退溪의 文學論**
1)
鄭 堯 一*
•目 次•
Ⅰ. 서 론
Ⅱ. 退溪의 문학론 1. 文學一般論
2. 詩歌論
Ⅲ. 결 론
Ⅰ. 서 론
퇴계 이황 선생(1501∼1570)의 높은 학문과 깊은 사상에 비추어 볼 때 그의 문학론을 논한다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하지만 퇴계의 문학론에 있어서도 그의 사상의 一端은 엿보인다고 하겠으며, 그의 문 학론을 통해서도 儒者로서의 퇴계의 학문적 志向과 문학관이 어떠했는 가 하는 점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시에 관한 이론을 포함하 는 문학 일반론과 시가를 논의의 대상으로 한 시가론 등의 문학론을 통 해서 그의 문학관을 논하는 본고를 시도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퇴계학 연구는 그 동안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특히 철 학사상․교육사상 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으며, 문학과 문학관에 대 한 연구는 그보다 많지는 못해도 이 또한 비교적 활발하게 행해져서 적 지 않은 성과를 보여 주었다. 문학과 문학관에 대한 그 기존 연구에 있
* 서강대 국문학과 교수.
** 단국대 퇴계학연구소 「퇴계학연구」 제4호, (1990) 게재논문.
어서 간혹 재고를 요하는 면도 없지는 않으나, 그간의 연구만 하더라도 퇴계의 문학과 문학관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1)
1) 退溪의 문학 및 문학관과 관련된 논저로서 참고가 될 만한 것을 일부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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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문학 및 문학관에 대한 기존 연구에 있어서는 歌辭․時調 등 국문시가에 대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2천 首가 넘는 것으로 알 려진 자료의 방대함에 비추어 볼 때 漢詩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 았는데,
2)
그것은 자료 해석상의 어려움 떄문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 리고 퇴계의 문학관 또는 시가관에 대한 연구가 또한 국문시가에 대한 연구에 비해서 부진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겠으 나, 최근에 와서는 점차 활기를 띠는 듯하다.본고는, 종래의 그와 같은 연구에서 얻어진 성과를 참고하면서 다소 필자 나름의 시각을 곁들여 퇴계의 문학론 곧 문학 일반론과 시가론에 나타난 문학관을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작품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문학관에 대한 논의는 본고에서 일단 논외의 문제로 남 겨 두고자 하기에, 본고의 논제와 논의의 대상을 ‘문학론’으로 한정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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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王甦(왕소) 교수의 ‘退溪詩統計簡表’에 의하면 退溪의 漢詩는 2,013 首이다.
王甦, 退溪詩學 (李章佑 譯)(退溪學硏究院, 1981) p.180 참조.
을 미리 밝혀 둔다. 그리고 문학론을 고찰함에 있어서도 문학론적 자료 가 될 만한 것을 모두 빠짐없이 논하지는 않으며, 다만 퇴계의 문학관 을 파악하기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자료는 거의 대부분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퇴계의 문학관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儒家의 전통적 문학 관을 이해하고자 하는 관점과 儒者로서의 선비정신에 바탕을 둔 학문적 志向 및 학문적 자세를 이해하고자 하는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무엇 보다도 중요하다. 그것은 퇴계가 특히 儒家思想을 바르게 계승한 철저 한 儒者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철저한 儒者로서의 문학과 문학론에서는 끊임없이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적극적인 현실관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修己治人의 학문적 과정을 중시하는 것으로도 나타나고, 겸양의 德으로도 나타나 며, 聖賢의 道를 따라 세상을 밝히고자 하는 聖道之學에 학문의 궁극 목표를 두는 점으로써도 확인되는데, 그것이 모두 儒者로서의 전통적인 선비정신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서 제대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선비정신에 바탕을 둔 문학관은, 가령 자연을 노래 할 경우에도 현실을 망각한 채 단순히 賞自然의 단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실을 염려하는 자세를 보여 준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음으로써 제대로 파악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儒者가 樂山樂水할 줄도 모르는 것은 결코 아니므로, 철저한 儒者라고 하더라도 때에 따라 서는 마음껏 자연을 노래할 수 있다는 점을 아울러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儒者야말로 인간 본성의 회복을 학문의 궁극 목 표로 삼는 자라는 관점에서 볼 때, 도덕 높은 철저한 儒者일수록 인간 의 본성을 가장 참되게 회복한 자로서 자연물 곧 대상의 참모습을 제대 로 파악할 수 있었으리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삶의 이치와 자연의 이 치가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을 노래하는 것과 인생을 노래하는 것이 결코 동떨어진 것일 수만은 없다. 따라서 儒者들이 자연을 노래하 다가 인생 또는 현실을 노래한다거나 자연을 노래하는 가운데 인생 또
는 현실을 동시에 노래한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 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종래의 연구에서 간혹 유학자의 詩歌를 논하면서, 자연을 대할 때에는 마음껏 자연만을 노래할 줄 모르고 현실에 연연해 하거나 현실과 양다리를 걸치려고 하였다는 식의 비판을 행한 것을 볼 수 있는 데, 그것은 참된 儒者로서의 자세 곧 선비정신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유학자의 시가에서 도덕적 또는 교훈적 내용의 충실성을 보인 것을 생경하다거나 시적 형상화가 되어 있지 않은 일정한 한계성을 지니는 것이라고 비판한 것을 보게 되는데, 생경한가 그리고 시적 형상화가 되어 있지 않은가의 여부는 좀더 엄밀 한 고찰이 필요하리라고 생각되며, 내용의 충실성을 기하고자 한 결과 에 대해 그 내용의 참맛을 얼마나 충실히 이해하고자 하는가에 따라 다 소 그와 같은 느낌을 받게 될는지도 모르겠으나, 겉꾸밈에만 힘쓰기보 다는 알찬 내용을 중시하는 것이 본래 儒家의 문학관이었다는 것을 이 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출발해야 儒者로서의 퇴계의 문 학과 문학관을 바르게 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우선 문 학관의 이해에 특히 도움되는 문학론을 논하게 된 것이다. 퇴계의 문학 을 고찰하기에 앞서 우선 그의 문학론부터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Ⅱ. 退溪의 문학론
1. 文學一般論
2,013 首나 되는 漢詩와 時調․歌辭 등 적지 않은 국문시가를 남긴 것을 보더라도, 퇴계가 시 또는 시가 짓기를 좋아하고 문학은 물론 문 예를 도외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족히 짐작할 수 있다.
퇴도선생언행통록 (退陶先生言行通錄)의 기록에 의하면 퇴계는 시
짓기를 좋아하여 평소에 시 짓는 데 功을 많이 들였다고 한다.
3)
따라 서 선생은 “시가 학자에게 있어서 가장 緊切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경 치를 만나고 興을 만나게 되면 시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4)
라고 한 바 있다. 여기서, 시가 학자에게 있어서 가장 긴절한 일은 아니라고 한 것 은, 선비 본래의 뜻, 다시 말해서 선비의 학문적 궁극 목표는 시 짓는 일 또는 좋은 시를 짓는 일이거나 시를 많이 짓는 일일 수 없으며, 현 실을 바로잡고 세상을 밝히는 일, 그러기 위해서는 실천적인 학문을 통 해 聖賢이 보여 준 길을 따르는 聖道之學의 달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 하지만 퇴계는 그와 같은 선비정신의 바탕 위에 情景과 흥취를 표현해 내는 데 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 기에, 기왕 시를 짓기로 한 바에는 功을 많이 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퇴계는 이와 같이 문학은 물론 문예를 배격하지 않으면서도 문학이나 문예에만 전념하는 태도는 참된 선비의 자세가 아니라는 문학관을 분명 히 제시하였으니, 이는 선생에 관한 기록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으 며, 바로 先儒들의 전통적인 문학관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제자 月川 趙穆이 말씀드리기를, “心行이 바름을 얻지 못하면 비록 문학이 있다 한들 무엇에 쓰겠습니까?” 하였더니, 선생은 “문학을 어찌 가히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글을 배우는 것은 마음을 바로잡기 위 한 것이니, 이 또한 논어 (論語) 首篇의 註에서 朱夫子가 아우나 자식 된 사람의 직분을 논한 뜻과 같은 것이다.”라고 한 바 있다.
5)
시경 시 (詩經詩)도 문학이요, 聖人之書가 모두 문학과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 아닌 이상, 퇴계가 문학을 배격할 리 없었던 것이다. 한편 위의 문답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퇴계의 문학관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문장을 짓는 데 있어서 마음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실속을 보여 주어3) 退陶先生言行通錄 卷之五, “先生喜爲詩, 平生用功甚多.”
4) 上同, “詩於學者, 最非緊切, 然遇景値興, 不可無詩矣.”
5) 上同, 卷之二, “余因率爾而對曰, 心行不得正, 雖有文學, 何用焉. 先生曰, 文學 豈可忽哉. 學文所以正心也, 是亦論語首篇註朱夫子論弟子職之意也.”
야 한다는 것으로 뒤집어 해석할 수 있는 점이라고 하겠다.
논어 (論語), 「학이」편(「學而」篇), ‘제자’장(‘弟子’章)에 대한 註에서 朱子는 “行有餘力, 則以學文.”이라고 한 孔子의 말씀에 대해서 “文은 詩
․書 등 六藝의 文을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程子는 “아우나 자식의 직분을 다하되 힘이 남음이 있으면 글을 배우는 것이니, 그 직 분을 닦지 않고 글공부를 앞세우게 되면 爲己之學이 되지 못한다.”고 하 였다. 그리고 尹氏는 “덕행은 근본이요, 문예는 末이니, 그 本末을 窮究 하여 먼저 하고 나중에 할 바를 안다면, 가히 德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6)
孔子의 말씀을 비롯하여 이와 같은 先儒들 의 말씀에 나타난 사상과 퇴계의 사상은 일치하는 것이었으니, 이는 바 로 글공부만을 앞세우는 태도로는 진정으로 제 몸을 위하는 학문적 자 세가 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덕행을 닦아 나가는 일을 근본으로 삼 지 않으면 안된다는 관점, 그리고 또 글공부와 문학은 물론 문예도 소 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지만 덕행과 문예에 있어서는 어느것이 근본이 되고 末에 해당되는지 本末의 분별을 분명히 해서 행하지 않으면 안된 다는 관점 그것이었다.문학을 소홀히 여길 수 없다고 한 퇴계로서도 문예의 공교로움을 추 구하는 태도는 배격하였으며, 과거 급제에만 매달리는 시속의 학풍을 개탄하였으니, 그것은 참된 선비의 자세와 학문의 바른 길을 제시하자 는 뜻에서였다. 퇴계선생언행록 (退溪先生言行錄), 「논과거지폐」(論科 擧之弊)의 기록을 보면, 퇴계는 “儒家의 意味는 스스로 분별되는 것이 니, 문예에 공교로은 사람은 선비가 아니며 과거에 급제함을 取하는 사 람은 선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세상의 허다한 英才가 세 속적 학문[俗學]에 빠져들고 있으니, 다시 어떤 심한 이[俗學에 물들지 않는 사람]가 있어서 이 과거의 구덩이를 헤쳐 벗어날 수 있겠는가?”
6) 論語 , 「學而」篇의 朱子註, “文, 謂詩書六藝之文.” 위의 「學而」篇 集註, “程子 曰, 爲弟子之職, 力有餘則學文, 不修其職而先文, 非爲己之學也.” “尹氏曰, 德行, 本也, 文藝, 末也, 窮其本末, 知所先後, 可以入德矣.”
하였다.
7)
이로써 보자면, 퇴계가 문학 또는 문예를 부정한 것으로 오해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문학에 대한 전적인 긍정은 하지 않은 것으로 자칫 오해 하기 쉽다. 그러나 앞서 제자 趙穆과의 문답을 통해서 확인하였듯이 퇴 계는 문학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그리 고 문예 또한 末藝라고 해서 쉽게 여길 수는 없다는 관점을 보인, 다음 과 같은 기록으로써도 문예를 부정하지 않은 퇴계의 문학관을 넉넉히 짐작할 만하다.
퇴계는 「여정자정탁」(與鄭子精琢)에서 “무릇 시가 末技이기는 해도 性情에 근본을 두는 것이며, 體와 格이 있어 진실로 쉽게 여겨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8)
라고 하였다. 많은 시를 남긴 퇴계로서도 아무리 시 짓기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이처럼 시가 末技라는 논리는 부정할 수 없었으니, 그것은 先代로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문학관의 계승에 의 한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고 할 것이다.9)
그러나 퇴계는, 이 구절과7) 退溪先生言行錄 卷之五, 「論科擧之弊」, “儒家意味自別, 工文藝, 非儒也, 取科 第, 非儒也, 世間許多英才, 混汨俗學, 更有甚人, 能擺脫得此科臼耶.”
8) 退溪先生文集內集 卷之三十五, 「與鄭子精琢」, “夫詩雖末技, 本於性情, 有體有 格, 誠不可易而爲之.”
9) 杜甫는 「貽華陽柳少府」라는 시에서 “文章一小技, 於道未爲尊.”이라고 하여, 문 장은 하나의 ‘작은 솜씨’라서 道에 있어서 높은 것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淸
․仇兆鰲 輯註, 杜詩詳註 卷之十五 참조). 鮮初의 梅月堂도 「戱爲」라는 시에 서 “文章於道未爲尊, 三百餘篇學孔門.”이라고 하여, 杜甫와 같은 뜻에서 문장이 道에 있어서 높은 것이 될 수 없음을 밝혔다.( 梅月堂全集原集 , 梅月堂詩集 卷之四, 文章, 「戱爲」 참조). 또 徐居正은 東人詩話 卷下에서 “詩者, 小技.”
라고 하였으며, 金宗直은 「永嘉連魁集序」에서 “文章, 小技也, 而詩賦, 尤文章之 靡者也.”라고 하여, 시를 ‘작은 솜씨’라고 하거나, 혹은 문장을 ‘작은 솜씨’라고 하고 나서 詩․賦는 문장 가운데서도 더욱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
( 佔畢齋文集 卷之一, 「永嘉連魁集序」 참조).
이와 같이 문장 또는 시를 道에 견주어 ‘小技’라고 하거나 시를 ‘末技’라고 하 고 문예를 ‘末藝’라고 한 것은, 그 모두 經綸之道 또는 聖道之學에 견주어 문장
․시 또는 문예를 ‘작은 솜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해 온 儒家의 전통적 인 문학관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退溪의 위와 같은 이론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논한 바 평소에 시 짓는 데 功을 많이 들였다는 기록으로써도 알 수 있듯이, 시 짓는 일을 쉽게 여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시에는 體와 格이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시 짓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며, 특히 시라는 것이 性情에 바탕을 두는 것이라는 의식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가 “문예에 공교로운 사람은 선비가 아니며 과거에 급제함을 取하는 사람은 선비가 아니다.”라고 한 까닭은 무엇인 가? 선비가 문예에만 치중해서는 선비 본래의 뜻과 선비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과거 급제를 위해서 經學의 겉핥기 에만 급급하거나 문예의 공교로움에만 치중하려 하는 것이 모두 권세와 利慾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릇된 시속에 휩쓸려 참된 선비로서의 선비 본래의 뜻을 망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경 (書經)에 “玩人喪德, 玩物喪志.”
10)
라고 하였는데, “器物을 가지 고 희롱거리를 삼게 되면 선비 본래의 참된 의지를 잃게 된다.”는 뜻을 말한 그 ‘玩物喪志’야말로 문예의 공교로움에 치증하는 태도에 대해 좋 은 경계가 되는 말이다. 宋代의 程伊川이 “ 서경 (書經)에 玩物喪志라 하였으니, 글 짓는 일 또한 玩物이니라.”11)
라고 한 것도 글 짓는 데에 만 전념하는 태도를 경계한 말이며, 조선 시대에 퇴계보다 앞서 花潭 徐敬德이 「송심교수의서」(送沈敎授義序)에서 “시는 性情을 즐겁게 하는 것이지만, 오직 그 뜻을 잃지 않는 데 있다.”12)
고 한 것 또한, 性情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시를 짓는다지만 문예의 공교로움에 치중하여 선비 본래의 참뜻을 잃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임을 경계한 말이다. 그리고 퇴계와 같은 시대의 학자 南冥 曺植도 「답성청송서」(答成聽松書)에서, 시 짓는 일을 ‘玩物喪志’하기 쉬운 것으로 보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10) 書經 , 周書, 「旅獒」篇.
11) 二程全書 , 伊川先生語錄 卷十八, “問作文害道否. 曰, 害也, … 書曰玩物喪 志, 爲文亦玩物也.”
12) 花潭先生文集 卷之二, 「送沈敎授義序」, “詩可以娛情性, 惟在勿喪其志.”
“일찍이 생각하기로는, 시를 읊는 일이 玩物喪志하기 쉬운 일일 뿐 아 니라 나에게 교만한 죄를 한없이 더해 주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시를 읊조리는 일을 그만둔 지가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13)
이와 같은 역대 여러 학자의 說이, 문예의 공교로움에 치중하는 것은 선비다운 자세가 아니라는 퇴계의 말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되는 儒家의 전통적인 문학관을 반영해 주는 것이며, 학문에 있어서의 本末․輕重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데서 나온 말이라고 할 것이다.
퇴계가 그와 같이 문예의 공교로움에 전념하는 태도는 배격했을지라 도 문장이나 문학은 물론 문예를 배격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학자 로서 문장을 지을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말은 생각을 분명히 전하자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학자로서 문장을 알지 못해서는 안될 것이니, 만약 문장을 알지 못하게 되면, 비록 文字 를 다소 안다 해도 생각을 말로 나타낼 수 없을 것이다.”14)
퇴계는 이와 같이 뜻을 충실하게 나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학자 로서는 문장 표현의 방법을 학습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 효과적인 문장 표현법이란 바로 ‘문예’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퇴계 는 문예의 필요성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앞서 인용한 것처럼 “문예에 공교로운 사람은 선비가 아니다.”라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문예에 만 치중하다가 선비 본래의 참뜻을 잃게 되지 않을까 경계하고자 하는 관점에서였다.
문예가 末藝 또는 末技에 해당된다는 것은 세상을 바로잡고 밝히는 經綸之道 또는 聖道之學을 학문의 궁극 목표로 삼아 학문을 해 온 儒家 13) 南冥先生文集 卷之二, 「答成聽松書」, “嘗以哦詩, 非但玩物喪志之尤物, 於植每
增無限驕傲之罪, 用是廢閣諷詠, 近出數十載.”
14) 退陶先生言行通錄 卷之五, “辭, 達意而已, 然學者, 不可不解文章, 若不解文 章, 雖知文字, 未能達意於言辭.”
의 전통적인 문학관이었다. 따라서 문장 가운데서도 대수롭지 않은 것 으로 여겨져 온 詩를 말하여 儒家에서는, 퇴계의 말로써 확인할 수 있 듯이, 학자에게 있어서 가장 긴절한 일은 아니라고 하거나,
15)
栗谷의「정언묘선서」(精言玅選序)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詩가 학자의 能事는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16)
또 茶山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시양아」(示兩兒)에서 “詩가 요긴한 일은 아니다.”
17)
라고 한 말로써도 그러한 儒家의 문학관은 확인된다.퇴계는 문장을 짓거나 말하는 데 있어서도 희롱하거나 외설된 표현을 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있어, 楊貴妃[太眞]가 臨邛道士 를 보내어 唐나라 天子[玄宗]에게 還報하는 내용의 시를 지어다가 퇴계 에게 評을 해 달라고 하자, 그는 답하여 말하기를, “楊太眞의 일은 白樂 天이 처음에 본보기를 만들었고,(우리 나라에서는) 魚無迹이 極口 퍼뜨 렸으니, 대장부의 입으로 어찌 그다지도 음란하고 醜한 말을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18)
라고 하였다 한다. 이것은 글을 짓거나 글을 배우는 것 이 모두 마음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는 퇴계 자신의 논리에 그대로 부 합되는 것이라고 하겠다.19)
희롱하거나 외설된 표현을 하는 것은 높은 道에 뜻을 둔 참된 선비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퇴계는 그와 같은 견해를 피력했던 것이다.2. 詩歌論
퇴계의 시가론은 앞의 ‘文學一般論’에서 논한 시에 관한 이론으로써도 이미 어느 정도는 논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도산십
15) 註 4) 참조.
16) 栗谷全書 卷之十三, 「精言玅選序」 참조. “詩雖非學者能事, ∼”
17) 與猶堂全書 , 第一集, 第二十一卷, 「示兩兒」, “詩非要務.”
18) 退陶先生言行通錄 卷之五, “先生, 雖文字言語之間, 未嘗爲戱褻之語, 人有作太 眞送臨邛道士還報唐天子詩, 欲課之, 先生批曰, 太眞之事, 白樂天始作俑, 魚無 迹極鋪張之, 大丈夫口中, 豈可狀出淫醜之語也.”
19) 註 5) 참조.
이곡발」(陶山十二曲跋)․「서어보가후」(書漁父歌後) 등의 국문시가론에 나타난 문학관을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퇴계의 詩歌 일반에 대한 인 식과 국문시가에 대한 인식,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의 선비정신 또는 사 상의 一端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퇴계는 「도산십이곡발」(陶山十二曲跋)에서 우리말 노래에 대해 논하 면서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짓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위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이란 것은 陶山老人이 지은 것이다. 노 인이 이를 지은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우리 동방의 가곡은 대체로 음란하여 족히 말할 것이 못된다. 이를테면 「한림별곡」(翰林別曲)과 같 은 류는 文人의 입에서 나왔으나, 호걸스러움을 자랑하여 방탕하며, 아 울러 무례하고 거만하고 희롱하고 친압한 것으로, 더욱이 君子로서 마 땅히 숭상할 바가 아니다. 오직 근세에 이별(李鼈)의 「육가」(六歌)란 것이 세상에 널리 전해지는데, 오히려 그것이 이것[「한림별곡」(翰林別 曲)]보다 좋다고는 하나 또한 세상을 놀리는 不恭스런 뜻이 있고 溫柔 敦厚20)한 실속이 적은 것이 애석하도다. 노인이 본디 음률을 알지 못 하나, 오히려 세속의 음악을 듣기 싫어할 줄은 알아서 한가히 지내며 병을 고치는 여가에 무릇 性情에 감동된 것이 있으면 매양 시로 표현해 내지만, 그러나 지금의 시는 옛날의 시와는 달라서 가히 읊을 수는 있 어도 노래할 수는 없다. 만약 노래할 수 있도록 하자면 반드시 時俗의 말[우리말]로 엮어야 하니, 대개 나라 풍속의 음절이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李氏의 노래를 간략히 모방해 지어서
「도산육곡」(陶山六曲)을 만든 것이 둘이니, 그 하나는 뜻을 말한 것이 요, 다른 하나는 학문을 말한 것으로, 아이들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익혀 노래하게 하고 의자에 기대어 듣게 하며,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하며 스스로 춤추고 뛰게 하고자 함이거늘, 행여 비루한 마 음을 씻어내어 감발되고 녹아 소통되게 한다면, 노래하는 자와 듣는 자 가 서로 유익하게 됨이 없지 않을 것이다.”21)
20) ‘溫柔’는 “성품이 따스하고 부드럽다.”는 뜻이며, ‘敦厚’는 “인정이 두텁고 두텁 다.”는 뜻이다.
21) 退溪先生文集 卷之四十三, 「陶山十二曲跋」, “右陶山十二曲者, 陶山老人之所作 也. 老人之作此, 何爲也哉. 吾東方歌曲, 大抵多淫哇不足言, 如翰林別曲之類, 出
퇴계는 우리의 가곡이 대체로 음란하여 즐겨 노래 부를 만한 것이 별 로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배우는 아이들로 하여금 날마다 익혀 노래 부르게 함으로써 학문을 하는 즐거움도 깨닫게 하고 모르는 사이에 비 루한 마음을 썻어내어 性情을 순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몸소 「도 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짓게 되었던 것이다.
위의 글로 미루어 볼 때 퇴계는 시가의 효용성으로서 性情을 순화할 만한 溫柔敦厚한 실속을 특히 중요시하였다고 하겠는데, 이러한 문학관 은 孔子의 遺訓을 따른 것이라고 판단된다.
22)
퇴계가 방탕하고 무례하 고 거만한 내용의 「한림별곡」(翰林別曲)을 배척한 것은 물론, 그보다는 나은 것으로 본 李鼈의 「육가」(六歌)마저도 溫柔敦厚한 실속이 적은 것 을 애석하게 여긴 것도, 바로 그러한 문학관에서 까닭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한편 퇴계는 시가의 가창적 효과를 매우 중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에 나타난 溫柔敦厚한 실속도 직접 소리내어 노래 부르는 가운데서 한층 쉽게 체득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당대에 시[漢 詩]가 이미 가창적 기능을 거의 상실하였다는 점에서 , 그리고 우리말 [俚俗之語] 노래야말로 우리의 정서를 순화하고 감동을 주기에 가장 적 합하다는 관점에서 그는 참된 우리말 노래의 필요성을 더욱더 절감했던 것이며, 당시에 참된 우리말 노래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李鼈의 「육가」
(六歌)의 형식을 모방하여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의 창작을 시도하
於文人之口, 而矜豪放蕩, 兼以褻慢戱狎, 尤非君子所宜尙, 惟近世有李鼈六歌者, 世所盛傳, 猶爲彼善於此, 亦惜乎其有玩世不恭之意, 而少溫柔敦厚之實也. 老人 素不解音律, 而猶知厭聞世俗之樂, 閑居養疾之餘, 凡有感於情性者, 每發於詩, 然今之詩, 異於古之詩, 可詠而不可歌也, 如欲歌之, 必綴以俚俗之語, 蓋國俗音 節所不得不然也, 故嘗略倣李歌而作, 爲陶山六曲者二焉, 其一言志, 其二言學, 欲使兒輩朝夕習而歌之, 憑几而聽之, 亦令兒輩自歌而自舞蹈之, 庶幾可以蕩滌鄙 吝, 感發融通, 而歌者與聽者, 不能無交有益焉.”
22) 禮記 , 「經解」篇에는 “孔子曰, 入其國, 其敎可知也, 其爲人也, 溫柔敦厚, 詩敎 也.”라는 기록이 있다. “그 나라에 들어가 보면 그 교화된 정도를 가히 알 만하 니, 그 사람됨이 溫柔敦厚한 것은 시로써 교화된 까닭”이라는 孔子 말씀을 기 록한 것이다.
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도, 퇴계가 「한림별곡」(翰林別曲)에 혹평을 가하고 李鼈의 「육가」(六歌)에 대해서도 善評을 하지 않은 것 은, 그것들이 국문시가라는 이유에서는 결코 아니었으며, 그 모두 작품 의 내용을 도덕적인 측면에서 평한 결과일 뿐이라는 점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은 그에 나타난 ‘樂中有憂’ ‘憂中有樂’의 의 미로도 파악될 수 있듯이,
23)
학문을 하는 즐거움 속에서도 聖賢의 도 道를 따르기 어렵다는 데서 생기는 근심과 그러한 근심 속에서도 끊임 없이 聖賢의 道를 따르고자 하는 학문의 즐거움이 노래된 것이다. 그러 한 내용이 바로 ‘溫柔敦厚한 실속’에 부합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그리고 퇴계는 그러한 내용이 가창적 효과를 충실히 거둘 수 있기를 꾀 하여 그것을 우리말 노래로 엮어내게 되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의 前後六曲은 각각 ‘言志’와 ‘言學’으로 그 내용이 크게 구분되는 것임을 밝혔는데, 그 구분 자체가 반드시 중요하 지는 않을 것이다. 그 중 前六曲의 ‘其五’에서는 山水를 즐기는 가운데 갈매기가 날아오고 가는 것이 노래되었으며, 또 그 때 결백한 ‘교교백구 (皎皎白駒)가 멀리 마음을 두는 것이 노래되었다. 즐거움 가운데에도 근심이 있다는 뜻이니,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樂中有憂’ ‘憂中有樂’으 로 대변될 수 있는 詩想이다. ‘학문의 줄거움’과 聖賢의 道를 따르기 어 려운 데서 생기는 ‘학문의 근심’ 바로 그것이다. 이는 또한 脫俗의 자연 속에서도 선비로서의 작자가 현실을 잊지 못하는 것을 보여 준 것으로 서, 자연관이 바로 현실관과 동떨어진 것일 수 없다는 점을 입증해 준 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중 後六曲의 ‘其六’에서는, 사람으로서의 기본적 인 道理를 愚夫도 알아서 행할 수 있으나 그 지극한 도리에 대해서는 聖人도 어렵게 여긴다는 뜻에서, 실천적인 학문의 즐거움과 근심 곧 求 道의 즐거움과 근심, 다시 말해서 聖賢의 道를 따르고자 하는 실천적
23) “憂中有樂, 樂中有憂.”라는 구절은 원래 陶山及門諸賢錄 의 卷首에 수록된 退 溪 先生의 「自銘」이라는 시에서 쓰인 말이다.
학문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수행해 나가는 데서 오는 즐거움과 함 께 그 학문의 어려움을 절감함으로써 한 평생 간직하지 않을 수 없는 君子의 終身之憂가 노래되었다. 이와 같은 내용에 담긴 시정신이 그대 로 퇴계의 문학관을 잘 반영해 준다.
퇴계의 시가관을 살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시가론적 자료 「서어보가 후」(書漁父歌後)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歌詞[「어보가」(漁父歌)]와 「상화점」(霜花店) 등 여러 曲이 그 가운 데 뒤섞여 실려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저 노래[「상화점」(霜花店)]를 들으면 손으로 춤추고 발로 뛰는데, 이 노래를 들으면 권태로워하면서 졸음을 느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만한 사람이 아니면 진실로 그 音을 알지 못하니, 또 어찌 그 樂을 알 수 있겠는가?”24)
위의 글은 퇴계가 「상화점」(霜花店) 등 몇몇 俗樂[우리 樂歌]이 그 歌詞의 내용이 외설되거나 음란하거나 하여 참된 음악이 되지 못하는 데 반해 朴浚이 새로 편찬한 歌集에 수록된 「어보가」(漁父歌)의 歌詞 내용이 좋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세속의 사람들은 「상화점」(霜花店) 등의 노래 듣기를 좋아하고 「어보가」(漁父 歌) 듣기를 권태롭게 여기는 것을 퇴계는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세속 사람들의 음악에 대한 그릇된 인식은, 그만한 사람[도리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음악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퇴계 평소의 시가관 을 퇴계로 하여금 더욱 확신하게 하고, 따라서 당시의 그 음악적 현실 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오직 君子라야 진정으로 능히 음악을 알 수 있다는 퇴계의 이같은 시가관은, 예기 (禮記)의 「악기」
(樂記)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구절에도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퇴 계의 위의 이론은 그 전통적인 儒家의 시가관을 철저히 계승하여 그와
24) 退溪先生文集 卷之四十三, 「書漁父歌後」, “此詞與霜花店諸曲, 混載其中, 然人 之聽之於彼則手舞足蹈, 於此則倦而思睡者, 何哉. 非其人, 固不知其音, 又焉知 其樂乎.”
일치하는 시가관을 보여 준 것이라고 하겠다.
“무릇 音이란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요, 樂은 윤리에 통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소리[聲]를 알면서도 音을 알지 못하는 것은 禽獸가 바로 그것이요, 音을 알면서도 樂을 알지 못하는 것은 뭇 서민 이 바로 그것이며, 오직 君子라야 능히 樂을 아는 사람이 되니, 이런 까닭에 소리를 살펴 音을 알게 되고 音을 살펴 樂을 알게 되며 樂을 살 펴 정치를 알게 된다면, 다스리는 도리가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런 까닭에 소리를 알지 못하는 자와는 더불어 音을 말할 수 없으며 音 을 알지 못하는 자와는 더불어 樂을 말할 수 없으니, 樂을 알게 된다면 禮에 가까워지리라.”25)
소리[聲]라고 해서 모두 音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音이라고 해서 모두 樂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君子라야 능히 樂을 알 수 있다.”
고 하였는데, 이 때의 “樂을 안다.”는 말은 진정한 樂을 구별할 줄 안다 는 말이다.
「서어보가후」(書漁父歌後)에서 퇴계는, 풍속이 바로잡혀야 음악이 바 로잡히고 음악이 바로잡혀야 풍속이 바로잡힌다는 관점에서 자신의 뜻 과 같지 못한 시속을 개탄하면서 漁父歌集의 간행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했던 것이다.
Ⅲ. 결 론
많은 漢詩와 적지 않은 국문시가를 남긴 퇴계는, 시 또는 詩歌 짓기 를 좋아한 것으로 보더라도, 문학은 물론 문예를 결코 도외시하지 않았
25) 禮記 , 「樂記」, “凡音者, 生於人心者也, 樂者, 通倫理者也, 是故知聲而 不知音者, 禽獸是也, 知音而不知樂者, 衆庶是也, 唯君子, 爲能知樂, 是故 審聲以知音, 審音以知樂, 審樂以知政, 而治道備矣, 是故不知聲者, 不可 與言音, 不知音者, 不可與言樂, 知樂, 則幾於禮矣.”
다. 하지만 퇴계는 시가 학자에게 긴절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經 綸之道 또는 聖道之學을 추구하는 참된 선비의 길에 견주자면 문예에 능한 것이 ‘末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퇴계는 문예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문예에 공교로운 사람은 선비가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퇴계는 글 배우는 것이 마음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러므로 외설되거나 음란한 내용을 담은 「장한가」(長恨歌), 외설되고 음 란하며 거만하고 방탕무례한 내용의 「한림별곡」(翰林別曲)에 대해 혹평 을 가했던 것이다.
퇴계는, 「도산십이곡발」(陶山十二曲跋)에서 밝힌 바와 같이, 듣는 사 람의 마음을 바른 데로 이끌 수 있는 溫柔敦厚한 노래가 참된 노래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俚語’로 된 노래 곧 우리말 노래라야 우리 나라 사람 으로서는 노래 부르기 알맞다는 것을 절실히 인식하였으니, 그것은 또 한 우리 역대 많은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기도 하였다.
퇴계는 詩歌 작품에서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동시에 현실과 인생을 노 래하였다. 그것은, 자연을 노래함이 단순히 賞自然의 단계에만 그쳐서 도 안될 것이기에, 賞自然의 즐거움 가운데서도 언제나 현실을 염려한 까닭이며, 또한 聖賢의 道를 따르고자 하는 학문의 어려움을 절실히 느 끼는 데서 오는 근심과 그 학문의 즐거움이 ‘樂中有憂’ ‘憂中有樂’의 情 緖로 나타나게 된 까닭이다.
퇴계는 「서어보가후」(書漁父歌後)에서, 세속 사람들이 오히려 외설되 고 음란한 노래는 좋아하고 참된 노래는 멀리하는 것을 개탄하면서 풍 속을 염려하였다. 그리고 君子라야 진정으로 참된 음악을 알아볼 수 있 다는 평소의 시가관을 다시금 스스로 확인하면서 시속과 시속의 음악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君子를 은연중 갈망하였다. 그러한 君子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바로 퇴계 자신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는 존재라 고 할 것이다.
퇴계의 문학론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 그의 이와 같은 문학관은, 철저한 儒者로서 전통적인 儒家의 문학관을 바르게 계승한 것이었으며,
참된 선비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본고에서는 퇴계의 漢詩와 국문시가 작품 등 많은 문학작품을 통해 서 살펴볼 수 있는 그의 문학관 또는 문학사상을 아울러 고찰하지 못 했다. 그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더 시간 여유를 두고 깊이 考究할 필요 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