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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연구론총 2집> 《월인석보》권25 소재 &#65378;아육왕전&#65379;의 文學的 硏究-사재동(충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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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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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석보》권25 소재 아육왕전 의 文學的 硏究

史 在 東1)*

<차례>

1. 서론

2. 아육왕전 의 撰成經緯 1) 撰成의 主體

2) 撰成의 動機 3) 撰成의 過程

3. 아육왕전 의 文學的 實相 1) 아육왕전 의 內容 構造 2) 아육왕전 의 構成樣式 3) 아육왕전 의 표현 문체 4) 아육왕전 의 장르적 性向 4. 결론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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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문>

이 <아육왕전>은 《석보상절》제24와 《월인석보》권25에 실려 최근에 발견된 국문 서사문학이다. 이 작품은 인도의 문 화사나 불교사상에서 워낙 저명한 ‘아쇼카왕’ 즉 아육왕의 전기 를 바탕으로, 유구한 전승과 분명한 계통을 거쳐, 불교계 문사 에 의하여 형성․전개되었다. 이 작품은 그 자체가 불교계의 전기나 서사문학 내지 예술적 대본의 실상을 갖추었다. 그리하 여 이 작품을 문학론에 입각하여 여러 모로 고찰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15세기 한국문학․국문문화의 정화인《석보상 절》․《월인석보》의 말권에 실림으로써, 그 형성 경위와 역사 적 좌표가 확인되었다. 이 작품은 《월인석보》에 이르러 월인 곡의 운문과 상절부의 산문, 협주 세문이 조화롭게 교직되어 장 편의 입체적인 종합문학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작품을 장르 론에 따라 분석․고찰하니, 여기서는 국문장편소설과 함께 국문 장편희곡, 그리고 분화된 월인곡과 삽입가요를 망라한 국문시 가, 협주 세문으로 된 국문수필이 분리․성립되어 나왔다. 게다 가 이 작풍의 장르들은 또한 불교계의 연행예술에 의하여 공연 될 운명을 스스로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이 작품은 15세기 국문문학, 국문시가․국문수필․국 문소설․국문희곡의 주심부를 이루어, 그 전범이 되었다. 그러 기에 이 작품은 불교계와 왕실의 주도하에 간행된 위 두 문헌 을 통하여 널리 유통․전파됨으로써, 후대의 국문문학사 - 한 국문학사 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나아가 이 작품 은 불교계 공연예술사 - 한국공연예술사 상에도 상당한 공헌을 했으리라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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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어>

아육왕전, 월인석보, 석보상절, 소설, 드라마

1. 서론

이 아육왕전 은 ≪석보상절≫ 제24와 ≪월인석보≫ 권25에 실려 있는 국문 서사문학의 전형적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인도 문화사․불교사에서 워낙 저명한 ‘아쇼카왕’(AṤOKA)의 전기를 바탕으로 유구한 전승과 분명한 계통을 거쳐 형성․전개되었 다. 그러기에 이 작품 자체가 불교계 전기나 서사문학 내지 예 술적 대본의 실상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권의 문학사 와 예술사 나아가 문화사 상에서도 중후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 는 터다. 이러한 아육왕전 이 한국어문으로 조성되어 한국문 학․문화사의 정화인 ≪석보상절≫과 ≪월인석보≫의 마지막 권에 수록된 채 560여년이나 비전되다가 최근에 발견된 것은 사계의 획기적인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국보적인 원전 에 실린 것만으로도 아육왕전 의 중요성과 가치는 족히 실증 되는 바다. 여기 문학적 관점에서 이 작품을 살펴본다면, 그 문 예적 실상과 문화사적 위상이 더욱 중시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아육왕전 이기에, 이를 본격적으로 연구․고찰할 필 요성이 절실해진다. 기실 현재 학계에서는 문학을 그 작품 자 체로서만 보지 않고 나아가 이를 예술작품이나 문화현상으로 취급해서, 그에 적절한 방법론을 모색․적용하여 그 연구 영역 을 넓히고, 그 성과를 올리는 추세가 뚜렷하다. 그리고 이 문학 을 한국만의 독자적 창작품이라 집착하지 않고, 적어도 인접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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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내지 아시아권의 그것이라 확대하여 거시적으로 비교 연구 하는 경향이 분명하다. 이러한 환위 속에서 이 아육왕전 은 보다 확대․개방된 영역에서 좀 더 거시적이고 국제적인 방법 론으로써 그 문학․문화적 보편성과 함께 그 독자성이 조속히 구명되어야 마땅하다.

그동안 이 아육왕의 역사적 행적이나 그 불교사 내지 불교문 화사 상의 위상에 대해서는 인도사나 인도불교사, 인도불교문화 사 등의 분야에서 상당한 연구가 진척되어 왔다.1) 그리고 아육 왕의 전설․전승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양한 고찰 이 진행되어 상당한 성과를 낸 것은2) 사실이다. 그러나 이 아 육왕의 행적이나 전설․전승을 문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직접 거론한 업적은 뚜렷한 것이 들어나지 않는다.

더구나 이 아육왕전 은 실제로 한국의 국문본으로 불교계의 문헌 속에 편입되어 비전되었기에,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일찍이 국어학계에서는 김영배 교수가 ≪釋譜詳節 第二十三․四注解≫에서 그 원전의 주석과 통해를 시도하였 고,3) 서지학계에서는 강순애 교수가 ≪月印釋譜 卷二十五 硏究

≫에서 그 불교문헌학적 실태를 그 저본 경문과 함께 밝혀 놓 았다.4) 그런데도 국문학계에서는 이 아육왕전 에 대하여 문학 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검토한 논고가 아직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필자는 이와 같은 처지와 수준의 작품들, 목련전 ․ 안락 국태자전 ․ 선우태자전 등을 이른바 국문소설로 고찰․규정 할 때, 거기에 이 작품의 이름만을 아육왕전 이라 열거했을 따 름이다.5)

1) 中村元, アジア佛敎史 イソト編Ⅱ, 佼成出版社, 1977, pp.154-157.

2) 山崎元一, アシヨカ王傳說の硏究, 春秋社, 1974, pp.3-26.

3) 김영배, 釋譜詳節 第二十三․四注解, 一潮閣, 1972, pp.140-231.

4) 강순애, 月印釋譜 卷二十五 硏究, 아세아문화사, 2005, pp.125-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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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본고에서는 첫째 이 아육왕전 의 찬성경위를 그 찬성 의 주체와 동기, 그리고 찬성과정으로 나누어 검토하겠다. 둘째 이 아육왕전 의 문학적 실상을 그 구조․형태와 구성 양식, 그 표현 문체와 장르적 전개 등으로 나누어 분석․고찰하겠다. 그 리하여 이 아육왕전 의 문학사 내지 문화사상의 위상을 계통 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작으나마 도움이 되고자 한다.

본고의 원전으로는 ≪석보상절≫ 제24(7․1-53․2)의 수록본 을 원형적 이본으로 전제하고, ≪월인석보≫ 권25(6장 a-142장 b)의 수록본을 변형적 원전으로 활용하겠다. 그리고 이 원전에 선행하는 한역본 ≪阿育王傳≫과6) ≪阿育王經≫7), 승우가 찬성 한 ≪釋迦譜≫의 阿育王弟出家造石像記 제25, 阿育王造八萬 四千塔記 제31, 釋迦獲八萬四千塔宿緣記 제32 등을8) 참고자 료로 하겠다.

2. 아육왕전 의 撰成經緯

1) 撰成의 主體

이 아육왕전 의 찬성 주체는 어떤 개인적인 제작자 또는 창 작인이라고 지적할 수가 없고, 그 찬성 과정에 주체적으로 간여 한 인물 유형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이 아육왕전 이 찬 5) 사재동, 國文小說의 形成過程 , 월인석보의 불교문화학적 연구, 중앙인

문사, 2006.

6) 阿育王傳 , 新修大藏經 통권 99, 불교대승회, 1976, pp.99-131.

7) 阿育王經 , 신수대장경 통권 99, pp.131-170.

8) 釋迦譜, 阿育王弟出家造石像記 , 위 책, p.67.

釋迦譜, 阿育王造八萬四千塔記 , 위 책, p.76-82.

釋迦譜, 釋迦獲八萬四千塔宿緣記 , 위 책, p.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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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국역되는 과정에 참여한 인물은 물론, 그 선행 원전이나 저 본의 형성 과정에 동참한 인물들이 또한 집단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먼저 위 ≪阿育王傳≫이나 ≪阿育王經≫, 阿育王造八 萬四千塔記 등의 찬성 주체를 전제하고, 이어 아육왕전 의 찬 성․국역자들을 추정․파악하여 보겠다.

먼저 이들 선행 원전․저본 중에서 범어본은 아육왕의 역사 적 행적으로부터 수세기에 걸쳐 ‘北方佛敎徒’들이 여러 전승을 집성하여 하나의 전설 작품으로 조성하였다고9) 보인다. 기실 이 북방불교도들은 인도 북방의 불교도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종잡기 어려운 복합적인 내막이 얽혀 있는 게 사실이 다. 적어도 이 아육왕 전설의 원형이 형성되었으리라고 추정되 는 서기전 150-100년으로부터10) 범어본 ≪阿育王經≫이 한역된 306년 이전까지 약 450여 년간에 걸쳐 생몰했던 고승들과 중요 신도들까지도 다 그 주체 속에 포괄되기 때문이다. 이 전설의 원형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불교도들에 의해서 전승․성장해 온 어느 단계에 이르러, 일단 집성․고정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범어본 산문으로 편성된 것은 인도 마도우라 지방의 설일체유 부좌에 속하는 고승들의 업적이라고 추측된다. 여기서 위 범어 본 원전․저본들이 북방불교도 중의 고승들에 의하여 찬성되었 으리라 유추되는 터다.

나아가 이 범어본이 한역되는 과정에서 그 주체가 매우 중시 될 수밖에 없다. 기실 이 한역본 ≪阿育王傳≫과 ≪阿育王經≫

이 아육왕 전승․전설의 범어본 완본을 실증하면서 그 번역․

재창작의 실상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 한역의 주체는 개인 적으로 이미 확정되어 있으니, ≪阿育王經≫을 한역한 안식국의 승려 安法欽과 《阿育王傳》을 한역한 부남국의 승려 僧伽婆羅 9) 山崎元一, 위 책, p.6.

10) 山崎元一, 위 책,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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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바로 그것이다. 안법흠은 당대의 고승․학승으로 서진에 초 빙․귀화하여 광희 원년(306)에, 승가바라는 당대의 고승 학승 으로서 양나라 천감 11년(512)에 각기 위와 같은 한역에 공헌 했던 터다.

이러한 고승․학승 중심의 주체적 전통은 중국 불교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위 阿育王造八萬四千塔記 등을 찬성하여

≪釋迦譜≫에 편입시킨 주체가 바로 제나라 승려 僧祐였기 때 문이다. 이 승우는 당대의 고승․학승으로 유명하고 그만큼 큰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공업은 승우 한 승려 의 역량만으로 이룩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때의 다른 승려들은 물론 제왕이나 신중들의 외호․협력이 필수되었던 것이다. 따 라서 그 찬성의 주체가 역시 고승 중심의 복합적 성향을 지녔 던 게 사실이다.

이어 한국의 경우, 아육왕전 의 찬성 주체는 비교적 선명한 윤곽을 드러낸다. 이 작품을 싣고 있는 ≪석보상절≫이나 ≪월 인석보≫의 찬성 주체가 어느 정도 자세히 밝혀지고 있기 때문 이다. 우선 ≪석보상절≫에서는 그 서문을 통하여 首陽君이 그 찬성의 주체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 서문의 말미에 ‘正統十二年 七月二十五日 首陽君諱序’라고11) 명기함으로써, 이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원래 서문이란 그 책의 주체․책임자가 찬성 경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게 원칙이기 때문이 다.

잘 알려진 대로 수양대군은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군왕 의 자질이 충분했을 뿐만 아니라, 불심이 깊고 불교에 관한 조 예가 전문가의 경지에 이르렀다. 더구나 수양대군은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하여 국문의 실용이나 한문의 국역에도 능숙 11) 역주 월인석보 제1․2(원문 영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2,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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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부모의 추선 불사로서 불경을 신찬하는 신앙적 의의도 선양하면서, 왕위에 대한 대망의 꿈을 펼치려는 발원을 겸하여, 이런 ≪석보상절≫을 주도적으로 찬성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아무리 그 적임자라 하더라 도, 이처럼 방대한 불사를 혼자서 해내는 일은 실제로 불가능하 였을 터다. 그 찬역 과정이란 이미 한역된 불경이나 한․중의 한문 불서 가운데서 선택․발췌하여 그 저본이 되는 ≪釋迦譜

≫를 편성하고, 다시 증보하여 국역․주해하며, 교정․인행하는 작업이 그만큼 다사․지난하였기 때문이다.12)

여기서 이 ≪석보상절≫의 찬역 사업이 수양대군의 주도적 지휘 아래, 그 전문적 실무자들의 조직적인 협력․작업에 의하 여 성취되었으리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 전문적 실무자는 자연 불교의 전문가, 훈민정음과 국문․국역에 능통한 인물, 불 경의 신찬이나 그 문장에 능숙한 왕실 측근의 인사 등을 어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숭유배불의 가혹한 현실 속에서 숭불 왕실과 손을 잡고 중흥불사를 기도․발원하던 당대의 고 승․학승 그리고 신불 문사류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 서 그때의 왕실에서 세종 비 소헌왕후와 대군․공주 등의 존숭 을 받으며 교류하던 승려들과 신불 문사들 가운데에서 그 주 체․중심적 인물을 지목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전문적 실무 자에 관한 직접적인 전거는 없다. 다만 세종 말기의 왕조실록 에 의하면, 이 ≪석보상절≫이나 《월인천강지곡》이 소헌왕후 의 추천 불사에 따른 ‘新撰佛經’이라고 볼 때, 세종이 그 불사를 승낙한 최고 책임자요, 수양대군 등이 그 감독자이며, 정효강이 간사자로 나타나고, 위 ≪釋迦譜≫와 직결된 김수온이 실무자로 들어날 정도이다. 그러면서도 훤히 짐작되는 고승․학승들의 12) 사재동, ≪월인천강지곡≫의 실상과 유통 , 월인석보의 불교문화학적

연구,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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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하나도 거론되지 않은 것은 불교계나 승려들이 이를 스 스로 숨기려 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 사관들의 불교관과 실록 편찬의 의도․기준에 의거하여 묵살된 터라 보아진다.

다음 ≪월인석보≫에서는 御製序文을 통하여 세조가 그 찬성 의 주체로 명시되어 있다.13) 그러니까 수양대군이 위 대망의 발원을 성취하여 세조가 되어서도, 그 찬성의 주체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세조는 그 말년에 명실공히 신불한 세종에 이어, 전형적인 숭불주로 자처․행세하여 획기적인 불사를 적극 추진 하였다. 세조는 불교정책을 공언․실천하여 승려를 보호․우대 하고, 거국적으로 사암을 중수․창건함은 물론, 대내적으로 불 경․불서의 신찬․국역에 심혈을 기울이며 심지어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각종 대승경전을 번역․유통시키는 데에 주력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세조의 불교시책과 그 추진은 워낙 단호․강력 하여 그 어떠한 유신․유생들도 공식적으로 반대할 수 없었고, 오히려 신불․추숭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세조가 대군 시절에 주도․주관하였던 ≪석보상절≫

에 이어 ≪월인석보≫의 찬간에 더욱 주체적인 역할을 다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월인석보≫의 서문에 의하면, 그 찬 간에 따르는 세조의 주도적 활동이 구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월인석보≫의 편간 작업에서 세조가 직접 전문적 실무 작업을 담당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단 왕위에 오르 면 대군시절과는 달리 어떠한 문헌의 편간에 직접 손을 대지 않는 것이 군왕의 법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조는 ≪석보 상절≫의 경우보다 ≪월인석보≫에서 외호․감독을 겸한 최고 책임자로 더욱 강력한 주체적 역할을 전담했으리라 본다. 그러 기에 이 수양대군 아래서 ≪석보상절≫을 찬역했던 전문적 실 13) 세조, 어제월인석보서 , 역주 월인석보 제1․2,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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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이 이 세조의 ≪월인석보≫에서도 동일한 역할․작업을 전 담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순리적이었을 터다. 수양대군-세조가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월인석보≫의 일관성있는 찬 역 불사를 추진함에 있어, 그 전문적 실무진이 계속성을 유지하 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르러 그 전문적 실무진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위

≪월인석보≫의 서문 주해에

묻더신 사 慧覺尊者 信眉와 判禪宗事 守眉와 判敎宗事 雪俊과 衍慶住持 弘濬과 前檜庵住持 曉雲과 前大慈住持 智海와 前逍遙住持 海超와 大禪師 斯智와 學悅와 學祖와 嘉靖大夫同知中樞院事 金守溫 괘라14)

라고 적시하였다. 이 승려들은 당대 최고 수준의 고승․석덕이 요, 유일한 속인은 당시 정예의 신불문사라 하겠다. 이상의 승 속 명사들은 불교․불경에 능통하고 훈민정음의 실용과 국문에 도 능숙한 데다, 불경 신찬이나 국문화에 사명감을 가지고 그 능력을 십이분 발휘할 수 있는 처지였다.

이처럼 ≪석보상절≫ 내지 ≪월인석보≫의 찬성 주체가 윤곽 을 잡았으므로, 이 아육왕전 의 찬성 주체가 자연스럽게 밝혀 지는 것이 당연하다. 결국 위 승속의 주체들 중의 누군가 이 작품의 찬성에 직접 손을 대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 기서 수양대군-세조를 그 찬성자로 가정해 볼 수는 있다. 그 왕자․군왕에게 이 작품을 찬성할 만한 재질과 능력이 충분하 였기 때문이다.15) 그러나 수양대군의 내외적 입장에서 이 작품 의 찬성에 직접 손을 대기는 어렵기로, 이를 지휘할 수 밖에 없 14) 역주 월인석보 제1․2, p.35

15) 윤사로, 御譯妙法蓮華經進箋 , 국역묘법연화경(영인), 동국대학교, 1960, 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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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을 것이다. 전술한 대로 이 작품의 내용이 마치 수양대군이 내심으로 발원했을 대망의 꿈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 문이다.

그렇다면 위 고승․대덕 중의 누가 이 작품에 직접 손을 댔 을 가능성이 짙다. 여기서 수양대군․세조의 대망의 꿈과 관련 지어 그 의중․의도를 중심으로 추적한다면, 아무래도 혜각존자 신미를 지목할 수가 있겠다. 이 신미는 당대 제일의 고승이요 석덕으로 왕가의 승앙을 받았고, 특히 수양대군의 신앙적 스승 으로서 그 필생의 대망과 행로를 직․간접으로 선도하고 성취 하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16) 더구나 신미는 불교와 불경에 조예가 깊은데다가 문장이 빼어나 ‘雄文巨筆’로 공인되었고,17) 나아가 훈민정음 창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국문 운용에 걸 림이 없었기로,18) 수많은 대승경전을 국역하는 데에 탁월한 업 적을 남기었다. 게다가 숭유배불의 정황 아래 불교 중흥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하여, 왕실의 신심을 더욱 강화하거나 숭불 왕자 를 등극케 하고 국문불서․국역불경을 찬성․광포하는 데에 희 생적으로 앞장섰던 것이다. 이러한 내밀한 과업 중에 신미가 이런 작품 아육왕전 을 특별히 찬성해 내는 일은 너무도 필수 적인 작업이었을 터다.

이러한 찬성의 가능성을 더욱 높여 주고 있는 것이 위 김수 온과의 관계다. 이 김수온은 수미의 재가 실제다. 그는 숭불 문 사로서 불교․불경에 조예가 남달리 깊은 데다, 문장에도 뛰어 나 세종․세조의 신임 아래 수준 높은 찬불가를 창작하고 사

16) 세조, 상원사어첩 ,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소장본.

17) 사재동, 국문소설의 형성경위 , 한국고전소설의 실상과 전개, 중앙인문 사, 2006, p.352

18) 이재형,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와 신미의 역할 , 불교문화연구 제4집, 한국불교문화학회, 2004, pp.147-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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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응험기 등의 중요한 불서를 많이 찬술하였다.19) 또한 전술 한 대로 ≪釋迦譜≫를 편찬․증보하는 주역이 되었고, 훈민정음 의 창제․실용에도 밝았기로 국문․국역에도 그만큼 능숙하였 던 터다. 그러기에 위와 같은 일련의 문헌 불사에서 재가자로 서는 유일한 전문적 실무자로 활약하게 되었다. 이러한 김수온 이 존경하는 친형을 적극 도와서 이런 작품을 완성케 하였으리 라는 점은 족히 짐작되는 바다. 그 당시의 문헌 불사에서 신미 와 김수온이 항상 협력․합작하였던 것처럼, 적어도 한․중의 방대한 선행 원전의 구득이나 정리․분석, 그 작품의 구상․기 술, 국역․교정 등에서 실로 합작에 값하는 성과를 내었으리라 추정된다. 이러한 작업은 친애하는 친형제이기에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작품의 찬성 작업에 김수온의 역할이 더 클 수도 있었지만, 그 핵심적인 완성의 주 역은 역시 신미일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이처럼 경전에 해당 되는 아육왕전 이라면 완성의 주도적 역할과 그 명분상의 영 예는 실제로 성직자인 신미에게 돌아가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 다.

2) 撰成의 動機

이 아육왕전 의 찬성 동기는 역시 복합적인 면모를 보일 수 밖에 없다. 위로는 그 선행 원전들과 상통하고, 실제로는 ≪석 보상절≫-≪월인석보≫의 그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선 위 선행 원전의 찬성 동기는 이미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유명한 아육왕의 역사적 행적과 불교적 공적을 길이 찬탄․숭 19) 김수온, 식우집(국역), 영동문화원, 2001,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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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하는 작업으로 그 선행 원전들이 찬성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나아가 이 선행 원전들이 그 당시 해당 지방의 불교의 발전이 나 중흥을 위하여 포교적 방편으로 찬성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실제로 ≪阿育王傳≫이나 ≪阿育王經≫ 내지 阿育王造八萬四 千塔記 등이 인도․중국 등지에서 불경으로 행세하면서 포교 와 불교발전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행 원전의 포괄적이고 거시적인 찬성 동기 속에 각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동기가 숨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밝 힐 만한 전거와 계기를 찾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행 원전의 찬성 동기가 이 계통의 아육왕전 의 찬성 동기에 공통기반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어 ≪석보상절≫과 ≪월인석보≫의 찬성 동기는 수양대군- 세조의 그 서문에서 잘 밝혀지고 있다. 여기에 보이는 그 찬성 동기는 대강 보편적인 명분과 내면적 동인으로 나뉘어 몇 가지 로 나타난다. 우선 보편적인 명분은 바로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찬탄하고 불법의 거룩함을 선양하기 위함이었다. 기실 이러한 명분은 고금의 모든 불경․불서의 편간에서 강조되는 그 동기 와 공통되는 게 당연하다. 이 부처님이 삼계의 지존으로 널리 중생을 제도하신 무량 공덕을 인천이 이루 다 찬탄할 수 없다 면서, 그동안 부처님의 생애가 팔상으로만 기술되었던 것을 극 복하고, 모든 경전․불서를 망라․발취하여 방대․참신한 ≪석 보상절≫ 내지 ≪월인석보≫는 찬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왕실 종친과 만조백관․사부대중, 만백성이 삼보에 귀의하고 나 아가 무궁한 공덕을 쌓아 국태민안하고 만인동락하여 저 진리 의 피안에 이르라고 발원한다는 점이었다.20) 그러기에 이러한 찬성 동기는 숭유배불의 현실 속에서 불교계 승단의 절명적 서 20) 세조, 어제 월인석보서 , 역주 월인석보 제1․2, pp.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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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라 할 불교중흥을 국가․군왕의 차원에서 공인․선포하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정의 유신이나 경향의 유생들은 생명을 걸고 반대 상소를 올렸지만, 결국 세조의 이런 정책이 실제로 불교중흥의 기틀을 잡아갔던 터다. 여기서 부수 적인 동기는 이를 국문불서로 편간하여 상하 백성들에게 훈민 정음을 실용케 하자는 일이었다. 실질적으로 이런 국문불서가

≪세종어제훈민정음≫을 모두에 싣고 널리 유통․보급됨으로써, 국문 활용이 대중적으로 파급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내면적 동인은 왕실의 추천 불사를 원만 봉행하기 위함 이었다. 기실 세종 25년 이래로 왕실에서는 대군․공주의 상사 가 잇따르고, 그 28년에는 숭불왕비 소헌왕후가 서거하니, 그 명복을 지성껏 빌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21) 이러한 추천 불사의 최고 방편은 불타의 일생을 새로운 국문불경으로 찬 성․간행하는 일이라 공인되었다. 그리하여 우선적으로 위 ≪ 釋迦譜≫를 서둘러 편성하여 ≪월인천강지곡≫을 제작하는 저 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저본을 통하여 신찬불경으로서 ≪월 인천강지곡≫을 완성한 뒤에, 그 ≪釋迦譜≫를 증보․국역하여 이른바 ≪석보상절≫을 찬역하게 되었다.

그런데 세종이 붕어하고 마침내 세조가 등극하여 불교천하를 다짐하면서 세종과 소헌왕후를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 는 터에, 그 왕세자 도원군을 잃고 처연한 부정을 진정키 어려 워지자, 위로 부모의 영위와 아래로 자식의 영가를 극진히 천도 하는 불사를 아주 크게 벌이게 되었다. 여기서 부왕의 이름으 로 제작된 ≪월인천강지곡≫과 당신이 왕자로서 찬역한 ≪석보 상절≫을 유합․증보하여 ≪월인석보≫로 완간하였던 터다. 실 제로 세조는 이 ≪월인석보≫를 편간하여 그 추천 불사에 활용 21) 사재동, ≪월인석보≫의 찬성 경위 , 월인석보의 불교문화학적 연구,

pp.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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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을 뿐만 아니라, 간경 공덕의 발원으로 경향의 대찰을 중심으 로 불교계에 널리 인행․유포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내면적 동 인은 숭불 중흥주라 할 세조의 왕권을 기반으로 큰 역량을 발 휘하여, 위에 든 보편적 명분을 족히 실현케 되었다고 보아진 다. 만약 이러한 내면적 동인의 작용․권능이 아니었다면, 당시 의 여건․환경으로 보아 보편적 명분은 성립․실천되기 어려웠 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월인석보≫는 후대의 복간․유통 에서도 내면적 동인의 구체적 보호를 받았던 것이다. 그것이 서문 아래의 탑형위패에 ‘世宗御製月印千江之曲․昭憲王后同證 正覺’, ‘今上纂述釋譜詳節․慈聖王妃共成佛果’라고22) 명기․과시 됨으로써, 유신․유생이나 관리․백성 어느 누구도 감히 이 ≪ 월인석보≫에 폄하․훼손의 손길을 뻗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 아육왕전 의 찬성 동기는 결국 위 ≪석보상절≫-

≪월인석보≫의 그것과 동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작품의 내용으로 보아 이미 암시된 대로 수양대군-세조와의 상관성이 심상치 않다. 기실 아육왕의 역사적 행적과 불교적 공덕은 후 대 한․중의 숭불제왕에게 영향을 미친 흔적이 보인다. 가령 양나라 무제나 백제 무령왕의 역사적 행적과 불교적 공덕이23) 이를 방불케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양대군 당시 그 ≪석 보상절≫을 주체적으로 찬역할 때, 이 아육왕전 은 그 대망의 꿈을 암시․발원하는 의도에서 선택․인용되었으리라 추측된 다. 실제로 세조가 등극한 이후 ≪월인석보≫를 찬간할 때에, 수양대군의 대망과 세조의 전도가 실로 아육왕전 의 그것과 유사한 점을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겠다. 당 시 왕위 계승의 분위기와 수양대군의 의중을 짐작한 찬성의 담 22) 역주 월인석보 제1․2, pp.39-40.

23) 사재동, 무령왕 행적의 불교문화사적 고찰 , 百濟 武寧大王과 佛敎文化 史, 중앙인문사, 2006, pp.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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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자가 숭불왕의 등국을 기대하는 발원을 담아 이런 아육왕전 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육왕의 출생과 등극 과정, 그 불사 추진, 그리고 왕의 피부질환과 왕위 승계 등에서 세조의 그것과 조응되는 바가 없지 않은 터다.

3) 撰成의 過程

이 아육왕전 의 찬성 주체와 그 동기가 어느 정도 밝혀지니, 그 찬성 과정의 윤곽이 대강 잡힌다. 더구나 ≪석보상절≫-≪

월인석보≫의 찬성 과정이 이미 밝혀져 있으므로 더욱 편의를 얻게 되었다. 실제로 아육왕전 은 위 두 불전 속에 자리한 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독특한 실상과 위상을 갖춘데다 그 원전․저본이 확실하고 다양하여, 그에 상응하는 찬성 과정을 구체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위 아육왕전승의 유구하고 광범한 형성․전개 양상 가운데서, 아육왕전설의 성립과정은 인도와 중국 등지에 걸쳐 형성․전 파․수용․개변 등 다양한 현상을 통하여 거시적으로 파악되어 왔다.24) 그런데 그 성과는 아육왕 시대의 정치적․종교적 현실 을 분석 해명하여, 인도의 고대 문화사의 장구한 흐름과 함께 그 불교문화사적 영향 관계를 밝히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지만, 그 전설의 문학적 실상과 위상을 직접적으로 고찰한 것이 아니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는 위 ≪阿育王傳≫이나 ≪阿育王 經≫, 阿育王造八萬四千塔記 등의 범어본과 한문본의 형성․

전개 과정을 유추하는 데에 유용한 기반이 되었다. 그리하여 24) I. Przyluski, The Legend of Emperor Aṥoka in Indian and Chinese

Text, Calcutta,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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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원전․저본의 서사문학적 실상과 위상을 계통적으로 파악 하는 전거와 단초를 제공하여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서 이 아육왕전 의 선행 원전․저본들이 어떤 전 파․수용․개변 과정을 거쳐 ≪석보상절≫ 중의 한 서사문학작 품으로 찬역․편입되었고, 나아가 ≪월인석보≫에 보완․수록되 었는가를 추적해 볼 수가 있겠다.

먼저 이 아육왕전 은 한문본으로 찬성되어 위 ≪釋迦譜≫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이 ≪釋迦譜≫가 ≪월인천강지곡≫이나 ≪ 석보상절≫의 저본으로 편성될 때, 그 군왕의 신불 행적과 불교 중흥을 강조․부촉하는 최선의 전범으로 ≪阿育王傳≫ 내지 ≪ 阿育王經≫ 등을 거울삼아 마지막 권차에 적합한 한문본 阿育 王傳 을 새롭게 찬성하는 것이 상책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 런 한문 작품은 위 원전․저본에 근거하여 새로운 구조․구성 을 갖추고 한국적 문체를 통해서 재창조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 이다.

여기서 전술한바 이 작품에 가장 가까이 간여했던 신미와 그 실제 김수온의 실제적인 작업 과정을 추정해 볼 수가 있겠다.

첫째, 그 찬성자는 8상 구조의 ≪釋迦譜≫를 계획하고, 그 원 전․저본을 한․중에 기존․유통되는 그 경전․불서 중에서 가 려 뽑았다. 그러기에 ‘爰采諸經 別爲一書’라고25) 하였던 터다.

여기서 ≪阿育王傳≫ 계열의 원전․저본이 만장일치로 선택되 었던 것은 위 찬성의 주체와 그 동기로 미루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김수온을 중심으로 많은 전문가들이 그 자료 를 수집하였을 때, 실로 방대한 질량의 원전․저본이 파악되었 던 터다. 그래서 일단 그 자료들을 한 묶음으로 하여, 그 ≪釋 迦譜≫의 순차에 따라 말권에 배치하게 되었다.

25) 수양군, 석보상절 서문 , 월인석보 제1․2,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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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전술한바 ≪釋迦譜≫에 가장 적합한 한문본 阿育王傳 의 새로운 재편․조성 작업이 착수되었다. 우선 이 작품에서는 그 주제가 원전․저본에서보다 강화되었다. 그 원전․저본은 아육왕의 신심․숭불과 조탑․불사의 공덕을 내세워 불법의 홍 포와 불교의 중흥을 강조한 것이거니와, 워낙 그 규모가 방대한 데다 소재․내용이 복잡․풍성하여 그것이 선명하게 부각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는 찬성자가 그 점을 고려하여 당 시의 소망스런 숭불주를 희원하는 가운데, 그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데에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 점은 현전 아육왕 전 과 그 원전․저본을 독파․비교해 보면 분명해지기 때문이 다. 이어 그 찬성에서는 이 작품의 구조가 그 원전․저본의 기 본 골격을 그대로 계승․유지하면서 대폭 응축되어 밀도를 훨 씬 증가시켰다. 기실 저 한역 ≪阿育王傳≫(전 7권)과 ≪阿育王 經≫(전 10권) 등만 보더라도 각기 방대한 규모에 그 전체적 구조가 느슨하고 유기적 긴밀성이 부족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 고 승우의 阿育王造八萬四千塔記 는 전자에 비하여 그 규모가 상당히 축소되고 그 구조가 비교적 조정․정리되었지만, 중간 중간에 ‘某經云’의 인용 방법을 활용하여 서사적 맥락을 약화시 키고 있는 터다. 그리하여 이 한문본 阿育王傳 은 위 원전․

저본의 구조적 방만성과 미비점을 극복․보완하여 서사적 구조 를 소설적 차원으로 재조성한 것이었다.

또한 이 작품의 찬성에서는 그 구성을 원전․저본의 소재․

내용에 기반하여 서사문학․소설형태로 재조직하였다. 위 원 전․저본들은 다 같이 장황․풍성한 소재․내용에다, 그 구성이 산만하여 조직성과 긴밀성이 선명치 못한 게 사실이었다. 그들 의 무대가 복잡․다단하여 등장인물들의 사건 진행을 뒷받침하 는 데에 유기적인 뒷받침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등장․활동하는 인물들은 그 성격과 역할이 불투명하여 사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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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진행에 기여하는 바가 희미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장황․다기한 사건 전개가 산만하고 지리멸렬하여 강인하고 역 동적인 통일성 내지 필연성이 뚜렷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그리 하여 이 한문본 阿育王傳 에서는 그 무대를 상당히 생략하고 선명화시켜 인물들의 활동과 사건의 추이에 따라 적절히 대응 함으로써, 그 효과를 증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등장인물들의 수량을 주리고 주인공을 중심으로 그 역할에 알맞은 성격과 역 량을 제대로 부여․활약시킴으로써, 사건 진행에 유기적인 활력 을 제공했던 터다. 그리하여 이 사건 진행은 입체적인 굴곡선 을 갖추어 조직적이고 역동적인 일관성을 유지함으로써, 서사적 인 역량과 극적인 감동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러기에 이 작품 의 구성은 그 원전․저본으로부터 재조정․찬성된 창작의 수준 을 유지하고 있는 터라 하겠다.

따라서 이 작품의 한문 문체도 저 원전․저본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기실 이 한문 작품이 주제나 구조․구성 등에 서 그 원전․저본과 달리 창작적 수준을 유지하였다면, 이 표현 문체가 이를 제대로 감싸도록 독창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저 한역의 문체나 중국의 한문체와 한국의 조선시대 한 문체가 서로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터에, 신미나 김수온의 ‘雄 文巨筆’로 저 원전․저본의 문장을 그대로 묵수․모방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한문 문체는 신미의 독창적 제작 이요, 김수온의 보완적 저술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미 그 한 문 문장은 증보․국문화에 이어 인멸되었거니와, 다만 이 아육 왕전 의 국문 문체로써 추적․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셋째, 이 한문본 阿育王傳 은 ≪釋迦譜≫에 편입되어 ≪月印 千江之曲≫을 제작하는 저본으로 활용되고, ≪석보상절≫로 찬 역되기 위하여, 다시 증보․교정을 거쳤다. 전술한 대로 ≪釋迦 譜≫는 완결되는 즉시 ≪월인천강지곡≫을 제작하는 저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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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용되었다. 이 ≪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의 어제로 유통․행세 하였지만, 실제로는 그 친제가 아니고 당시 전문적 실무자에 의 하여 제작된 것이었다. 이미 밝혀진 대로 그 전문적 실무자들 은 ≪석보상절≫․≪월인석보≫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던 것 이다. 이 ≪월인천강지곡≫은 600곡에 가까운 최초의 장편서사 시로 서둘러 창작된 것이기에,26) 처음부터 전문가들이 분담하 여 합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 제작의 저본으로서 위

≪釋迦譜≫가 필수되었던 것이다. 기실 이 ≪釋迦譜≫는 대강 24권 정도의 규모와 권차를 갖추었으리라 추산되거니와, 이것을 여러 전문가에게 권차별로 분배하여 해당 저본에 입각한 가사 를 창작해 내었으리라 본다. 이어 그 분담 제작한 가사를 다시 권차별로 조합하여 전체적으로 통일․교정함으로써 현전하는 국문 장편시가로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釋迦譜≫의 말권에 해당되는 한문본 阿育王 傳 을 가지고 누군가가 가사로 제작해 낸 것은 분명하지만, 구 체적으로 거명할 근거가 없다. 다만 이 한문본 阿育王傳 을 찬성하는 데에 기여했다는 신미와 김수온을 주목할 수는 있을 터다. 그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그 말권의 이 작품에 역점을 두고 관심을 가지며, 그 제작에서 대표성을 띤 신미는 빼어난 문장가요, 김수온은 실제로 찬불가를 지은 문학인이었기 때문이 다.

여기서 중시되는 것은 이 한문본 阿育王傳 이 위와 같은 편 성․제작 과정을 거쳐 ≪석보상절≫로 국역․편입될 때에, 상당 한 수정을 거쳤다는 점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이 ≪釋迦譜≫

는 ≪월인천강지곡≫의 저본으로 활용된 다음에, 세종의 명에 의하여 김수온의 증수를 거쳤던 터다. 이것이 바로 이 한문본 26) 사재동, ≪월인천강지곡≫의 실상과 유통,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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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育王傳 의 증보․수정으로 직결되었으리라고 본다. 기실 이

≪釋迦譜≫ 속의 그 작품은 그 저본으로서 전체 내용을 전달하 는 초고본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때 이 작품이 본격 적인 서사문학 형태로 최초의 산문불경, ≪석보상절≫에 독립적 으로 수록․행세하기 위해서는 재창작에 준하는 수정․보완이 필수되었던 게 사실이다. 여기서 이 수정․보완의 주체가 바로 신미와 김수온이라 지목할 수밖에 없다. 역시 신미는 그 작업 의 대표적 전문 문사요, 김수온은 그 증수의 책임 문사였기 때 문이다. 이로써 이 한문본 阿育王傳 이 조선 초기의 한문 서 사문학․소설형태의 독립 작품으로 행세하게 되었던 터다.

넷째, 이 한문본 阿育王傳 이 ≪석보상절≫의 말권으로 국 역․편입됨으로써, 이 아육왕전 으로 완결되었던 것이다. 이 작품의 국역 과정은 지금으로서는 당연시되지만, 당시로서는 획 기적인 환골탈태의 시대적 사건이라 하겠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석보상절≫은 최초의 국문산문이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단순한 역어체가 아니라, 고유어 중심의 창조적 산문이었기 때 문이다. 실로 처음으로 훈민정음을 실용하여 새로운 문장을 지 어 냈다는 것은 한국어문의 문장사에서 경천동지할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실제로 국문운문이 ≪월인천강지곡≫에서 최초로 성립되었다면, 이 국문산문은 바로 ≪석보상절≫에서 최초로 완 결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아육왕전 의 국역에 손을 댄 주체적 핵심인물은 역시 수미와 김수온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의 국역은 여러 모로 주목되는 작업이었기에, 그 형제가 손을 맞추어 일관되게 작업하는 것이 순리적이었기 때문이다. 기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 하거니와, 그 한문 작품 을 찬성한 당사자가 이를 국문 작품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합당 한 일이었다. 전술한 대로 수미와 김수온은 훈민정음의 활용에 능숙한 문장가로서, 그런 작품을 국역하기에 적격자였음은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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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실제로 한문 작품에 능숙한 문장가가 국문 작품에 더욱 능숙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 아 육왕전 은 국어국문의 서사문학․소설형태의 전형적 작품으로 정립되었던 것이다.

다섯째, 이 아육왕전 이 다시 ≪월인석보≫에 편입되는 과정 에서 의외로 상당한 증보․변모를 겪음으로써, 새로운 형태를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우선 이 ≪월인석보≫에 와서는 숭불 군왕의 입장․차원에서 그 편찬 의도가 많이 달라졌다. 그 당 시는 숭유배불의 위축된 분위기가 숭불․존교의 명분을 띠고, 불교중흥의 기운이 만천하에 감돌기 시작한 지 5년이나 지난 당당한 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석보상절≫이 찬간된지 무 려 12년간이나 경과되면서, 왕위 계승의 우여곡절과 왕실의 중 첩된 비사에 휩싸여 왔기에, 획기적인 문헌불사를 발원․실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건과 환위 속에서, 그 ≪월인 석보≫의 편찬은 국가적 불사로서 획기적인 증보․개변이 예상 되었던 터다. 이미 알려진 대로 이 ≪월인석보≫는 ≪월인천강 지곡≫과 ≪석보상절≫의 단순한 합편이 아니다.27) 그 두 대전 이 유합되는 동시에 그것은 원작으로 되돌릴 수 없는 독특한 운․산문 국문불경이 되어 제3자적 독자성을 확보하였기 때문 이다. 거기에다 그 월인곡은 부동적인 고정성을 유지하고 있었 지만, 그 상절문은 유동적인 유연성 내지 포용성을 갖추어 상당 한 증보․개변이 자행되었다.

따라서 이 아육왕전 은 위와 같은 여건․환위와 증보․변모 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음은 물론, 오히려 그것이 주목․중시 되는 정도만큼 그 폭이 넓고 깊었던 게 사실이다. 먼저 이 작 품의 모두에 월인곡 제 577곡(62장 a-b)이 놓이고 그 해설격으 27) 사재동, ≪월인석보≫의 문화사적 전개 , 월인석보의 불교문화사적 연

구,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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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상절문이 이어지다가, 또 월인곡 제578-579곡(91장 a-92장 a)이 끼어들고 그에 해당되는 상절문이 계속되다가, 다시 월인 곡 제580-581곡(135장 b-136장 a)이 자리하여, 그에 부합되는 상절문이 나오는 형식이다. 이러한 현상은 실제로 아육왕전 의 구조에 상당한 변전을 가져 온 게 사실이다. 거기에는 크게 보아 강창구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와 같이 상절문의 적절한 곳에 그 주석․해설을 위한 협주 세문이 보입 되어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협주 세문은 이 원전의 내용을 풍 성히 하고 서사문맥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써 독자적 작품의 성격을 갖추고 있는 터다.

또한 이 원전은 그 사건 장면에서 전자의 애매하거나 불투명 한 점을 보완․강화함으로써, 그 서사문맥의 선명성과 필연성을 높이는 데에 적잖이 기여하고 있다. 나아가 이 원전에서는 전 자의 서사적 구조에 기반하여, 이를 확대․보충하려고 새로운 삽화를 적절하게 첨가시켰다. 그러면서도 전자에 있던 삽화가 이 원전에서는 삭제된 것도 극소 부분 나타난다. 이러한 삽화 들의 출입은 그 역할이 매우 소중한 터다. 기실 그것들이 아육 왕의 성격․기능이나 그 사건 진행에서 창의적 서사성과 합리 적 필연성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원전에서는 전자에 이미 배열되어 있는 사건 삽화의 순차를 적절히 바꾸어 놓았다. 실제로 이런 변화는 그 사건 전 개에서 전자의 모순점이나 불합리성을 시정․정리함으로써, 그 서사성의 합리적이고 필연적인 향상․발전을 지향․실증하는 바라고 하겠다. 게다가 그 어휘나 어구의 표현에서도 10여년의 시대차를 보이며 변화되어 있는 터다. 특히 이 원전에서는 그 표현 문체가 전자에 비하여 매우 부연되어 있다는 점이다. 실 제로 양자의 동일한 사건 장면이 전자로부터 이 원전에 이르러 더욱 보완․연설되었다는 것이다. 양자의 거의 같은 인판과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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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한 내용이 그 ≪석보상절≫에서는 46장인데 비하여, 이 ≪월 인석보≫에서는 80장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모와 장 편화로써 이 아육왕전 이 ≪월인석보≫에서 완성․전개되어, 그 서사적 구조를 유지․확충하면서 문학적 장르면에서는 복합 적 성향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당대의 모든 국문서사산문 중에서 가장 장편이면서 제일 복합적인 문학성을 확보함으써, 현존 국문전승 가운데 최초의 완벽한 원전으로 확 정되는 게 당연한 일이다.

3. 아육왕전 의 文學的 實相

1) 아육왕전 의 內容 構造

전술한 대로 이 아육왕전 은 ≪석보상절≫과 ≪월인석보≫

에 각기 수록되어 양자가 이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게 사실 이다. 그리하여 ≪석보상절≫의 수록본을 원형적 이본이라 전 제하고, ≪월인석보≫의 수록본을 변형적 원전이라 이름하여 본 고의 대상으로 거론하는 것이 순리라고 본다. 여기서 전제할 것은 이 작품의 주제․사상이다. 이 구조는 골격이기에 그 주 제․사상의 통어에 의하여 조직된 것이기 때문이다. 기실 이 작품의 사상적 배경은 총합적 불교사상이고 그 주제는 신불․

숭불에 따른 무한 보시․공양의 공덕과 성불에 의한 영원한 행 복이라고 하겠다. 그러기에 이 작품의 구조는 그 주제․사상을 가장 효율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주력하여 구심적으로 조성된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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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육왕전 의 내용

위 원형적 아육왕전 의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이 원전의 내 용을 개조식으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월인천강지곡 제577곡

(1) 아육왕이 전세에 부처님께 공양을 하고 불멸 후 제왕으 로서 팔만사천탑을 세우리라는 수기를 받는다.

○ 아육왕이 전세에 수기 받은 이야기(원형적 아육왕전의 인용, 협주 세문)

(2) 파인불읍에 일월호왕의 아들 빈두바라왕이 수사마왕자를 두고는 섬바국 바라문의 단정한 딸을 제일부인으로 맞아 아육 을 낳는다.

(3) 아육이 몸이 추하여 왕의 미움을 많이 받았지만, 왕이 신 뢰하는 상자에 의하여 태자로 뽑힌다.

(4) 아육이 왕의 치명적 명령에 의하여 적은 병사를 이끌고 변방의 반군을 치러 가지만, 왕위를 두고 하늘에 맹세하여 땅에 서 많은 병사들이 솟아나와 승전하고 국토를 해변까지 넓힌다.

(5) 왕이 중병에 들어 신하들이 아육을 장엄해서 왕위를 잇 게 하려니 왕은 응락치 않으나, 아육이 왕위를 두고 하늘에 맹 세하여 제천이 관정하는 감응을 얻고 즉위하니 인신이 다 기뻐 한다.

(6) 큰 왕자 수사마가 왕위를 찾는다고 아육왕을 공격하니, 측근 대신이 아육왕가상을 코끼리에 태워 동문에 세우고, 그 문 입구를 파서 숯불구덩이를 조성․위장하고는 수사마를 유인․

섬멸시킨다.

(7) 아육왕이 선정을 펴는데 신하들이 자만하여 왕명을 듣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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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으니, 칼을 들어 오백 대신을 죽이고, 채녀들이 왕의 추모를 능멸하여 무우수화를 꺾으니 왕이 노하여 채녀들을 매어 불태 워 죽인다.

(8) 아육왕은 포악한 왕이라 불리는 판에 측근 대신이 진언 하여 살인하는 흉주를 두고, 그 흉주가 지옥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오는 사람을 무조건 죽인다.

(9) 한 비구가 걸식하다가 그 지옥에 잘못 들어가 흉주에게 죽게 되니, 피나게 정진하여 불법을 깨닫고 아라한으로서 신통 력을 발휘한다.

(10) 흉주가 그 비구의 이적을 보고 왕에게 알리니, 친히 와 서 그 신통력과 함께 그의 게송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불법을 숭신한다.

(11) 아육왕이 부처님을 심히 숭신하여 그 당시 친견한 파사 익왕의 누이 130살의 비구니를 찾아, 그 위신력과 신통력을 확 인하고, 그 미성을 닮은 새를 구하여 청의녀의 도움으로 그 청 아한 소리를 듣고서 정도를 깨닫는다.

(12) 아육왕이 그 게송한 비구에게 자신의 전세 수기에 대하 여 듣고, 전륜성왕이 되어 정법으로 다스리며 수많은 사리탑을 세우되, 그 지옥을 파하고 법답게 수행하라는 충고를 받고는 더 욱 참회․예경한다.

(13) 아육왕이 사문 2만을 궁중에서 공양하다가, 단정이라는 사미가 모든 사문들을 다 갈아 먹고자 하는 흉악한 외도의 무 리를 신통력으로 항복시켜, 비구들의 제자로서 정법을 익혀 아 라한이 되는 것을 친견하고는 더욱 경신․감복한다.

(14) 그 게송한 비구가 아육왕을 제도하고 허공으로 날아간 뒤, 그 왕이 그 지옥에서 나오려 하니, 흉주가 가로 막고 죽이 려 하므로, 기지로써 흉인을 죽이고 지옥을 헐어 버린다.

(15) 아육왕이 신심을 더욱 높이고 도인을 만나 참회․면죄

(27)

의 방편으로 무수한 탑을 세우라는 훈계를 듣고, 왕사성의 불탑 중에서 꺼낸 사리와 용왕들에게 보시 받은 사리를 팔만사천개 의 보배상자에 나누어 그 사리탑을 세우려 준비한다.

(16) 아육왕이 야차들에게 한 사리씩 맡겨 탑을 만들게 하고 야사상좌의 신통한 방편으로 팔만사천탑을 온 세상에 동시에 세우니, 세간 사람이 경하하며 법아육왕이라 부른다.

○ 진단국․고려탑 이야기(협주 세문)

○ 월인천강지곡 제578-579곡

(17) 아육왕은 그 많은 탑을 세우고도 거기에 번을 달지 못 하여 발병하고, 위령에 지극 정성으로 발원하니, 팔만사천탑들 이 왕의 곁에 와 서서 차례로 왕의 번을 달고 돌아가매 그 병 이 낫아 12년을 더 산다.

(18) 아육왕은 그 탑을 세우고 환희 용약하여 군신과 함께 야사상좌를 통해서, 부처님의 수기를 받은 우바굴다존자를 찾아 그 1만 8천 비구와 함께 예배․찬탄하며, 존자의 설법을 듣고 정법을 부촉 받는다.

(19) 아육왕이 존자를 따라 부처님의 성지 륭빈림 탄생지와 부처님의 고행처, 두 여인이 우유죽을 바치던 곳과 용왕이 찬탄 하던 곳, 그 성도지와 최초설법처를 거쳐 열반지에 이르러 통곡 하기까지 각기 온갖 공양을 다하며 대탑을 세운다.

(20) 아육왕이 그 존자를 따라 부처님의 오대 제자 사리불탑 과 목건련탑에 이어 마하가섭탑, 박구라탑과 아란탑을 예방하여 각기 그 공덕을 들어 찬탄하고 무량 진보로 공양․예경한다.

○ 목건련이 신통력으로 용왕을 항복받은 이야기(협주 세문, 증 일아함경)

○ 부처님이 가섭에게 자리를 반분하여 앉히고 의발을 전한 이 야기(협주 세문)

(21) 아육왕은 다시 보리도량수 아래에 가서 여래가 무상정

(28)

등정각을 이룬 공덕으로 세상에 다시없는 보배로 공양하며, 왕 비의 교묘한 시험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어 환희하며 그 아래 에 서서 항상 응시․정진한다.

(22) 아육왕이 여래 현성 제자들 30만 비구에게 공양할 때, 가장 높은 보좌에 부처님을 직접 시봉하던 빈두로존자를 앉히 고 공경․예배하며, 그 존자가 친견한 부처님의 위용과 신통상, 존자의 장수 내력, 왕의 전세 수기담 등을 듣고 위없이 감격․

환희한다.

(23) 아육왕이 그 존자의 6만 아라한들에게 10만금으로 보시 하고, 나아가 일체 소유를 다 보시하며 무량한 향탕으로 보리수 를 씻기니, 그 나무가 배나 씩씩하여 군신이 다 환희한다.

(24) 아육왕이 야사상좌의 권청에 따라 일체 비구승의 상하 에 걸쳐 공양하는데, 각초로 놀이공을 만들어 노는 두 사미가 아라한과를 얻었다는 말에 더욱 하심해서 무량금 진보를 보시 하니 그 공덕이 그지없다.

(25) 아육왕은 그 아우 선용이 범지 외도에 기울어 바른 사 문들을 업신여기니, 신하들과 함께 기녀들을 부려 연극적 방편 을 통해서, 그가 참회․출가하여 무상도를 이루게 한다.

○ 월인천강지곡 제580-581곡

(26) 아육왕이 모든 비구에게 물어 급고독 장자가 억천금 보 시한 것이 가장 많다는 것을 알고 억백천금을 보시하려 서원하 니, 4억금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사방 제불께 예경하며 삼보에 보시하기를 태자에게 부촉하고 명종한다.

(27) 신하들은 태자로 왕위를 이으려 하니, 그 측근 대신이 왕의 보시 부촉을 실천할 태자라 하여 유보하고, 산하들이 4억 금을 태자에게 보내며, 그 아들 삼바제태자를 즉위시킨다.

○ 법익태자가 왕의 한 부인의 유혹․가해로 고행하다가 출가 한 이야기(원형적 아육왕전의 인용, 협주 세문)28)

(29)

이와 같이 이 작품의 내용은 풍성하고도 감동적으로 전개되 었다. 이 아육왕이 통일 제국의 제왕이요 전무후무한 숭불 영 웅으로서 최대의 발원을 세우고 무량․무비의 보시 공덕을 통 하여 장엄한 불국토를 건설하고 천하 만민과 함께 영원한 행복 을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전체 내용은 파란만장 한 우여곡절의 사건을 통하여 희대의 서사문맥으로 극대화되어 있는 터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세기적 장편서사시요, 불후의 드라마라고 하여 마땅할 것이다.

(2) 아육왕전 의 구조

이 아육왕전 은 아주 거대한 서사적 구조를 확보하고 있다.

우선 그 구조적 배경과 계통이 매우 거창하다. 인도의 정치사 는 물론 불교사 상에서 아육왕은 실로 거대한 행적을 보였다.

나아가 아육왕은 불멸 후 100년 경에 불교를 중흥시킨 숭불주 로서 불교문화사 상에서 찬연한 족적을 남겼다. 그러기에 인도 사에서는 광대한 통일제국의 영웅적 제왕으로 찬양․기록되었 고, 인도불교사에서는 숭불․보시로 불국토를 이룩한 절세의 숭 불주로 찬탄․기술되었다. 나아가 불교계에서는 아육왕의 찬연 한 행적이 신화화되고 다양한 경전 속에 등장하면서, 마침내 ≪ 阿育王傳≫이나 ≪阿育王經≫ 등으로 집대성되었다. 이어 후대 의 불교권에서도 그 행적을 불전식으로 기술하여 더욱 존숭하 게 되었다.

이러한 행적의 구조적 배경과 계보를 적절하게 계승․조정한 28) 이 부분은 월인석보 권25, 140장 a - 144장 a에 실려 있는데, 釋譜詳節 第二十三․二十四注解 24, 48․2 -53․2에서 쌍행 세자로 인용한 것이다.

(30)

아육왕전 은 거대한 서사적 구조로서 걸출한 면모를 갖추었 다. 첫째, 이 아육왕전 은 전기적 구조유형을 취하고 있다. 원 래 아육왕의 역사적 전기가 찬성된 것은 생전의 여러 기념물들 로 미루어 사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한 역사 적 전기가 오랜 세월 유전․보완되면서 신화화․전설화의 과정 을 거쳐 이른바 서사성을 갖춘 전기적 유형으로 정립되는 게 순리였다. 그리하여 이 아육왕전 이 그런 계보와 전통을 발전 적으로 계승하여 서사계의 전기적 유형을 갖추게 된 것은 당연 한 추세였다. 이러한 아육왕전 의 전기적 유형은 동방․한국 의 고전소설에 보이는 ‘전기적 유형’과29) 공질성을 유지하고 있 는 게 사실이다.

둘째, 이 아육왕전 은 설화적 구조유형을 보이고 있다. 이 아육왕전승은 역사적 전기로부터 불교적 신이․영험성과 더불 어 신화화의 과정을 밟았던 것이다. 이러한 신화적 구조가 자 연 전설화되거나 민담화되어 광포되기에 이른 것은 지극히 자 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러한 발전적 전승양상은 아육왕전승의 설화적 구조유형으로 파악되는 게 당연하다. 그러기에 이 아 육왕전 이 위 아육왕 전승의 계맥․전통을 발전적으로 수용․

조정하여 설화적 구조유형을 이룩한 것은 서사문학적 성취로 보아진다. 여기서 이 아육왕전 은 서사적 구조유형을 확보하 여, 이른바 ‘영웅의 일생’을30) 확보한 터라 하겠다.

셋째, 이 아육왕전 은 장편의 서사문학적 구조유형을 구비하 고 있다. 이로부터 아육왕전 은 문학적 기반 위에서 문학작품 으로 행세․평가되어야 마땅한 터다. 원래 이러한 서사문학적

29) 김열규, 민담과 이조소설의 전기적 유형 , 한국민속과 문학연구, 일조각, 1971, pp.94-95.

30) 조동일, 영웅의 일생, 그 문학사적 전개 , 동아문화연구 제10집, 서울 대학교, 1971, pp.77-8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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