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EP Original Articles J Korean Psychoanalytic Society Vol. 10, No. 1, page 141~157,1 9 9 9
精神分析 大家들의 逆轉移 경험에 대한 考察
李 炳 郁*
A Study on the Countertransference of Psychoanalytic Masters
Byung-Wook Lee, M.D., Ph.D.*
머 리 말
우리는 흔히 정신분석의 대가들에 관하여 논할 때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영웅들을 대하듯 미화시키며 칭송하는 경향들이 농후하다. 그러나 엄밀한 시각으로 자세히 들여 다보면 그들 대가들도 타고난 재능 또한 무시할 수 없지만 끝없는 시행착오와 좌절, 그리고 불굴의 투쟁과정을 통하여 이룩한 업적들임을 알 수 있다. 마치 아버지를 대하 는 듯한 우리의 전이적 태도에 대하여 과연 그들이 살아 있다면 어떤 해석들을 하였을 까 궁금하다. 이제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대가들의 역전이 경험이 당시에는 대가들 자 신조차 인식하지 못한 경우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가들이라고 해서 모든 치료를 성공적으로 수월하게 수행한 것은 아니리라고 본다. 오히려 모든 면에 철저했던 그들 로서는 우리보다 더욱 큰 좌절과 실망을 딛고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숱한 시행 착오를 겪었다고 본다. 단지 논리의 비약으로 인하여 이들 대가들의 역전이 경험들을 폄훼하는 만용을 드러냄으로서 결국 대가들도 별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성급한 결론 에 도달할까 염려된다. 모든 임상가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본의아닌 실수나 헛점을 드 러낼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이들 대가들의 경험에서 우리들 자신의 약점을 배우는 자 세로 각자의 모습을 한번씩 되돌아보는 태도가 바람직하다. 단지 무엇 무엇에 불과하 다, 또는 단지 무엇 무엇에 지나지 않는다는 섣부른 결론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 모두 에게 불행이다. 이런 측면에서의 고찰은 우리의 현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대가 들은 마치 대단한 신통술이라도 부리는 듯이 신비화하여 떠받드는 경향은 오히려 우
*한림대학교 의과대학 신경정신과학교실
Department of Neuro-Psychiatry, College of Medicine, Hallym University, Seoul, Korea
리 동양사회에서 더욱 심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속한 공동사회는 진솔한 비판과 토론 문화가 정착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방적인 선언과 주장만 횡행하고 대화는 실종된채 그야말로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도식을 기대하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대가들의 역전이 경험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성공사례 못지않 게 실패경험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고 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진지 한 고찰이 요구되는 부분이 아닐까한다.
逆轉移 개념의 略史
오스트리아의 문화비평가 칼 크라우스(1874~1936)는 정신분석은 그 자체가 바로 정신질환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가한 바 있다(Szasz 1990). 그의 비판은 곧 현실로 나 타났다. 인간 정신의 심층을 탐색하고자 하는 정신분석이론은 얼마가지 않아 대두된 히틀러에 의해 순수 아리안인종의 숭고한 영혼을 좀먹는 페스트균으로 분류되어 박멸 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은 물론 그에 연루된 모든 유태인들도 구라파 대륙에서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처럼 험악한 반유태주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정신분석의 운명은 유태인의 운명과 다를 바 없었다. 차라리 모르는게 약이라는 옛말도 있듯이 인간 내면의 추악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들어내 직면시키고 자 하는 정신분석의 방법론에 대해서 추악한 유태인 환자와 부도덕한 유태인 분석가 들이 공모하여 만들어낸 합작품 정도로 인식한다는 것은 진실을 대면할 용기와 배짱 이 없거나 비겁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추하다 아름답다 하는 것 자 체가 인위적이요, 상대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프로이트는 브로이어의 안나 O증례에 대 한 치료중단 경험을 들으면서도 그것이 치료자의 문제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는 점에 대하여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후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분석가 자신의 감 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고 치료자의 절제와 중립성을 특히 강조하게 되었다. 분 석가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해야된다는 그의 주문은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고는 마치 분석가가 거울처럼 차갑고 냉정하게 굴어야하는 것으로 잘못 인 식되어져 왔지만 본래 뜻은 그게 아니었다. 즉 치료자의 역전이를 경계하는 의미로 사 용한 비유였다고 본다. 분석가는 자신이 거울이 되어 환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춰 주면 되지 분석가 자신의 어떤 감정이나 생각으로도 오염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었다. 이처럼 경계의 대상으로만 인식되던 역전이는 Heimann(1950)에 의해 그 의미 가 확장되어 역전이는 거꾸로 환자를 이해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개 념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치료에 활용하는 추세로 바뀌게 된 것이다. 특히 경계성환자에 대한 분석 경험이 늘어나면서 이러한 개 념의 변화는 보다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러나 Heimann의 주장은 영국 및 남미 등
클라인학파가 우세한 지역에서 받아들여졌을뿐 정통 정신분석가들이 주도하는 미국에 서는 줄곧 거부되어왔으며 오히려 전통적 입장에서 이에 대응한 Annie Reich(1951) 의 견해가 크게 호응을 얻었는데 그녀는 주장하기를 분석에서 역전이현상이 아무리 불가피한 것이라 하더라도 프로이트가 경고한 바 처럼 분석가는 자신의 역전이를 극 복할 수 있어야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최근에 이르러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의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원조격인 페렌치의 상호분석(mutual analysis)이 관심을 끌고있 지만 정통분석가들은 아직까지도 인정하지 않고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Jacobs 199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클라인 및 위니코트 등 영국학파의 영향권안에 있는 분석가들은 역전이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치료적 활용에 열을 올 린바 그 영향으로 오늘날에 이르러 역전이는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역 으로 그것을 이용하자는 적극적인 수용자세가 보편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大家들의 逆轉移 경험 사례
1. 브로이어와 베르타 파펜하임
미국 클라크대학에서 행한 유명한 강연의 서두에서 Freud(1909)는 비록 의례적인 말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정신분석의 효시는 분명 자신이 아니라 요제프 브로이어임을 밝혔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가 치료했던 안나 O는 기억해도 브로이어를 기억 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않다. 브로이어는 유태인 출신의 개업의로서 프로이트보다 14 년 연상이었다. 그는 한때 물심양면으로 프로이트를 후원하였는데 兩人 공저(1895) 로 [히스테리아 연구]를 출간한 이후 이론적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별하고 말 았다. 만약 그가 계속해서 프로이트와 협조하여 정신분석의 발전에 기여했더라면 그야 말로 역사적 기록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히스테리 연구와 치료에 치를 떨며 손을 떼고 말았는데 그러한 결정으로 이끈 주 된 장본인이 다름아닌 안나 O 증례로 알려진 Bertha Pappenheim(1859~1936)이 라는 한 맹렬 유태인 여성이었다. 베르타 파펜하임은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사회사업 가로서 근대여성운동의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여걸이었다. 그녀만큼 투쟁적인 여 성은 아마 로자 룩셈부르크 정도일 것이다. 물론 룩셈부르크 역시 유태인 출신으로 스 파르타쿠스단을 이끌고 혁명을 주도하던 중에 백주대로상에서 극우단체의 테러로 인 하여 비참하게 학살당하고 말았지만 파펜하임 역시 그에 못지않은 지적인 맹렬여성이 었다. 1936년 5월 28일 그녀가 사망했을 때 유명한 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손수 추도 문을 쓸 정도의 명성을 누린 인물임을 고려한다면 그녀가 바로 그 유명한 안나 O였을 까 의심이 들 정도다. 부버는 추도문에서 이렇게 썼다.“기지가 뛰어난 사람이나 정열 적인 사람은 흔치 않다고들 한다. 그러나 기지가 뛰어나면서도 정열적인 사람은 더욱
드물다. 베르타 파펜하임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고.
그녀의 복잡한 증상과 치료과정을 여기서 자세히 논할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분명 한 점은 브로이어가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도 않은채 치료를 갑자기 중도에서 포기하 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한 치료는 카타르시스 요법과 최면요법이 전부였다. 우여곡절 끝에 증상이 호전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안나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 며 브로이어 박사의 아기를 낳고 있다고 호소한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밤마다 환자의 집으로 불려가 그녀의 침대머리맡에서 환자와 씨름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않던 브로 이어의 아내 마틸데는 두사람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브로이어로서는 기 가 막힐 노릇이었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부 부생활의 위기를 감수해가면서까지 치료를 계속할 의사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 브로이 어는 치료중단을 결심하였고 안나는 배신감에 치를 떨 수 밖에 없었다. 안나의 증세는 전이적 사랑에 의한 현상으로 판명되었지만 한동안 안나는 다른 정신병원을 전전하며 권위적인 정신과의사들과 신경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기 록은 보이지 않는다. 평생을 두고 베르타 파펜하임은 분석가를 증오하였다. 그녀는 남 은 여생을 정력적인 사회활동에 바쳐 불행한 여성들의 지위향상을 위하여 혼신의 힘 을 다하였지만 결국 그녀 자신도 결국 안나 O의 악몽에서 빠져 나오지는 못한 것 같 다. 물론 안나의 강력한 성적 전이현상 앞에서 브로이어 자신이 흔들렸고 드디어 아내 보다 더욱 큰 관심을 환자에게 기울임으로서 안나를 고무시켰으며 동시에 아내의 신 경과민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물론 당시로서는 역전이에 대한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던 시기였지만 브로이어의 경험담을 전해들은 프로이트는 직감적으로 환자와 치료자 양측 모두가 관련된 문제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개념들은 꿈의 해석에서 예로 든 [이르마의 주사 꿈]에서도 아직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프로이트 자신의 역전이를 시사하는 꿈이라는 점이 분명하지만 분석 초창기에는 전이 개념조차 확립되기까지 상당한 시간 이 걸렸다. 브로이어는 환자의 신원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안나 O라는 가명을 사용 하였지만 왜 하필이면 O라고 명명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점에서 우리는 브로이 어 자신의 역전이 감정을 시사하는 또 하나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 포르노 소설 [O양 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클라이스트의 소설 [후작부인 O]의 예에서도 보듯이 서구 문 학사에서 O라는 익명이 지닌 의미는 상당히 외설스러운 연상을 불러 일으키는 철자법 이다. 이러한 호칭은 성적인 의미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 심지어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도 한동안 물의를 일으켰던 [O양의 비디오]사건에서 보듯이 섹스와 관련된 곳에는 반 드시 O라는 익명이 등장한다. Freud(1900)의 유명한 [이르마의 주사 꿈]에서도 이 르마의 벌린 입속을 들여다보는 프로이트의 모습이 얼마나 성적인 자극을 불러일으키 는 장면인지 프로이트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며 특히 창녀들의 구제운동에 몸바친 베르타 파 펜하임의 헌신적인 삶의 이야기는 바로 자신의 갈등과 약점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승 화시켜 나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한 증거로 제시될 수 있다고 본다. 프로이트와 거의 동년배로서 같은 시대를 살다간 베르타 페펜하임, 그녀의 삶에서 분석경험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해를 끼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녀의 후반기 삶에서 나 름대로 성공적인 승화의 과정을 밞아 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2. 프로이트와 증례 E, 도라 그리고 안나
1) 증 례 E
프로이트가 기록한 최초의 역전이는 앞서 예로 든 [이르마의 주사 꿈]에서 드러난 다. 프로이트 자신도 그 꿈은 꿈을 꾼 자의 자기변명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후 엠마 를 분석하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역전이 반응이랄 수 있는 성적 불안이 나타나는데 당 시 엠마 엑슈타인(1865~1924)은 정치에 관심이 많던 30세의 지적인 여성이었다.
그의 친구 플리스는 베를린에서 유명한 이비인후과 의사였는데 1895년 2월 엠마의 코를 수술하면서 자신의 이론인 [코와 생식기 사이의 연관성]을 입증해 보이고 싶어 했지만 수술은 실패였다. 프로이트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플리스와 똑같은 실수를 저 질렀는데 잘못된 수술의 후유증 때문에 기인한 출혈을 히스테리성 출혈의 증거로 잘 못 오인하고 속으로는 무척 기뻐했던 것이다. 이와같은 일련의 실수와 경험들을 통하 여 프로이트가 내린 결론은 히스테리 환자의 성적전이에 따른 분석가 자신의 역전이 감정을 지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게된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프 로이트의 핵심적 이론이 정립된 1895년과 1900년사이 5년간 치료한 남성환자 E씨 에 관한 분석기록을 프로이트가 출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단지 플리스와의 서신교 류에 의하여 확인할 수 있는 환자 E의 존재는 프로이트의 아버지 야곱 프로이트의 죽 음만큼이나 초기분석이론의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사실이다(Masson 1985).
당시 그 자신이 신경증적 증상에 시달리던 프로이트로서는 E씨를 분석하면서 자신 과 동일한 문제의 핵심에 도달한 것으로 믿고 자가분석을 병행하면서 이러한 결과들 을 플리스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 프로이트는 E씨의 분석경험에서 자신과 E씨, 그리 고 외디푸스 사이에 공통점이 있음을 확인하고 모든 노이로제의 핵심에는 외디푸스적 갈등이 놓여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환자, 치료자 모두에서 깊이 억압하 고있던 초기모자관계의 갈등은 전면에 부각된 부자관계에 프로이트가 집착하는 태도 를 보임으로서 그 실체가 명확히 드러날 수 없었는데 이러한 점이야말로 환자 E와의 전이-역전이 관계에서 야기된 제약을 프로이트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고 본다. 즉 E를 통하여 프로이트 자신의 핵심적 갈등이 의식화되려는 것에 저항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프로이트가 취했던 것 같다. E의 분석은 비록 잔여증상이 일부 남
아있기는 했지만 부활절에 때맞춰 종결을 보았다. 부활절에 맞춘 점도 이채롭다. 아버 지의 사망후 프로이트는 자가분석과정을 통하여 자기에 대한 철저한 탐색기간에 들어 갔으며 본인도 고백한 바와 같이 자신의 노이로제 증상들이 부친사망후 사라졌다는 것이고 또한 E의 분석이 종료되면서 플리스와의 관계도 시들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E 와 프로이트, 아버지, 외디푸스, 플리스 간에는 절묘한 역동적 관계가 존재하겠지만 주 목할 사실은 이들 가운데 여성이 빠져있다는 점이라 하겠다. 어머니, 아내 마르타, 처 제 미나, 스핑크스 등은 주된 관심의 영역에서 소외되어 있는데 오히려 이점이 의미심 장하다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초기이론은 그 자신의 역전이 경험에서 비롯된 요인 들이 적지않다고 본다. 프로이트는 E와 함께 부친 사망후 악몽에서 깨어나 다시 부활 한 셈이다. E는 바로 프로이트 자신의 분신인 셈이었던 것이다.
2) 도라 분석
무엇보다도 프로이트로 하여금 뼈저린 실패의 경험을 안겨준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도라 증례였다(Freud 1905). 이 증례를 통하여 프로이트는 치료자가 환자의 전이는 물론 자신의 역전이 감정을 무시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 여주었다. 따라서 지금 이순간에도 모든 정신분석연구소에서는 도라 증례를 분석교육 과정의 필독서로 지정하고 있을 정도다. 한마디로 불과 18세의 어린 소녀가 40대 중 반의 노련한 분석가를 마음대로 농락한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1900년 10월 도라가 그를 찾아왔을 때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을 입증할 수 있는 증례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던 참이었다. 마침내 비밀의 문을 딸 수 있는 열쇠를 찾은 기분에 들뜬 프로이트는 그 기쁨을 편지로 동료 플리스에게 전하고 있다. 이처럼 성급한 마음 자체가 이미 치 료상에 역전이로 작용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고 본다. 결국 프로이트는 도라 의 전이 저항을 극복하는데 실패한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본다면 자신의 실 수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러한 내용을 증례로 공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학자적 양심과 용기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도라의 분석은 프로이트에 있어서 환자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동기보다는 자신의 이론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의 확보에 더욱 몰 두하게끔 함으로서 결국 치료의 중도 탈락을 야기하였지만 그후에도 도라는 별다른 어려움없이 잘 지냈다는 후담이다.
3) 안나 분석
프로이트는 자신의 딸 안나를 분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상식으 로는 무척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멜라니 클라인은 한때 계속하여 이 사 실을 붙들고 늘어지며 안나의 분석가로서의 자격시비 논쟁을 일으킨 바 있지만 당시 프로이트로서는 아킬 레스건을 건드리는 대목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대가라 하더라도 어떻게 아버지가 딸을 분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지금도 풀리지않는 수수께끼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안나는 평생동안 결혼도 하지않고 오로지 아버지를 위하여 헌신 하였으며 그의 과업을 인수받아 정신분석의 맥을 이어나가는데 공헌하였다. 아버지와 정신분석을 위하여 자신의 개인적 행복을 희생한 것이다. 그들 부녀간의 외디푸스 콤 플렉스를 본인들도 모를리 없었을 것이다. 또한 프로이트의 처제 미나와의 미묘한 관 계, 역시 서로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아내이며 안나의 어머니인 마르 타 베르나이스가 차지하고 있던 위치 또한 애매모호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의 위치를 대신 점령해버린 딸 안나에 대해서 마르타는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안 나는 1918년에서 1921년까지 아버지로부터 분석을 받았다. 참고로 말하면 Freud (1919)는 딸 안나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매맞는 아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안나의 분석내용을 다루었다. 놀랍게도 그 내용은 외디푸스 주제에 의한 매저키즘을 다룬 증례였다. 그러나 정신분석 초창기에는 현재와 같은 교육분석의 규정이 마련되지 않았던 시기이며 또한 당시는 서로 빤히 아는 처지끼리도 분석이 시행되던 때이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안나의 분석에 시비를 벌였던 클라인도 제자인 위니코트의 두 번째 부인 클레어를 죽을 때까지 분석하였으며 동시에 자신의 아들 에리히의 분석을 위니 코트에게 의뢰하기도 하였다. 카렌 호나이도 자신의 막내딸 레나테를 분석한 바 있다.
또한 아동분석으로 유명했던 헤르미네 폰 후그 헬무트가 자신의 조카를 분석한 바 있 으며 공교롭게도 바로 그 조카의 손에 살해된 사건은 정신분석의 역사에서 두 번 다시 기억하고싶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다.
3. 융과 자비나 슈필라인
1977년 제네바의 정신분석 연구소 지하실에서 한 끔찍한 내용의 기록들이 발견되 었다. 그것은 1908년부터 1912년 사이의 자비나 슈필라인의 일기와 프로이트, 융, 슈 필라인 사이에 오간 수많은 편지들이었다. 그러한 기록들이 우연히 발견됨으로서 그동 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융과 자비나 사이에 벌어진 어떻게 보면 처절하기까지한 분 석의 실상이 드러나게 되었다(Carotenuto 1982). 자비나 슈필라인(1885~1941)은 러시아의 돈강 주변에 위치한 부유한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상당한 엘리 트였던 어머니의 본을 따라 의학을 공부하였지만 일생동안 여자와 유태인이라는 두 가지 지독한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녀는 심한 히스테리 증세 때문에 융에게서 치 료를 받았는데 회복된 후에는 정신분석에 몰두하여 1911년 [정신분열 사례의 심리적 내용에 관하여]라는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그러나 점차 자신의 열등감 과 내적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포자기하는 방향으로 흐르다가 1941년 여름, 로스 토프를 점령한 나치독일군에 의해 다른 유태인들 틈에 끼여 유대교 회당으로 끌려갔 으며 그곳에서 두 딸과 함께 학살당하고 말았다. 자비나가 항상 꿈꾸었던 아리안과 유 대인의 결합은 이처럼 끔찍스런 홀로코스트라는 방식을 통하여 실현된 것이다. 그녀의
부모대에서 좌절된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결합에 대한 소망은 프로이트와 융의 교류로 거의 이루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융과 슈필라인의 사랑은 비극적인 사랑이었다. 그들 간의 사랑은 전이와 역전이가 한데 어우러져 나타난 현실적으로는 금지된 실현될 수 없는 환상적 욕망의 분출이었다(Stephan 1992).
그렇다면 융은 왜 유태인 여성에 이끌렸을까? 서구문명의 몰락에 실망한 융의 심성 가운데에는 동양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컸던 것 같다. 동양신비주의사상 및 종교에 심취하거나 인도를 여행하거나 아메리카 인디언부락을 찾아 연구한다거나 만다라에 몰두한다든지 등의 행적을 보면 그의 주된 관심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 수 있다. 검은 머리의 유태인여성에 대한 흥미는 그러한 측면뿐만 아니라 융으로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장벽, 즉 프로이트를 정복할 수 없는 대신 그와 같은 유태인인 자비나를 대타 로 하여 성적으로나 지적인 우위의 입장에서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다는 융 자신의 나 르시즘적 전지전능감을 만족시켰던 것 같다. 슈필라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융은 메시아 를 살해한 유태인을 언급함으로서 슈필라인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아픔을 주기도 했 다. 융은 독일어로 젊음을 뜻하고 슈필라인은 순수한 유희를 뜻하는 말이다. 슈필라인 의 지그프리트 환상은 유태인으로서의 결함을 순수독일계인 융을 통하여 승화시키고 싶은 그녀 자신의 욕구를 나타낸다. 융에게 작은 소년 지그프리트를 선물하고 싶다는 자비나의 소망은 집요할 정도로 강렬하였다. 융은 여자친구를 뜻하는 독일어 Freun- din을 Freudin으로 철자를 잘못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Freudin은 Freud를 여성화시 킨 단어이다. 즉 융은 프로이드를 계집애로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융의 꿈에 나 타난 지그프리트에 대해서 그 자신은 그럴듯한 신화적 의미를 이야기 하였지만 전후 맥락에서 살펴보면 자비나에 대한 역전이 꿈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또한 지그프리트 는 발음상으로도 프로이트의 이름인 지그문트와도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나 슈필라인 의 환상은 무참히 깨져버렸다. 그리고 끝내 여성과 유태인이라는 되물릴 수 없는 조건 과 씨름했던 이 비운의 여성은 두 딸과 함께 때마침 로스토프를 점령한 파시스트들에 이끌려 유대교당에 갇힌채 나치들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1941년 어느 여름날의 일 이었다. 그 시간에 융은 아름다운 스위스 호반에서 혼자 조용히 사색 중에 있었다. 천 국과 지옥의 대비가 너무도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슈필라인이 비참하게 죽고난 후에도 융은 전혀 동요함이 없이 영예롭고 평온한 삶을 지속해 나갔다. 그런 점에서 역시 융은 대가다운 면모를 지녔다고 볼 수 있겠다.
4. 페렌치와 그로덱의 상호분석
페렌치가 프로이트와 결별한 시점은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프로이트 입장에서는 페 렌치가 주장한 새로운 분석기법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었다. 즉 분석가가 수동적인 위 치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 분석가는 아버지 역할보다 어머니 역할
을 수행한다는 점, 분석가만이 해석을 하는게 아니라 환자도 치료자를 분석하고 해석 할 수 있다는 주장 등이었다. 이중에서 프로이트로 하여금 가장 격분케 한 점은 바로 상호분석이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프로이트는 페렌치가 자신의 역전이를 제대로 극 복하고 있지 못함을 지적하였지만 페렌치는 수긍하지 않았다. 오늘날에 와서도 환자와 치료자가 서로를 분석한다는 사실은 상당한 위험 부담을 안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또한 현실적으로도 쉽지않은 기법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페렌치는 왜 이 런 무리한 주장을 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원래 페렌치는 능동적 분석치료를 주장하다가 치료가 여의치않자 상당히 낙담이 컸던 차에 때마침 그로덱과의 교류를 통하여 이완기법으로 흘렀고 그후 상호분석 쪽으로 나아갔다.
Nasio(1994)에 의하면 페렌치와 그로덱간에 이루어진 상호분석은 프로이트에게는 상당히 곤혹스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게오르크 그로덱은 당시 바덴바덴에 자신의 대형 진료소를 차리고 있던 소문난 실력자였다. 프로이트로서는 정신분석에 관심을 기 울인 그로덱의 존재가 반가웠겠지만 야심많은 그로덱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발상이라고 믿고있던 내용들이 간발의 차이로 프로이트에게 선수를 빼았겼다 는 억울한 느낌을 마음 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그 뿐 아니다. 페렌치가 자신이 치료하 던 환자 엘마를 사랑하였듯이 그로덱 역시 자신의 환자 에미 폰 보이크트와 사랑에 빠 져 결혼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페렌치와 그로덱이 의기투합하게된 배경에는 그와같은 공통점이 서로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1911년 프로이트가 클 라크대학의 초청으로 미국방문길에 올랐을 때 융과 페렌치가 동행한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그때 선상에서 그들은 서로의 꿈에 대해 분석을 하였다는 것이 융의 주장이 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페렌치는 거기서 힌트를 얻었을까? 물론 이것은 추측에 불 과한 것이지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최근 출간된 프로이트와 페렌 치간에 주고받은 [서한집 제2권]은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즉 페렌치가 프로이트 에 대해 분석을 제안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당연히 프로이트는 일언지하에 거절 했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스승을 분석하겠다는 발상부터가 신기하게만 느껴진 다. 그들 사이는 그토록 자유스러웠을까? 프로이트가 지적한대로 페렌치는 전이와 역 전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융과 마찬가지로 페렌치 역시 상징적 아버지 프로이트 를 지배하고 능가하려는 차원을 넘어 상호분석을 통하여 아버지의 권위를 해체하고 심리적 살인이나 마찬가지인 저의를 드러낸 것은 아닐까.
한때 자신의 딸 마틸데의 신랑감으로까지 생각했던 페렌치로부터의 분석 제안은 장 인 후보 프로이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임에는 틀림없겠다. 그러나 프로이트 자 신도 딸 안나를 분석하지 않았는가. 페렌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후 페렌치에게서 분석받은 멜라니 클라인은 그 문제를 가지고 계속해서 비인의 프로이트 부녀를 괴롭히며 골탕을 먹였던 것이다. 프로이트 입장에서는 이들 항가리의 상징적
부녀 때문에 무척이나 속을 끓였을 것 같다. 비인에서 보면 변방에 불과한 부다페스트 로부터의 거센 도전앞에 프로이트조차 난감해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페렌치의 결혼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페렌치는 자신이 치료했던 환자 젊은 엘마를 사랑한 끝에 그녀의 어머니 기젤라를 간신히 설득하여 약혼까지 하는데 성공하였으나 프로이트가 그 결혼을 강력히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페렌치는 8년 연상의 기젤라와 결혼했지만 그들 사이에 아이는 없었다. 그가 아내로 원했던 엘마는 마침내 자신의 딸 이 되고 말았다. 그후 페렌치는 아버지가 되어본 적이 없다. 결코 아버지를 능가해서 는 안된다는 무의식적 명제를 실현한 것일까. 페렌치는 그대신 멜라니 클라인을 키움 으로서 프로이트에 강력히 대적할 수 있는 여전사를 배출해내었다. 그야말로 기묘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하여간 Ferenczi(1985)의 임상일기는 그의 특이한 주장을 실제 분석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하게 되었는가 하는 궁금증을 풀어주는 유일한 기록임 에 틀림없다.
5. 라이히의 성치료
빌헬름 라이히는 수수께끼처럼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그의 삶은 마치 그의 도발적 인 성격은 물론 자신의 유태인 신분처럼 전체 서구사회를 마구 헤집고 다닌 삶이었다.
일정한 국적도 없이 정처없는 방황만을 거듭하다 살고간 라이히의 삶이야말로 그 자 신의 정체성 혼란을 여실히 보여준다. 국적불명의 라이히. 정체불명의 라이히. 그에게 분명한 것은 인류 공통의 코스모폴리탄적인 정치와 섹스 뿐이었다. 성의 해방과 공산 주의는 그의 유일한 신앙이었다.
그는 당시에 오스트리아-항가리제국에 속했던 갈리시아지방의 부코비나에서 유태 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카르파티아산맥에 위치한 변방출신이었던 라이히는 불미스 런 사건에 뒤이은 어머니의 자살과 아버지의 病死로 한꺼번에 부모를 잃고난후 비인 에 유학, 처음에는 법대를 들어갔으나 곧 의학으로 전향하여 비인의대를 졸업하였고 친 구의 권유로 프로이트 문하생으로 들어가 정신분석운동에 가담하면서 동시에 공산주 의운동에도 몰두하였다. 프로이트의 지도와 페르귄트에 대한 연구로 정신분석가가 되 어 주로 베를린에서 활약하던 중 나치의 대두로 덴마아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지로 망 명생활을 전전하다가 간신히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였으나 파행적인 언행과 사이비 의료행위로 기소되어 옥사한 인물이다.
빌헬름 라이히는 스스로 프로이트 이론의 정통 계승자임을 공언하면서 네오프로이 디안 및 자아심리학을 싸잡아 수정주의자들로 몰아부쳤다. 그는 성해방론자임을 자처 하면서 베를린에서 섹스폴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때는 러시아에서의 공산주 의 실험에 열광하기도 했다. 그의 천재적인 두뇌는 자타가 공인하는 터였지만 좌충우 돌하는 라이히의 성격은 주위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 십상이었다. 그는 정신분석
학계로부터는 위험한 공산주의자일뿐 아니라 극단적인 성해방론자로 경원시 되었으며 나치당국으로부터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위험한 반체제 유태인 극렬분자로 몰려 결 국 북구라파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으며 소련 당국으로부터는 반동적인 분석학자 및 퇴폐적인 성이론가로 몰려 사상적으로도 좌우익 모두에게서 위험한 기피인물로 낙인 찍히는 불행을 겪었다. 결국 그가 택한 종착지는 미국이었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우여곡절 끝에 겨우 미국동부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라이히의 기인적 언행과 진료행위는 미연방 식품의약국에 의해 기소 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결국 미연방 교도소에 수감되어 복역 중 사망하였다(Robinson 1969).
라이히의 성치료는 어찌보면 위험하기까지 하다. 물론 도덕적인 시각에서 볼 때 그 렇다는 뜻이다. 극단적인 성의 해방논리도 그렇다. 라이히는 무엇을 주장하든 극단으 로 치닫는다. 이는 무엇으로도 씻어낼 수 없는 자신의 출신성분에 대한 분노요 부정이 며 반동형성이다. 그는 억압적인 기존체제의 모든 것을 전복시켜 버리고자 하였다. 그 러한 그의 어찌보면 무모하다싶은 시도들이 모두 실패하자 좌절의 늪에 빠진 라이히 는 자신의 주위에 온통 보이지않는 음모들이 깔려있는 것으로 투사하는 피해망상증에 빠져든 것 같다. 그의 천재성을 고려해 볼 때 무척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라이히 의 전기를 연구한 Sharaf(1994)에 의하면 라이히는 어릴때부터 엄격하기만한 아버지 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었으며 아버지로부터 학대받는 불쌍한 어머니에게 항상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녀가 자신의 가정교사와 불륜의 관계에 빠진 현장을 목격하 고는 극심한 분노와 질투심으로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고자질하였으며 그러한 사건직 후에 가정교사는 쫓겨났으며 아버지의 추궁과 비난을 견디다못한 어머니가 급기야는 음독자살하고만 사건이 벌어졌다. 아버지도 그 충격의 여파로 오래지않아 병사하고 말 았으며 그일로 라이히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 씻을 수 없는 상처 를 받았고 부모를 모두 잃게되는 시련을 겪게되었다. 도대체 인간의 섹스가 무엇이길 래 그토록 불행한 비극을 야기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는 어린 라이히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될 수 밖에 없었다.
비상한 머리를 지닌 라이히는 남동생의 도움으로 의대를 졸업하기는 하였지만 그의 마음 깊숙이 자리잡은 불신과 죄책감은 평생을 두고 그를 괴롭힌 주범이 되었다. 항상 주위 남성들을 공격하고 저주하면서도 여성들만을 편애하는 그의 기벽은 이러한 부모 와의 쓰라린 아동기 상처에서 비롯된 결과인 것 같다. 그의 성격무장이론도 자신의 경 험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이며 특히 과격한 성해방의 이론 또한 학대받고 억압된 어머 니의 성적 갈등과 그로인한 비극적 사건을 목격한 그 자신의 어릴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성인이 된후에도 라이히는 무절제한 성적 방종을 공공연하게 과시하곤 하였는데 마치 그의 어머니가 못다 이루고간 한을 아들이 대신 풀어주기라도 하듯 동료들의 부 인과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부도덕한 행동에 대한 비난을
희석시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동료분석가들의 은밀한 부도덕성을 폭로하는 자세를 보 였는데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이 라이히의 성격구조상의 미숙함은 물론 초자아의 형성 에 의문을 갖게하는 단서가 되기도 하였다. 하여튼 라이히는 자기와 같은 천재를 알아 보지 못하는 세계를 경멸하였으며 자신이 처한 기구한 운명의 덫을 달리 설명할 방도 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저서 [들어라, 소인배들아]는 그러한 라이히 자신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고 있다. 말년에 아이슬러 박사와의 대담은 라이히 자신의 피해의식이 어 느 정도인지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비도덕적일 수도 있는 환자와의 성적 접촉을 다른 동료 분석가들에게 투사하는 양상도 보이는데 라이히는 자신의 성적 역 전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않고 있다. 진정한 중립성을 유지하는 치료자라면 적어도 그러한 측면에서 자신의 문제도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토 론
브로이어는 안나 O의 전이현상과 자신의 역전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함으로서 자신 의 부부관계에까지 불똥이 튀기 일보 직전에 느닷없이 치료를 종결하고 말았다. 안나 O라는 골치아픈 짐을 벗어던진 후 브로이어 부부는 기분전환 및 새로운 충전을 위한 여행을 떠나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일방적으로 치료자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는 안나 O는 그후에도 상당기간 정신과의사들을 전전하며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뛰어난 사회사업가로서의 승화된 여생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정신분석의 이론 은 프로이트에서 발단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기법 면에서의 공로자는 단연 안나 O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겠다. 대화요법이니 굴뚝청소니 하는 용어들은 그녀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기 때문이다(Breuer와 Freud 1895). 프로이트의 초기 이론이 정립 된 배경에는 증례 E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공식적인 기록으로 출간되지는 못하 였지만 프로이트 자신과 거의 비슷한 노이로제 증상 및 심리적 갈등 구조를 보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프로이트가 스스로 자가분석에 몰두하던 시기와도 일치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프로이트는 자신과 E 모두에게서 외디푸스적 갈등의 고 리를 발견하고 이러한 발견을 즉각적으로 친구 플리스에게 여러번(정확히 16번) 보고 하였다(Davis 1990).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프로이트가 증례 E의 분석경험을 발표하 지 않기로 한 결정 자체가 자신의 분신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자신과 공통된 문제점을 드러내 보인 증례 E에 대하여 프로이트가 어떠한 유형으로든 역전이적 반응 을 보인 것으로 생각된다. 프로이트는 도라의 치료에 실패함으로서 환자의 전이뿐 아 니라 분석가의 역전이도 분석의 진행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실감하였다. 우선 프로이트의 문제는 학문적 과욕이었다. 성인이 아닌 사춘기 소녀라는 점이 프로이트로
하여금 자신의 이론적 정당성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새로운 증거 확보에 마음이 급급 하도록 유인했을 것이다. 따라서 도라의 딱한 처지를 공감하고 도와준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욕심이 더욱 앞서있었기 때문에 민감했던 어린 도라가 원숙한 대가 프 로이트를 골탕먹이는 결과를 자초했다고 본다. 어리다고 만만하게 본 것이 프로이트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패경험을 은폐하지않고 솔직히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며 공개한 점은 후학들에게 크나큰 귀감이 되고도 남는 태도라 하겠다. 또 한가지 납득이 되지않는 점은 프로이트가 자신의 딸 안나를 분석한 것인데 멜라니 클라인은 한동안 이 문제를 물고 늘어져 프로이트 부녀를 괴롭히기도 했던게 사실이다. 프로이트의 아킬레스 건이라 할 수 있는 친딸의 분석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같은 이야기로 남아있지만 실제로 안나 프로이트의 삶 자체가 희랍고전의 비 극에 나오는 주인공과 같은 일생을 살면서 아버지를 위해 희생적이며 헌신적인 삶을 바쳤다. 프로이트가 안나에게 즐겨 부르던 [나의 안티고네]라는 애칭처럼 그녀는 어머 니의 위치를 대신 차지하고 평생동안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프로이트 부녀야 말로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생생한 자료의 역할을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칼 융은 실제로 환자 치료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연구성과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 였던 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와 결별하기 이전에 융이 분석한 자비나 슈필라 인에 관한 기록은 융의 저작에서 철저히 삭제되었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은 물론 학자 들까지도 그들의 관계에 대해 무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슈필라인의 일기 는 물론 융과 프로이트, 슈필라인간에 서로 오간 편지들이 발견되면서 융과 환자사이 에 벌어진 지독한 전이 및 역전이의 실상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유태인이었던 자비 나는 두딸과 함께 나치독일에 의해 학살되었기 때문에 이미 오래전에 사람들의 기억 에서 사라져버렸지만 그녀가 융에게 보인 환상 및 집념은 가히 전율적이라고 할만하 다. 자비나의 가장 강렬한 소망은 융의 아이를 갖는 것이었는데 지그프리트 환상이 바 로 그것이다. 유태인의 징벌적 신분에서 벗어나고 순수 독일혈통을 나누어 갖는 것이 자비나의 욕망이었다. 융은 이처럼 보기드문 강렬한 욕망의 유태인 여성을 치료하면서 묘한 지배욕과 전지전능감을 즐길수 있었다. 주인과 노예의 헤겔적 변증법과 같은 치 열한 전이 및 역전이의 시소게임을 통하여 융과 자비나 양자의 마음이 모두 상처투성 이가 되고 말았다. 프로이트와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면 융은 이같은 자신의 실패 경험 을 철저히 은폐시켰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자비나는 융과 프로이트사이의 역동적 관계에서 태어난 희생양이라고 할 수도 있다. 특히 융 자신의 프로이트에 대한 갈등이 자비나의 지그프리트 환상을 대하는 융의 태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 나 융은 역시 대가였다. 격렬한 자비나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엠마 융과의 관계는 흔 들림없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본처와 애인의 구분이 있었던 것처럼 융은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페렌치의 상호분석은 정통분석기법의 기초를 뿌리부터 흔드는 중대 사건이었다. 분 석가의 중립성과 투명성을 누누이 강조한 프로이트로서는 페렌치가 능동치료를 내세 울 때부터 이미 불길한 조짐을 깨닫고 역전이 가능성에 대하여 수시로 주의를 환기시 키려 했지만 페렌치는 그에 동조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가 치료하던 젊은 여성환자와 결혼하고자 했을 때 프로이트가 반대하면서 결국 페렌치는 환자의 어머니와 결혼하고 말았는데 이것이 페렌치로 하여금 평생을 두고 젊은 여성에 대한 강박적 추구를 포기 할 수 없도록 이끌었다. 프로이트는 한때 자신의 사위감으로까지 생각할 정도로 페렌 치를 아꼈지만 딸이 페렌치를 거부하고 다른 남자를 선택함으로서 프로이트의 꿈이 무산되고 말았는데 이러한 복잡한 삼각관계가 페렌치는 물론 프로이트에게도 감정적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판단된다. 페렌치가 그로덱과의 긴밀한 유대관계로 이어지기까 지에는 이와같은 페렌치와 그로덱의 프로이트에 대한 미묘한 감정적 앙금 및 저항감 이 작용했다고 본다. 한편 페렌치는 멜라니 클라인을 분석하고 이론적 대가로 키움으 로서 안나를 내세운 프로이트에 맞서게 만들었다. 비록 페렌치는 악성 빈혈로 죽어가 면서도 끝까지 프로이트의 신변 안전을 걱정하며 영국으로의 망명을 권유했을 정도로 신의를 지켰다는 것이 당시 부다페스트에서 직접 페렌치를 목격했던 클라라 톰슨 등 이 전하는 증언이지만 오히려 어니스트 존스의 기록에는 페렌치가 이 당시 편집증적 피해망상을 지녔던 상태로 왜곡하여 보고하였다(Bonomi 1999).
라이히는 일생동안 성문제에 집착하면서 한때는 섹스폴 운동을 통하여 성-경제학 의 이론을 대중적 차원에서 노동자를 위한 치료운동으로까지 확대시키려 애쓰기도 하 였다. 그의 성격방어 개념은 뛰어난 업적이었지만 근육이완법을 이용한 성치료는 자신 의 어렸을 적 어머니의 불륜과 자살, 그에 따른 라이히 자신의 죄의식 및 피해의식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성적 스캔들과 성장한 이후 라이히가 보여준 성 적 스캔들 사이에는 분명한 역동적 인과관계가 개입되어 있다고 본다. 자신의 성적 문 제를 동료들에게 투사하여 마치 동료 분석가들이 환자들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농락하 는 것처럼 발언하며 비난함으로서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도 가장 큰 골치거리가 되기 도 하였다.
결 론
이상에서 고찰해본 바와 같이 역전이현상은 긍정적, 부정적 경험을 막론하고 분석 및 치료과정 전반에 걸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결정적 요인임을 알 수 있다.
비록 프로이트가 자신의 실패 경험 때문에 역전이에 대하여 특히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경계의 대상으로 파악하였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오히려 역전이를 통하여 더욱 신속하게 환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공감적 감정이입도 긍
정적 역전이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들도 있다. 더욱이 경계성 환자들의 치료경험이 쌓 여가면서 역전이의 치료적 활용 문제가 더욱 활발히 논의되어져 왔다. 오늘날에 와서 소위 대가들로 알려진 정신분석의 선구자들이 어떤 시행착오의 과정들을 겪어 왔는가 에 대하여 논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의 실패와 좌절이 결국 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 크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로부터 배울 점이 얼마나 많은지를 실감하기 때문이다. 심층적인 임상치료를 시도해 본 사람일수록 전이와 역전 이의 강력한 위력을 실감하고 이러한 논의의 필요성에 공감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임 상 경험 없이 피상적으로 환자를 이해하고 있거나 형이상학적으로만 심리적 갈등 문제 를 파악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러한 논의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위대한 인물들의 업적에 흠집내기 정도의 저급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시도로 오해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정한 발전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단계를 거치며 이루어진다고 볼 때,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뒤돌아 본다는 사실이 생각처럼 그렇게 손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우리는 지난날의 대가들에 대 해서도 어떤 환상을 갖고 싶어한다. 그러한 환상에는 우리 자신들의 소망과 콤플렉스 도 함께 실어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환상을 깨고싶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존재 기반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두려움 을 우리가 마주하는 환자들도 경험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전이와 역전이 현 상에 대한 논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치료 경험에서 우리가 귀가 닳도록 듣게되는 수많은 성공사례보다는 단 한건의 실패한 증례경험이 보다 진 정한 교훈과 각성을 가져다준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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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Countertransference of Psychoanalytic Masters
Byung-Wook Lee, M.D., Ph.D.
In the history of psychoanalysis, theoretical and technical development have not been always coincided. There were many changes in the theory and viewpoint about transference and countertransference. Really in the pioneer days of psychoanalysis, a number of the distinguished pioneers, themselves, had many trial and errors.
Their agony and weak point as a human also have been involved in such changes.
But the transference and countertransference experiences of psychoanalytic masters are very suggestive now to us. Needless to say, their successful practices are important, but their clinical failure is more valuable and instructive to us. To err is human!
The genius or masters also have many conflicts and weakness as a human. In my viewpoint, rather excessive our mystification of them seems to be neurotic attitude.
Even though Breuer, Freud, Jung, Ferenczi and Wilhelm Reich were the most eminent pioneers in the history of psychoanalysis, but they also have been become the target of many controversial disputes. After hundred years’ war of psychoanalysis, our updated attitude is desirable to be more neutralized.
The issue I presented here is not their theoretical aspects, but their countertransference experiences in analytic settings, and I have no intention of defaming their honor at all.
We rather should bear in mind that nothing great is ea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