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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Change of NaInGaGa(Female Space) at the Royal Tomb in the Lat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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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1588-1141(Print) http://dx.doi.org/10.7738/JAH.2012.21.5.007

조선후기 산릉의 여성공간,

나인가가(內人假家)의 변화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hange of NaInGaGa(Female Space) at the Royal Tomb in the Late Joseon Dynasty

신 지 혜*1) Shin, Ji-Hye (공학박사, Ph.D.)

Abstract

On behalf of the royal women,

SangGung

(尙宮:The head of female servants in the palace) and

NaIn

s(內人:

Female servants caring for royal families in the palace) were dispatched in order to attend a funeral at the royal tomb. The

NaInGaGa

(內人假家) is the temporary building for

SangGung

and NaIns in the royal tomb. It is comprised of lodgings for them and also workrooms and warehouses to prepare ritual offering for the dead King or Queen.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NaInGaGa

was utilized until a funeral at the royal tomb. Since 1674,

NaInGaGa

for the 3 years-period lamentation was started constructing separately. At these processes, the plan and placement of

NaInGaGa

was changed.

This study based on the

SanReungDoGam-EuiGwae

(山陵都監-儀軌: The report on constructing royal tomb).

The

SanReungDoGam-EuiGwae

written since 1800 have illustration about

NaInGaGa

. The illustration and explanation about

NaInGaGa

become a important clue that make suppose detailed space of

NaInGaGa

.

주제어 : 조선왕릉, 산릉, 나인가가, 가재실, 빈전, 혼전, 국조상례보편

Keywords: The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SukJong, YeongJo, SanReungDoGam-EuiGwae

1. 서 론

본 연구는 산릉에서 장례 및 삼년상에 참여하는 여성 들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된 나인가가의 사용기간과 규모 등을 살펴보고, 조선후기 국가상례에서 왕실여성1)들의 역할과 의례의 변화에 따라 건축공간의 변화가 이루어졌 음을 논증하기 위한 것이다.

최근 산릉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통해 최초 조성시점 부터 의례의 단계에 따라 다양한 공간이 마련되었음을

* Corresponding Author : [email protected]

이 연구는 2007년도 정부(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과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기초연구사업임

과제번호: No.R01-2007-000-20464-1

1) 왕실여성: 대비와 왕비, 세자빈을 포함하여 내명부와 외명부를 모두 포함한다.

인식하게 되었다. 장례의식을 위한 영악전(靈幄殿), 길유 궁, 나인가가(內人假家)와 이를 휘장으로 둘러싸 시선차 단과 영역성을 강화한 유문(帷門)이 설치되었으며, 삼년 상을 위한 가정자각(假丁字閣), 가재실(假齋室)등이 조성 되었다. 삼년간의 상례가 끝나면 신주를 종묘에 안치한 다. 이때부터 종묘에서와 같이 산릉에서도 길례를 설행 하게 된다. 정자각과 재실 등은 길례의 공간으로 활용된 것이다.

산릉에서는 유난히 임시건물인 가가(假家)형태의 공간 이 많이 활용되었다. 장례식과 삼년상례 기간에 수많은 의례 및 보조공간이 필요하지만, 만 3년의 기간이 끝나 면 철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 주제로 선택한 나인가가는 건물의 이름에 서 드러나듯 가가 형태의 임시건물이며 만 3년간 사용하 고 철거되었다. 산릉에서 상례기간에 활용되는 의례의

(2)

중심건물인 영악전이나 가정자각과 삼년상동안 산릉을 지키는 수·시릉관을 위한 가재실도 일종의 가가2)인 셈이 다.

임시건물이었던 ‘나인가가’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은 산릉조성과정을 기록한 의궤 중에서 19세기 이후의 산릉 도감의궤에 ‘나인가가간가도(內人假家間架圖)’라는 이름 으로 평면도 형태의 그림을 수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통해 산릉에 ‘나인가가’를 지었다는 것은 인식되 었으나,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가 하는 등의 연구는 이 루어지지 않았다. 2003년에 우동선은 조선시대 활용된 여러 유형의 가가를 소개하는 중에 산릉에 건립된 ‘나인 가가’를 언급하며, ‘나인가가간가도’를 수록하기도 하였 다.3)

산릉도감의궤에 꽤 상세하게 갖추어진 간가도를 싣고 있는 ‘나인가가’라는 건물에는 여러 의문점이 있다.

첫 번째 풀어갈 문제는 산릉에 나인가가를 조성하게 되는 배경이다. ‘나인가가’는 ‘나인’이라는 사용자와 ‘가가’

라는 건축형태를 나타내는 단어로 조합된 건물명이다.

산릉에 조성된 유일한 여성공간인 것이다. 산릉에 궁궐 여성의 공간이 필요한 이유를 밝힘으로써 나인가가의 용 도를 인식할 수 있다.

두 번째 문제는 언제부터 나인가가를 조성했으며, ‘나 인가가간가도’와 같은 건물구성을 갖게 된 시점과 계기 를 밝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19세기 이후의 ‘나인가가간가도’를 분석하여

‘나인가가’의 기본형태를 파악하여 궁궐의 여성이 산릉에 서 행하는 역할에 따라 형성된 건물의 특성을 밝히는 것 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 본 논문에서는 현재 남겨진 산릉도감의궤를 바탕으로 각 시기별 나인가가의 조성규모와 종류, 변화의 시점을 확인할 것이며, ‘나인가 가도’를 분석하여 나인가가의 공간을 분석할 것이다. 또 같은 시기 산릉에서 삼년상을 설행하는 남성의 공간인 가재실과 비교하여 나인가가의 건축특성을 살펴볼 예정 이다.

산릉에 조성된 나인가가에 관한 연구는 건축적인 측면 에서 가가 형태의 임시건물에 불과하지만, 건물의 공간 구성과 활용기간 등을 분석하고 변화의 역사적인 배경을

2) 우동선은 2003년에 발표한 「가가(假家)에 관한 문헌 연구」에서 가가에 대한 용어정의와 활용된 여러 형태를 소개하였다. 가가의 정 의를 간략하면, 조선시대 가가는 임시로 지은 집으로 건축의 규모 혹은 질과는 무관하다. 또 조선시대에 서민에서부터 관청 및 궁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3) 우동선, 앞의 논문

밝힘으로써 산릉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그들의 공간을 밝 힐 수 있다. 또한 상례기간 활용되었던 수많은 공간들은 산릉의 본래 기능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조성한 것이므 로 이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통해 현재 조선왕릉의 가 치를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조선전기의 나인가가

2-1. 나인가가의 용도와 산릉에 파견된 궁인의 역할 나인가가는 조선전기부터 장례를 위해 산릉에 따라온 왕실여성4)들과 궁인(宮人)들의 의례공간 및 숙소로 건립 되었다.

조선전기에 궁인들은 장례를 지내는 날까지 산릉에 머 물며, 반우할 때 궁궐로 돌아온다.

산릉에 궁인이 파견되는 것은 두 가지 목적이다. 첫 번째는 죽은 왕 혹은 왕비가 살아있을 때 곁에서 모시던 궁인이 산릉까지 따라가서 재궁이 땅에 묻히기 전까지 아침저녁으로 영침5)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아보기 위함이 다. 발인하여 재궁이 산릉에 도착한 당일에 장례를 행하 기 어렵기 때문에 산릉에 빈전을 다시 마련하고 기다렸 다가 길일(吉日)을 택하여 장례를 지냈다. 18세기에 들어 서면서 발인하여 장례까지의 기간이 짧아져서 발인하고 난 다음날 장례를 지내기도 했으나, 조선전기에는 길게 는 열흘 정도 소요되기도 하였다. 이때 산릉에서 성빈(成 殯)을 행하기 위한 건물이 영악전6)이다.

재궁이 영악전에 안치되는 동안을 위해 빈전에 음식을 마련하던 봉상시, 내섬시, 내자시의 관원을 포함하여 빈 전을 내부를 살피던 내관들과 영침을 관리하는 궁인들이 모두 산릉에 파견되는 것이다.

산릉에 파견되는 궁인의 또 다른 목적은 왕실의 높은 신분의 여성들이 모두 산릉에 따라가지 못하므로 그들을

4) 왕실여성: 대비·왕비 이하 내명부로 구분되는 (빈(嬪)·귀인(貴人)·

소의(昭儀)·숙의(淑儀)), 세자빈 이하 세자궁 소속의 내명부인 양제 (良娣)이하, 외명부로 구분되는 왕의 딸인 공주와 옹주, 세자의 딸인 군주와 현주까지를 말한다.

5) 영침(靈寢)은 죽은이의 침소이다. 당시 인식은 죽었다 하더라도 체백(體魄)이 아직 존재하므로 살아있을 때와 같이 침소를 마련해 두었다. 따라서 빈소(궁궐의 빈전과 산릉의 영악전)안에 재궁 즉 관 이 놓이는 곳의 동쪽에 영침을 배치해두었다.

6) 영악전(靈幄殿) : 빈전에서 재궁을 모셔 나와 산릉에 마련된 현 궁에 안치하기 전까지 궁궐 밖에서 재궁을 모시기 위해 임시로 마 련하는 빈전과 같은 건물로 '丁‘자형을 갖춘 가가(假家)의 일종.

1674년 이전까지 산릉에 조성되었으나 (현종)숭릉을 조성하는 것을

기점으로 정자각에서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 영악전의 조성은 폐지

된다. 1674년 이후 정자각에서 재궁을 모시고 있는 동안을 영악전이

라 부르기도 한다. / 신지혜, 「조선후기 靈幄殿 기능수용에 따른

정자각 평면변화 고찰」, 『건축역사연구』, v.18n.4(통권65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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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1588-1141(Print) http://dx.doi.org/10.7738/JAH.2012.21.5.007

대신하여 산릉에서 슬픔을 표하는 곡림(哭臨)의례를 행

하기 위함이다. 이에 관한 내용은 『세종실록』에서 찾 아볼 수 있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고사에 의하면 궁주나 옹주들은 곡 하면서 재궁을 따라 산릉에 가서 하직을 하게 되어있나 이다.”하였으나 임금이 “궁주나 옹주들은 마땅히 빈전에 서 하직하게 하고 궁녀들을 시켜 산릉에까지 곡하며 따 라가게 하라”하였다.7)

위 기록은 왕실여성 중 궁주(宮主)와 옹주(翁主)에 한 정하고 있으나, 아마도 대비 및 왕비는 이전부터 궁녀들 을 대신 파견하였으며 이것을 궁주와 옹주에까지도 확대 적용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산릉으로 파견된 궁인은 대행왕 혹은 대행왕비 의 시신이 안치된 재궁8)이 땅 위에 있는 동안 죽음에 대한 슬픔을 나타내기 위해 끊임없이 곡하는 것이 역할 이다.

따라서 산릉에서 영침을 관리하거나 곡림의례를 행하 기 위해 파견된 궁인들은 발인하는 순간부터 장례식〔下 玄宮〕 당일에 재궁이 능상(陵上)으로 올라갈 때까지 그 역할을 마치고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반우(返虞)할 때 함께 돌아왔다.

결국 조선전기 나인가가는 재궁이 산릉에 도착한 시점 부터 하현궁할 때까지 활용되며 이후에 철거되었다.

2-2. 영악전에 소속된 나인가가의 규모와 배치 조선전기 나인가가의 특징은 영악전에 소속되어 지어 졌다는 점이다. 1674년 가을(현종의 국장)을 기점으로 그 이전을 조선전기로 구분해보았다. 이때를 기점으로 나인 가가가 소속되는 영악전이 건립되지 않았으며 대신 정자 각을 사용하면서 건물배치에 큰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산릉도감의궤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601년(선조34)『(의인왕후)유릉산릉도감의궤』9)이다. 건 물조성을 담당한 「조성소」의 기록을 살펴보면 나인가 가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유사한 공간으로 시녀청(侍女 廳)을 찾을 수 있다.

-. 靈幄殿 從地勢 南向造排 次序近東邊 侍女廳造排 四 面 外園杻木 大把子 高十尺 造排 南門 高十八尺 廣二十

7) 『世宗實錄』9권 2년(1420, 庚子) 9월 14일 3번째 기사

8) 재궁(梓宮): 국장 시 왕․왕후의 시신을 담는 관이다. 왕세자 혹 은 세자빈의 경우는 재실(梓室)이라 표현하고 격을 달리한다.

9) 『[懿仁王后]裕陵山陵都監儀軌』, 1601년(宣祖34), 규14826

七尺 比大輿長杠 連推木 從造同門 東挾作小門 又有東門 又有西門 又有北神門

-. 侍女廳近西水剌間二間造排10)

이때 산릉에서 현궁에 재궁을 묻기 전까지 재궁을 봉 안하던 영악전을 지세에 따라 남향으로 조성하였으며, 영악전 가까운 동편에 시녀청을 만들었다. 위치와 ‘侍女’

라는 사용자로 유추하여 시녀청이 영악전 근처에서 곡림 하던 궁인들의 의례공간인 나인가가로 생각된다. 시녀청 의 공간구성이나 규모를 알 수는 없으나 서편 가까이에 수라간 2칸이 함께 지어졌다. 그 주변으로 파자(把子)를 이용하여 높이 10자 정도의 울타리를 만들고 동․서․

남․북 사면에 문을 만들어 하나의 영역을 만들었다. 이 공간은 정자각을 중심으로 왼쪽에 수복방을 두고 오른쪽 에 수라간을 배치하는 공간과는 별도로 형성된 것이다.

시신을 안치한 재궁을 모신 영악전 영역과 신주를 모시 게 될 정자각의 영역을 분리한 것이다.

Fig.1 The concept placement plan of NaInGaGa, 17th.

(reference: 『(Euiin WangHu) SanReung DoGam EuiGwae』,

『(InMok WangHu) SanReung DoGam EuiGwae』)

1632년(인조10)에 기록된 『[인목왕후]산릉도감의궤』

에서 ‘나인가가’를 찾을 수 있다. 영악전을 지세에 따라 서향으로 설치하고 가까운 곳 북변에 나인가가를 지었다.

나인가가는 온돌 4칸과 량청(凉廳) 2칸으로 이루어졌으 며, 그 가까운 동쪽에 수라간3칸이 마련되었다.11)

앞의 두 사례는 왕후의 상례를 행하는 것으로 내상(內 喪)에 해당하며, 이때 영악전 내부에 있는 영침은 나인들 이 관리하게 된다. 따라서 영악전 주변으로 파자를 이용 하여 둘러친 영역 안쪽에 배치되어 수시로 영악전 내부 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선조33년에 의인왕후의 국장에서 산릉의 영악전에 화

10) 『[懿仁王后]裕陵山陵都監儀軌』, 「造成所」, 1601년, 奎14826

11) 『 [仁穆王后]山陵都監儀軌』, 「造成所」, 1632년, 奎 13517

(4)

재가 일어났었다. 그 원인이 영악전 영역 내에 있었던 나인가가에서 밤을 세우던 나인의 방에서 불이 붙었기 때문이었다.12) 또 화재 속에서도 영악전의 내부의 모든 의물(儀物)을 꺼내왔으나 영침만은 나인들의 관리이므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Year Sanreung Scale Space organization (or location) 1601

宣祖34 懿仁王后

裕陵 - 靈幄殿近東邊

侍女廳近西水剌間二間 1632

仁祖10 仁穆王后

穆陵 6칸 靈幄殿(西向)近北邊

溫突四間 凉廳二間, 近東水剌間三間 1649

孝宗1 仁祖

長陵 13칸 溫突三間 凉廳六間

虛間四間 1659

賢宗卽 孝宗

寧陵(東九陵) 13칸 溫突五間 凉廳三間 虛間三間 廚二間 1673

賢宗14 孝宗

寧陵遷陵(麗州) 13칸 온돌6칸 內進香廳7칸 賢宗

1674 15 仁宣

王后

寧陵

左邊內人 右邊內人 21칸 13칸

Tab.1 The NaInGaGa at the YeongAkJeon(靈幄殿) area in the 17th Century.

Fig.2 The concept placement plan of NaInGaGa in the royal tomb JangReung for King InJo(1649)

(reference: 『(InJo JangReung) SanReung DoGam EuiGwae)』)

국왕의 국장일 때는 조금 달라진다.

인조의 국장을 위해 조성된 영악전과 그 주변의 가가 배치를 살펴보면 국왕의 국장과 왕후의 내상일 때 배치 가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영악전 주변으로 사방에 문

12) 『宣祖實錄』 33년, 12월 22일 2번째 기사

을 내고 파자를 이용하여 영역을 둘러친다. 남문의 가장 가까운 곳에 수․시릉관의 곡림가가를 두고 그 바깥으로 나인가가와 대군의 가가, 수․시릉관 및 대전관(代奠官) 과 내반원(內班院)의 가가를 각각 두었다13). 내상일 때 나인가가를 영악전 주변을 둘러싼 파자 안쪽에 마련하는 반면, 국왕의 상일 때는 파자 바깥에 수시릉관보다 뒤쪽 에 마련한 것이다.

현종14년에 효종의 녕릉(寧陵)을 천릉(遷陵)할 때의 기록을 보면 영악전 주변의 배치를 이해할 수 있다.

천릉할 때 구릉(舊陵)과 신릉(新陵) 양쪽에 영악전을 설치하게 된다. 재궁이 땅 위에 나오게 되면 봉안할 처 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시 구릉에서 재궁을 파내어 잠시 봉안할 처소로 영악전을 새로 짓지 않고 정자각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정자각 주변으로 120칸 규모로 파자 를 둘러싸고 사면에 문을 설치하였다. 남문으로 재궁이 이동할 것이기 때문에 남문의 크기는 높이 20자 너비 27 자 규모로 조성하고 협문을 두었다. 나머지 문의 규모는 높이 10자에 너비 8자로 남문에 비해 작게 조성한다. 동 문은 어로출입처(御路出入處)로 사용되므로 협문을 따로 만들고, 문 안쪽에 왕의 곡림가가를 마련하고 문 밖에 어재실과 내관가가을 배치한다. 서문 밖에는 재향(祭享) 과 나인가가를 두었다.14)

1601년부터 1673년까지 산릉도감의궤의 기록으로 추 정해볼 때, 산릉에서 장례를 지내기 위한 공간으로 영악 전과 그 주변의 가가를 배치하는 것의 기본 원리는 다음 과 같았다.

산릉에 마련된 봉분에 장사지내기 전까지 영악전에 재 궁을 봉안하고 빈전에서와 같이 의례를 행한다. 그러기 위해 丁자 형태의 영악전을 마련하고 그 내부에 찬궁(贊 宮)을 두어 재궁을 안치한다. 영악전 주변으로 파자를 이 용하여 높이 10자 정도의 높이로 둘러싸고 동․서․남․

북면에 문을 내고 문을 수문장이 지킨다. 어로(御路)는 동문을 사용하므로 동문 안쪽에 어곡림가가(御哭臨假家) 를 두고 동문밖에 어재실과 대군이하의 가가를 둔다. 궁 인의 출입은 서문으로 이루어지며, 서문밖에 나인가가를 배치한다. 그러나 왕후의 재궁을 봉안할 경우 나인가가 를 영악전 영역 내부에 마련하여 가까이에서 영침을 관 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13) 『 [仁祖長陵]山陵都監儀軌 』, 1649년, 奎 15074

<Fig.2>에서 영악전 밖의 여러 가가 중에서 수시릉관곡림가가만 남 문의 서쪽 가까이에 마련하였다고 하였으며, 그 외의 가가는 빈전에 서 상황을 고려하여 나인가가인 여성공간을 서쪽에 두고, 대군이하 의 가가를 동쪽에 두어 임의로 추정 배치한 것이다.

14) 『〔孝宗寧陵〕遷陵都監殯殿所儀軌』, 1673년, 藏 2-2327

(5)

ISSN 1588-1141(Print) http://dx.doi.org/10.7738/JAH.2012.21.5.007

3. 17세기 후반 나인가가의 확대

3-1. 1674년 국장을 위한 시설의 변화

1674년을 기점으로 산릉에서 국장을 위해 조성하는 여 러 공간의 변화가 일어난다. 1674년 봄에는 효종비 인선 왕후가 승하하여 여주에 조성된 효종의 영릉에 인선왕후 의 릉을 마련하여 장례지냈으며, 8월에 현종이 승하하여 동구릉에 숭릉(崇陵)을 조성하고 12월에 장사지냈다. 이 두 번의 국장에서 나인가가의 규모가 확장되었으며, 숭 릉을 조성할 때에는 산릉의 국장시설 전반에 변화가 있 었다.

이 시기 나인가가의 변화가 이루어진 배경을 살펴보면 두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첫번째는 1674년 가을에 이루어진 숭릉 조성에서 영악 전 제도가 폐지되는 것이다.15) 의례의 중심이 되는 영악 전이 조성되지 않게 되면서 관련 의례를 정자각에서 행 하게 되었다. 따라서 영악전에 소속되어 조성되던 여러 공간이 정자각 주변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정자각은 본래 길례를 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다. 따라서 정자각 앞 마당에는 동쪽에 수복방과 서쪽에 수라간을 배치하게 되며, 그 남쪽으로 정문인 홍살문을 배치한다. 이러한 규정된 배치 안에 국장을 위한 시설이 지형에 따라 적절하게 배치되어야 했다. 따라서 국장을 위한 임시시설의 규모를 정리하기위해 의례공간과 숙소 및 제물조성의 공간을 구분하여 따로 배치하게 되는 계 기가 된다.

두 번째 배경은 흉례기간동안 왕실여성들의 의례에 변 화가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삼년내나인가가(三年內內人 假家)'를 등장시키게 된 주된 배경이며, 1649년 인조의 국상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국조오례의』를 살펴보면 통해 살펴보면, 조선전기에 국상에서 대비를 포함하여 왕실여성들의 역할은 빈전에서의 약 5개월 동 안 곡하는 것으로 한정되었으며, 산릉으로 발인하여 장 례지낼 때에는 궁인들이 그들을 대신하였다. 혼전에서 이루어지는 의례에는 왕실여성들의 공식적인 절차가 없 었다. 그러나 인조의 국상에서 인조비 장렬왕후는 혼전 의례가 행해지는 동안에도 자신의 예를 갖추고자 시도하 였다. 장렬왕후는 망곡례(望哭禮)라는 형식으로 혼전에 들어가서 직접 의례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가까운 전각 에서 혼전을 바라보며 망곡하는 의례를 통해 대행왕 인 조에 대한 예를 표하고자 하였다.16) 이에 효종은 그 뜻

15) 이에 대한 내용은 신지혜, 앞의 논문(2009년)에서 상세하게 다 루고 있다.

을 받아들여 숭문당 앞마당에서 망곡례를 하도록 했으며, 우제(虞祭)와 졸곡제(卒哭祭)뿐 아니라 매달 15일마다 있는 삭망제(朔望祭)에도 망곡례를 행했으며, 대비이하 왕실여성 모두가 참여하였다. 이날 이후부터 혼전 주변 에서 왕실여성들이 망곡례를 행하는 것은 상례(常禮)가 되었으며, 그 장소로 숭문당이 활용되었다.

망곡례를 행할 때 혼전에 올릴 제물을 마련해 올렸으 므로 제물 조성을 위한 장소가 요구되었다. 이같은 혼전 의례에 왕실여성이 참여하기 시작함으로 하여 산릉에서 이루어지는 삼년상에도 궁인들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그 결과 삼년상이 행해지는 동안 왕실여성들을 대신하여 산 릉에 궁인이 파견되어 제물을 마련하여 올리는 정자각에 올렸으며, 이들을 위해 삼년상 내내 나인가가를 유지해 야 했다. 이 공간이 '삼년내나인가가'라는 이름으로 조성 되었다.

3-2. 삼년내나인가가의 등장

산릉에 삼년내나인가가를 조성하기 시작한 것은 1681 년에 이루어진 인경왕후의 익릉을 조성할 때부터다. 장 렬왕후가 숭문당 앞마당에서 영사전(永思殿-인조의 혼 전)을 향해 망곡례를 행하고, 1659년 효종의 혼전인 경 모전(敬慕殿)을 향해 왕실여성들의 망곡례를 행하기 위 해 숭문당에 곡림청을 처음 마련하고, 그 후 1674년에 인선왕후와 현종의 두 번의 국장이 행해진 후, 비로소 1681년 인경왕후의 익릉에서 '나인삼년내가가'라는 이름 으로 등장한 것이다. 1674년 인선왕후와 현종의 국장에 서 나인가가를 '좌변나인'과 '우변나인'으로 분화하여 조 성하고 그 규모도 확대된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변화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분화된 두 공간을 나인가 가(혹은 발인시나인가가)와 삼년내나인가가로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 1681년에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1720년 숙종의 국장에서 명릉에 조성된 나인가가 는 ‘발인임시나인가가(發靷臨時內人假家)’, ‘삼년내나인가 가’, ‘곡림나인가가(哭臨內人假家)’등으로 세분화되는 모 습을 볼 수 있다. 용도와 사용 시기에 따라 별도의 공간 을 조성하여 건물명을 구분한 것이다.

산릉에 마련된 삼년내나인가가의 역할은 혼전에서 망 곡례의 연장선에서 생각할 수 있다. 혼전에서의 망곡례 는 곡(哭) 즉 울음을 울기위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혼전 의례는 슬픔을 자제하고 길례로 전환하기 위한 중간과 정이므로 곡례(哭禮)는 의미가 없다.

16) 신지혜, 「조선후기 대비의 喪葬禮 참여확대와 의례공간의 변

화」, 『藏書閣』26, 2011, p.140

(6)

Year

Sanreung NaInGaGa

Scale

1674

肅宗卽 賢宗

崇陵

內人假家 24間

發靷時內人假家 20間 1681

肅宗7 仁敬王后

翼陵 內人假家 28間

三年內內人假家 35間 1683

肅宗9 明聖王后

崇陵 內人假家 27間

三年內內人假家 27間 肅宗141688 莊烈王后

徽陵 發靷時內人假家 28間

三年內內人假家 35間 1701

肅宗27 仁賢王后

明陵 內人假家 29間

三年內內人假家 36間 1720

景宗卽 肅宗

明陵

發靷 臨時

內人假家 27間

三年內內人假家 29間 哭臨內人假家 3間17) 1724

英祖卽 景宗

懿陵

發靷時內人假家 29間 三年內內人假家 - 18) 哭臨內人假家 3間19) 英祖61730 宣懿王后

懿陵

發靷時內人假家 27間 三年內內人假家 14間

哭臨內人假家 2間

1757

英祖33 貞聖王后

弘陵 三年內內人假家 41間

1757

英祖33 仁元王后

明陵 三年內內人假家 48間

正祖卽1776 英祖

元陵 三年內內人假家 41間

1800

純祖卽 正祖

健陵 內人假家 43間半

1805

純祖5 貞純王后

元陵 內人假家 43間半

1821

純祖21 孝懿王后

健陵 內人假家 43間半

憲宗卽1834 純祖

仁陵 內人假家 54間

1843

憲宗9 孝賢王后

景陵 內人假家 44間半

1849

哲宗1 憲宗

景陵 內人假家 63間

哲宗81857 純元王后

仁陵 內人假家 63間

高宗11863 哲宗

睿陵 內人假家 67間

Tab.2 The Preparation Scope of NaInGaGa since 1674

17) 『(肅宗明陵)山陵都監儀軌』, 1720년, 장서각소장 2-2328 나인곡림가가의 위치(作於圍排西門外)를 추정할 수 있다. 나인곡림 가가와 함께 수시릉관곡림가가2칸(作於守僕房下邊)의 위치와 왕자곡 림가가1칸 (作於守僕房上邊)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 18) 『(景宗)懿陵山陵都監儀軌』, 1724년, 장서각소장

조성하지 않고 용동궁에 소속된 구농막을 사용하고, 오량가3칸을 추 가로 조성해서 차양과 파자로 내외를 구별할 것.

不爲造作 以龍洞宮舊農幕仍排 而五樑家三間 添造修補內遮把子內外 區別 五樑家 油芚仰遮及溫突塗褙等事分長興庫次知

아마도 제상(祭床)에 올릴 제물을 정성껏 마련하여 올 리는 것이 주된 목적일 것이다. 1649년 인조의 국장에서 장렬왕후가 망곡례를 시작하고 그 다음 국장인 1659년 효종의 혼전 서북쪽에 곡림청으로 사용하게 되는 숭문당 과 혼전이 마련된 문정전 사이에 내제물진설처(內祭物陳 設處)가 마련된 것이 확인된다.20)

Fig.3 The location of royal women’s GokRimCheong and NaeJeMulJinSeolCheo in the case of HonJeon at the MunJeongJeon.

혼전에서 삼년상 동안 조석상식(朝夕上食)과 주다례 (晝茶禮)를 올리도록 한다. 이때 대비 혹은 왕비등 내전 에서 제물을 별도로 마련하여 조석상식 혹은 주다례와 함께 혼전에 올렸다. 또는 생일과 같은 기념일에는 별다 례(別茶禮)라 하여 따로 제상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때 제물을 진설했두었던 공간이 혼전의 정전인 문정전 서편 에 마련된 되었으며, 이곳을 내제물진설처라 불렀다.

혼전에서 곡림청과 내제물진설처의 형성은 삼년내나인 가가의 구성과 유사하다. 산릉에서도 내전에서 제물을 별도로 마련하여 올리기 위해 삼년내나인가가를 조성하 게 된 것이다.

1674년 이전에 나인가가는 재궁을 안치한 전각, 즉 영 악전 가까이에 조성하여 곡(哭)하는 소리가 재궁에 까지 닿도록 하였다. 그러나 삼년내나인가가는 제물조성이 목 적이기 때문에 홍살문 밖 능역(陵域)의 외곽에 지형에 따라 적절하게 조성하면 된다.

1720년에 숙종이 승하하여 명릉을 조성할 때에는 나인 가가를 좀 더 분화하여 나인곡림가가, 발인시나인가가, 삼년내나인가가 등으로 세 개의 공간이 별도 조성되었다.

나인곡림가가와 발인시나인가가를 구분한 것은 공간 활

19) 곡림가가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作於丁字閣右夾門外地排)

20) 신지혜, 「조선조 숙종대 혼전조성과 그 특징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v.19 n.3(통권 70호), 2010

(7)

ISSN 1588-1141(Print) http://dx.doi.org/10.7738/JAH.2012.21.5.007

용상 편리하게 변화한 것이다.

영악전을 별도로 조성하지 않고 정자각에 빈소를 마련 하므로, 정자각 주변으로 길․흉의 여러 공간이 복잡하 게 얽혀졌다. 따라서 홍살문 안쪽에 조성하던 20~30여 칸의 나인가가를 홍살문 밖 넓은 곳에 배치한 것이다.

대신 빈소 가까이에서 곡림의례를 위한 공간으로 2~3칸 만을 정자각 서편에 마련하였다. 그 결과 홍살문 안쪽에 는 의례를 위한 소수의 공간만 남게 되고, 숙소 및 제물 조성의 공간을 홍살문 밖에 배치함으로써 의례공간이 정 리되었다.

그 결과 1720년에 숙종의 장례를 위해 명릉에 조성된 시 설을 추정하면 <Fig.4>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다.

Fig.4 The assumed location concept plan of NaInGaGa at the royal tomb when the funeral of SukJong

(reference: 『(SukJong MyeongReung) SanReung DoGam EuiGwae)』)

빈소로 사용되는 정자각21) 주변으로 파자를 둘러싸고 사면에 문을 낸다. 서문 밖에 곡림나인가가를 3칸의 규 모로 마련하고, 작은 협문(小夾門)을 만들어 나인들의 출 입구를 만들었다. 또 정자각의 서쪽 마당에 제물중진소 (祭物中陳所)를 마련하고 이와 별도로 정자각 서편 계단 위에 내출제물중진소(內出祭物中陳所)를 차일과 장막을 이용하여 공간을 마련한다. 내출제물중진소는 혼전에서

21) 숙종은 인현왕후가 모셔진 명릉(1701년 조성)에 합부하는 것이 므로 가정자각을 활용해야 했으나, 국왕과 왕후의 위계를 생각하여, 왕후의 신좌를 가정자각으로 옮겨모시고, 숙종의 빈소를 정자각에 마련하도록 하였다. 그 과정에서 정자각 남동쪽에 미리 조성되었던 수복방(守僕房)이 인현왕후의 신좌를 모신 가정자각의 정면을 가로 막게 되므로 수복방을 약간 동쪽으로 옮긴다.

『(肅宗明陵)山陵都監儀軌』, 造成所, 來關秩, 庚子十月十二日

내제물진설처와 유사한 공간이다. 이와 대응하여 어로(御 路)는 동문을 사용하므로 정자각의 동남쪽에 위치한 수 복방을 중심으로 그 위쪽으로 왕자곡림가가를 배치하고, 수복방의 남쪽으로 수․시릉관곡림가가를 배치하였다.

이로써 어정문, 즉 홍살문 안쪽 의례공간은 마무리 된 다. 어정문 밖으로 제물조성과 궁인의 숙소로 사용되는 발인시나인가가와 삼년내나인가가가 및 가재실과 왕자가 가를 배치하게 된다.

나인가가를 홍살문 밖에 배치하여 의례공간과 분리하 게 되면서 규모를 여유롭게 건립할 수 있게 되었다.

3-3. 발인시나인가가와 삼년내나인가가의 공간분석 1681년부터 1730년까지 발인시나인가가와 삼년내나인 가가 두 개의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발인시나인가가는 주로 산릉에 마련된 빈소 가까이에서 곡림하고 영침을 돌보기 위해서 조성된 공간이다. 따라서 곡림의례와 숙 소의 기능을 중점으로 하였다.

Year Classification Space Composition 1681

仁敬王后翼陵

發靷時 총28칸: 온돌12, 주6, 凉廳6, 곳간4 三年內 총35칸: 온돌9, 假마루3, 廚6, 허청7,

곳간2, 오량가5 1683

明聖王后崇陵

發靷時 총27칸:온돌11, 량청5, 廚6, 허청2, 곳간 3

三年內 총27칸: 온돌7, 마루5, 주5, 곳간4, 厠1, 오량가5

莊烈王后1688 徽陵

發靷時 총28칸: 온돌11, 廚6, 량청6, 곳간 2 三年內 총40칸: 온돌10, 가마루5, 廚6, 허청

8, 곳간2, 오량가5, 마구2, 厠1 仁賢王后1701

明陵

發靷時 총29칸: 온돌12, 廚6, 량청6, 곳간3, 허청1, 厠1

三年內 총36칸: 온돌11칸, 廚6, 허청8, 곳간 2, 오량가5, 厠1

1720 肅宗明陵

發靷時 총27칸: 온돌11, 량청4, 廚6, 厠1, 허 간5

哭臨 총3칸: 정자각 圓排 서문 밖 三年內 총29칸: 온돌7, 가마루4, 廚6,庫1, 오

량가3, 허간7, 厠1 1724景宗

懿陵

發靷時 총29칸: 온돌12칸, 량청10, 廚1, 厠1 哭臨 3칸, 정자각 우협문 밖

三年內 용동궁 구 농막 활용 宣懿王后1730

懿陵

發靷時 총27칸: 온돌7, 허간18, 厠1

哭臨 2칸

三年內 총14칸:온돌5, 가마루2, 廚3, 곳간1, 허간1, 오량가2

Tab.3 The inner space compositon of BalInSi-NaInGaGa and SamNyeonNae-NaInGaGa

(reference: SanReung DoGam EuiGwae)

반면, 삼년내나인가가는 삼년상동안 제상에 올릴 음식 을 만들기 위한 공간으로 음식을 마련하는 궁인의 숙소

(8)

Type Year Example A

43칸

1800년 정조 건릉

1805년 정순왕후 원릉

1821년 효의왕후 건릉

1843년 효현왕후 경릉

A-1(54칸) 1834 순조 인릉

A-2 63칸반

1849년 헌종 경릉

1857년 순원왕후 인릉

1890년 신정왕후 수릉

A-3(63칸) 1863년 철종 예릉

C 1878년 철인왕후 예릉

Tab.4 The classification of NaInGanGaDo type drawn with SanReung DoGam EuiGwae since 1800

와 음식 마련을 위한 공간이 중심이 된다. 또 의례공간 에 가까이 있을 필요가 없으므로 홍살문 밖 능역 외곽에 지형에 따라 적절하게 배치되었다.

세부 공간구성을 살펴보면 발인시나인가가는 온돌의 비중이 높은 반면, 삼년내나인가가는 온돌의 규모는 줄 고 '오량가(五梁家)'22)라 하여 제물숙설처로 사용되는 공간이 필수적으로 조성되었다.

3-4. 영조27년 나인가가의 통합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까지 의례와 배치상의 이유 에서 점차 세분되던 나인가가는 영조27년을 기점으로 하 나의 공간으로 조성된다.

영조는 1751년 그의 첫째 아들 효장세자의 빈 효순현 빈(孝順賢嬪)의 장례를 위한 시설을 마련할 때 곡림가가 를 비롯하여 발인시나인가가를 짓지 않고 삼년내나인가 가만을 조성하도록 수료를 내렸다.

“임금이 말씀하길 곡림나인은 의당 나인공상가가(內人 供上假家)에 들것이며, 따로 건물을 지을 필요가 없으니 이를 없애도록 하라”23)

이는 『국조상례보편』에 반영되면서 이후 산릉에는 곡림가가를 짓지 않았다.24) 산릉에 파견된 모든 궁인들 은 삼년내나인가가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삼년내나인가가의 규모가 20여칸에서 40 여칸 이상으로 확대되었으며, 19세기 이후가 되면 60여 칸이 넘는 규모를 갖게 된다.

4. 19세기 나인가가의 공간 구성

4-1. 나인가가의 기본형과 확장과정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나인가가의 공간구조를 담은

「內人假家間架圖」를 각 해당 산릉도감의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22) '오량가(五梁家)'라는 명칭은 건물의 규모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산릉나인가가에서는 제물숙설처로 추정된다. 17세기 후반에 혼전조 성 기록을 살펴보면 곡림청에 부속하여 오량가를 건립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혼전의 곡림청과 산릉 나인가가의 관련성에서 그 유사한 공간임을 알 수 있다.

23) 『승정원일기』, 영조 27년(1751) 12월 29일 (신유)

上曰, 哭臨內人, 當入於內人供上之假家, 別建不緊, 除之, 可也。抄出 擧條 令承旨書之。傳曰, 所謂哭臨假家除之, 此後永除事, 載於喪禮受 敎

24) 『[正祖]健陵山陵都監儀軌』下, 「造成所儀軌」, 庚申九月二十七 國葬都監了 (奎 13642, 1800년)

...守侍陵官及內人哭臨假家則補編中永減故不爲造作 而只有入接處是置 以此知委向事

1800년 정조의 국장을 위해 건릉을 조성한 기록은 담 은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에 처음으로 수록되었다.

산릉의 목조건물을 건립하는 일을 담당했던 ‘조성소(造成 所)’의궤에 ‘나인가가도(內人假家圖)’라 하여 공간을 상세 하게 기록하고 있다. 1800년 이후 의궤에 수록된 나인간 가도를 통해 각 시기마다 조성된 나인가가의 평면형을 단순화 하여 유형을 살펴보고자 한다.

Fig.5 The space composition of NaInGaGa at the GeonReung constructed in 1800

(reference: 『(JeongJo GeonReung) SanReung DoGam EuiGwae)』)

산릉을 조성할 때마다 나인가가의 규모를 결정하기 위 해 전례를 상고하는데, 각 시기마다 그 규모가 다르다25)

25) 『[貞純王后]元陵山陵都監儀軌』,「造成所儀軌」, 稟目, 乙丑二月 十二日(奎13677)

取考謄錄則 癸亥年假齋室八十六間內人假家五十四間 , 庚子年假齋室

八十一間內人假家五十一間, 丁丑年假齋室八十四間內人假家四十八間

是如乎各年間數不同今番段以何年例擧行是乎乙喩指一分付何如手決假

齋室依癸亥年內人假家依丁丑年例爲之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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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기록이 나타난다. 「나인가가간가도」에서도 몇 개의

다른 유형이 나타난다. 자세히 공간을 살펴보면 1800년 정조건릉이 조성될 당시 계획된 나인가가를 기초로 필요 에 따라 공간을 덧붙여 가며 변화되었다.

가장 기본이 되는 A유형은 정조 건릉을 조성할 때 조 성된 것으로 규모 43칸으로 이루어졌다. 『정조건릉산릉 도감의궤』, 「나인가가간가도」를 분석하면 나인가가의 기본 평면을 확인할 수 있다.

대문에서 들어가는 순서로 살펴본다. 대문간은 4칸으 로 구성되었으며 대문 좌우에 방과 곳간이 있다. 대문간 옆방은 문의 개폐를 담당하는 이의 거처이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다시 중문으로 들어간다. 중문 안에 마당이 있 으며 마당 한가운데 5칸반의 건물이 독립하는데 이곳이 제물숙설청으로 추정된다. 그 서쪽으로 담장과 중문을 설치하고 조과청(造果廳)이 별도의 공간으로 조성된다.

조과청은 제상에 올릴 유밀과26)와 과자를 만드는 곳이 다.

북쪽에는 상궁방(尙宮房)으로 3칸온돌방-6칸마루-2칸 온돌방으로 구성되며 좌우 온돌방 옆에는 부엌(廚)이 설 치되었다. 동쪽의 여러 개의 방은 상궁 이하 나인들의 숙소로 추정할 수 있다.

정순왕후․효의왕후․효현왕후의 국장에서 이 기본형 과 유사하게 조성되었다. 또 간가도가 수록되지 않았던 1757(영조33)년에 정성왕후의 홍릉부터 1776년 영조의 원릉까지 모두 40여칸의 규모로 이루어졌는데, 아마도 유사한 평면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조의 건릉에서 건립된 나인가가의 형태를 기본으로 하여 점차 제물조성의 공간이 추가되어 54칸과 63칸 반 등으로 확대되는 모습을 보인다.27)

1834년에 순조의 국장을 위해 인릉을 조성할 때에 10 칸 반을 추가로 조성하여 총 54칸 규모가 된다.28) 새롭 게 추가된 공간은 병식방(餠食房) 3칸과 4칸 마루, 용정 간(舂井間) 3칸이다. 병식방은 떡을 만드는 곳이며, 용정 간은 절구질을 하는 방앗간과 같은 곳이다. 이때에 이르

26) 유밀과(油蜜菓): 여러가지 곡식의 가루를 꿀과 기름, 술 등을 넣 고 반죽하여 모양을 만들어 기름에 튀겨 집청꿀에 건져낸 과자, 오 늘날의 약식과 유사하다.

27) 1878년에 철인왕후의 예릉을 조성하면서 건립된 나인가가는 좀 형태가 다르며, 간가도에 공간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 기록되지 않아 연구대상에서 제외하였다

28) 『[純祖仁陵]山陵都監儀軌上』, 移文 乙未正月二十日

爲相考事卽因魂殿次知中使知委內人假家元磨鍊四十三間半外添造十間 半事已爲稟定是如爲有置十間半添造木物後錄文移爲去乎到卽出給於造 成所以爲擧行之地事

러 나인가가에서 마련하는 제물의 종류가 좀 더 다양해 지면서, 건축공간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Fig.6 The space composition of NaInGaGa at the InReung constructed in 1834

(reference: 『(SunJo InReung) SanReung DoGam EuiGwae)』)

1849년에 헌종의 경릉을 조성할 때에는 순조 인릉에서 조성된 나인가가에 10칸이 추가되어 63칸 반 규모로 건 립된다. 산릉의 나인가가로는 가장 크며 가재실과 유사 한 건물규모를 보인다.

Fig.7 The space composition of NaInGaGa at the GyeongReung constructed in 1849.

(reference: 『(HeonJong GyeongReung) SanReung DoGam EuiGwae)』)

.

(10)

내부 구성은 기본형(상궁방+나인방+조과청+제물숙설 청)에 용정간을 갖춘 병식방의 공간이 확대되었다. 본 건 물 ‘ㅁ’자 공간에서 북편에 상궁방과 동편에 나인방은 변 함없으며, 기본형에서와 같이 서편에 조과청이 배치되고, 안마당에 독립된 재물숙설청이 남쪽행각으로 이동한다.

본 건물‘ㅁ’자 공간 남쪽으로 대문채가 놓이며 대문채 동 쪽으로 새롭게 추가된 용정간과 병식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온돌과 대청 및 부엌이 배치된다. 순조 인릉에서 구성된 내부 공간이 좀 더 합리적인 배치로 정 리되면서 규모가 증가한 것이다.

헌종 인릉에 조성된 나인가가의 특징은 방앗간인 용정 간이 바깥채에 배치되고 나인가가의 중심에 제물숙설청 이 위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담장으로 별도 구성되 었던 조과청이 상궁방과 함께 안마당을 공유함으로써 협소했던 조과청 마당을 좀 더 넓게 활용하여 기능성을 높였다. 내부에 담장을 설치하지 않았으나, 안마당으로 진입하는데 이중의 중문을 배치하였기 때문에 내부공간 의 위계는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4-2. 나인가가와 가재실의 비교

나인가가과 가재실(假齋室)29)은 산릉에서 삼년상을 행 하기 위한 여러 관원의 숙소이며 제물조성의 장소로 활 용되었다.

이 두 공간은 성별에 따라 별도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공간의 특성이 다르며, 담당하는 역할도 다르다. 가재실 과 비교를 통해 나인가가의 특성을 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

첫 번째 비교해볼 것은 제물조성의 공간이다. 가재실 에는 사옹원에 소속되어 대궐음식을 맡아보는 반감(飯 監), 반공(飯工), 고기굽는 적색(炙色), 찜을 맡는 증색 (蒸色), 떡을 빚는 병공(餠工), 국수를 만드는 면색(糆 色), 두부를 만드는 포장(泡匠) 등의 제물조성 공간이 다 양하게 나타난다.

나인가가에 배치되는 제물조성을 위한 공간은 크게 조 과청과 병식방(餠食房)과 용정간(舂井間) 등이 전부이다.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 제상에 올려지는 조석상식과 주 다례는 모두 가재실에서 마련한다. 반면, 나인가가에서는 내전에서 따로 올리는 한정된 소량의 제물과 다과 정도

29) 가재실(假齋室)은 재궁을 현궁에 안치하고 반우하고 나면 삼년 상 기간 약 22개월 동안 조석상식을 준비하여 산릉에서의 제례에 올리는 제물을 조성하는 곳이다. 재실(齋室)이 삼년상을 끝내고 길 제(吉祭)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영구히 산릉에 유지되는 것과 비교하 여 흉례기간동안 일시적으로 운영된다는 의미에서 가재실이라 한다.

관련연구로는 ‘정정남, 「조선시대 산릉의 가재실과 재실의 운영」, 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논문집, 2008년’이 있다.

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후기가 되면서 내전에서 마련해 올리는 제 물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공식적인 절차로 인정되면서 관련된 공간이 증대된다.

조선후기에 대비(大妃)를 중심으로 왕실 내전(內殿)에 서 별다례(別茶禮)라 하여 생일이나 삭망일 등, 혹은 다 례를 올리고자 하는 주체의 요구에 따라 별도로 제상을 마련하는 사례가 늘어난다.

이와같이 추가로 마련된 제물은 정자각 서편 기단위에 조성되는 내출제물중진소에 진설되었다가 정전으로 들여 질 것이다.

Fig.8 The GaJaeSilDo, JeonSunWangHu WeonReung SanReung DoGam EuiGwae, 1805

두 번째로 비교해볼 것은 숙소로 사용되는 공간이다.

가재실은 주로 수릉관과 시릉관, 참봉방이 주된 공간이 다. 수릉관은 주로 문관 혹은 종친 중에서 정2품 이상의 인물이 임명되었다. 수릉관의 입접처를 북쪽에 두고 남 향하도록 하며 그 주변으로 참봉방을 배치하였다. 또 바 깥마당과 구분하여 안마당을 구성하여 영역성을 확보해 주었다. 시릉관은 내관을 임명하며, 정자각으로 올리는 제물을 살폈으므로 수라간과 공상청 및 각색방과 하나의 공간에 배치된다.

나인가가를 숙소로 사용하는 신분에 따라서 구분한다 면 상궁방, 나인방 정도로 나뉜다. 궁인들은 특별히 직책 이 구분되지 않는데, 이것은 나인들을 5품의 상궁과 나 머지 나인으로 분류하는 궁인 제도의 특성에 기인한 것 으로 보인다.

상궁방의 경우는 나인가가의 가장 안쪽에 남향으로 위 치하며 그 규모는 3칸 방과 6칸 대청, 2칸의 건너방으로 구성되는 형태는 18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지켜진다. 아

(11)

ISSN 1588-1141(Print) http://dx.doi.org/10.7738/JAH.2012.21.5.007

마도 이곳이 나인가가의 가장 중심공간으로 볼 수 있다.

산릉에 파견된 상궁은 왕실여성을 대리하는 입장이므로 신분의 위계가 높으며 이들을 보조하고 제물을 만드는 나인들과의 신분적인 차이가 있으므로 이러한 신분의 위 계는 공간의 위계로 나타난다.

나인가가는 여성들의 공간으로 중문(中門)과 담장·차 양 등을 이용하여 내부공간의 영역성을 확보해준다. 대 문채 주변으로 노비방과 내관인 중사방을 위치시켜 위계 와 성별에 따른 구분이 이루어졌다.

가재실도 사면을 둘러 건물을 배치함으로 'ㅁ'자형의 구성을 하며 수릉관의 입접처는 이중으로 마당을 구성하 였다. 그러나 외부에 담장을 두르지 않아 창호를 통해 밖과 소통된다. 반면, 나인가가는 여성공간으로 내밀한 공간을 구성하기 위해 대문채를 중심으로 외부담장을 둘 렀다. 바깥마당과 안마당과 뒷마당으로 구성되며, 외벽의 창호를 열더라도 바깥과 소통하기 어려운 형태이다.

5. 맺음말

산릉에 조성된 여러 공간들 중 여성들을 위한 공간으 로 마련된 나인가가는 상장례의 변화와 시대적 요구에 따라 확대․축소의 과정을 통해 일정한 형식을 갖추기 되었다.

1) 나인가가는 조선초부터 산릉에 왕실여성들을 대리 하거나 산릉의 빈소에 영침을 관리하기 위해 궁인을 파 견하기 위하여 조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장례를 마치고 궁인들이 궁궐로 돌아가고 건물은 철거되었다.

2) 17세기에 장렬왕후의 망곡례를 시작으로 왕실여성 들의 혼전의례가 공식화되면서 산릉에서도 궁인들이 삼 년상 내내 머물기 위해 ‘삼년내나인가가’를 조성하였다.

이와함께 1674년에 나인가가가 소속된 영악전이 폐지되 면서 정자각에서 빈소를 마련하게 되면서 나인가가를 홍 살문 밖, 의례공간의 외곽에 배치하게 되었다.

3) 1757년 이후 삼년내나인가가는 건릉에서 건립된 형 태로 규모40여칸에 상궁방+나인방+조과청+제물숙설청으 로 구성되었다. 1834년에 기본형에 용정간과 병식방이 추가되어 54칸이 되고, 1849년에는 63칸 반으로 제물조 성공간이 점차 증가하였다.

4) 나인가가의 제물조성공간은 조과청과 용정간, 병식 방 등으로 다과를 만드는 공간으로 한정된다. 산릉에서 삼년상동안 공식적인 제상을 마련하는 가재실에 각색공 간이 다양하게 조성된 것과 비교된다. 궁인들의 역할이 별다례와 내전에서 따로 마련하여 올리는 제물을 조성하

는데 한정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5) 나인가가는 가재실과 달리 여성들의 공간으로 중문 과 담장을 활용하여 바깥마당과 안마당과 뒷마당으로 여 러 겹의 공간을 구성하고, 외벽의 창호를 열더라도 바깥 과 소통하기 어려운 형태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동안 산릉에서의 여성들의 역할이 어떠했는지는 아 직 연구되지 않았다. 관련된 자료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 일 것이다. 다만 산릉에 조성된 여성공간인 나인가가에 대한 건축기록을 통해 그 공간을 분석함으로써 그들의 역할을 추정하는데 본 연구가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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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2011. 12. 15) 수정(1차: 2012. 10. 3) 게재확정(2012. 10. 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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