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NICE, 제21권 제4호, 2003
입사
나는 1979년에 토쿠시마 대학의 전자공학 석사 과정을 졸업했습니다. 일본의 교육 시스템은 일류 대학에 들어가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을 꿈으로 하 는 교육으로 나 자신도 졸업 후에는 동경이나 오 사카의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 런데, 석사과정 1학년 때에 학생결혼을 하여 지도 교수께서 “아이가 있기 때문에 일, 연구를 전부 포 기하고 토쿠시마에 남는 것을 고려해보는 것은 어 떠한가”라고 하시며, 토쿠시마 지방의 니찌아화학 공업(주)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당시, 니찌아화학 공업(주)는 종업원 200명 정도(현재 약 3,000명) 로, 토쿠시마현 아난시에서 황화아연을 원료로 하 는 형광체 재료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전자공학이 전공인 나로서는 그 공장냄새와 송림 안의 가건물 오두막이 직장이었던 것에 망설였습니다만, 어쨌 든 일을 할 수 있으면 좋다라는 생각에 취직을 했 습니다.
훈련과정
소속부서는 부원 2명의 개발과로, 처음 다룬 일 은 갈륨인의 제품화였습니다. 대학에서의 연구도 꿈도 버리고 들어간 회사에서, 대학시절과 같은 반도체의 연구를 맡은 것은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처음의 5년 간은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석영을 용접하여, 많을 때에는 47리터 용량의 반응기를 만들고, 반응기체로 수소 실린더 2개, 산소 실린더 1개를 사용하여 실험을 했습니다. 석영의 반응관 안에서 갈륨과 인을 넣어 반응시키기 때문에 공기 가 들어가면 폭발합니다. 한달에 1회 정도의 폭발 이 일어나면 또 전부 다시 만들어야 했습니다. 폭 발도 큰일입니다만 정말 힘들었던 것은 용접이었 습니다. 아세틸렌 용접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어 렵고 위험을 옆에 두고 하는 연구였습니다.
간신히 3년 만에 제품이 되어 판매 들어갔습니 다. 당시, 연구개발, 제조, 판매, 품질 관리, 전부 혼 자서 했고, 화학회사이니까 반도체도 혼자서 판매 를 하였습니다. 혼자서 전부 했던 것은, 나중에 매 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점은 작은 회사의 좋 은 점입니다. 그러나, 판매처에 가면 시험은 해 주 지만 “타사와 같은 품질이다”, “타사의 반값이라 면 산다”라는 말을 듣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번은 상사에게 “판매가 되지 않기 때문에 갈륨 비소의 결정을 만들어 보자”라고 말을 하고, 마찬가지로 한 달에 1, 2회 폭발사고를 일으키며 3년째 제품 화했습니다만, 역시 네임밸류가 없어 판매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갈륨 알미늄 비소의 에피 웨이퍼를 만들어 보자”라고 말하고 액층 에피 성 일본화학공학회 제 68회 총회(2003년 3월 24일 토쿄대학) 특별강연 요지
나카무라 슈지
미국 캘리포니아대 산타바바라 분교 재료과 교수
장장치를 만들어, 4년 만에 적외 LED(발광다이 오드)까지 제품화했습니다만, 이것도 판매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달 총 판매액이 100만, 200만엔이지만, 회사 에 말한 대로 10년에 걸쳐 반도체 재료에서 발광 다이오드의 디바이스까지 3개를 독자로 제품화했 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는 “쓸모 없다”라고 하 여 10년째에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전 세계의 대기업과 유명대학이 청색 LED에 도 전하고 있었습니다만 지지부진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미 회사에서 필요 없게 되었으므로 “만들 지 못하면 회사를 그만둬도 좋다”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성공한 적이 없는 청색 LED에 도전해보 자고 결심하였습니다.
미국 유학
우선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창업자의 허가를 얻 기로 했습니다. 그 때까지 입사 4년째에 과장과 사 장을 설득해 간신히 산 1,500만엔의 슬라이싱기가 회사에 들어온 이래 연구비에 사용한 최고 금액이 었지만, 나는 창업자에게 “5억엔이 필요하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창업자는 단 한마디의 대답으로 좋다고 했고, 또 청색 LED의 결정 성장에 사용하 는 MOCVD(유기금속화학기상성장법)의 공부를 위해, 플로리다 대학에 1년간 유학을 시켜 주었습 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만, 창업자 이외에 회사에 서 제품화까지 한 것은 나 뿐 이었던 것을 창업자 가 인정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회사의 경영 상태가 좋았던 것도 다행이었습니다.
유학처에서 제일 도움이 되었던 것은 박사과정 학생에게서 ‘바보’ 취급받은 것이었습니다. “너 박 사학위 가지고 있느냐?”, “논문을 썼느냐?”라고 들으면 “없다”라고 말한 순간부터 테크니시언 취 급입니다. 테크니시언이라는 이유로 기술적인 미 팅에는 불리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는 박사학위 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연구자입니다. 나는 10년 간
이나 제로에서 연구하여 오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저에게 아이 수준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업신여 김을 당하고 보니, 돌아가서 성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녀석들에게 자랑해 주리라 결심하였습니다.
청색 LED 개발
귀국 후, MOCVD로 청색 LED 개발에 착수했 습니다. 재료는 셀렌화 아연과 질화 갈륨의 두 종 류이었습니다만, 1989년 당시의 전세계의 주류는 셀렌화 아연으로 질화 갈륨은 거의 논문에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질화 갈륨을 사용하면 청색 LED를 만들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른다는 논문은 있었습니다. 논문 쓴 박사를 보면서 플로리다 대 학 학생을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시판의 MOCVD 장치로는 잘 되지 않던 중에 이미 5억엔 중 3억엔을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기가 죽었습니다. 거기서, 일대 결심을 하여 장치 개조를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 과거 10년 간의 경험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전 중에 장치를 개 조해, 오후부터 반응을 시작하는 둥 대체로 잘 되 지 았았습니다. 외주하면 수개월씩 걸리는 것을 매일 매일 혼자서 가공·장치개조를 하여 마침내 1년 반 만에 Two-Flow MOCVD 라는 장치가 완성시키고, 기존 발표된 질화 갈륨 중에서 가장 좋은 결정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논문 을 쓸 수 있어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회사는 논문 발표를 금지하였습니다. 그 렇지만 이미 회사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의 명령규칙 전부 무시하고 논문을 내 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반도체를 모르는 회사 에서도 언젠가 발각될 것입니다. 그래서 발각되었 을 때의 대책으로 특허를 내 두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만 특허도 기본적으로 공개되는 특 허는 금지였습니다. 논문발표도 특허도 기업비밀 이 샌다는 이유였습니다. 난처해하고 있을 때, 특 허부에 신입사원이 들어왔기에 연공서열로 그에
NEWS & INFORMATION FOR CHEMICAL ENGINEERS, Vol. 21, No. 4, 2003…503
특/별/기/고
게 말했습니다.
“너 이것을 특허내라!”
“아니, 그렇게 하면 부장에게 혼나요”
“아니, 내가 전부 책임질테니 내라”
그는 고맙게도 내가 말한 특허를 전부 내 주었 습니다.
Two-Flow MOCVD를 사용할 수 있었던 1990 년 10월부터 퇴직하는 1999년까지 매년 논문을 5, 6건, 특허를 15~20건 냈습니다만, 마침내 1992 년경에 발각되어 버렸습니다. 아직 어두운 빛이지 만 청색 빛을 내는 질화갈륨의 논문을 칸사이 지 방의 대기업 직원이 읽고, 오사카 지사에 전화를 했습니다.
“니찌아씨, 대단한 청색 발광다이오드를 만들었 군요”
“우리는 그런 엄청난 연구는 아무도 하지 않습 니다. 무엇인가 착각하신가 보네요”
오사카지점장이 그렇게 전화를 끊은 1주일 후, 다른 메이커로부터 또 전화가 있어 지점장이 나에 게 전화를 했습니다.
“나카무라, 방금 칸사이의 대기업 가전 메이커 로부터, 청색 LED의 문의가 있었는데 알고 있나”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만, 마침내 다음 전화에서 발각되어 지점장이 논문의 카피를 손에 들고 나의 이름을 찾아냈습니다. 그 다음날 나의 책상 위에 커 다랗게 “회사의 허가없이 논문발표를 금한다”라고 붙여져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곧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유일한 인센티브가 논 문을 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사는 보람 으로 청색 LED의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국제학회에서의 만남
1993년 말에 밝은 청색 LED의 제품화에 성공 하여 국제학회에 자주 불리게 되고, 그때까지도 학회발표는 금지였지만 간신히 회사도 모른 척으 로 허락해 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제학회에서
여러 미국인과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너, 급료가 얼마냐?”
나의 수입은, 청색 LED의 제품화 이전의 연봉 500만엔에서 제품화로 배로 되어 1,000만엔이었습 니다.
“너, 그런 회사에 있지 말아라”
라고 많은 미국인이 말해주었습니다. 일본의 영 원한 샐러리맨은 이런 것이라고 대답하자, 이후, 나의 별명은 “Slave Nakamura”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전날 타나카씨가 노벨상을 타고나서, “샐 러리맨이지만 연구를 할 수 있으면 좋다”라고 하 는 발언을 하셨습니다. 일본에서는 그것이 보통입 니다만, 미국인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말이였습니 다. “Slave Nakamura”라는 말을 듣고 나도 점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에 보라색의 반도체 레이저도 제품화하여 퇴직을 생각하기 시 작했을 무렵, UCLA로부터 교수로 오퍼가 있어 생각 끝에 최종적으로 반도체 분야에서 전미국 1, 2위의 캘리포니아대학 산타 바바라 분교를 선택 했습니다.
미국에 와서
미국에 와서 느낀 것은 역시 대학의 교수가 전혀 다른 점입니다. 공대의 대부분의 교수는 기업의 컨 설팅을 하거나 벤처 회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할 수 없으면 대학 교수로서 고용되지 않습니다. 의 대의 교수가 의약품 메이커의 돈을 받으면, 일본에 서는 형무소행이지만 미국에서는 컨설팅이고, 개인 적으로 돈을 버는 것은 존경을 받습니다. 일본 대학 의 교수는 학술연구로 연구 인센티브가 없습니다.
공대 교수는 좀 더 기업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연구 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대학 교수는 박사과정 학생에 급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회사를 세우는 교수가 아니면 감당해내지 못합니다. 나는 현재 일본에서 말하는 석사이상의 학생 8명을 고용해 24만 달러, 504…NICE, 제21권 제4호, 2003
특/별/기/고
NEWS & INFORMATION FOR CHEMICAL ENGINEERS, Vol. 21, No. 4, 2003…505
특/별/기/고
조수 3명으로 21만 달러, 인건비만으로 년간 50만 달러입니다. 연구비 등으로 년간 1억엔을 모으지 않으면 도산입니다. 미국의 대학 교수의 제일 소중 한 일은 중소기업의 사장들과 함께 하는 모금입니 다. 일본의 대학도 이제 곧 법인화가 되어 같은 입 장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센티브
나는 타나카씨와 양극단으로 자주 비교됩니다.
같은 기업 연구자라도 나는 돈에 사로 잡힌 사람 이고 타나카씨는 그렇지 않습니다. 타나카씨는 훌 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야구 선수가 몇 개의 안타를 치든지, 몇 개의 홈런을 치든지 1,000 만엔 밖에 주지 않는다고 하면 모두 미국에 가서 합니다. 연구자도 같습니다. 일에 알맞은 인센티 브가 있어야 당연한 것입니다. 프로 스포츠보다 연구하는 쪽이 더 개인적인 일인데, 일본의 기술 자, 연구자는 돈을 말하면 안됩니다. 일본은 회사 가 제일로 개인은 어떻게 해도 좋습니다. 미국이 라면 완전히 반대입니다.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을 위해서 회사가 있습니다.
미국의 공대 교수는 거의 기업에서 온 사람들로 공학계는 기업에 있던 사람이 아니면 감당해 내지 못합니다. 일본은 완전히 반대입니다. 그렇지만 회 사를 모르면 기업과 공동 연구를 하려고 해도 어 렵다고 생각합니다.
자주 비교됩니다만, 시라카와 선생님이 노벨상 수상 후, 정년이니까 농업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거의 같은 년에 수상한 UCLA의 히이거 교수는, 정년이 없기 때문에 현역으로 열심히 교수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수상 10년 전에 도전성 플라 스틱 회사를 만들어, 수상 2, 3년 전에 제품을 판 매해 상당한 재산을 만들었습니다. 나의 생각입니 다만, 그에 있어 노벨상의 상금은 푼돈 정도겠지 요. 중요한 것은, 그는 현역으로 기업과 대학에서 능력을 살리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명예 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노벨상 수상자의 능력을 계속 살 려 주지 않으면 곤란하겠지요. 시라카와 선생님께 서 2, 3사 정도의 회사를 일으켜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일본의 대학 교수의 집은 소 박합니다. 미국의 대학 교수의 수입은 일본과 차 이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컨설팅과 벤처로 대저택 입니다. 부디, 학생 여러분은 미국 등지에 몇 년 정도 살아 가치관을 바꾸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제일 소중합니다. 그 다음에 전공의 공부입니다.
이것도 중요합니다.
맺음말
일본에서 제일 문제인 것은 교육입니다. 대학입 시가 제일의 암입니다. 반드시 시험을 없애기를 바랍니다. 시험이 로보트 인간을 만들어, 영원한 샐러리맨을 대량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제일 소중 한 청춘시대에 당연히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하면 얼마나 발전할까. 대학합격이 꿈이니까 입학 한 순간에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은지를 모르게 되고, 적당히 놀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안정 지향이 됩 니다. 그런데 인간은, 10년, 20년 같은 일을 하면 질립니다. 그래서 50세 가까이에 회사를 그만두고 벤처 회사를 세웁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대학생 이 합니다. 18, 19세와 50세의 어느 쪽이 강한지 아시겠지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게 하는 교육시스템으 로 개성을 발전시키고, 창조성이 있는 제품을 만 드는 것 같은 창조성이 있는 천재를 기르는 교육 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 래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 기사는 일본화학공학회 발행의 北學工學 67권 6호 346~347페이지(2003년 6월호)의 내용을 편집한 것입니다.
[편집:동아대 화학공학과 김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