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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강6

감성과 오성 사이 한국 미술사의 라이벌 -

제 주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과장과 방불1 . ( ) 제 주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2 . 2 (과장과 방불) 제 주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 사의론과 사실론3 . ( ) 제 주 소정 변관식과 청전 이상범 분방과 평담4 . ( )

이중섭과 박수근 격정과 과묵( ) 제 주 종합 토론5 .

강 연 : 이 태 호 명지대학교 교수 ( )

강연 사회 : 이 영 수 명지대학교 강사( ) 토론 사회 : 이 주 현 명지대학교 교수( ) : 이 인 범 상명대학교 교수( ) 이 영 수 명지대학교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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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감성과 오성 사이 한국 미술사의 라이벌 -

제 주 2 _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2 과장과 방불

( )

제 강 감성과 오성 사이6 - 한국 미술사의 라이벌

생애와 예술활동

I. ……… 7 회화사에 남긴 업적

.

Ⅱ ……… 12

(3)

의 예술활동과 업적 檀園 金弘道

이 태 호 명지대학교 교수( )

옛 화가 가운데 한국회화사를 대표하는 민족적 古典樣式의 완성 자를 찾자면 단연, 檀園 金弘道(1745-?)가 떠오른다 그만큼 우리. 땅과 사람 그리고 대지에서 자라던 식물이나 동물의 모습을 정확, 한 묘사력으로 아름답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김홍도는. 謙齋 鄭敾 에 이어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정조 재위

(1676-1759) . (

시절에 주로 활동하였고 영조 재위 말 1776-1800) , ( 1724-1776) 부터 순조 재위( 1800-1834) 초까지 ‘國中의 화가 로 명성을 날렸’ 다 그 때문인지. 畵員 출신이면서도 비교적 많은 公私의 문헌기록 에서 김홍도의 이름이 확인된다.

김홍도에 대해서는, 일찍이 고유섭과 김용준부터 1960-70년대 최순우와 이동주까지 미술사적 위치와 예술세계에 대한 평가가 이 루어졌다.1) 1980년대 들어 새로운 사료와 작품들이 속속 발굴되었 고 연구도 깊어졌다 김홍도의 생애와 활동상이 적잖이 밝혀졌고, . , 당시 문화계의 위상을 규명하는 노력도 이어졌다.2) 지금까지 축적

1) 高裕燮, 朝鮮名人傳 第 卷 朝鮮日報社2 , , 1939; 高裕燮 全集, 2, 通文館, 재수록, 341-348 , 단원 김홍도 조선시대 신천지

1993; 金瑢俊, : 畵界 巨星, , 1950. 1-2; 近園 金瑢俊 全集

열화당 재수록

3, , , 91-128 , 2001 .

2) 崔淳雨, 金弘道在世年代攷, 미술자료 11 ,호 국립중앙박물관, 1966. 12; 檀園 金弘道 韓 21, 중앙일보사 재수록, , 189-192 , 1985; , 이라는 , 우리나라

李東洲 「 」金 檀園 畵員

의 옛그림, 박영사, 57-114 , 1975; 이동주 지음, 우리나라의 옛 그림, 학고재 재수록, ,

(4)

된 김홍도 연구 의 성과를 훑어보면 새삼 김홍도의 위대함이 부각‘ ’ , 된다 먼저 김홍도가 당대의 문화지형을 결정하는 데 미친 영향이. 다 변형과 과장이 심한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을 현장사생을 통한. 사실적 표현으로 변모시켰고 풍속화를 회화 경향의 중심으로 부상, 케 했다 이를 포함하여 김홍도가 이룩한 전 영역의 회화형식은 그. 이후 화가들의 교과서가 되었다 김홍도의 회화는 우리 미술사에서. 민족회화의 전형으로 그 가치를 발한다고 볼 수 있다.

김홍도를 키워낸 사회 또한 문화적 저력이 탄탄했다 김홍도는. 이른바 제 때 를 만나 천부의 재능으로 예술적 금자탑을 쌓은 셈이‘ ’ 다. 18세기 영 정조대는 양란으로 인한 전후복구가 완비된 가운데, 일시적으로 정치적 안정을 보였다 대외적으로는 폐쇄적이었으면서. 도 對淸 ․ 對江戶의 국제교류 속에서 西學이나 西敎같은 문물의 유 입도 새로운 자극이었다 농업과 상공업 발달에 따른 경제력 성장. 을 계기로 부를 축적한 서민층과, 中人계층이 새로운 교양인으로 부상했던 시기이기도 하다.3) 김홍도 같은 화원도 문인들과 교류의 폭이 넓어지고 역관으로, 巨富가 된 金漢泰의 후원이 따르기도 했 던 것이다.

김홍도와 수원 화성 의 인연은 정조대 최대 프로젝트인( ) ‘華城 건 설 이라는’ 大役事의 추진과정에서도 확인된다. 화성사업에 소용된 각종 畵役에 김홍도가 참여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김홍도는 《華城春秋八景圖》처럼 화성의 풍광을 그렸다. 園幸乙 를 위시한 의궤와 기록화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또 정. 卯整理儀軌

조의 아버지 莊獻世子(1735-1762)의 능원 이전에 따른 능침사찰 와 판화 등 다양한 화성 관련 龍珠寺 大雄殿 後佛幀畵 父母恩重經

중앙일보사

1995; 李泰浩, 金弘道 眞景山水畵, 檀園 金弘道 韓國 21, , 201-212 ,

노트 국립중앙박물관

1985; 兪弘濬, 檀園 金弘道 硏究 , 檀園 金弘道 , , 109-122 , 1990; 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 화가 열화당 진준현 지음 단원 김

, - , , , 1998; ,

柱錫 檀園 金弘道

홍도 연구 ,일지사, 1999외에 많은 논저와 도록이 있다.

3) 강만길, 朝鮮後期 商業資本發達 ,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3(7 ); 강명관, 조선후기 여항문 학 연구, 창작과 비평사, 1997;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1998; 정옥자 외,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 돌베개, 1999 참조.

(5)

제 주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2 _ 2 (과장과 방불)

유물들을 거론할 때면 으레 김홍도가 언급되곤 한다.4) 동시기 화가 중 화성에 남긴 화적이 가장 많은 인물이 김홍도일 것이다.

생애와 예술활동 I.

김홍도의 자는 士能이고 호는, 西湖 ․ 檀園 ․ 醉畵士 ․ 丹邱 등이 다 본관은 김해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문인화가. . 豹菴 姜世晃 에게 그림을 배웠다 하며 두 사람 사이의 돈독한 우 (1713-1791) ,

의는 ‘忘年忘位’의 경지로 발전하며 평생 지속되었다.5) 김홍도가 圖 에 들어간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10대 후반쯤 학생으로 시작했 畵署

을 것이다. 1765년 21세 때 영조가, 10월에 베푼 행사장면을 담은 제작에 참여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景賢堂受爵圖> .6)

이후 김홍도는 화원의 고유 직분에 속하는 御眞 제작에 세 번이 나 참여하였다 그 첫 번째가. 1773 (29 )년 세 때 영조어진과 왕세손

정조 의 초상 제작에 참여한 일이었다

( ) .7) 두 번째는 1781 (37 )년 세 영조어진의 모사와 정조어진 작업이었고, 세 번째는 10년 후인 년 세 정조어진 제작이었다 첫 번째는 일반화사로 참여하

1791 (47 ) .

였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主管畵師가 아닌 同參畵師 자격이었다. 두 번째는 선배인 韓宗裕 아래서 세 번째는 후배인, 李命基 아래서 어진제작에 참여하였다. 김홍도가 20대부터 40대까지 거의 10년 주기로 어진 제작에 발탁되었으나 명성과 달리 주관화사로 한 번, 도 선정되지 못했음이 확인된다 한편 세 번 모두 정조 어진과 관. 련 있다는 점은 김홍도와 정조 사이의 특별한 인연을 방증하는 것

4) 오주석, 정조 연간의 회화 -화성과 관련하여, 근대를 향한 꿈, 경기도박물관, 124-137 , 에서 매우 개략적으로 소개된 바 있다

1998 .

5) 姜世晃, 豹菴遺稿 卷4, 檀園記(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영인본248-251 )쪽 참조. 6) 吳柱錫, 앞의 책, 94 , 1998.

7) 承政院日記,乾隆三十八年癸巳 正月 二十二日壬子 晴 巳時

(6)

이기도 하다.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 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다.

삼십 년쯤 전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弘道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8)

위의 글은 1773년 왕세손 신분으로 초상화를 그렸던 무렵부터 말년까지 정조의 김홍도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음을 말해준다 과장, . 이 섞여 있겠지만 정조는 불시에 김홍도를 호출하곤 해서 그가 제, ‘ 집에 있는 날보다 궁 안에 있을 적이 많았다 고 한다’ .9) 이러한 사 정은 김홍도의 30대 이후 畵歷의 면면을 이해하는 밑거름을 제공 해 준다 김홍도는 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면서 강세황과 정조를. 만난 행운을 밑거름으로 비교적 탄탄대로 위에서, 畵才를 쏟아낸 예술가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활동상이 출중했던 만큼 김홍도는 여러 차례 도화서를 떠나 양반 직 벼슬에 임명되었다. 1773년 어진도사 후의 장원서별제를 시작으 로 사포서별제 ․ 와서별제 같은 벼슬을 받았다.10) 또 지방관으로 년 정월부터 년 월까지 년여 동안은 경상도 안기역의 1784 1786 5 2

찰방을 지냈다.11) 1791년의 어진도사에 참여한 공으로 그해 말부 터 1795년 초까지 만 3년간 충청도 연풍현감으로 재임하였다 그. 러나 중매나 즐기고 아전들에게 가축을 상납케 했으며 장정들을, 동원하여 사냥한 죄과 등으로 결국 불명예스럽게 현감직에서 물러 났다고 전한다.12) 이는 김홍도가 양반 벼슬아치로서의 자긍심을 과

8) 弘齋全書 卷7, 謹和朱夫子詩 金弘道工於畵者 知其名久矣 三十年前圖眞 自是凡屬繪事 皆使

弘道主之

9) 申光河, 震澤集 卷9, 題丁大夫乞畵金弘道; 吳柱錫, 앞의 책, 253쪽 주10, 1998.

10) 진준현 앞의 책, , 21-30 , 1999 참조.

11) 유홍준 앞의 논문, , 113-114 , 1990; 同著, 察訪시절의 檀園 金弘道, 월간미술 2월호 중, 앙일보사, 74-79 , 1995.

12) 연풍현감 재직과 관련된 내용은 吳柱錫, 앞의 책, 182-201 , 1998; 진준현 앞의 책, , 51-58 , 1999에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7)

제 주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2 _ 2 (과장과 방불)

용한 결과이기도 하려니와 당시 여타의 양반층 수령들의 행적을 본 뜬 듯하여 흥미롭다 어찌 보면 자신이 하고픈 대로 행동한 김홍도. 의 예술가다운 면모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교유관계의 폭이 확. 장되었음은 물론이요 화풍의 변화도 수반되었다.

김홍도의 회화세계를 일변시키는 계기는 1788 (44 )년 세 정조의 어명에 따라 선배인 復軒 金應煥(1742-1789)과 함께 嶺東과 金剛 일대의 에 나선 일이다 이때 김홍도는 회양에 머물던.

山 紀行寫景

스승 강세황과 잠시 조우하기도 하면서 수십 일에 걸쳐 백여 폭의 을 그렸다 초본을 토대로. 두루마리와 을 제작한

草本 絹本彩色 畵帖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당시의 완성본으로 확실시되는 작품은 전하 지 않는다 다만 장기간 동안의 직접적인 실경 체험 이후. 眞景山水 를 비롯한 산수화의 비중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년 정조 로 예정되어 있던

1789 ( 13) 冬至正使 李性源(1725-1790) 이 김홍도와 이명기를 冬至使行의 일원에 포함시켜 달라고 奏請하 여 윤허 받은 사실이 주목된다.13) 김홍도는 금강산과 관동지역에 이어 왕복 사행길에 평양을 비롯한 關西 일대의 실경을 만났을 것 이다 또한 당시 동아시아의 맹주국이었던 청의 발달된 문물을 접. 하면서 견문을 넓혔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성원의 일행은 다음해. 2 월 20일 귀국보고회를 가졌다 당시 정사 이성원은. 1789년 12월 일부터 이듬해 월 일까지 북경에서 있었던 일 중 중요한 사

21 1 19

건들에 대해 날짜를 밝히며 소상히 보고하였고 선물로 받은 전쟁, 기록화 <戰圖> 16폭을 진상하기도 했다.14) 그런데 김홍도가 이 사 행길에 그림을 그렸다거나 청 회화와의 영향관계 등 김홍도와 관련 된 다른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성원이 귀국 후 한. 달여 만인 4월 1일 세상을 떠났던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듯하다.15)

13) 日省錄 正祖十三年己酉 八月十四日條 性源以冬至正使啓言 金弘道 李命祺 今當率去 元窠無推

”; ,

移之道 金弘道則請以臣軍官 加啓請 李命祺則當次畵師外加定 率去 從之 承政院日記 乾隆五 앞의 책

; , , 170 , 1998.

十四年己酉 八月 十四日丁卯 條 吳柱錫

14) 正祖實錄 29, 正祖14년 월2 20辛未(영인본46 96 ). 15) 正祖實錄 29, 正祖14년 월 일4 1 辛亥(영인본 46117 ).

(8)

교유관계로 미루어 볼 때 김홍도의 행보는 동시기 여느 화가보다 도 폭이 넓고 두터웠다 위로 군왕과 사대부 문인으로부터 같은 처. 지의 중인과 화원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사대부 인사들은. 기본적으로 그림의 주문자로서 김홍도를 찾았고 지방관 재직 이후, 에는 詩會雅集을 함께 하는 風流客의 일원으로 만나기도 했다 우. 선 南人과 小北 인사들과 친밀했는데, 강세황을 비롯해 鄭範祖

형제 (1723-1801), 申光洙(1712-1775) ․ 申光河(1729-1796) , 李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김홍 (1708-1782), (1725-?) .

用休 鄭瀾

도가 그림 외에 詩書樂 같은 교양을 쌓고 자기 화풍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또. 李漢鎭(1732-1815), 李德懋 (1741-1793), 李

년 경 등 계열 인사들도

(1760 -?), (1735-1793)

光燮 徐常修 北學派

포함되었다 안기찰방 시절인. 1784년 8 ,월 김홍도는 흥해군수 成大

관찰사 봉화현감 등

(1732-1812), (1742-1806),

中 李秉模 沈公著

과 경상도 청량산에 모여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16) 또 이광섭은 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연풍현감을 지내고 있던 김 1792

홍도와 이한진, 黃運祚(1730-?) 등을 불러 청주에서 西原雅集을 가 졌다.17)

김홍도는 洪愼猷(1722-?)와 馬聖麟(1727-1798), 그리고 松石園 회원인 (1771-1849) 등 신분적 입장이 같은

詩社 朴允黙 閭巷文士

들과 친교했다. 1791년에는 그들의 시회 모습을 담은 <松石園詩社 를 그려주었다 이와 더불어 서화를 애호했던

> .

夜宴圖 徐直修

(1735-?) 洪儀泳(1750-1815), 南公轍(1760-1840), 曺允亨 등도 김홍도의 재주를 인정하고 교유했던 인물에 속 (1725-1799)

한다. 醫官 출신으로 서화와 골동을 수집했던 대수장가 金光國

이나 과 등도

(1727-?) 譯官 李敏埴(1755-?) 金漢泰(1762-1823) 적극적인 후원자였다.18)

16) 成大中, 靑城集 6, 淸凉山記; 吳柱錫, 위의 책, 129-133 , 1998.

17) 李奎象, 一夢稿 所收 幷世才彦錄,書家錄; 兪弘濬, 앞의 논문, 115-116 , 1990. 18) 김홍도와 해당 인물들과의 구체적인 교유 내용에 대해서는 吳柱錫, 앞의 책, 1998; 진준현 앞,

의 책, 71-107 , 1999 참조.

(9)

제 주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2 _ 2 (과장과 방불)

김홍도가 동시대에 활동했던 동료 혹은 선후배 화원 화가들 모두 일가를 이루었다. 1788년 금강산 사경에 동행했던 김응환 초상화, 로 이름난 卞相璧이나 申漢枰(1726-?) 등의 선배화가가 있는가 하 면, 동갑내기 동료화원 李寅文(1745-1822)이나 어진과 초상화를 합작했던 李命基(1756-?)가 그들이다 이들 속에서 특히 김홍도의. 화풍은 18세기 후반 화단은 물론 19세기 이후까지 영향력을 행사 하였고, ‘시대양식 으로서 확고한 위상을 다졌다 그만큼 김홍도는’ . 후배화원들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김홍도는 정조 시절 1783 (년 정조7) 확립된 差備待令畵員 의 운영에 참여하지 않았다 자비대령화원제도는 도화서 화원 중. 뛰어난 자들을 선발하여 奎章閣에 소속시키고 왕이 몸소 시험하고 관할하면서 중요 繪事를 담당케 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 화단에서. 내로라하는 화원화가들이 거명되었다 그런데 정조 재위 기간 동안. 치러진 祿取才에서는 단 한 차례도 김홍도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다 정조가 김홍도를 열외의 화가로 대우했기 때문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의문점도 없지 않다 순조대 들어서야 자비대령화원으로, . 差

되었지만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

19) 개성김씨나 인

동장씨 등 화원 가문의 형성에 따른 힘에 밀렸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19) 姜寬植, 朝鮮後期 奎章閣 差備待令畵員制, 澗松文華47, 50-97 , 1994; 同著 『, 조선후기 궁중화원 연구 : 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을 중심으로 상 하 돌베개, , 2001; 吳柱錫, 위의 책,

쪽 및 참조

24 216-226 , 1998 .

(10)

회화사에 남긴 업적 II.

조선후기 영, ․ 정조 연간은 미술뿐 아니라 역사 ․ 지리 등 국학과 실학 애정소설, ․ 사설시조 등의 문학 서예 판소리에 이르기까지, , 조선풍과 독창성이 두드러졌던 때이다.20) 그 중 회화 분야를 선도 했던 인물은 정선과 김홍도이다 정선이. 18세기 전반 영조대의 대 표 주자였다면 김홍도는, 18세기 후반 정조대를 평정한 화가였다. 김홍도는 딱히 어느 한 가지를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그림 영 역에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초상화와. 기록화 장식화 같은 실용화는 물론이고 사대부 민간의 요청에 따, 른 각종 감상화까지 두루 섭렵하며 神妙한 경지에 도달한 대가였 다 강세황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

고금의 화가가 각기 한 가지 능력을 떨쳤지 두루 솜씨를 겸할 수 는 없었는데, 金君 士能은 근래 우리나라에 나서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배워 못하는 것이 없으니 인물 산수 신선과 불교그림, , , 꽃과 과실나무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의 그림이 모두, , 妙品에 드는 데 이르렀다 옛 사람에 비한다 해도 거의 더불어 대항할 이. 가 없을 것이다.21)

김홍도가 다양한 제재를 다루면서도 각 부문의 발전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는 점에서 강세황의 상찬에 수긍이 간다 산수화의. 경우 초기에는 중국에서 유입된, 畵譜를 참조하여 그린 定型山水가 대부분이었으나 1788년에 가졌던 기행사경 체험 이후에 변화가 있

20) 이태호, 18-19 세기 회화의 조선풍 독창성 사실정신, 역사비평 계간23 , 1993 년 겨 울 이태호; , 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정신 , 학고재 재수록, , 11-39 , 1996.

21) 姜世晃, 豹菴遺稿 卷4, 檀園記 古今畵家 各擅一能 未能兼工 金君士能 生於東方近時 自幼 번역문은

治繪事 無所不能 至於人物山水仙佛花果禽蟲魚蟹 皆入妙品 比之於古人 殆無可與爲抗者

앞의 책 에서 재인용

, , 68-69 , 1998 . 吳柱錫

(11)

제 주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2 _ 2 (과장과 방불)

었다. 眞景山水의 비중이 증가하는 동시에 筆墨法도 一新하였다 김. 홍도는 18세기 전반 정선에 의해 정형화된 진경산수 화법을 계승 하면서 18세기 후반의 新風을 가미하여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정. 선과 마찬가지로 금강산과 관동지역 단양 일대의 명승지를 그리는, 한편 시야를 더욱 확장하여 <疏林明月>과 같은 평이한 경관까지 화면 속으로 끌어들였다.22) 또 과장과 변형을 통해 현장의 감동을 회화적으로 승화시킨 정선과 달리 김홍도는 시각적 사실성에 근사, 한 구도와 화법을 적용함으로써 대상 재현에 충실을 기하고자 했 다 이전 시대에 비해 널리 확산된 서양화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김홍도는 정선에 비해 치밀한 묘사를 추구하면서도 1795년 작 이나 1796년 작 에서 볼 수 있듯이

乙卯年畵帖 丙辰年畵帖

《 》 《 》

필묵의 농담과 강약을 자유자재로 변주할 수 있는 탁월한 기량의 소유자였다 아울러 맑고 해사한. 淡彩를 써서 서정적이면서도 감각 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여 정조대 문예계의 성격을 대변해 준다 정. 조가 건설한 신도시 화성의 경관을 대상으로 한 그림이나 판화도 이와 같은 진경산수의 범주에 속한다.

김홍도는 널리 알려진 대로 風俗畵의 예술성을 높였고 조선 사, 람의 인물표현의 고전적 전형을 완성시킨 장본인이다. 18세기 전반

와 같은 문인화가에 의해

(1668-1715) (1681-1761)

尹斗緖 趙榮祏

시도된 당시 사람들의 일상과 세태를 담은 그림이 김홍도에 의해 본격화되었다 정조 시절 풍속화는 상업경제의 발달에 따른. 中庶계 층의 부상을 기반으로 수요가 증대되었고 규장각 자비대령화원의, 녹취재에서 試題로 채택되는 등 상하를 막론하고 관심을 끌었다.2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檀園風俗畵帖》과 같은 김홍도의 풍속화에 는 비스듬히 俯瞰하여 인물의 자세와 동작을 정리한 원형과 사선

22) 이태호, 정선 진경산수화풍의 계승과 변모, 한국미술사논문집 1 ,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조선후기 회화의 사실정신 학고재 재수록

1984; 同著, , , , 83-108 , 1996; 同著, 金弘道

참조

, 204-212 , 1985 . 眞景山水畵」

23) 강관식 앞의 책 상 돌베개, , , 243-275 , 2001.

(12)

구도의 여유로움이 담겨 있다 근경에 뒷모습의 인물을 등장시켜. 관객의 시선과 일치시키거나 다른 장면으로 이동시키는 동선을 설 정했다 또 성별. ․ 계층 ․ 연령 ․ 직업에 걸맞도록 복식과 자세 표정, 등을 밀도 있게 포착해 냈다.24) 그리하여 당대인들로부터 “세속의 모습을 옮겨 그리기를 잘했는데 … 한번 그리기만 하면 사람들이 모두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외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25) 하거나 특히 당시 세속의 모습과 양태를 잘 그려 세상에서 라 일컫

“ 俗畵體

는다. 무릇 정신이 법도 가운데서 자유로이 훨훨 날아다니는 경 지”26)라는 평가를 받았다.

풍속화와 마찬가지로 인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詩會雅集圖나 분야도 빼놓을 수 없다 김홍도는. 40대 이전 초 道釋 ․ 故事人物畵

기에 주로 풍속화와 함께 신선도를 많이 그렸다 정조의 명을 받고. 궁중의 벽에 <海上群仙圖> 벽화를 그렸다는 기록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27) 대개 중국의 역사나 고전 문학에 등장하는 성현을 주제로, 삼은 고사인물화도 말년까지 꾸준히 제작하였다 감상용 도석. ․ 고 사인물화는 양란 이후 특히, 18세기를 전후하여 인기를 얻은 주제 였다 윤두서와 윤덕희 부자 그리고. , 沈師正(1707-1769) 같은 문 인화가에 이어 김홍도를 거치며 크게 발전하였다 정조대 자비대령. 화원 녹취재의 인물화 부문 화제로도 고사와 도석이 상당수 출제되 어 당시 화단의 유행을 짐작할 수 있다.28) 김홍도의 작품은 고사와 도석이 섞인 채 한 질을 이루고 있거나 도상이 모호하여 주제를 파 악하기 어려운 경향을 보인다 이는. 18-19세기 고사 ․ 도석인물화 전반에 걸치는 특징이기도 하다 도상뿐 아니라. 옷주름 표현 같은 세부 기법 면에서도 김홍도의 화법에 기댄 자취가 확연하다.29)

24) 이태호, 풍속화 ( ),둘 대원사, 6-39 , 1996. 25) 姜世晃, 豹菴遺稿 , 檀園記又一本.

26) 李奎象, 一夢稿 所收 幷世才彦錄,畵廚錄.

27) 趙熙龍, 壺山外史, 金弘道傳; 吳柱錫, 앞의 책, 252-253 ,쪽 주8, 1998 참조. 弘齋全書 1, 春邸錄 1에 실린 正祖詩 壁畵< >의 내용 역시 神仙圖에 관한 것이어서 英祖代에도 궁 중에 신선도 벽화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28) 강관식 앞의 책 상, , 137-243 , 2001.

(13)

제 주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2 _ 2 (과장과 방불)

김홍도는 花鳥와 翎毛 魚蟹, 를 다루는 솜씨도 탁월하였다 화조화. 의 경우 초기에 화원체로 꼼꼼하게 묘사하던 경향이 후기로 가면서 여유롭고 시정 넘치는 필묵과 담채의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 외. 에 정조대 간행된 서적의 삽도로 쓰인 판화와 용주사 후불탱과 같 은 정통 불화까지도 김홍도와 연관되는 작품으로 논의되는 데서

세기 후반 화단에서 차지하는 김홍도의 비중을 짐작케 한다

18 .

단원 김홍도의 생애와 예술적 자취는 김홍도가 조선후기 곧 전, 근대 시기의 전인적 예술가이자 교양인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타고. 난 천재성도 남달랐지만 자신의 여건에 맞는 시대를 만나 맘껏 기, 량을 뽐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김홍도의 회화세계는 년에 가진 금강산 을 전기로 삼아 대 이후 말년에는 그

1788 寫景 50

때까지 연마해온 각종 화제를 종합하여 독자적인 畵境을 구축하기 에 이른다 한 화면에 진경산수. ․ 풍속 ․ 화조 등 여러 소재를 결합 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면서 그 모든 요소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특유의 조선풍을 창출해낸 것이다 또 김홍도 이전의 진경. 산수에 형식적으로 등장했던 점경인물들이 구체적이고 자상한 일화 거리로 표현되었다 적절한 방식으로 새나 소 말 등을 배치한 점도. , 마찬가지이다. 결과적으로 《丙辰年畵帖》을 비롯한 50대 이후의 작품들에서 풍속이나 산수 혹은 진경산수라는 경계를 나눌 필요가 없는 김홍도만의 개성이 창출된 것이다, .

김홍도의 회화는 제재와 화풍 질과 양 면에서 당시 화단의 모범, 이자 전형으로서 당대 및 후대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엄치욱. ․ 김득신 ․ 김석신 ․ 신윤복 ․ 조정규 ․ 장한종 ․ 이재관 ․ 이유신 ․ 김 하종 ․ 백은배 ․ 이한철 ․ 장승업 등 김홍도 일파 를 형성시켰다 한‘ ’ . 편 일부에서 김홍도의 진작으로 간주하는 금강산 그림을 비롯한 수

29) 진준현 앞의 책, , 430-527 , 1999; 李京熹, 純高宗時代 道釋人物畵 硏究 , 동국대학교 대 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7; 이태호 박정애 이영열, 琳田 趙廷奎 小琳 趙錫晋 의 회화 , 전통회화 명문가 3인전 - , 동산방, 56-58 ,

小亭 卞寬植 」 『 琳田 小琳 小亭

2006. 11.

(14)

많은 임모본 금강산 그림들도 김홍도의 위상을 엿보게 하는 증거이 다.30) 덧붙여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김홍도의 贋作들이 존재하는 사실은 그의 이름이 지닌 예술사적 무게를 방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이태호 박정애, 단원 김홍도의 예술활동과 업적 그,

※ ・ 『

리고 화성』 『( 수원학 연구』4 ,호 수원학연구소, 2007)의 일부임.

30) 이태호,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여운 이풍익의 동유첩 에 실린 금강산 그림들- , 이풍익 지음, 이충구 이성민 옮김 , 東遊帖 ,성균관대학교출판부, 310-329 , 2005 참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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