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1. 마르크스
칼 마르크스는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창시자이며 변증법적 및 사적 유물론 그리고 과학적 경제학의 정립자이다. 라인 주의 프리에르 시에서 부유하고 교양있는 변호사의 가정 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태인이고, 1824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다. 마르크스는 프리에 르의 고등학교를 졸업한(1835년) 뒤, 본 및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하고 법률학을 전공했지 만, 특히 철학과 역사를 연구했다. 이 시기에는 아직 헤겔학파의 관념론자에 머물러 있었다.
베를린에서 청년헤겔학파 그룹에 들어간 그는 이 파의 극좌파에 섰으며 혁명적 민주주의 사 상을 다져 나갔다. 교수가 될 꿈을 꾸었지만, 당시의 반동정책을 고려하여 이를 포기하고 1842년 「라인신문」의 편집에 참가한 뒤 주필이 되어 이 신문을 혁명적 민주주의의 기관 지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그 활동과 이론연구에서 헤겔철학의 타협적 경향,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 그 원리 와 현실의 사회관계 및 그 변혁의 과제 사이에서 발견되는 불일치를 발견하고 헤겔로부터 이탈, 더 나아가서는 청년헤겔학파에도 만족하지 않고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으로, 또한 현 실에 관한 경제적인 연구로 나아갔다. 거기에서 그는 혁명적 민주주의로부터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로, 노동자 계급의 입장으로 혁명적 변화를 수행했다(1844). 이것이 일어났던 것은 유럽에 있어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진전과 실레지엔 지방의 섬유 노동자의 봉기 그리고 파리에서의 그 자신의 혁명적 투쟁에의 참가가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했다.
「라인신문」이 폐간된(1843) 뒤, 그는 파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동지와 함께 『독불연 감』(1844)을 편찬, 여기에 『헤겔 법철학 비판』, 『유태인 문제』를 발표하고, 그의 경제 학과 역사 및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성과 위에 서서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역할, 사 회혁명의 필연성, 노동운동과 과학적 세계관의 결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시기에 마르 크스는 파리에서 엥겔스와 만나게 되는데(1844), 이후 우정이 깊어져 활동을 같이 하게 된 다. 이 두 사람은 계통적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해 내며, 그 주요한 원리는 마르크스의
『경제학ㆍ철학 초고』(1844), 엥겔스와 공저한 『신성가족』(1845), 『독일 이데올로기』
(1845~1846) 그리고 마르크스의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1845), 『철학의 빈곤』
(1847)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르크스주의는 종합적인 과학으로서 그 구성 부분(철학ㆍ경제학ㆍ사회주의)이 통일적으로 표명되었다. 1847년에 마르크스는 브뤼셀에 살면서 여기에서 비밀결사 '공산주 의자동맹'의 기틀을 잡고, 그 제2차 대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대회는 마르크스와 엥겔 스에게 그 강령의 초안을 의뢰했다. 이렇게 해서 유명한 『공산당 선언』(1848년 3월 발 표)이 씌어지고,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 입장이 거기에서 열매를 맺어 여기에는 “새로운 세 계관, 사회생활의 영역을 포함하는 수미일관된 유물론, 가장 전면적이고 심원한 발전학설인 변증법, 계급투쟁 및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의 창조계급인 프롤레타리아의 세계사적ㆍ혁명적 역할에 관한 이론이 천재적인 명료함으로 풍부하게 드러나 있다”(레닌).
1848~49년의 독일혁명의 시기, 그는 「신(新) 라인신문」의 주필로 활약하고 혁명의 전선 에 서서 싸웠다. 이 혁명의 실패로 인하여, 그는 독일에서 추방당하고 런던으로 이주하여 이 지역에서 생을 마친다(1883년 3월 사망). '공산주의자동맹'이 해산(1852)된 뒤에도 노동 운동 활동을 계속하고, 1864년에 제1인터내셔널을 창립했으며 이 조직을 주재하면서 많은 나라에서 노동운동을 결합하고 그 운동을 상세히 비교하여, 비프롤레타리아적ㆍ전(前)마르 크스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을 통일시키면서 이들이 지닌 입장의 오류와 싸웠다. 모든 마르크 스의 활동은 그의 이론에 불가결한 재료를 제공했으며 그 이론의 발전에 공헌했다.
사회주의혁명과 계급투쟁, 부르주아 혁명에 있어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전술, 노동자와 농민 동맹의 필요성, 혁명에 있어서의 부르주아 국가기관의 파괴,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구 상 등이 거기에서 만들어졌다.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1850),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 뤼메르 18일』(1852), 그리고 파리 코뮨(1871)의 경험을 토대로 집필한 『프랑스에서의 내 전』(1871)에서 그 사상이 전개되고 있다. 『고타강령비판』(1875)에서는 과학적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견해가 더욱 발전된 형태로 설파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경제학에 주요 노력을 기울이고 전 생애를 거쳐 『자본론』의 집필에 전념했다.
이 저작은 경제학에 관한 획기적인 저서로 공산주의를 기초짓는 과학적 성과일 뿐만 아니라 유물론과 변증법에 있어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철학적 의의를 지닌다.
『자본론』은 마르크스 생존시에 제1권이 출판되고(1867), 제2권, 제3권, 제4권(즉 『잉여 가치학설사 Ⅰ, Ⅱ, Ⅲ』)은 사후 엥겔스의 손에 의해 편찬되었다(1885~1894). 레닌이 지 적하고 있듯이 『자본론』에 이르러 마르크스주의는 가설의 단계에서 과학적 단계로 확립된 것이다. 그 이전에 씌어진 『경제학비판』 서문에서 사적 유물론의 기본적 입장이 요약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해서 마르크스가 남긴 성과는 그 동료 엥겔스와 함께 이 후 역사 발전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2. 마르크스주의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기초가 다져지고 또한 그들의 사상에 서 출발ㆍ전개되었던 사상ㆍ학설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과학적 사회주의라고도 한다.
그 이론적인 기초를 이루는 주요한 것은 철학 영역에서의 변증법적 유물론 내지 사적 유물 론, 경제학 영역에서의 이른바 마르크스경제학(『자본론』)을 중심으로 하여 자본주의 사회 의 내부구조와 운동법칙에 대한 분석,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ㆍ사회과학적인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주장(노동자 계급을 주체로 한 사회주의 혁명과 그 사회 건설 에 관한 이론) 등이다.
이것들은 서로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으면서, 하나의 체계적인 사상을 형성하고 있다. 마르 크스주의의 사상과 학설이 다른 사상 및 학설과 구별되는 근본적인 특징은 그것이 '과학성' 과 함께 '계급성', '혁명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표방하고 나선다는 점이다. 마르크 스와 엥겔스는 종종 자신들의 사상 및 학설이 단순한 추상적 사변의 산물이 아니고, 노동자
계급을 그 현실적인 담당자로 하며, 그들의 해방 투쟁에 있어서 무기이자 지침이 되기도 한 다는 것을 역설한다. 이것은 바꾸어 말한다면, 그들의 사상 및 학설이 새롭게 등장한 노동 자계급을 선두로 한 전체 노동대중에게 그 해방의 모든 조건을 이론적으로 자각시켜 그들의 의식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이론적 노력의 산물이었음을 의미한 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과학 및 사상의 역사적인 유산이 올바르게 받아들여져 계승되지 않으면 안 된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주요한 사상적 원천 으로서 “인류가 19세기에 형성했던 3대 정신적 조류, 즉 독일의 고전철학, 영국의 고전경제 학,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들면서 마르크스주의야말로 그러한 역사적 유산의 가장 정통적인 계승자이며 비판적인 섭취자”라고 주장했다(『칼 마르크스』, 1914). 생시몽, 푸리에, 오웬 등 종래의 사회주의자들은 인류해방의 이상을 내세워 자본주의적 사회체제를 비판하기는 했 지만, 사회변혁을 위한 현실의 조건과 주체를 분명하게 밝히지 못했다.
이에 반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의 고전철학과 영국의 고전경제학에 대한 비판적 섭취 를 통하여, 종래의 '공상적'사회주의를 '과학성'을 갖춘 것으로 전화시켜 과학적 사회주의로 서 마르크스주의를 기초지었다. 이 세 가지의 사상적 원천은 동시에 다양한 사상ㆍ경제ㆍ정 치 등 인간생활의 세 가지 기본적인 측면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체계를 지닌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세 가지 주요한 구성부분을 이룬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은 단순히 자본 주의적인 사회체제 및 부르주아적 사상ㆍ학설을 비판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인류의 과학적인 유산, 민주주의적ㆍ휴머니즘적 전통을 계승하고 그것을 전면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그것이 과학성과 혁명성을 표방하는 한, 고정된 완결체계일 수 없으며, 지식과 사회 의 끊임없는 발전에 대응하여 실험과 실천에 의한 검증을 매개로 하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발전하고 있는 동적ㆍ개방적인 사상체계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후 사상체계의 구조와 성격의 파악방식을 둘러싸고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자 내부에서도 '과 학주의'에 대한 '정치주의'와 '인간주의', '교조주의'에 대한 '수정주의' 등의 여러 가지 분열 과 대립이 나타나, 그 극복이 과제로서 제기되었다.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확립된 후, 유럽으로부터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사회주의운동 및 민족주의운동의 지도 적인 이론으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후, 노동운동 및 혁명운동과의 결합이 실제적으로 강화되고 사회주 의가 과학으로부터 현실로 이행하는 시기에 접어들게 됨에 따라, 과학성보다는 계급성ㆍ당 파성ㆍ정치성이 강조되고, 또한 이론적 발전에 있어서도 분업적인 경향이 생겨나게 되었다.
19세기 말에는 카우츠키, 베른슈타인, 룩셈부르크 등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얼 마 지나지 않아 레닌은 수정주의적인 여러 조류와 싸워나가면서 '제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에 있어서의 마르크스주의'로서 레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도 한다.)를 확 립하며, 여기에 기초해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실현,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했다.
이후 사회주의운동의 국제적인 발전과 더불어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사회주의 국가의 공식적
인 지도이론이 됨과 동시에 사회주의 정당들의 중심적 이론이 되어 왔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한 마르크스주의의 일시적 경화, 스탈린 비판과 '비(非)스탈린화'의 진전, 중ㆍ소 논쟁, 모 택동사상에 기초한 '문화대혁명'의 전개, 토글리아티(P. Togliatti) 등의 구조개혁론, 이른바 '신좌익'의 등장, 소련 및 동구의 몰락,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 혁명 등, 그 내용은 매우 다양해지고 내부에 다양한 대립을 잉태하면서 오늘날까지 전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