영적 치유의 경관에 관한 지리학적 고찰:
한국 천주교 순례지를 중심으로
박수경*
A Geographical Study on the Spiritual Therapeutic Landscape:
From a Perspective of Catholic Sacred Places in Korea
Sookyung Park*
요약 :본 연구는 치유의 경관 중 영적 치유의 경관을 한국 천주교 순례지의 사례를 통해 고찰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박해의 역사로 점철된 한국 천주교 순례지는 약 300여개가 전국적으로 퍼져있으며, 이는 조성형, 선택형, 체험형 등으로 유형을 나눌 수 있다. 조성형 순례지에는 천주교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곳곳에 배치되 어 있지만, 황량하거나 혹은 도심 속에 숨어있는 듯 조성되어 있어 종교의 치유적 요소가 주는 정서적인 안정 감 혹은 절대적 신이 돌보고 있다는 점을 느끼기에는 다소 한계가 있다고 판단된다. 선택형 순례지에는 순례자 들이 직접 신성한 경험을 체험할 수 있도록 종교적 요소들을 순례지의 구석구석에 배치했으며, 종교적 요소의 예는 박물관, 청원기도,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의 길, 성모마리아상, 천주교 관련 조형물 등을 들 수 있다. 그 렇지만 순례자들이 얼마만큼 적극적으로 그 종교적 요소를 체험하느냐에 따라 치유의 정도와 강도는 천차만별 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체험형 순례지는 일정한 프로그램 안에서 다양한 종교적 요소를 경험하게 되는 것 을 의미한다. 이러한 체험은 개인이 아니라 순례자 집단을 위한 것이며, 여기에서 형성된 대인관계는 참여자들 에 대한 관심의 네트워크로 승화되고, 승화된 타인을 향한 열린 마음은 정서적 안정과 감정의 해소, 진정성 충 만한 심도 있는 치유에 닿을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된다. 종교적 요소를 통한 영적 치유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한 계와 세상의 유한성을 깨닫고, 절대적 신에게 자신을 스스로 내어놓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영혼의 의식을 자 유롭게 펼칠 수 있는 장이 바로 영적 치유의 경관이라 할 수 있다.
주요어 : 영적 치유의 경관, 종교, 한국 천주교, 순례지, 믿음
Abstract : This study aims to consider spiritual therapeutic landscapes thought the case of catholic sacred
places in Korea. The catholic sacred places, which have been a series of persecution, are distributed in 300 all over the country and can be divided into a formational type, a selective type, and a participatory type. In the formational type, the catholic sculptures are scattered here and there; but it seems that there are limits somewhat to feel the emotional stability and the experience of caring by God. Because the formational type is deserted or is built up in unnoticeable urban areas. The religious factors, for example, museums, special pray, Station of the Cross, Rosary way, statues of the Virgin Mary, catholic sculptures, etc. in the selective type are placed in the corners of the catholic sacred places to provide the opportunity of holy experience to pilgrims.But the level and the intensity of healing depends on the matter as to how much pilgrims experience religious factors voluntarily. Lastly, the participatory type means the experience of various religious factors following scheduled programs. The experience is for the group of pilgrims, not a person; and the human relationship via the religious experience spiritualizes the network of interest towards other participants. Furthermore, the
본 연구는 2015년 상명대학교 교내연구비를 지원받아 수행하였음.
* 상명대학교 조교수(Assistant Professor, Sangmyung University), [email protected]
1. 서론
“…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는 뜻이다 …”
(마르코 복음서, 5장 41절)
믿음. 종교를 믿는다는 행위는 절대자에게 자신을 내어 놓고,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영적이든 온전 한 상태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마르코 복음서의 죽었던 아이가 예 수의 “탈리타 쿰”의 한마디로 살아난 기적은 믿는 사 람들이 종교에 대해 기대하는, 즉 믿음 속에서 성취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설명하고 있는 대목 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 예수가 현존했던 시대 의 기적과 같은 일들은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대개 는 이단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아-, 종교가 대중의 심신의 안정과 평화에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 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며, ‘구원’이라는 단어를 통 해서 믿는 자들의 삶 속에 현존한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개별 종교에서는 믿음의 행위를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추상적인 어떤 것으로만 한정시키지 않고 종교적으로 의미가 있는 이른바 거룩한 장소(Sacred Places)-예를 들어, 천주교에서는 프랑스의 루르드 ( Lourdes), 스페인의 산티아고(Santiago), 개신교에서 는 이스라엘, 불교에서는 인도와 중국, 이슬람교에서 는 메카( Mecca)와 메디나(Medina) 등-를 순례하도 록 권고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믿음을 가시화하고,
각 종교에서 추구하는 교리를 되새기도록 하고 있다.
거룩한 장소에서의 체험은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 들에게 믿음을 확고히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또한 순례자들은 그 믿음에 기초해 ‘온전한 상태로 돌아감’
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거룩한 장소는 미국의 지리학자 Gesler 가 1992년 처음 제시했던 치유의 경관(Therapeutic Landscapes) 중 영적 치유의 경관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데, 1990년대 문화지리학을 바탕으로 보건 및 의 료를 다루던 시선이 일대의 ‘문화적 전환기(Cultrual Turn)’를 맞이하면서(Gesler and Kearns, 2002, 1-10) 새롭게 부각-소비주의, 차이성, 묘사 혹은 서술, 구 조 및 조직 등과 함께-되고 있는 연구 영역이다. 영 적 치유 경관은 여타의 그것과 다르게 일종의 신화 ( myth)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믿음 혹은 신앙을 더할 수 있는 상징적 요소를 내포하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 고 있다. 다시 말해, 영적 치유의 경관에서 제일 중요 한 요소는 신념( faith)이며, 그 위에 변화, 역사적 환 경, 장소적 의미, 방문자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특정적 사실( reality)이 결합된다. 더 나아가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치유의 줄거리(storylines)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요소들(박수경, 2014, 550-551)이 곳곳에 숨어 있는 것도 영적 치유의 경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매우 독특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해 우리나라의 영적 치유의 경 관을 살펴보면, 불교에서는 사찰, 개신교에서는 교회 와 기도원, 천주교에서는 성당, 피정센터, 공소, 순교 성지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으며, 대부분 종교 시 설과 관련성을 가진다. 특히, 한국 천주교의 영적 치 유의 경관은 자생적으로 성장하고, 확산된, 그렇기 때문에 박해와 같은 고통의 시간을 통해 깊은 뿌리를 갖게 된 한국 천주교의 역사적 특징으로 인해 다른 종
spiritualized open mind towards other people becomes the power that can arrive at the emotional stability, the relief of stress, and the in-depth and authentic healing. Ultimately, the spiritual healing through religious factors is to realize human finitude and dedicate one’s own self to God; in addition, the spiritual therapeutic landscapes are the place that can carry out such a spiritual ritual without any restraint.Key Words : spiritual therapeutic landscape, religion, catholic church in Korea, sacred places, belief
교와 달리 독특한 특성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에 대한 지리학적 접근의 결과는 미비하 며, 이러한 의미에서 본 연구에서는 한국 천주교 순례 지를 중심으로 영적 치유의 경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는 1) 국내외 치유의 경관, 한국의 천주교 경관에 관한 문헌을 통해 우리나라 천주교 순례지가 가지고 있는 치유의 의의에 대해 검토하고, 2) 우리나 라 천주교 순례지의 현황에 대해 각 유형별로 살펴보 며, 3) 사례를 통해 각 유형에서는 어떤 치유의 요소 들이 나타나는지 알아보고, 4) 마지막으로 한국 천주 교 순례지의 영적 치유의 경관으로서의 의의에 대해 서 고찰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본 연구를 위해 한 국천주교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와 오영환·박정자( 2011)이 발행한 「한국 천주교 성지순 례」와 「가족이 함께 가는 성지순례」를 토대로 우리나 라 천주교 순례지를 유형화 및 지도화하였으며, 각 유 형별 대표 순례지인 미리내성지(경기도 안성시), 천 주교중림동약현성당(서울특별시 중구), 감곡매괴성 모순례지성당(충청북도 음성군), 절두산순교성지(서 울특별시 마포구), 성이시돌피정의집(제주도 제주시) 등을 2015년 1월부터 8월까지 방문하여 순례지 운영 자 및 방문자(순례자)와의 인터뷰를 실시하였다. 이 외에 영적 치유 공간의 심도 있는 고찰을 위해 추상표 현주의자이면서 종파를 초월한 침묵과 명상의 장소 를 제시한 마크 로스코 전시회의 관계자 등과도 인터 뷰를 진행했고, 프랑스의 플럼빌리지와 떼제공동체 의 홈페이지 등도 참조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는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 그 성과 의 축적이 적은 치유의 경관, 더 좁혀서 영적 치유의 경관에 관한 지리학적인 접근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 대된다. 더 나아가 그간 천주교와 관련된 연구는 천주 교 공간의 해석(최진성, 2003), 종교 공간의 장소성과 사회적 의미의 관계(정희선, 2004), 신성공간으로서 성지가 가지는 장소성(정은혜, 2012) 등과 같이 종교 공간 그 자체로 바라본 시선이 중심적이었다면, 본 연 구에서는 거기에 ‘치유’라는 의미를 더해 분석한다는 점에서 종교 공간의 또 다른 해석이라는 의의를 가진 다고 할 수 있다.
2. 영적 치유의 경관과 천주교 순례지에 관한 이론적 검토
치유의 경관은 치료( treatment) 혹은 치유(heal- ing)와 관련된 물리적, 심리적 환경을 아우르는 장 소( places), 배경(settings), 상황(situations), 현장 ( locales), 환경(milieus) 등을 의미하며, 물리적(physi- cal), 정신적(mental), 영적(spiritual) 치유가 이루어 진다고 지속적으로 알려진 지리적 범위를 칭한다 ( Gesler, 1993, 173-174; Williams, 1998, 1193). 통 상 치유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자연 혹은 인공 환경, 혹은 이 둘이 중첩된 형태를 칭하는 것으로, 더 나아 가 그러한 치유의 지리적 범위가 자신만의 이야기 ( own story)를 가지고 있고,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나 타나게 되는 경우에 치유의 경관으로서의 의미를 부 여받는다(Gesler and Kearns, 2002, 133). 그리고 수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특정한 치유의 경관이 효험이 있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는 명성( reputation), 신념 (beliefs),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ships)를 강하게 묶어주는 상징( symbols) 속에서 치유의 경관은 구체 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Gesler and Kearns, 2002, 125- 132).
이렇게 형성되는 치유의 경관은 학자에 따라 그 구
분 방식이 다양하지만, 치유의 경관에 대해 처음으로
제안한 Gesler(1993)의 분류에 의하면 물리적, 정신
적, 영적인 치유의 경관으로 나눌 수 있다. 물리적 치
유의 경관은 일반 병동, 공원, 온천 등과 같은 신체적
활동이 원활하도록 하는 곳이고, 정신적 치유의 경관
은 정신병동, 심리상담센터 등과 같이 정신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며, 마지막으로 영적인 치유의 경
관은 프랑스의 루르드나 스페인의 산티아고 등의 성
지 혹은 순례지 등과 같이 종교적으로 치유하거나,
심리적인 안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칭한다(박수경,
2014, 550). 물리적, 정신적 치유의 경관은 경관 그
자체로서도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어떠한 요
소들이 관련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더 직접적으로
환자들-에게 주요하게 영향을 주는지 평가하는 것,
그리고 그 요소에 기초해 관련 기관을 조성하는 것도
지리학 범위에 포함된다. 한편, 본 연구의 중심인 영 적인 치유의 경관은 물리적, 정신적 치유의 경관과는 다소 차이성을 갖는데, 일종의 신화(myth)적인 장소 와 연결되는 경향이 있으며, 거기에 믿음 혹은 신앙을 더 굳건히 할 수 있는 요인들이 첨가되는 것이 특징 적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영적인 치유의 경관은 신화, 믿음 혹은 신앙을 한층 깊이 할 수 있는 요인들 과 결부되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드러나던, 드러나 지 않던 그 경관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 meaning)’와 연결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영적 치유의 경관의 가 장 대표적인 프랑스의 루르드의 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의 루르드는 1858년 베르나데트라는 14세 소녀가 이곳에 있는 마사비엘의 동굴에서 18회에 걸 쳐 성모 마리아를 보고, 기도와 보속(죄를 보상하거 나 대가를 치르는 일), 생활의 회개를 촉구하는 메 시지를 들었다고 전해진 후 해마다 세계 각지로부터 300만이 넘는 순례자가 찾아오는 곳으로, 천주교의 상징적인 순례지로 꼽힌다. 동굴에 있는 샘물은 성수 (聖水)로서 병을 치료하는데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이를 찾는 신도와 환자들이 끊이지 않으며, 그 입구에
는 완치된 사람들이 두고 간 수많은 목발들이 걸려 있 다고 한다(두산백과사전, 2015). 그러나 사실상 이 성 수를 통해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극소수이다. 그럼에 도 효과가 빠르다는 점, 치유의 과정이 매우 단순하다 는 점(오직 마시는 행위만 요구됨), 신앙심과 경건함 이 일치되어 나타난다는 점에서 루르드 순례지의 의 의를 찾을 수 있다( Gesler, 1996).
루르드는 상당히 넓은 지역에 관련 시설이 퍼져있 으며, 이는 ‘성모 마리아 영역( Marian terrain)’이라고 일컬어진다(그림 1 참조).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교회 와 같이 종교적인 믿음을 더하는 경관은 아니고, 오 히려 상업주의 혹은 자본주의와 결합된 형태이다. 상 품점, 호텔, 레스토랑과 같이 복잡하고, 소음이 강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신성모독이라 느낄 수 있는 공 간이 혼재되어 있다. 또한 치유 온천, 목욕탕, 바실리 카(끝 부분이 둥그렇고, 내부에 기둥이 두 줄로 서 있 는 큰 교회나 회관), 병원과 관리 건물 등도 눈에 띈 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변 경관을 지나 루르드의 가장 핵심인 마시비엘의 동굴에 들어서게 되면, 외부와의 소음은 일절 차단되고, 오로지 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 는 경관이 조성되어 있다는 것도 매우 특징적이라 할
그림 1. 성모 마리아 영역이라 불리는 프랑스 루르드 순례지 지역 내 주요 관광지 지도 출처: http://www.fbmarche.it/lourdes.html(2015)
수 있다( Gesler, 1996, 101).
대개의 루르드 순례자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특정 한 소문을 듣고 모이게 되는데, 예를 들어 주변 친구 의 추천일 수도 있고, 친인척의 제안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일종 의 변화( transformation) 혹은 진실된 체험(authentic experience)을 염두에 두고 루르드로 향한다. 그러나 막상 루르드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일상의 종교 의 식에서 행했던 미사( mass)이다. 단, 순례지에서 일상 적인 행위를 더 강렬하게 느끼며, 그것을 의미로 받아 들이게 되는 것이 순례지에 형성된 독특한 정서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감정이 일렁이는 주요 원인으로 순례 자 그룹의 연대, 결속, 일체감( communitas: 완전사회 를 의미), 미사 혹은 수많은 순례자가 행렬을 하며 부 르는 노래, 그러한 활동을 통해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 등을 들 수 있다.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사람들과의 만남 자체가 정신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풍부한 경험 으로 볼 수 있으며, 전혀 다른 사람들이 기적의 동굴 앞에 모여 하나의 행위를 하는 것은 마치 새로운 친구 를 얻는 것과 같은 매우 흥미진진한 체험으로 볼 수 있다( Gesler, 1996, 104).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일순간 순례자들은 정서적으로 치유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Gesler, 1996, 104).
루르드의 순례는 매우 조직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런 형태도 또한 정서적 안정을 도모하는데 일조한다 고 해석할 수 있다. 1884년에 the Association of Hos- pitallers of Our Lady of Lourdes가 설립된 이후, 환자 의 이송 혹은 보호(돌봄), 치안 행위 등을 제공하고 있 다. 또한 루르드에는 단체 및 관광이 목적인 사람들, 젊은 순례객, 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방 문하고 있는데, 특히 단체로 오는 경우에는 대개는 환 자들이며, 그들은 의사, 간호사, 혹은 도우미를 동반 하는 경우가 많아 루르드 지역의 병원은 무료 침대 혹 은 쉼터를 이들에게 제공한다.
루르드와 같은 순례지는 역사적인 맥락에 기초하 며,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더라도 정신적으로, 영 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장소라는 점은 자명한 사 실이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치유라는 드라마
를 믿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 의 믿음 내지 신념의 행위는 과학적이지는 아닐지 몰 라도 사실상 의료에 있어서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 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생물학적 이며, 의학적인 치료에 있어서 기적이라고 하는 요소 는 저 너머 어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보이지는 않 지만 공존하고 있는 그 무엇인가로 볼 수 있는 것이 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 혹은 신념이 바로 치료와 더 강하게 연결될 수 있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Gesler, 1996, 104).
한편, 본 연구의 핵심 주제인 천주교 순례지에 관한 이론적 검토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보편적인 의미에서 순례지는 ‘거룩한 장소’를 의미한 다. 성서의 내용과 순례의 역사에서 순례지는 히브리 인들이 하느님이라 부르는 신에게 은혜를 받거나 또 는 그분과 어떤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찾아간 성스러 운 장소를 칭한다(이기락, 2006, 130). 조금 더 구체 적으로, 순례지는 1) 인간에 의해 선택되어지는 곳이 아니고, 신 자신이 드러나는 곳이며, 2) 일상적인 장 소이지만, 의례에 의해서 특별한 공간으로서 만들어 지는 곳이기도 하고, 3) 직접적으로 의식의 상태와 연 관되어 있으며, 4) 무엇보다 특정 지역과 관련성을 지 니지만, (누구나 허용되는) 보편적인 특징을 가진다 (허남진, 2006, 57). 고대부터 인간들은 신들의 특별 한 힘이 있는 곳을 찾아 그곳에서 예배와 감사의 행 위를 드려왔고, 관련 의식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 다. 이러한 의미에서 천주교의 순례지의 개념도 여 타 종교와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일하 게 차별적인 점은 히브리인들에게는 신의 존재가 다 신이 아니라 유일신이며, 늘 항상 선택을 받은 민족과 함께 현존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순례의 역사가 좀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구본식, 2002, 38).
천주교의 순례지, 즉 천주교의 거룩한 장소의 개념
에 대한 논의는 19세기 후반에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이미 활발히 이루어졌었는데, 산, 물, 동굴, 계곡처럼
강력한 인상을 주는 자연환경이 특별한 경외의 대상
으로서 그 개념에 포함되었고, 중앙 집권적 정치권력
이 발달한 사회의 신전 혹은 대규모의 의례 공간들이
그러한 장소로 분류되었다(허남진, 2007, 256). 예수
가 탄생한 베들레헴, 예수가 세례를 받고, 마지막으 로 기도를 올렸다는 요르단강, 산상수훈(산위에서 내 려진 교훈이라는 뜻으로 마태오 복음 5~7장에 실린 내용)이 내려진 산, 예수가 못 박힌 골고타 언덕 등은 특정한 장소를 성스럽게 인식한 사례이고, 그곳에는 신성함을 상징하는 교회나 수도원이 세워져 있다. 또 한 성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현몽하여 환영이 나 타난 곳, 치료의 은사를 받은 곳, 성인의 유해가 발견 된 곳도 순례의 대상이 되었다(허남진, 2007).
이러한 신성한 거룩한 장소를 순례한다는 것은 궁 극적인 구원을 향한 인간의 여정과 긴밀히 연결된 것 으로 해석할 수 있다(까를로 마짜, 2005, 17). 다시 말 해, 순례는 단지 신이 드러나는 장소에 대한 매력으 로 그치지 않고, 한 개인과 공동체의 실존을 변화시키 는 보다 깊이 있는 삶과 느낌들 그리고 관계의 변화를 내포한다. 순례는 근본적으로 위로에 대한 열망이 녹 아 있으며, 무엇인가 기적과 같은 것을 바라는 마음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고, 신앙 안에서 보다 은총 가득한 그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일상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일상적인 책임으로부터 일시적 으로 자신을 거두어들이고자 하는 개인주의, 감상주 의 같은 것들도 내포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모 든 것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순례는 그로 하여금 창조성, 결속, 참여와 같은 참된 영성적인 가치들을 보다 심화시켜주는 기회이다(까를로 마짜, 2005, 59- 60). 더 나아가 순례를 통한 신앙 체험은 일시적인 현 상이 아니라 보다 독창적이고 본질적으로 신앙생활 을 하고자 하는 열망의 결과로 볼 수 있다(까를로 마 짜, 2005, 95-96).
특히,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치유의 행위는 이러한 순례지에서 극대화된다 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불안, 우울, 정신병, 발작 과 같은 상태의 호전이 가능하고(물리적 혹은 정신적 치유), 우리를 위한 신의 의지 혹은 계획을 가르침 받 고, 무엇보다 신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증 하는 기회를 부여받으며(영적 치유), 죽음의 공포 경 감,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할 수 있는 기회의 부여, 시공간을 초월한 신의 보살핌의 기회를 얻게 된다(죽 음에 대한 치유).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죄의 고백과
용서, 근심하는 행위의 무가치를 깨달음, 명상과 사 색, 안수(기도를 할 때 또는 성직 수여식이나 기타 교 회의 예식에서, 주례자가 신자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 일), 도유(기름을 바르는 예식)와 성찬례 등을 통해 구체화 된다( Leathard, 2006, 34).
천주교 순례지의 일반적인 개념은 우리나라에서 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천주교 교회법에서 “순례지는 많은 신자들이 교구 직권자의 승인 아래 특별한 신심 때문에 빈번히 순례하는 성당이나 그 바의 거룩한 장 소를 뜻한다(가톨릭 교회 교회법 제 1230조)”라고 명 확히 명시하고 있다. 특히, 성찬과 참회의 거행으로 써 전례 생활을 적절하게 증진시키며 또한 승인된 대 중적 신심 형태를 보급시켜서 신자들에게 구원의 수 단들이 더욱 풍성하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 하고 있다(가톨릭교회 교회법 제 1234조)(가톨릭교회 교회법, n.d.). 교회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우 리나라 순례지는 상당히 포괄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 다고 할 수 있으나, 대개 박해라는 특수한 역사적 사 실로 인해 순교성인의 탄생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주로 순교지, 묘자리, 성인유해지, 가매 장지, 출생지, 활동지, 교우촌, 사적지 등과 같은 곳 이 주로 한국 천주교 순례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허남진, 2007, 263), 대부분의 성지에서는 대동소이 하게 순례자를 위한 미사(고해성사) 및 순례지 소개·
안내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일부 성지에서는 연 중계획에 따라 피정(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서 묵상이나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살피는 일)을 하거나 개인 혹은 단체가 피정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영성생 활에 도움을 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이기락, 2006, 138).
종교적 공간에 대해 Tuan(1976)은 종교란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세계의 일관성과 의미를 찾
는 그 무엇이며, 그들의 종교 문화는 구조화된 세계
관이라고 언급했다( Tuan, 1976, 271). 이러한 의미에
서 그는 성스러운 공간을 방문한다는 것을 ‘지루한 일
상의 틀의 졸음( the drowsiness of routine)을 해체하는
의식’으로 해석했다. 또한 그는 사람들은 ‘장소 내( in
place)’와 ‘장소 외(out of place)’에서 살아가는데, 대
부분 익숙한 관계, 습관, 일상의 틀이 안정적으로 보 장된 장소 내에서 우리의 삶을 보내게 된다고 설명했 다. 그렇지만 주기적으로 장소 외의 곳에 가는데, 이 러한 가장 대표적인 형태를 순례로 보았다. 순례는 잠 깐의 장소 외의 체험임에도 불구하고 우주를 포용하 는 것과 같은 심오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 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순례는 분리(집을 떠남), 통과의례, 전환(신성한 곳으로 여행), 통합(도착) 등 을 거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장소 내에서 느끼는 감정만큼 장소 외의 곳에서도 비슷한 감정- 예를 들어, 안정감, 안락함, 기쁨, 따뜻함 등과 같은- 을 느끼게 된다( Park, 2004). Gesler가 설명하듯이 이 러한 장소 외의 경험(혹은 특정 장소에서의 경험)은 한사람의 도덕, 가치, 절대적인 판단 등에 영향을 미 치며, 정신세계 혹은 개성의 형성에까지 파급을 줄 수 있다( Williams, 1998). 결국 장소 외의 지리적 범위의 주어진 환경, 상징성의 복합성, 신념과 기대, 장소감, 사회적 관계와 상대적인 평등, 매일의 일상, 영역 등 의 경험은 본 연구에서 치유로 표현되는 행위에 영향 을 미치고, 한 명의 환자 그 자신이 스스로를 표현하 거나 혹은 세상에 대해 말해주는 이야기( story)로 응 집되게 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환자는 신체적으 로든, 정신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온전한 상태에 도달 하게 되는 것이며( Gesler, 1993), 여기에서 순례지의 영적 치유의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3. 한국 천주교 순례지 형성과 지리적 특성
앞서 우리나라 가톨릭교회 교회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순례지를 검토한 바와 같이, 한국 천주교 순례 지는 전세계에서 드물게 자생적으로 시작한 한국 천 주교회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 장소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외에 성모성지 혹은 십자가의 길( stations of the Cross: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서 일어 난 14개 사건을 묵상하는 기도) 등과 같이 거룩한 장 소로서 오늘날 새롭게 의미가 부여된 곳도 포함된다.
본 연구에서 우리나라 순례지의 추산 근거로 삼은 한 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와 오영환·박정자(2011) 이 발행한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및 「가족이 함께 가 는 성지순례」를 통해서도 이러한 특성을 그대로 확인 할 수 있다. 두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순례지는 총 328개로, 공소(신부가 없이 기도하기 위한 지역신자 들의 모임), 성인 묘지, 주요 성당, 성인 탄생지 및 고 향, 생가, 순교지, 신앙공동체, 피정, 성지 복합 등으 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피정의 집이 168개소(50.9%) 로 가장 많고, 순교지 49개소(14.9%), 성지 복합 39개 소( 11.9%)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표 1 참조). 지역적 으로 봤을 때, 경기도 59개소(18.0%), 서울특별시 41 개소( 12.5%), 충청남도 34개소(10.4%), 경상북도 30 개소(9.1%) 등으로 나타났으며, 이를 지도화한 것을 그림 2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수도권의 순례지 는 주로 피정의 집이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수도권 이외의 지역에서는 순교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 순례 지가 주로 분포하고 있다. 이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피 정을 할 수 있는 피정의 집, 교육관, 기도원 등이 집 중한 것에서 기인한다고 판단할 수 있는데, 주로 이
표 1. 우리나라 순례지 형태별 분포
순례지 형태 개소
공소 3 (0.9%)
묘지 18 (5.5%)
성당 13 (4.0%)
성인 탄생지 및 고향, 생가 7 (2.1%)
순교지 49 (14.9%)
신앙 공동체 2 (0.6%)
피정의 집 167 (50.9%)
성지 복합 39 (11.9%)
기타 30 (9.1%)
합계 328 (100.0%)
주 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2011), 오영환·박정자(2011) 을 토대로 한 자료에 근거함.
주 2: 본 연구에서 성지 복합이라고 표현한 것은 한 순례지 에 2개 혹은 그 이상 성격의 순례지가 함께 모여 있는 형태 를 의미하는 것이며, 기타에는 기념경당, 박물관 등이 포 함됨.
곳을 관리하는 주요한 수도원 혹은 수녀원이 수도권 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지리적 특징 을 보이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특별히 피정의 집 은 성모성지 혹은 십자가의 길이 조성된 곳으로 의의 를 갖는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적 특징상 순교자 관련 순례지가 많지만, 성모성지 혹은 십자가의 길 등 도 주요한 순례지 중 하나의 형태이다. 프랑스의 루르 드처럼 직접적인 기적의 장소인 성모발현지(성모 마 리아가 나타난 곳)가 순례지로 조성된 경우는 사실 쉽 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 천주교에서는 성모발현지를 대신해 특정 성모상이 나 성화가 모셔진 성당이나 경당을 중심으로 오랜 세 월 동안 성모에 대한 신심을 가진 신자들의 기도가 이 어지고 있는 곳을 순례지로 지정했다. 혹은 성모의 발 현 성지를 모방해 새로운 성지를 창출하기도 하는데, 루르드의 성모 동굴을 그대로 재현하여 신자들이 순 례할 수 있도록 조성한 곳도 우리나라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성모성지로서의 순례지이다. 한편, 십자가의 길 은 예수가 사형 선고를 받은 후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 타(해골 터를 의미) 언덕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열 네 가지 중요한 사건(수난과 죽음의 주요한 장면)을 묵상할 수 있는 내용을 말한다. 이는 초대 교회 예수 살렘을 순례하던 자들이 영성 생활에 도움을 얻기 위 해 실제로 기도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 렘의 순례가 종교 갈등으로 불가능하자 중세 유럽에 서는 십자가의 길의 내용을 모티브로 해서 길을 만들 었고 여기에서 기도와 묵상을 하도록 권했는데,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고 순례하도록 권하고 있다.
한편, 수도권을 제외한 곳에서는 박해로 점철된 역 사와 관련성을 갖는 순례지가 주류를 이룬다. 이미 역 사를 통해서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신해박해( 1791년), 신유박해( 1801년), 기해박해(1839년)를 통해 많은 천 주교 신자가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를 갔고, 일부 신 자들은 관원의 눈을 피해서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이 또한 도적이나 사회의 봉 기를 들 가능성이 있는 집단으로 치부되어 탄압의 대 상이 되기도 했었다(류홍렬, 1983; 한국천주교중앙협 의회, n.d.;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이러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오늘날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곳, 예를 들어 순교지, 묘자리, 성인유해지, 가매장지, 출생지, 활동지, 교우촌, 사적지 등을 순례지로 지정하였다.
특히, 충청남도에 이러한 형태의 순례지가 많이 발견 되는데, 18세기 조선 후기에 지식인들이 사람들의 눈 을 피해 천주학을 모여 논하던 곳, 상대적으로 포교하 기 용이했던 고향, 친인척이 모여 있는 곳, 자신과 교 류를 자주하던 집단이 모여 있는 곳 등이 주로 충청남 도였기 때문인 것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다(한국천교 회사연구소, 2009). 더구나 충청남도는 가장 혹독했 던 박해로 알려져 있는 병인박해의 중심지인 서산의 해미읍성, 우리나라 최초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인 당진군의 솔뫼성지 등이 분포하고 있어 그 의미가 깊다. 이러한 연유로 천주교 신자를 국사범(國事犯)으로 대거 처형한 광화문, 서소문, 절 두산 등의 오늘날의 서울 일대, 성서에서 “두 사람이 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18장 20절)라는 문구처 럼 소수의 신자들이 신앙의 의지를 굳건히 하면서 비 밀스럽게 은둔 공동체를 유지했던 경기도 일대, 그리 고 충청남도까지 걸친 그 범위를 오늘날 소위 순교길 이라 칭하고 있다.
천주교에서 순례지의 시작은 순교자 공경에서 발
현되는데, 순교자와 관련된 성지나 사적지의 순례는
전통을 되찾는 일, 곧 ‘고유한 전통의 회복’ 혹은 ‘우리
것의 자리매김’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순교를
자처했던 모범적인 신앙의 선조들의 영성( spiritual-
ity)을 이어받는 혹은 전통을 세우는 일인 것이다(차
기진, 1999, 88). 우리나라에서 순교자 공경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들
은 순교자 공경의 핵심 사업으로 순교 행적을 발굴 및
보존하는 작업을 착수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프랑스
천주교 내에서 순교자들의 행적을 찾아 기록하던 분
위기가 유행을 했었고, 이러한 사업은 시류에 편승하
기 위해 우리나라에서도 고스란히 들여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순교자 공경은 시복과 시성(죽은 뒤 복자품
혹은 성인품에 오르는 것으로, 복자와 성인은 교황청
에서 공인하는 존칭) 운동을 통해서 구체화 되는데,
한국 천주교에서는 1925년 7월 5일 79위 순교 복자가
그림 2. 우리나라 주요 순례지 분포
주 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2011), 오영환·박정자(2011)를 토대로 한 자료에 근거함.
주 2: 성지복합은 개별 성격의 성지가 2개 이상 함께 모여 있는 경우를 가리킴.
탄생한 것을 그 공식적인 시작으로 보고 있다. 순교자 현양(이름, 지위 등을 세상에 높이 드러냄) 운동은 각 성당에서 이루어지다가 1939년 기해박해 순교 100주 년을 앞두고 전 교회 차원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 당국이 이를 불허해 좌절되었고, 1946년 9월 16일 복자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후 순교자현양회의 활동이 이어져 1949년 최초 로 새남터 순교성지(현재의 용산구 이촌동 앞 한강변 의 모래사장 주변)를 확보하였으며, 1956년 이곳에
‘가톨릭 순교성지’라는 기념탑을 건립함과 동시에 순 교자현양대회를 개최하였다. 이것이 바로 한국 천주 교의 순례지 창출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이어 순교자 현양회는 절두산 순교지를 매수하였고, 서울대교구 에서는 병인순교백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으로 이곳 에 성당과 기념관을 이곳에 건립하였다. 이후 지역별 로 순교자현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우리나라 천주교 순교성지개발이 적극적으 로 추진되었다. 또한 자발적인 순례, 순교자 공경 활 동 등으로 이어졌고, 각 교구(종교의 전파, 신자의 지 도 등을 위해 편의상 나눠 놓은 구역으로, 현재 우리 나라 천주교는 19개의 교구로 구성)의 교회사 연구소 를 중심으로 연구수집과 연구 활동, 기념성당 및 기념 관 건립과 같은 성역화 사업 등으로 확산되었다(허남 진, 2007, 257-262). 성인의 유해와 유물은 한 장소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장과 분배를 통해 다른 장소
로 복제되어 새로운 순례지의 창출로 이어지기도 한 다. 다시 말해, 한국 천주교에서는 성인의 유해를 기 반으로 하는 새로운 성지들을 만들어내며 성지창출 을 이어나갔다. 특히, 한국 천주교회는 200주년(1984 년) 기념사업의 초점을 순교자에 두고 모든 사업과 운 동의 구심점을 ‘시복(거룩한 삶을 살았거나 순교한 이 에게 복자 칭호를 허가하는 교황의 공식 선언)’과 ‘시 성(천주교에서 죽은 자들의 탁월한 신앙과 성덕을 기 리기 위해 교회가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 운 동(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식)에 두었기 때문에 1984년을 전후하여 교구마다 순 교자와 관련된 순교지나 순교자의 무덤을 발굴하여
‘순교성지’를 중심으로 새로운 순례지 개발을 전개하 였고, 이러한 움직임이 오늘에 이르러 330여개에 달 하는 순례지를 조성하게 된 초석이 되었다(허남진, 2007, 257-262).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순례지는 앞서 살펴 본 것처럼, 순교지, 묘자리, 성인유해지, 가매장지, 출생지, 활동지, 교우촌, 사적지 등의 형태로 우리나 라 전역에 퍼져있다. 순례지에서 영적 치유의 과정을 돕는 방법으로 미사,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도, 십자 가의 길, 특별기도, 고백성사, 천주교 전례력에 따른 기타 활동 등을 들 수 있으며, 개별 순례지의 특징에 따라 그 내용의 가감이 있기는 하지만 거의 모든 순례 지에서 이상으로 열거한 종교 행위내지, 신앙체험이 가능하도록 조성 및 운영하고 있다. 이는 다시 신앙체
표 2. 한국 천주교 순례지의 유형
유형 조성형 선택형 체험형
공통점 미사,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도, 십자가의 길, 특별기도, 고백성사, 천주교 전례력에 따른 기타 활동 등 정도의 차이 가 있지만,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체험할 수 있음
주요 경관
- 다양한 신앙체험의 요소를 제시함 - 신앙활동이 비정기적으로 제공됨
- 폭넓은 형태의 다양한 신앙체험 요 소가 펼쳐져 있음
- 경관 속에 경건함의 요소가 숨어 있음
- 순례의 본질을 고조시킬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함
- 프로그램을 통해 적극적인 신앙체 험이 가능함
- 일정한 장소와 시간이 제공됨 - 순례지 내부에서만 아니라 외부에
서도 신앙체험이 가능토록 함
대표적인 예 미리내성지, 서소문순교성지 감곡매괴성모순례지 성당, 절두산순
교성지 성이시돌피정의 집
주: 연구자 작성(2015)
험의 유도 정도에 따라 조성형 순례지, 선택형 순례 지, 체험형 순례지 등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그 내용 은 표 2처럼 정리할 수 있다.
조성형 순례지는 신앙체험의 유도 정도가 가장 약 한 형태로, 미사,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기도, 십자가의 길, 특별한 기도, 고백성사, 기타 특별 활동 등을 순례 자에게 제시만 한다. 또한 조성형 순례지에서 하는 여 러 가지 신앙 활동은 비정기적으로 제공되는 특징이 있다. 다음으로 선택형 순례지는 조성형 순례지와 크 게 다르지는 않지만, 박물관, 성모 마리아에게 쓰는 청원 편지 등 조금 더 폭넓은 형태로 신앙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며, 주변의 경관도 순례지 본래 목적에 맞게 경건하며, 순례의 본질을 고조시킬 수 있는 방 법으로 조성한 곳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체험형은 주 로 피정과 같은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는 데, 신앙경험을 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부여하고,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신앙체험 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순례 지에서의 경험은 대부분 순례지 자체 혹은 내부에서 일어나지만, 때때로 체험형 순례지의 경우에는 순례 지 외부의 체험을 제공함으로 방문객의 신앙심을 고 취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내용을 조금 더 면밀하게 알 아보기 위해 조성형에는 미리내성지, 서소문순교성 지, 선택형 순례지에는 감곡매괴성모순례지 성당, 절 두산순교성지, 마지막으로 체험형 순례지에는 성이 시돌피정의 집의 예를 통해 순례지의 유형에 따라 영 적 치유의 경관적 특성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설명하 고자 한다.
4. 영적 치유의 경관으로서의 한국 천주교 순례지
1) 조성형 순례지: 미리내성지, 서소문순교성지
조성형 순례지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로 미리내성 지와 서소문순교성지를 들 수 있고, 전자의 개황은 다 음과 같다. 미리내성지는 신유박해( 1801년), 기해박
해( 1839년)를 거치면서 박해를 피해 숨은 천주교 신 자들이 옹기를 굽고 화전을 하며 살았던 신앙공동체 터로 밤이면 그 불빛이 은하수처럼 보인다는 뜻에서 미리내(은하수의 순우리말)라고 불리게 되었다(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 2011). 병오박해(1846년) 때 순교 한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안장되면 서 교회 안에서 한층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미리 내성지는 성당(김대건 신부의 성해(聖骸)인 하악골 (아래턱뼈)이 있는 성 요셉 성당과 103위 시성 기념 성당), 김대건 신부와 주요 순교자 묘지, 김대건 신부 의 동상, 실사 크기로 표현된 묵주기도의 길과 십자가 의 길, 성모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 미리내 성지를 중심으로 수도원, 천주교 노인복지시설과 노 인병원 등은 위치해 있다. 미리내성지 내에서는 전문 교육을 수료한 안내봉사자가 주요 순례 장소에 위치 하여 안내를 하거나, 필요한 경우 안내봉사자의 인솔 하에 성지순례를 할 수 있지만, 평소에는 전문교육을 수료한 안내봉사자는 김대건 신부의 묘지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으며, 특수한 목적 혹은 단체로 방문하지 않는 이상 성지순례 서비스를 받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성지에 언제 도착할 것인지, 미사는 언제 참 석할 수 있는지 등의 사전 예약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미리내성지 내에서의 활동에 약간 제약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리내성지는 둘러보는 데만 약 2시간여가 소요될
정도로 그 규모가 상당한 순례지이며, 우리나라 천주
교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인물인 김대건 신부를 기리
고, 순교했던 주요 성인들이 묻혀있는 곳이라는 점에
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미리내성지에 들어서자마
자 처음 눈에 들어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특히 박
해와 고난이라는 주제를 실사로 표현한 묵주기도의
길과 십자가의 길에서는 종교적 의미와 동기를 부여
받기에 충분하다. 오래된 성 요셉 성당과 103위 시성
기념 성당은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에 있어 기념비적
인 건축물이며, 영적인 그 무엇이 충만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당 안을 장식하고 있는 스테인
드글라스와 성인들의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과 행적
을 타일로 장식한 벽면은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종교
적인 경건함을 충분히 고취시키는데 모자람이 없다.
103위 시성 기념 성당과 김대건 신부와 주요 순교자 의 묘지 사이에 있는 성모당은 성모 신심을 중시하는 천주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김대건 신부 의 묘소와 동상, 그리고 주요 순교성인의 묘지는 미래 내성지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극대화한다. 소박하게 조성된 김대건 신부의 묘소의 겉모습과는 달리 막상 그 앞에서 느껴지는 장중함이, 그리 유명하지 않은 순 교 성인들의 묘지에서는 모진 박해 속에서도 끝끝내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선조 성인들의 정신을 기 린다는 엄숙함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관을 통해서 현재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나아가 야할 방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고찰하게 되는 계기로 이어지게 된다(그림 3 참조).
그렇지만 미리내성지는 너무 넓은 곳에 조성되어
있어 특정한 집단에 속하거나, 일정한 목적을 두지 않 는 이상 개인적인 방문으로 순례지가 주는 종교적 의 의, 더 나아가서 영적 치유를 할 수 있는 여지는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순례를 어떤 순 서로 하는 것이 좋은지 알려주는 안내도를 찾아보기 어려우며, 흔히 보통의 순례지에서 할 수 있는 신앙체 험-궁극적으로는 영적 치유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미사도 딱히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성지 내의 개별 기도 혹은 묵상할 수 있는 장소들은 전시의 형태에 더 가까워 개별 방문자가 느끼고, 그리스도교 가 추구하는 이상향을 직시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다 시 말해, 종교적 체험과 순교의 정신 등이 충분히 담 겨 조성된 순례지이긴 있지만, 너무 넓은 곳에 흩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이해하기
그림 3. 미리내성지 내의 103위 시성 기념 성당(왼쪽 위), 실사 크기의 십자가의 길(오른쪽 위), 김대건 신부의 묘소 및 동상(왼쪽 아래), 성모당(오른쪽 아래)
출처: 연구자 촬영(2015)
가 어렵고, 마치 각 요소가 독립되어 위치한 듯해 영 적 치유의 스토리라인이 하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성형 순례지의 한계점을 찾아볼 수 있다. 연 구자가 미리내성지를 방문했을 때에도 순례자는 거 의 찾아볼 수 없었으며, 김대건 신부의 묘소와 동상 근처에 몇몇의 방문객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마 저도 순례의 목적으로 온 사람들은 아니었다. 황량하 고, 너무 고요하다 못해 스산한 분위기에서 마음속 깊 이 집중해 기도를 하거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계 기를 마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판단된다.
조성형 순례지의 두 번째 예시인 서소문순교성지 는 조선시대 공식적인 사형집행장으로 사직단 서쪽 에 처형장을 두어야 한다는 ‘예기’의 가르침과 최종 사형 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다 는 편의성,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칠패시 장’이 있어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다는 점 때 문에 조선시대 대부분의 처형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1801년 신유박해 이래 이 처형장에서 순교한 사람은 신원이 확인된 경우도 100여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 되고 있고, 이 가운데 44위가 시성되었는데 단일 순 교지로는 성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한 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1).
서소문순교성지는 여기가 순례지인지, 아니면 도 심 내 공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 경관이 매우 밋 밋하다. 심지어 지도에도 서소문순교성지라 표하지
않고, 서소문근린공원으로 표기되어 있어 순례지로 서의 의미가 그리 크지 않은 것-물론, 천주교에서 발 간한 자료에서는 순례지로서 의미를 중요하게 부여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단,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했다는 사 실을 알려주는 플랜카드만이 이곳이 우리나라 성인 들이 순교한 곳이며, 종교적으로 의미가 있는 장소임 을 말해주고 있다. 서소문순교성지의 핵심이자, 중심 에 위치한 현향탑에는 이곳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새 겨져 있고, 현향탑의 장식적인 것처럼 보이는 십자가 와 순교자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에서 종교적인 의미 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현향탑 앞에는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에 미사를 드리기 위한 제대가 마련되어 있 으며, 서소문순교성지를 관리하고, 안내하는 작은 사 무실이 위치해 있다. 교황 방문 시 교황께서 서 있었 던 곳을 발자국으로 표시한 동판, 교황 방문을 표시한 현판 등이 다소 눈에 띄는 상징성이다(그림 4 참조).
그렇지만 오히려 몇몇의 운동기구와 벤치만이 서 소문순교성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더구나 일 반적인 순례지에서 볼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이나 묵주 기도의 길은 찾아보기 어려우며, 십자가 혹은 성모 마 리아상과 같은 그리스도교의 상징성을 담은 그 무엇 도 드러나 있지 않다. 아주 특별한 종교적 행사나 간 헐적으로 있는 미사 때를 제외하고 여기가 어떤 용도 로 쓰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숨겨져 있는 순례지의
그림 4. 서소문순교성지의 교황 방문 기념 플랜카드 및 제대 출처: 연구자 촬영(2015)
형태이기 때문에 서소문순교성지 자체 내에서는 신 앙적인 강렬한 체험을 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 단된다. 심지어 주변에 큰 도로가 있어 짧게나마 기 도할 수 있는 여유도 쉽게 주어지지 않은 환경에 노출 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에 중림동 약현성당에 서소문순교성지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박물관이 위치해 있고, 다양한 전시물들이 있 지만, 이마저도 사전지식이 있을 때만 방문이 가능하 며, 서소문순교성지에서는 이에 관한 정보를 알 수 있 는 방법도 어느 곳에서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미리내성지와 서소문순교성지를 통해 조성형 순례 지의 특징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얼마나 드 러나 있느냐 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종교적 상징 성은 조성형 순례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 미 리내성지에는 기념비적인 건물, 묘지, 조형물 등이 눈에 쉽게 띄도록 조성되어 있지만, 서소문순교성지 에는 현향탑을 중심으로 다소 숨어 있는 형태로 조성 되었다는 사실이 차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상징성은 박해 혹은 순교의 역사는 종교가 가지고 있 는 경건함이요, 숭고함이라고 하는 텍스트로서의 경 관에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종교적 요소가 서로 긴밀 하게 연결되지 않고, 혹은 도심 속에 숨어 있어 조성 형 순례지에서 느낄 수 있는 장소감, 또는 진실성 등 은 다소 약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순례지 는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함으로서 신앙
을 고취시키고, 더 나아가 순례지에서 하는 신앙체험 은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없는 특별한 것 혹은 정신 적인 여행을 떠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영적 체험들을 느낄 수 있는 여지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조 성형 순례지의 한계를 찾을 수 있다. 순례자의 신앙고 백, 순수한 종교적 체험, 깊이 있는 묵상 등은 혼자서 수행해내기 쉽지 않고, 스산한 분위기와 교통소음에 노출된 환경은 신앙을 향한 마음에 방해가 되는 요소 로 작용한다. 또한 김대건 신부 혹은 교황 방문과 같 은 특별한 이벤트의 부각은 반대로 별 목적 없는 사람 들의 발길이 닿은 곳으로 전락하게 한 이유로도 볼 수 있다.
2) 선택형 순례지: 감곡매괴성모순례지 성당, 절 두산순교성지
다음으로 선택형 순례지의 예로 감곡매괴성모순례 지 성당과 절두산순교성지를 들 수 있다. 감곡매괴성 모순례지 성당은 1914년부터 성체거동(성체를 모시 고 성당 밖을 행렬하는 행사)을 시작한 110년 역사의 유서 깊은 성당이다. 이곳은 처음부터 성모 마리아에 게 봉헌된 곳인데, 성모 신심과 성체 신심을 바탕으로 15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 다. 장호원 지역은 원래 부엉골 성당 관할 지역에 들 어가 있었는데, 부엉골에는 1885년 예수성심신학교
그림 5. 감곡매괴성모순례 성당의 박물관과 청원기도 봉헌함 출처: 연구자 촬영(2015)
가 설립되면서 교우촌이 조성되었고, 1887년 신학교 가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 뒤에도 얼마 동안 성당으로 남아 있었다. 1894년 부엉골 성당 신부로 부임한 파 리 외방전교회 소속인 임가밀로 신부는 1896년 5월 장호원의 매산 언덕의 한옥(명성황후의 육촌 오빠인 민응식의 집이며,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피신했던 곳)을 매입하여 같은 해 10월에 그 집터에 성당을 설 립하고, 성모 마리아에게 이곳을 봉헌해 오늘날 감곡 매괴성모순례지 성당의 초석을 다졌다(한국천주교중 앙협의회, 2011; 감곡매괴성모순례지 성당 홈페이지, n.d.).
선택형 순례지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앙체 험을 할 수 있는 컨텐츠가 다양하게 놓여 있지만, 순 례자들의 선택에 의해 체험이 결정된다. 또한 신앙체 험의 컨텐츠가 많은 만큼 조성형 순례지에 비해 경건 함과 엄숙함이 느껴지는 요소들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신앙을 고백하고, 자신의 참회하고, 깊이 있 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들이 암묵적으로 더 부 여되어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감곡매괴성모순례 성당에서 이러한 요소들을 곳곳에서 체험할 수 있는 데, 이는 여기가 순례지임을 알려주는 입구를 지나 처 음 만나는 박물관에서 시작된다. 사제관(사제(신부) 가 거처하는 집)으로도 쓰이는 박물관에서는 우리나 라 초창기 사제들이 미사에 쓰던 서적, 제의(미사 때 사제가 입는 옷), 촛대, 미사도구 등이 전시되어 오랜 시간 지속되어온 순례지의 역사만큼 깊이 서려 있는 신앙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문화재로 지정된 대 성당 안에는 일명 ‘수난 받은 성모님’으로 불리는 감 곡매괴성모순례 성당의 상징인 매괴 성모상이 있다.
이 성모상은 프랑스 루르드에서 제작하여 1930년 대 성전 건립 당시 중앙에 안치되었는데, 한국전쟁 때 인 민군의 총을 7발이나 맞았지만 총구멍만 남아 있고 그 형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신앙의 상징 이 되었다. 흡사 7발의 총알은 성모 마리아가 아들 예 수로 인해 겪게 되는 일곱 가지 고통을 상징하는 ‘성 모칠고’를 의미한다고 하여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는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 러한 스토리에 근거해 감곡매괴성모순례 성당 내에 서는 매괴 성모와 관련해 매괴 성모에게 자신의 신앙
고백 혹은 청원의 내용을 적어 봉헌할 수 있는 봉헌 함, 매괴 성모 그림, 성모동산 등이 조성되어 있다. 특 히, 천주교 신자들에게 있어 성모 마리아의 존재는 어 머니와 같이 포근하며, 늘 어떠한 상황에서도 돌봐주 고, 따뜻함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는 의식이 깊이 자 리 잡고 있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를 매개로 하는 순례 지는 신앙인들에게 한층 더 의미 깊게, 또한 친근하 게 느껴지는 요소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대성당 뒤쪽 에 자리 잡은 피정의 집, 감곡매괴성모순례 성당을 둥 글게 둘러싼 산에 조성되어 있는 십자가의 길과 묵주 기도의 길 등도 자연 속에서 유유히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십자가 의 길과 묵주기도의 길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예수 의 죽음’의 부분에서는 실제 십자가상 위에 예수가 매 달린 형상을 실측으로 조성해 경건함과 엄숙함의 절 정에 닿는 것 같은 체험이 가능하다(그림 5 참조).
한편, 절두산은 예로부터 가을두, 잠두봉, 용두봉 등으로 불렸던 곳이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 을 통과해 서울 근교까지 침범해오자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들로 더렵혀진 한강을 천주교인들의 피로 씻 겠다며 이곳에서 수많은 교인들의 목을 잘라 죽이게 되는데(병해박해) 그때부터 이곳의 지명을 절두산이 라 명했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1966년 병인박해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서 절두산에 기념관을 건축했는데 기념관에는 성당을 비롯하여 27위 순교 성인과 무명 순교자의 유해가 안치된 성인 유해실, 그리고 박물관 등이 조성되어 있다(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1).
선택형 순례지의 또 다른 예인 절두산순교성지에
서도 감곡매괴성모순례 성당과 비슷한 경관이 펼쳐
진다. 절두산순교성지의 입구에 잘 정리된 철재와 나
무로 만든 벽에서부터 이곳이 박해의 흔적이 있었던
곳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절두산순교성지 안에 들어오
면 이러한 느낌이 더 배가가 되는데, 돌로 만든 제단,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의 길, 1984년 교황 요한 바오
로 2세의 방문을 기념한 교황 흉상, 김대건 신부의 동
상, 심지어 절두산이라고 하는 이름에 걸맞게 순교자
의 잘린 머리를 형상화한 예술품 등 순례지 곳곳에 숨
어 있는 신앙의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돌로 만
든 제단은 절두산순교성지에서 신앙과 자신의 목숨
을 맞바꾼 신앙의 선조와 형틀을 모티브로 해 만들어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외에도 성지 안내판, 대성 당으로 가는 문 등도 형틀을 본떠 만든 것으로 ‘여기 가 순례지’라는 의식을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성지를 지나가는 2호선 터널 외관에도 예수 그리스도
의 십자가 고통을 형성화한 그림을 그려 절두산순교 성지가 가지고 있는 엄숙함과 경건함을 더 크게 전달 하고 있다(그림 6 참조). 절두산순교성지에서는 절두 산순교성지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박물관 기능을 겸하고 있는 체험관이 있으며, 여기에는 우리나라 천
그림 6. 절두산순교성지의 체험관 입구, 형틀을 형상화한 안내표지판, 성지를 지나는 2호선 터널 외관출처: 연구자 촬영(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