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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아집첩( 漢 衕雅集帖)󰡕과 오세창의 시회활동(詩會活動) 연구

55) 김 예 진*

❙국문초록❙

󰡔한동아집첩󰡕은 오세창·김돈희·이도영·고희동 등의 서화가, 시인인 이기, 승려인 박한영, 역사학자 인 최남선 등 7명이 시회를 갖고 이를 기념하여 남긴 시회첩이다. 이들은 동인의 집을 돌아가면서 시회 를 가졌으며, 시회가 열릴 때마다 이를 기념하여 시회첩과 시회도권 등의 시서화 작품 등을 함께 남겼다.

이 시회의 결성과정과 활동내용, 그리고 작품의 제작과정 등은 오세창의 시고인 󰡔경고실음고󰡕에 전하고 있어 일제강점기 시회의 일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한동아집첩󰡕과 󰡔경고실음고󰡕의 기록, 그리고 시회에서 제작된 서화작품들을 살펴보면, 오세창이 활 동하였던 시회의 성격은 19세기말 여항시사의 계승, 방고적인 시회 문화, 은일지사를 표방하는 동인들의 태도 등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오세창을 비롯한 동인들 대부분이 기술직 중인집안 출신으로서 이들의 시회 활동은 육교시사의 전통과 방고적인 시회문화를 따르고 있으며,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 대에서도 지조를 잃지 않는 은일지사의 풍류를 추구하였다. 오세창·최남선·고희동 등은 근대문명을 섭 렵한 신지식층이면서도 고전과 민족문화의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시회는 이들이 전통과 고전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탐구하는 공간이 되었다.

[주제어] 오세창, 최남선, 박한영, 고희동, 한동아집첩, 경고실음고, 시회첩, 육교시사

❙목 차❙

Ⅰ. 머리말

Ⅱ. 한동아집의 결성과 󰡔한동아집첩󰡕의 제작

Ⅲ. 오세창의 시회활동과 그 성격

Ⅳ. 맺음말

* 고려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 heesoo2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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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동아집첩(漢衕雅集帖)󰡕은 오세창을 비롯한 7명의 서화가·학 자·승려 등이 시회(詩會)를 갖고 이를 기념하여 남긴 시회첩(詩會帖)이다.1) 위창(葦滄) 오세창(吳世 昌, 1864~1953)·난타(蘭坨) 이기(李琦, 1856~1935)·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1870~1948)·성당(惺 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7)·관재(貫齋) 이도영(李道榮, 1884~1933)·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67) 등 동인(同人) 7명은 1925년 1월 오세창의 집에서 한동아집이라는 시회를 가진 뒤 동인들의 시(詩)·서(書)·화(畵)를 모아서 시회첩을 제작하였다.2) 이 시회첩은 오세창의 집안에 가장(家藏)되어 전하다가 후손에 의해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되었다. 한동 아집을 주관하였던 오세창은 시회가 열릴 때마다 참석자와 특이사항, 그리고 자신의 시를 함께 기록 하여 󰡔경고실음고(竟沽室吟藁)󰡕라는 시고(詩稿)를 남겼다. 현재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이 시고는 오 세창의 시회활동·교유관계·서화창작 등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3)

본고에서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한동아집첩󰡕과 개인소장의 󰡔경고실음고󰡕를 비교 검토하여 한 동아집의 결성과정과 동인의 구성, 시회의 성격 등을 살펴보고, 아울러 이들이 시회를 기념하여 제 작한 또 다른 시회첩들과 시회도(詩會圖) 등을 통해 오세창을 중심으로 한 근대 문예인사들의 시회 활동 양상과 시회문화의 성격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Ⅱ. 한동아집의 결성과 󰡔한동아집첩󰡕의 제작

1. 한동아집의 결성 배경

한동아집의 결성배경에 대해서는 석전 박한영의 「한동아집서(漢衕雅集敍)」에 자세한 경위가 적혀 있다. 박한영의 서문에 따르면, 전통적인 예원(藝苑)이 황폐해지고 풍아(風雅)가 사라짐을 안타까워한 동인들이 1924년 음력 10월 북원초집(北苑初集)을 처음 결성하였고 같은 해에 원남이집(苑南二集)과 동원삼집(東園三集)을 연이어 가진 뒤 이듬해 초 서원사집(西園四集)에 이어 1월 15일 한성(漢城) 중

1) 오세창의 󰡔한동아집첩󰡕은 가전(家傳)되다가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되었으며 2001년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개 최한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특별전시를 계기로 처음으로 공개되었으나, 현재까지 본격적으로 연구된 바는 없 다. 근대 시사(詩社) 및 시회첩(詩會帖)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19세기 여항시사에 집중되어 있다.

2) 󰡔한동아집첩󰡕으로 미루어 오세창 등 7명이 가진 모임은 한시창작을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 삼는 시회의 성격을 띠었 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표제의 ‘아집(雅集)’이라는 용어 대신 ‘시회(詩會)’로 통칭하였다. 다만, 시 창작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여기적인 모임의 경우에는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그림들의 제목을 따라 ‘아회(雅會)’라고 칭하였다.

3) 오세창의 󰡔경고실음고󰡕는 오세창가에 전하고 있으며, 양선하, 「한국 근대기 서화계의 합작품 연구」(이화여대 석사학 위 논문, 2008)에서 처음으로 그 존재가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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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中部)에서 다섯 번째 모임을 개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한동아집이다.4) 그리고 이 시회에 모인 동인들이 시서화로 함께 꾸민 시회첩이 󰡔한동아집첩󰡕이다. 이에 대하여 오세창은 “정월 15일 눈 오 는 날에 나는 난타 이기·석전 박한영·성당 김돈희·관재 이도영·춘곡 고희동·육당 최남선을 나 의 집에 초대하였다. 이전의 모임을 이어서 한동원소집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어서, 오 세창이 대보름날 한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 동인들을 초대하여 시회를 열고 이를 한동원소집이라 한 것을 알 수 있다.5) 오세창의 한동아집에 참석한 동인은 <표 1>과 같다.

이름 생몰년 활동 분야

이기(李琦) 난타(蘭坨) 1856~1935 한학자

오세창(吳世昌) 위창(葦滄) 1864~1953 서화가·언론가

박한영(朴漢永) 석전(石顚)

법명:정호(鼎鎬) 1870~1948 승려

김돈희(金敦熙) 성당(惺堂) 1871~1937 서화가

이도영(李道榮) 관재(貫齋)

벽허자(碧虛子) 1884~1933 서화가

고희동(高羲東) 춘곡(春谷) 1886~1965 서화가

최남선(崔南善) 육당(六堂) 1890~1967 문학가·사학자

<표 1> 한동아집 동인 명단 7명

동인들의 구성을 보면 황현(黃玹, 1855~1910)·김택영(金澤榮, 1850~1927)과 함께 구한말 3대 시인 으로 불리는 이기부터, 김돈희·이도영·고희동 등의 서화가, 그리고 사학자인 최남선과 승려인 박한 영 등 나이·지위·활동 등이 제각기 다르다. 이들이 시회를 결성하고 수차례 모임을 지속할 수 있 었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오세창을 중심으로 이들의 교유관계와 1920년대 중반 무렵의 활동 양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한동아집을 주관한 오세창은 대대로 역관을 배출한 중인집안 출신으로, 부친 역매(亦梅) 오경석(吳 慶錫, 1831~1879)은 구한말의 대표적인 개화지식인이었다. 오세창은 의관 출신의 개화사상가인 대치 (大致) 유홍기(劉鴻基, 1831~?)를 가숙(家塾)으로 모시고 학문을 익혔으며, 가업을 이어 16세인 1879 년 역과에 합격하여 1880년부터 관직을 시작하였다. 부친 오경석과 스승인 유홍기를 통해 일찌감치 개화사상과 문물에 눈을 뜬 오세창은 1886년에 박문국 주사로 임명되어 󰡔한성순보󰡕 발간에 참여하였

4) 박한영, 「한동아집서」, 󰡔한동아집첩󰡕, 1925, “一自漢鼎覆餗以後, 漢上藝苑, 極至荒廢, 所謂渢渢風雅不可復見, 亦爲齎 志者, 咄咄深嘆久矣……然漢衕雅集, 不自雅集起因, 實自客歲小春之北苑, 初集焉耳, 且初集之起, 已提苑南二集之首, 簡固不足重言, 而歲將暮, 爲東園三集, 又今年頭, 爲西園四集, 及此上元, 爲五集於中府漢衕…….”

5) 오세창, 󰡔경고실음고󰡕, 1924~1925, “正月十五日雪中, 余招蘭陀石顚惺堂貫齋春谷六堂于敞廬, 續前會, 是曰漢衕元宵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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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독립협회가 결성되자 간사원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일심회에 가담하였다가 1902년 일본으로 망명하여 천도교에 입도하였다. 귀국 후에는 천도교가 발행한 󰡔만세 보󰡕의 사장이 되었으며, 1907년 윤효정(尹孝定, 1858~1939)·권동진(權東鎭, 1861~1947) 등과 대한협 회를 설립하여 한일합방 때까지 대한협회를 이끌었다.6) 그러나, 1919년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가 하여 옥고를 치른 후에는 서화와 전각 등 예술활동에 전념하였다.

오세창의 서화활동은 1911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서화교육기관인 경성미술원 서화미술회에 회 원으로 참여하는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7) 오세창은 1918년 5월 19일 일본인 화가들의 협회 조직과 전람회 등의 활동에 자극을 받은 서화가들이 서화협회를 조직하자 안중식(安中植, 1861~1919)·조석 진(趙錫晉, 1853~1920)·이도영·김돈희·고희동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8) 서화협회 전람 회에 왕성하게 작품을 출품하면서 전서(篆書) 연구에 몰두하여 자신만의 서체(書體)를 이 시기에 형 성하였다. 오세창은 서화단체의 결성과 서화교육기관의 설립 등에 활발히 참여하면서 서화가들과 교 유하였고, 특히, 안중식과는 3·1운동 다음날까지도 안중식의 사숙(私塾)인 경묵당(耕墨堂)에 나와 어 울릴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9) 따라서, 안중식의 경묵당을 드나들던 문하생 고희동·이도영이나 서 예가 김돈희·안종원 등과도 친목이 두터웠으리라 생각된다.

김돈희와 이도영은 안중식과 조석진이 잇달아 타계한 뒤 각각 서화협회 4대·5대 회장을 맡으며 화단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서화가들이었다. 이도영은 명문가 출신이지만 안중식 문하에 입문하여 그 림을 배웠고, 안중식을 통해 오세창을 소개받은 후 국민교육회·대한자강회·대한협회 등의 애국계 몽단체에서 활동하며 교과서 삽화와 소설 삽화 등을 제작하였다. 이도영은 오세창이 사장으로 있던

󰡔대한민보󰡕에 우리나라 최초로 시사만평을 그릴 정도로 애국계몽기의 출판운동에서 서화가로서 중요 한 역할을 선도하였던 인물이었다.10) 또한 안중식과 더불어 서화 교육가로서 후진양성에 참여하였으 며, 안중식이 타계한 뒤인 1920년대부터는 화단의 원로로 부상하였다.11)

안중식·조석진 등과 더불어 이도영이 교수로 있었던 서화미술회는 젊은 서화가들을 양성하는 교 육기관이면서 한편으로는 서화를 애호하는 지식인·정치가·실업가 등이 서화가들과 어울려 시회와 화평회(畵評會)를 갖는 사랑방 역할도 하였는데, 서화미술회를 출입하는 인사들 중에는 당시 한창 정 치활동을 하던 오세창과 동경유학생 고희동도 있었다.12) 고희동은 동경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서양화 가였지만 일본유학 중에도 방학에는 오세창·이도영 등의 서화가들과 어울렸으며, 안중식과 조석진

6) 오세창의 정치활동에 대해서는 김경택, 「중인층의 개화활동과 친일개화론」, 󰡔역사비평󰡕 23, 역사문제연구소, 1993, 255~258쪽.

7) 이승연, 󰡔위창 오세창󰡕, 이회문화사, 2000, 135~136쪽.

8) 최열, 󰡔한국근대미술의 역사󰡕, 열화당, 1998, 107쪽.

9) 김은호, 󰡔書畵百年󰡕, 중앙일보사, 1981, 91쪽.

10) 이도영의 인쇄미술에 대해서는 현영이, 「貫齋 李道榮의 생애와 인쇄미술」,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2004 참조.

11) ‘李道榮氏 長逝; 畵壇의 巨擘 三十년 동안 미술 진흥에 노력’, 󰡔동아일보󰡕 1933년 9월 23일자; ‘조선 화단의 거인 이도영 화백 長逝, 21일 夜 자택에서’, 󰡔조선중앙일보󰡕, 1933년 9월 23일자.

12) 김은호, 앞의 책, 47~48쪽, 58~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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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 후 이도영과 함께 서화협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한동아집에 참여했던 동인 가운데 주목되는 인물은 오세창과 함께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하 였던 최남선이다. 최남선은 우리나라 근대적 종합잡지의 효시를 이루는 󰡔소년󰡕(1908~1910)·󰡔붉은 저고리󰡕(1913)·󰡔아이들보이󰡕(1913)·󰡔새별󰡕(1913)·󰡔청춘󰡕(1914~1918)을 발간하는 등 근대문화의 소 개와 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역사학·민속학·문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인 물이다. 1910년대 최남선이 이끈 조선광문회와 신문관은 국수보존운동(國粹保存運動)의 중심이 되었 으며 당시 신지식인들의 출입이 빈번했던 곳이다. 특히, 고서수집 및 간행을 위해 설립된 조선광문 회는 민족운동가들과 문화운동가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였던 곳으로서, 오세창·고희동·박한영 등은 이곳을 출입하면서 한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이도영 역시 조선광문회의 고문으로 있었던 부친 이인승 (李寅承)과 삽화 제작과 관련하여 이곳을 드나들었던 다수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광문회 출입인사 들과 교류하였으리라 여겨진다.13)

최남선은 3·1운동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출옥한 후에는 낙산 중턱에 있는 일람각(一覽 閣)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장안의 시객들을 불러 모아 일주일에 두세 번씩 시회를 열었다.14) 최 남선은 금강산·지리산·백두산 등의 국토를 순례하고 기행문을 서술하면서 민족과 민족문화를 탐구 하였고,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1925)을 비롯한 단군론을 발표하면서 고대사를 연구하였다. 1920년 대 조선학을 주도하였던 최남선의 역사연구와 국토순례는 민족의 자아(조선/조선인)를 찾고 이를 통 해 민족문화를 부흥시키고자하는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한자문화권에서 조선이 갖는 독자적인 문화 적 위치를 찾는 작업이었기 때문에,15) 최남선은 오세창·이도영 등의 전통 서화가 및 한학자들과 공 통된 관심사를 형성하였을 것이다.

최남선의 국토순례 동반자였던 박한영은 일제의 한국불교 장악에 맞서 민족불교의 정통성을 지키 는 데 앞장서며 개혁적 성향의 불교유신운동을 광범위하게 펼쳤던 근대 불교계의 고승으로서, 이 기·오세창·김돈희·이도영·변영만·고희동·정인보·최남선 등 당대의 학계·언론계·문화예술계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유하였고 시문(詩文)에도 조예가 깊었다.16) 천도교도였던 오세창 역시 집안의 영향으로 불교에 깊이 심취해 있었으며 박한영과는 “늘상 침식을 같이 할 지경”으로 가까운 사이였 다.17) 박한영은 1922년 5월 불교청년운동의 주축인 중앙학림의 학장직에서 물러난 뒤 1926년 7월 서

13) 오영섭, 「朝鮮光文會 硏究」, 󰡔韓國史學史學報󰡕 3, 한국사학사학회, 2001, 83~85쪽, 124~130쪽; 1933년 6월 이도영의 타계 직전에 결성된 ‘이도영화회(李道榮畵會)’의 발기인 명단에는 서화가들 외에도 신문관 출입인사들이었던 송진 우·현상윤·김성수 등도 보여서 이도영과 문화계몽운동 인사들과의 교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현영이, 앞의 논 문, 38~41쪽.

14) ‘學界의 重鎭 六堂崔南善氏:駱山一覽閣에서 讀書昹詩로 消日, 時代日報로 죽을 쑨 륙당, 지금은 고유종교를 연구’,

󰡔동아일보󰡕, 1925년 8월 10일자.

15) 류시현, 󰡔최남선 연구󰡕, 역사비평사, 2009, 150~156쪽.

16) 성락훈, 「華嚴宗主 映湖堂 大宗師 浮屠碑銘幷序」(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 편, 「석전 정호 스님의 생 애와 행적」, 󰡔석전 정호스님 행장과 자료집󰡕, 2009, 104쪽에서 재인용).

17) 이동국, 「葦滄의 學藝 淵源과 書畵史 硏究」, 󰡔葦滄 吳世昌: 亦梅·葦滄 兩世의 學問과 藝術世界󰡕, 예술의 전당, 1996,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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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의 개운사 대원암의 불교전문강원의 강사를 맡을 때까지 경전연구와 국토 순례에 전념하였고, 1925년 6월에는 이능화·최남선 등과 함께 조선불교총서간행회를 발족하였다.18)

시회의 가장 연장자인 이기는 한말의 대표적인 여항시사인 육교시사(六橋詩社)의 일원으로 활동하 였던 한시단(漢詩壇)의 원로로서 19세기 말의 여항시사의 전통을 근대 시단까지 이어주는 역할을 하 였던 인물로 여겨진다.19) 또한, 고희동의 부친인 고영철(高永喆, 1853~?)이 육교시사 동인이었고, 오 세창의 부친인 오경석은 육교시사 동인인 강위(姜瑋, 1820~1884)·김석준(金奭準, 1831~1915)·김경수 (金景遂, 1818~?)와 깊은 친분이 있었으므로,20) 오세창과 고희동은 각각 부친을 통해 육교시사의 전 통을 계승할 수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이기·김경수·김석준·고영철·오경석은 모두 유명한 역관집 안 출신들이어서 19세기말 역관시인들의 교류가 대를 이어 이기·오세창·고희동 등의 한동아집까지 이어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기는 󰡔소대풍요(昭代風謠)󰡕·󰡔풍요속선(風謠續選)󰡕·󰡔풍요삼선(風謠三選)󰡕으로 이어지는 여항시선 (閭巷詩選)의 전통을 이어 중인들의 시집인 󰡔풍요사선(風謠四選)󰡕의 간행을 계획하였으나, 갑오경장 이후 계급이 타파되어 호응을 얻지 못하자 󰡔풍요사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내용을 다시 정 리하여 오세창과 함께 󰡔조야시선(朝野詩選)󰡕(1922)을 간행하였다.21) 이처럼 여항시단 전통의 계승에 힘썼던 이기와 당시 문예계 인사들 사이에서 명망이 있던 오세창은 한동아집의 결성에 중추적 역할 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또, 오세창·고희동·이기는 역관집안 출신이고, 최남선은 관상감 기술직 집안 출신, 김돈희는 사 자관(寫字官) 집안 출신으로 동인들 대부분이 기술직 중인집안 출신인 것도 이들이 조선말의 여항시 단을 이어 시회를 결성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중국이나 일본사행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대표적인 역관가문인 해주 오씨와 제주 고씨 출신인 오세창과 고희동은 대대로 축적된 재산과 부친의 개화사상을 통해 신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였고 이를 배경으로 계몽운동을 선도하였다.

이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인들은 근대문물을 수용한 신지식층이었지만 1920년대 최남선의 조선학운 동을 비롯한 민족문화운동을 접하면서 민족문화에 대한 의식을 강화하였고, 전통과 고전에 대한 관 심을 공유하면서 시회를 결성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22)

18) 󰡔朝鮮佛敎總書󰡕의 표지에는 성당 김돈희가 제자(題字)를 썼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선운사 편, 앞의 책, 64~

65쪽.

19) 육교시사는 역관 변진환(邊晋桓, 1832~?)이 조카 변위(邊煒, 1859~?)의 글공부를 권면하기 위해 1877년 동짓날 가 까이 사는 시인들과 강위(姜瑋, 1820~1884)를 초대하여 자신의 해당루(海堂樓)에서 술을 마시며 시를 지은 것으로 출발한 중인시사이다. 허경진, 「평민한문학이 개화에 끼친 영향:육교시사를 중심으로」, 󰡔논문집󰡕 23, 목원대학교, 1993, 66~67쪽.

20) 윤재민, 󰡔조선후기 중인층 한문학의 연구󰡕,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1999, 401쪽; 특히 오경석은 강화도조약 체 결 당시 강위와 함께 신헌을 도왔고, 오경석과 강위 모두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으므로 교유가 있었을 것이 분명하 다. 오세창 역시 󰡔한성순보󰡕의 발간에 참여하면서 강위와 함께 활동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장선희, 「한국근대의 한 시연구」, 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132쪽.

21) 1922년 간행된 󰡔조야시선(朝野詩選)󰡕은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조야(朝野)의 시인 233인의 시 1,130 여수를 실은 시선집으로서 이기가 편집하고 오세창이 교감을 하였다.

22) 1920년대의 문화주의는 과거의 역사·전통의 재현 속에서 민족의식을 구하였으며, 전통을 현재적 관점에서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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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1> 오세창 외, 󰡔한동아집첩󰡕, 1925년, 국립중앙도서관

차례 작가 작품 비고

표지 석정 안종원 <漢衕雅集帖 石丁簽> 제첨

내지 1면 성당 김돈희 <漢衕元宵集> 예서

2면 난타 이기 <可人如玉 步屧尋幽> 행서

3면 춘곡 고희동 <花卉圖> 지본담채

4면 벽허자 이도영 <簫來天霜 琴生海波> 전서

5면(右面) 성당 김돈희 <達摩圖> 지본담채

5면(左面)~6면 석전 박한영 <漢衕雅集敍>

오세창이 󰡔근역서화징󰡕에서 최남선에 의해 1929년 계명구락부에서 출판되었던 것을 비롯하여,23) 이도영이 1920년대 초부터 고대사를 주제로 한 역사고사화와 신라와 가야 토기를 모티프로 한 기명 절지화 등을 발표하고, 서양화가였던 고희동이 1920년대 중반 무렵부터 한국화가로 전향하였던 것은 이들이 당시 고조되었던 문화주의의 경향을 수용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일제의 문화통치가 더욱 공고화된 1920년대 이후 문예계 인사들은 새로운 활동방향을 모색하고 있었고, 마침 오세창이 1924년 10월 환갑을 맞이한 것을 계기로 시회결성을 도모하

게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2. 󰡔한동아집첩󰡕의 구성과 내용

󰡔한동아집첩󰡕은 크기는 세로 18.0㎝·가로 12.0㎝이며 8절 14면의 지본절첩(紙本折帖)으로 되어 있다<도 1>. 비단으로 싸인 표지에는 안종원이 전서(篆書)로 쓴 제첨이 붙어 있으며 내지에는 <표 2>와 같이 동인들의 시서화가 있다. 첩을 펼치 면 앞부분에 김돈희·이기·고희동·이도영의 서화작품이 차 례로 실려 있으며, 뒤이어 박한영이 쓴 「한동아집서(漢衕雅 集敍)」와 동인들의 시가 각각 자필로 수록되어 있다. 이기부 터 최남선까지 오세창의 집에 초대된 동인 6명이 나이 순서 대로 자신이 지은 칠언율시를 직접 썼으며, 마지막으로 시회 의 주최자인 오세창이 시를 남겼다.

<표 2> 󰡔한동아집첩󰡕의 구성

선양하여 신문화를 건설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지원, 「일제하 민족문화 인식의 전개와 민족문화운동 ― 민족주의 계 열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173쪽.

23) 홍선표, 󰡔한국 근대미술사󰡕, 시공사, 2009, 183쪽.

(8)

차례 작가 작품 비고

7면 난타 이기 칠언율시

8면 석전 박한영 칠언율시

9면 성당 김돈희 칠언율시

10면 벽허자 이도영 칠언율시

11면 춘곡 고희동 칠언율시

12면 육당 최남선 칠언율시

13면 위창 오세창 칠언율시

제첨을 쓴 안종원(安鍾元, 1877~1951)은 서예가이자 교육가로서 안중식의 8촌 동생이다. 안종원은 당시 서화가들과 서화애호가들의 사랑방이었던 안중식의 경묵당과 서화미술회에 자주 드나들었으며, 안중식의 사후에는 장사동에 있는 자신의 사랑채에 ‘경묵당’이라는 같은 당호(堂號)를 붙이고 화가들을 머무르게 하면서 크고 작은 아회(雅會)를 베풀었다.24) 안종원은 한동아집의 동인은 아니지만 1925년 2 월과 3월 사이 네 차례에 걸쳐 오세창과 함께 시모임에 참여하였고,25) 오세창은 󰡔한동아집첩󰡕이 완성 된 이후 동인들과 왕래가 잦았던 서예가 안종원에게 제첨을 요구하여 표제를 꾸민 것으로 보인다.

<도 2> 김돈희, <한동원소집>

<도 3> 이기, <가인여옥 보섭심유>

내지를 펼치면 대보름 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김돈희가 쓴 제자 ‘한동원소집(漢衕元宵集)’이 예서 로 쓰여 있다.<도 2> 김돈희는 전서·예서·해서·행초서의 각체를 두루 잘 썼고 세련된 선과 획의 변화로 작품전체를 부드러우면서도 기백있는 강한 필치를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김돈희는 예서와

24) 안종원의 경묵당은 서화협회 사무실을 겸하였을 정도로 서화가들의 친목 및 교류 활동에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였 다. 김예진, 「경묵당과 근대 서화가들의 활동」, 󰡔근대 서화의 요람, 耕墨堂󰡕, 고려대학교박물관, 2009, 10~15쪽.

25) Ⅲ장의 <표 3> 참조.

(9)

해서에 특히 뛰어났으며, 예서에서는 한예(漢隸)를 깊이 연구하여 자유분방하고 변화가 많은 예서 서 풍을 이룩하였다.26) 김돈희의 예서는 분방한 필세로 우견(右肩)이 위로 올라가는 결구상의 특성을 가 지고 있는데,27) <한동원소집>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볼 수 있다. 글자 획수의 다수에 따라 ‘元’자와 같이 굵고 힘 있는 필선으로 중량감 있게 쓰기도 하고, ‘雧’자와 같이 갈필의 가벼운 필세를 사용하 는 등 김돈희 특유의 변화를 보인다.

2면에 이기가 행서로 쓴 글씨 ‘가인여옥 보섭심유(可人如玉 步屧尋幽)’는 중국 당말(唐末)의 시인 사공도(司空圖, 837~908)의 시론(詩論)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 가운데 제16 ‘청기(清奇)’의 한 구절 이다.<도 3>28) 󰡔이십사시품󰡕은 시의 의경(意境)을 24품으로 나누고 각 품을 2언의 운어(韻語) 12구로 구성하여 모두 288구로 쓴 장문의 시로서 18세기 후반 󰡔전당시󰡕가 조선에 유입되면서 알려지기 시 작하여 신위·김정희 등 19세기 문인들 사이에서 감상되었다.29) ‘청기’는 작품의 깨끗한 소재와 남다 르게 기이한 분위기를 의미하며, 그 가운데 ‘가인여옥 보섭심유(可人如玉 步屧尋幽)’는 진세(塵世)를 벗어나 벗을 찾아 나서는 선비의 고결하고 청아한 아취를 나타낸다.30)

<도 4> 고희동, <화훼도>

<도 5> 이도영, <소래천상 금생해파>

이기의 시 구절에 이어 고희동이 담채(淡彩)로 그린 그림은 수선화·매화·구기자를 한 폭에 그린 소폭의 화훼도이다.<도 4> 이른 봄을 알리는 수선화와 매화, 그리고 장수를 상징하는 구기자는 일제 강점기라는 혹한을 이겨내는 동인들의 아취고절(雅趣高節)을 기리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그

26) 김돈희의 서풍에 대해서는 김윤경, 「惺堂 金敦熙의 書藝硏究」, 원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8, 30~31쪽.

27) 김양동, 「한국근대서예의 전개와 양상」, 󰡔한국서예일백년󰡕, 예술의 전당, 1988, 308쪽.

28) 사공도, “娟娟群松 下有漪流 晴雪滿汀 隔溪漁舟 可人如玉 步屧尋幽 載瞻載止 空碧悠悠 神出古異 澹不可收 如月之 曙 如氣之秋”; 최근 학계에는 󰡔이십사시품󰡕이 명대 회열(懷悅)의 󰡔이십사품󰡕에 근거해 위조하고 당대 사공도의 이 름을 의탁한 위작이라는 설도 있다. 민유삼, 「사공도 󰡔이십사시품󰡕 위작 논쟁 추이」, 󰡔中語中文學󰡕 27, 한국중어중 문학회, 2001 참조.

29) 금지아, 「󰡔이십사시품󰡕이 조선후기 문예이론사에서 차지하는 자리」, 󰡔중국어문학󰡕 52, 영남중국어문학회, 2008, 163~165쪽.

30) 사공도는 14세기 고려 말에 수용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백거이(白居易, 772~846)와 함께 은거를 상징하는 인 물로 언급되기도 했다. 금지아, 앞의 논문, 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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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진 것이다. “한매(寒梅)·녹균(綠筠)·창포(菖蒲)·수선(水仙) 등이 서로 어울려 가지가 얽혀있고 그 밖에 정헌(庭軒)의 진기한 여러 물건이 있으니, 하나라도 장엄한 시해(詩海)가 아님이 없었다.”라고 한 박한영의 서문에서 보듯 고희동은 오세창의 서가에 있는 매화와 수선화 등에서 소재를 취하여 그 림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고희동은 화면의 우측 하단에 얽혀 있는 화훼를 통해 동인들 간의 조화와 친목을 우의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수선화와 매화 꽃, 그리고 구기자 열매에 화사한 채색을 가하여 곧 다가올 봄의 정취를 청신하게 표현하였다.

이도영은 전서(篆書) <소래천상 금생해파(簫來天霜 琴生海波)>를 남겼다.<도 5>. ‘소래천상 금생해 파’는 성령설(性靈設)을 주장하였던 청대(淸代) 시인 원매(袁枚, 1716~1797)의 󰡔수원시화(隨園詩話)󰡕에 나오는 구절로서 원매의 성령설은 18세기 후반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그의 문하생인 이덕무 (李德懋, 1741~1793)·박제가(朴齊家, 1750~1805) 등에 의해 조선에 소개되었고, 19세기에는 김정희를 거쳐 최성환(崔瑆煥)·조희룡(趙熙龍, 1789~1866) 등의 여항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도영의 전서는 이기의 행서와 더불어 19세기 여항문인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던 청조문예의 잔영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다.31) 이도영은 부친 이인승과 스승 안중식의 영향으로 한학 및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특히 행서와 예서에 능하였다.32) 전서로 쓴 <소래천상 금생해파>는 정제되고 연미한 이도 영의 필세가 잘 드러난다. 시첩의 한쪽 면에 작은 크기로 그려진 김돈희의 <달마도>는 소품이지만 유 려하면서도 빠른 필선으로 그린 얼굴과 대담한 갈필로 그린 의습(衣褶)이 대조를 이루며 달마의 강한 인상을 잘 포착하였다.<도 7> 또 의습에 담채(淡彩)로 푸른색을 가하여 세속에 초탈한 달마의 이미지 를 고조시키고 있다. 김돈희의 <달마도> 좌측에는 바로 이어 박한영의 <한동아집서>가 있다.<도 6>

<도 6> 박한영, <한동아집서>

<도 7> 김돈희, <달마도>

31) 원매의 성령설에 대해서는 具敎賢, 「袁枚의 性靈設이 조선 후기 문단에 미친 영향 연구」, 󰡔중국어문한논집󰡕 59, 중 국어문학연구회, 2009, 197~419쪽.

32) 이도영의 부친 이인승은 조선광문회의 󰡔신자전(新字典)󰡕 편찬에서 정확한 용례를 밝히기 위해 다양한 전적에서 추 출한 전거들을 가지고 한자 어휘들을 검토하고 강구하는 역할을 맡을 정도로 한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오영 섭, 앞의 논문, 79~85쪽.

(11)

한 번 국운이 기운 뒤로 서울의 예원이 지극히 황폐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른바 아름다 운 풍아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고, 뜻을 품은 자들도 혀를 차며 깊은 한숨을 내쉰 지 오 래되었다. 그러니 돌이켜보건대 이번 한동의 아집은 장차 풍아를 다시 있게 할 길광편우(吉光 片羽)33)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동의 아집은 말 그대로 아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실은 지 난해 10월에 북원에서 처음으로 모임을 가졌다. 첫 모임이 일어나자 금새 두 번째 모임을 서둘 러 당기게 되었으니 그 엉성함이야 더 이상 말할 게 없다. 그런데 한 해가 저물녘에 동원에서 세 번째 모임을 가졌고, 또 금년 벽두에 서원에서 네 번째 모임을 가졌다. 급기야 이번 정월 보름에 중부의 한동에서 다섯 번째 모임을 갖게 되었으니, 다섯 번째 모임은 그런대로 규모를 갖춰 문란하지 않은 것 같다. 다섯 차례의 모임이 점점 나아갈수록 성대해져 실로 한강물이 넓 고 멀리 굽이도는 기세를 갖추게 되었다.

모임을 같이하는 사람들로 말할 것 같으면 나이·위상·취미·조예 등이 혹 같지 않고, 세 상에 들어가거나 속세를 벗어나는 행업도 모두들 다르다. 그러나 이치에 닿는 말로 감개하게 하고 흉금을 크게 열어젖혀 호산연하(湖山煙霞)의 사이에서 서로 팔을 끼고 정신으로 교유하여 모두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닌데 우연히 의기투합하는 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아집의 좋은 약속 에 꼭 참석하려 하면서도 나중에 혹 호사에 얽혀 바빠서 시를 읊조리며 한바탕 웃을 겨를이 없는 지경에 이를까 걱정하는 일도 있다. 오늘 밤은 정월 대보름으로 달이 티 없이 밝고 문 앞 엔 눈이 이미 한 자나 쌓였다. 다들 눈길에 빠지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혹 병든 몸 을 이끌고 도롱이를 쓰고 혹 우산을 지고 나막신을 끌고서 일제히 나아오니, 마치 이문을 좇는 자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드는 듯하였다. 위창 노인이 걸상을 내려 맞아들이는데 기상이 몹시 훌 륭했다. 금석과 도서가 서가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을 보니 마치 이유산(二酉山)의 정경을 띠 고 있는 듯 정신이 멍해졌다. 게다가 매화·대나무·창포·수선 등이 서로 어울려 가지가 얽혀 있고 그밖에 정헌(庭軒)의 진기한 여러 물건이 있으니, 하나라도 장엄한 시해(詩海)가 아님이 없었다. 차를 다 마시고 술이 거나해지자 나란히 연반(硏畔)에 앉아 꽃이 한창 고운 때를 상상 하며 그림 그리는 사람은 붓을 적시고 글씨 쓰는 사람은 한 번 팔뚝을 휘둘러보고 시를 짓는 사람은 어깨를 곧추세우며 각자 솜씨를 발휘하니, 진실로 하나같이 조화의 오묘함을 드러내었 다. 우두커니 앉아있는 돌중인 나는 전혀 재주가 없으니 그저 아집의 후서(後敍)를 한 단락 지 어 훗날에 부치는 바이다.

을축년 정월 대보름 석전산민(石顚山民)은 삼가 기록하다.34)

33) 길광(吉光)은 짐승의 이름이다. 󰡔十洲記󰡕에 “한무제(漢武帝) 천한(天漢) 3년에 서국왕(西國王)의 길광의 모구(毛裘)를 바쳤는데 색이 황백으로 대개 신마(神馬)의 류(類)이다. 그 모구가 물에 들어가서 여러 날이 되어도 가라앉지 아니 하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후인들이 문인의 시장(詩章)이 잔여(殘餘)에서 겨우 발견된 것을 칭 하여 길광편우라 하였다.

34) 박한영, 「한동아집서」, 󰡔한동아집첩󰡕, “一自漢鼎覆餗以後, 漢上藝苑, 極至荒廢, 所謂渢渢風雅不可復見, 亦爲齎志者, 咄咄深嘆久矣, 顧此漢衕雅集, 將無出風雅再然之吉光與, 然漢衕雅集, 不自雅集起因, 實自客歲小春之北苑, 初集焉耳, 且初集之起, 已提苑南二集之首, 簡固不足重言, 而歲將暮, 爲東園三集, 又今年頭, 爲西園四集, 及此上元, 爲五集於中 府漢衕, 五集之序, 殆若準擬而不紊, 五集之漸進漸盛, 諒有江漢之屈曲瀚遠勢耳, 若夫同會諸子, 其年位趣操, 有或不同, 入世出世之行業, 亦不遵一軌, 然及其理遺感慨, 開蕩心胸, 交臂神游於湖山煙霞之間, 咸有不謀而偶協焉, 是以必踐雅集 之佳約, 有恐後至綢繆好事, 亦似奔走不暇可發吟吟一笑已, 是宵上元也, 明月無緣, 門前雪, 已尺深, 諸子不拘雪泥, 或 扶病披簑, 或擔簦飛屧, 而齊進如趍利者之穣穣, 葦滄老人下榻而引入, 氣象甚喜, 觀夫金石圖書, 籖架秩秩, 似帶二酉

(12)

박한영은 국운이 기운 뒤로 서울의 문예가 황폐해진 것을 안타까워한 동인들이 이처럼 시회를 결 성하게 되었으니, 한동아집으로 인해 문인들의 시장(詩章)이 끊어지지 않고 후인들에게까지 아름다운 풍아가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면서 아집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한동아집이 열린 이날 밤에는 동인들이 겨우내 쌓인 눈으로 험한 길을 무릅쓰고 한자리에 모였으 며, 오세창의 서가에 가득한 금석도서를 완상하고 차를 한잔씩 마신 뒤 거나하게 술자리를 벌이고 흥취가 오르자, 각자 자신의 특장을 발휘하여 시서화를 남기고 박한영이 서문을 지었다. 한동아집첩 에는 모임의 주최자인 오세창과 학자인 최남선을 제외한 모든 동인들은 한자리에서 시서화를 남겼으 며, 시를 수창(酬唱)하는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제작된 서화들은 여기적(餘技的)이고 간일한 작풍을 보 여준다.35)

서화에 뒤이은 시들은 “고적(古蹟)으로 빛나는 집은 우하(虞夏)가 아득”하고 속세의 때를 씻고 시 서화로 무르익은 “고상한 회포를 어부와 나무꾼에게 기대지 않아도 되겠네.”라는 최남선의 시처럼, 금석도서가 가득한 오세창의 서가를 칭송하고 모임의 고아한 청취를 읊고 있다.

百年無月幾元宵 오래도록 달없는 대보름이 몇 번째인가 莫恨同雲未易消 먹구름이 사라지지 않음을 한스러워 마시게.

已見人間成玉界 이미 인간이 옥계를 이룬 것 보았으니 何須物外步虹橋 굳이 물외에서 홍교를 건널 필요 있겠는가.

竗心觀壁葦滄濶 신묘한 마음으로 벽을 바라보니 갈숲 강이 광활하고 古蹟耀堂虞夏遥 고적으로 빛나는 집은 우하가 아득하네.

浣盡塵膓猶有術 묵은 창자를 다 씻어내 오히려 재주가 생겨나니

雅懷不必寄漁樵 고상한 회포를 어부와 나무꾼에게 기대지 않아도 되겠네.36)

벽에는 갈숲이 그려진 산수화가 걸려 있고 서가에는 고적이 가득한 오세창의 서실에서 동인들은 금석도서 및 시서화를 감상하면서 선계(仙界)의 아취(雅趣)를 즐겼다. 오세창은 동인들의 풍류를 초부 (樵夫)와 어부(漁夫)의 청담(淸談)에 비유하였다. 세속을 멀리하여 자연에 묻혀 사는 은일지사(隱逸之 士)에 대한 은유는 모든 동인들의 시에서 공통되게 나타나는 것으로 󰡔한동아집첩󰡕의 서화와 마찬가 지로 도가적인 탈속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

山之景, 怳矣, 復有寒梅綠筠菖蒲水仙並蒂交柯外, 他庭軒之珍恠諸品, 無一非莊嚴詩海已, 而茶罷酒闌, 列坐硏畔, 想華 方艶, 畵君䑛毫, 書君試腕, 詩君聳肩, 各逞手眼, 允同化工之妙著, 塊坐石衲, 殆無能也, 只敍一端如右, 雅集有後, 付 在來日矣. 乙丑上元 石顚山民 謹識.”; 석문(釋文)에 도움을 주신 유지복 선생님에게 감사드린다.

35) 박한영의 󰡔석전문초󰡕에는 동인들이 박한영의 초대로 최남선의 일람각에서 시회를 갖고 󰡔차좌동림첩(借座東林帖)󰡕을 만들면서 쓴 서문이 있는데, 󰡔경고실음고󰡕의 날짜와 박한영이 서문을 쓴 날짜가 일치하여 시회첩의 제작이 모임에 서 함께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박한영, 「借座東林酬唱序」, 󰡔石顚文鈔󰡕, 法寶院, 1962, 45~46쪽; 󰡔한동아집󰡕의 동인들이 가진 시회들과 시화첩 제작에 대해서는 Ⅲ장에서 다시 논하겠다.

36) 최남선, 「칠언율시」, 󰡔한동아집첩󰡕.

(13)

龍公似妒月明宵 용공이 달 밝은 밤을 시기한 듯 行雪春空積未銷 봄 하늘에 내린 눈은 녹지를 않네.

高燭難紅連甍屋 높은 촛대 어지러운 불빛은 기와집마다 줄짓고 萬枝垂白隔磎橋 만 가지에 내린 눈은 시내 다리에 이어있네.

茶廚煙纈齋猶冷 차 달이는 부엌 연기에도 집은 아직 차가운데 佛海香深漏漸遙 바다같은 불도는 향이 깊어 점점 멀리 스며드네.

已唱□陽何所憶 이미 □양을 노래했으니 어느 곳을 생각하리오 綠江南路伴漁樵 푸른 강과 남쪽 길이 어초와 짝하는 곳이라네.37)

승려인 박한영은 눈 내리는 밤 차 향기가 퍼지는 가운데 넓고 깊은 불도(佛道)가 어우러지는 모습 을 노래하였다. 오세창·최남선 등 일제강점기 지식인들 사이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박한영의 서문 옆에 김돈희가 달마도를 그린 것처럼 한동아집에서는 시서화의 아취 가운데에 불도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이처럼 5점의 서화와 7수의 시로 구성된 󰡔한동아집첩󰡕은 시회의 결성과정과 모임의 정경, 그리고 참석한 동인들의 심상(心象) 등을 시서화를 통해 다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 세창의 서실에 모인 동인들은 은일을 자처하면서 서화고동(書畵古董)을 함께 완상하고 차와 술을 나 누면서 암울한 시대현실의 시름을 잊고 청류(淸流)를 노래했다. 그리고 오세창은 초대된 동인들에게 서화를 요청하여 시회첩을 제작한 뒤 본인이 직접 소장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Ⅲ. 오세창의 시회활동과 그 성격

1. 오세창의 시회활동과 󰡔경고실음고󰡕

오세창은 여러 인사들과 활발한 시회활동을 가지면서 지은 자신의 시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한동 아집과 관련하여 󰡔경고실음고(竟沽室吟藁)󰡕라는 시고(詩稿)가 전하여 오세창의 시회활동을 조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오세창가에 전하는 󰡔경고실음고󰡕는 1924년 음력 10월에 동인 7명이 고희동 의 춘곡서실에서 가진 원북소집(苑北小集)부터 1925년 3월 23일 탑동 승사에서 가진 6명의 모임까지 총 25회의 시회가 기록되어 있다.<도 8> ‘경고실(竟沽室)’은 오세창의 당호(堂號) 중의 하나였던 듯, 오세창의 󰡔근역인수(槿域印藪)󰡕에는 ‘경고주인(竟沽主人)’과 ‘경고실이(竟沽室鑈)’라고 새겨진 주문방 인이 전한다.<도 9>38)

37) 박한영, 「칠언율시」, 󰡔한동아집첩󰡕.

38) 오세창, 󰡔槿域印藪󰡕, 國會圖書館, 1968, 545쪽, 556쪽.

(14)

<도 8> 오세창, 󰡔경고실음고󰡕, 1924~1925, 개인소장 <도 9> ‘경고주인’, ‘경고실이’

박한영은 「한동아집서」에 음력 10월에 첫 모임으로 북원초집이 열렸으며 뒤이어 원남이집·동원 삼집·서원사집·한동오집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는데, 오세창의 󰡔경고실음고󰡕에는 10월 30일의 원북 소집을 비롯하여 남원속집(南苑續集)·동원세모(東園歲暮)·서원춘초(西園春初)·한동원소집(漢衕元宵 集) 등 이름을 조금 달리 기록하였으나 시기와 장소, 참석자 등이 서로 일치한다.39) 이기 대신 윤희 구가 참석한 서원사집(서원춘초)을 제외하면 이들 모임에 참석한 인물들은 한동아집의 동인과 일치하 며, 그 밖의 모임에는 때에 따라 안종원·동주(東州) 심인섭(沈寅燮, 1875~1939)·성석(醒石) 이응균 (李應均, 1883~?)·정재(靜齋) 오일영(吳一英, 1896~?)·묵재(黙齋) 최우성(崔愚誠) 등이 참여하였다.

<표 3> 모임의 참가자들은 󰡔경고실음고󰡕의 총 25회의 모임 중 이 다섯 모임에만 시회명(詩會名)을 붙였다. 첫 모임인 원북소집은 1924년 10월 30일 고희동이 이기·오세창·박한영·김돈희·이도영·

고희동·최남선을 초대하여 술을 마시고 시서화를 즐기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2월 19 일 이도영이 동인을 초대하여 남원속집을 가졌으며, 일주일 뒤인 12월 25일에는 최남선이 동인들을 초대하여 동원세모, 이듬해 1월 8일에는 김돈희가 모임을 주관하여 서원춘초를 열었다. 그리고 1월 11일과 13일 이종익의 집과 오세창의 집에서 두 번의 모임을 연 뒤에 다시 1월 15일 오세창의 집에 서 동인들이 모여 한동원소집을 가졌다.

39) 박한영의 󰡔석전시초(石顚詩鈔)󰡕에는 1924년 9월 5일과 11월 3일 사이에 기록한 오언율시 ‘北苑小集’과 이듬해 겨울 에 쓴 칠언율시 ‘仲冬龜山在日高春谷來訪示余苑北詩會紀念諸作追和同人韵郤寄’가 실려 있는데, 첫모임인 북원소집 의 모임장소가 고희동의 집이었으므로 그때의 작품을 고희동이 보관하고 있다가 이듬해 겨울 박한영에게 보여주였 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북원소집과 원북시회는 같은 모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석전시초󰡕에 실려 있는 시 가운데 오언율시 ‘북원소집’과 칠언율시 ‘西園春初小集(金惺堂家 乙丑正月初八日)’, 그리고 3월 5일부터 최 남선과 함께 지리산을 순례하며 지은 시들은 그 시기와 내용이 오세창의 󰡔경고실음고󰡕와 일치한다. 박한영, 󰡔석전 시초󰡕 (한국역대문집총서 2881), 한국문집편찬위원회, 1999, 59쪽, 73쪽.

(15)

<표 3> 󰡔경고실음고󰡕의 시회기록

날짜 오세창의 기록 참가자 시회명·장소

1 1924년 10월 30일

1924년 10월 30일 춘곡 고희동이 난타 이기·석전 박한영·

성당 김돈희·관재 이도영·육당 최남선과 나를 초대하여 술을 마시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이름하 여 원북소집이라 하였다. (甲子十月三十日高春谷(羲東)招李 蘭坨(琦)石顚上人(鼎鎬)金惺堂(敦熙)李貫齋(道榮)崔六堂(南 善)及余治樽拈韻惑畵惑書名曰苑北小集…)

이 기, 오세창, 박한영, 김돈희, 이도영, *고희동, 최남선

‘원북소집’

고희동의 춘곡서실

2 12월 19일

12월 19일 이도영이 동인을 초대하여 배파회를 흉내내니, 이를 남원속집이라 하였다. 박한영이 호상으로부터 새로 돌 아왔다. (十二月十九日李貫齋(道榮)招同人擬拜坡會 是曰南 苑續集時石顚上人自湖上新歸)

이 기, 오세창, 박한영, 김돈희,

*이도영, 고희동, 최남선

‘남원속집’

이도영의 관재서옥

3 12월 25일 12월 25일 최남선이 동인들을 초대하니 이를 동원세모라 하 였다. (十二月二十五日崔六堂(南善)招同人是曰東園歲暮)

이 기, 오세창, 박한영, 김돈희, 이도영, 고희동,

*최남선

‘동원세모’

최남선의 일람각

4 1925년 1월 8일

1925년 1월 8일 김돈희가 동인들을 초대하니 이를 서원춘초 라 하였다. 이기는 병으로 인하여 오지 못하고 우당 윤희구 가 와서 참가하였다. (乙丑正月八日金惺堂(敦熙)招同人是曰 西園春初 李蘭坨因病未赴尹于堂(喜求)來參)

윤희구, 오세창, 박한영, *김돈희, 이도영, 고희동, 최남선

‘서원춘초’

김돈희의 집

5 1월 11일

정월 11일 석천 이종익 家에서 楓嶽記游之會가 있었다. 나 또한 초대되어 야란으로 시를 지었다. (正月十一日李石泉 (鍾翊)家有楓嶽記游之會 余亦披招夜闌拈韻)

오세창, *이종익 등…

‘풍악기유지회’

이종익의 집

6 1월 13일

정월 13일 고희동과 최남선이 찾아와서 시를 지었다. 동주 심인섭이 마침 왔다. (正月十三日春谷六堂見訪拈韻沈東洲 (寅燮)適至)

*오세창, 고희동,

최남선, 심인섭 오세창의 집

7 1월 15일

정월 15일 눈오는 날에 나는 이기·박한영·김돈희·이도 영·고희동·최남선을 집에 초대했다. 이전의 모임을 이어 서 한동원소집이라 하였다. (正月十五日雪中余招蘭陀石顚 惺堂貫齋春谷六堂于敞廬,續前會是曰漢衕元宵集)

이 기, *오세창, 박한영, 김돈희, 이도영, 고희동, 최남선

‘漢衕元宵集’

오세창의 집

8 1월 17일 정월 17일 박한영·최남선이 함께 왔다. (正月十七石顚六堂 同至)

*오세창, 박한영,

최남선, 오세창의 집

9 1월 20일 정월 20일 박한영·고희동·최남선이 와서 시를 지었다.

(正月二十日石顚春谷六堂又訪拈韻)

*오세창, 박한영,

고희동, 최남선 오세창의 집

10 1월 22일

정월 22일 이기가 박한영·김돈희·심인섭·이도영·최남 선 및 나를 춘곡 고희동의 서옥에 초대하여 문진입실첩을 만들었다. (正月二十二日李蘭陀(琦)招石顚惺堂東洲貫齋六 堂及余于高春谷之苑北書屋作聞晉入室帖)

*이 기, 오세창, 박한영, 김돈희, 심인섭, 이도영, 최남선

≪聞晉入室帖≫

춘곡서실

11 1월 26일

정월 26일 송석 김완규가 호중으로부터 서울에 왔다. 여러 친구들과 함께 왔다. (正月二十六日金松石(完圭)自湖中入 洛, 與數朋共至)

*오세창, 김완규

오세창의 집

12 1월 29일

정월 29일 박한영이 이기·김돈희·심인섭·이도영·고희 동 및 나를 최남선의 일람각에 초대하여 차좌동림첩을 만들 었다. (正月二十九日石顚上人招蘭陀惺堂東洲貫齋春谷及余 于崔六堂之一覽閣成借座東林帖)

이 기 , 오 세 창 ,

*박한영, 김돈희, 이도영, 고희동, 최남선

≪借座東林帖≫

최남선의 일람각

(16)

날짜 오세창의 기록 참가자 시회명·장소

13 2월 6일 2월 6일 심인섭이 동인을 초대하여 춘곡서실에서 모였다.

(二月六日東洲招仝人集春谷書室)

*심인섭, 이 기, 오세창, 박한영, 김돈희, 이도영, 고희동, 최남선

고희동의 춘곡서실

14 2월 7일

2월 7일 박한영·이도영·고희동·최남선·안종원이 왔다.

어린 조카(정재 오일영)가 함께 왔다. (二月七日(陽三月一日 也)石顚貫齋春谷六堂石汀至英姪亦來)

*오세창, 박한영, 이도영, 고희동, 최남선, 오일영

오세창의 집

15 2월

2월 □일 박한영·심인섭·이도영·고희동·최남선이 왔 다. 황산 이종린은 늦게 도착했다. (二月□日石顚東洲貫齋 春谷六堂至凰山遲到)

*오세창, 박한영, 심인섭, 이도영, 고희동, 최남선, 이종린

오세창의 집

16 2월 12일

2월 12일 눈오는 날에 심인섭과 함께 관재서옥에 모였다. 박 한영을 맞이하여 함께 시를 지었다. (二月十二日雪中與東洲 集貫齋書屋邀石顚共賦)

*오세창, 심인섭, 이도영, 박한영

이도영의 관재서옥

17 2월 13일

2월 13일 이도영·고희동·박한영·최남선·심인섭·안종 원 및 이응균이 왔다. 내일 있을 성 동쪽 일람각의 모임을 의논했다. (二月十三日貫齋春谷石顚六堂東洲石汀及醒石至 議明日集城東一覽閣)

*오세창, 이도영, 고희동, 박한영, 최남선, 심인섭, 안종원, 이응균

오세창의 집

18 2월 14일 2월 14일 모두 일람각에 모였다. 묵재 최우성도 왔다. (二月 十四日仝一覽閣崔黙齋愚誠亦來)

오세창, 이도영, 고희동, 박한영, * 최남선, 심인섭, 안종원, 이응균, 최우성

최남선의 일람각

19 2월 15일 2월 15일 심인섭을 보내고 부상에서 놀았다. (二月十五日送

東洲遊扶桑) 오세창, 심인섭 등

20 2월 2월 □일 박한영·이도영·고희동·최남선이 왔다. (二月□

日石顚貫齋春谷六堂至)

*오세창, 박한영, 이도영, 고희동, 최남선

오세창의 집

21 2월 22일

2월 22일 비오는 중에 박한영·고희동·최남선은 시를 지었 다. 박한영과 최남선은 장차 두류산을 여행한다. (二月二十 二日雨中石顚春谷六堂來賦石顚六堂將遊頭流山)

*오세창, 박한영,

고희동, 최남선 오세창의 집

22 3월 2일 3월 2일 박한영·이도영·고희동·최남선, 조카(오일영)가 함께 시를 지었다. (三月二日石顚貫齋春谷六堂英姪共賦)

*오세창, 박한영, 이도영, 고희동, 최남선, 오일영

오세창의 집

23 3월 8일 3월 8일 이도영·고희동과 함께 풍로진 주루에서 함께 시를 지었다. (三月八日共貫齋春谷風鷺津酒樓共賦)

오세창, 이도영,

고희동 풍로진 주루

24 3월 9일 3월 9일 안종원·이도영·고희동과 함께 청량사에서 놀았 다. (三月九日同石丁貫齋春谷游淸涼寺)

오세창, 안종원,

이도영, 고희동 청량사

25 3월 23일

3월 23일 김돈희·안종원·이도영·이응균·고희동과 함께 탑동 승사에 갔다. (三月二十三日同惺堂石丁貫齋醒石春谷 往塔洞僧舍)

오세창, 김돈희, 안종원, 이도영, 이응균, 고희동

탑동 승사

비고:참가자 중에서 그날의 모임을 주관한 사람은 *표시를 하였다.

7명의 동인이 결성한 정규 시회에는 시회명에 편의상 ①~⑦까지 연번을 붙였다.

(17)

그리고, 나머지 모임 중 1월 22일과 1월 29일 모임에는 7명의 동인이 모두 모여 󰡔문진입실첩󰡕과

󰡔차좌동림첩󰡕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북원초집(원북소집)부터 한동오집(한동원소집)까지의 5회 와 󰡔문진입실첩󰡕과 󰡔차좌동림첩󰡕을 만든 2회의 모임을 합치면 동인의 수와 같은 7회가 된다. 박한영 은 자신의 문집에 「차좌동림수창서」를 남겨서 7명의 동인이 자신의 집을 돌아가며 시회를 가진 경 위를 설명해 준다.

수창(酬唱)을 대접하는 순서가 이미 육자(六子)의 윤단(輪壇)을 돌아서 일개 중인 석전(石顚) 의 쓸쓸한 바리때에 이르렀으나 어느 곳에 시단을 만들어서 음식을 대접하겠는가. 다행히 최남 선이 자신의 동림 한자리와 나누어줄 음식을 빌려주므로 차좌동림(借座東林)이라 하였다. 어찌 다른 말이 있겠는가. (중략) 낙하칠자(洛下七子)라 함은 누구를 말하는가. 난타 이기·위창 오세 창·성당 김돈희·관재 이도영·춘곡 고희동·육당 최남선·사문(沙門) 석전 박한영이다.40)

즉, 오세창을 비롯한 7명의 시 동인들은 번갈아가면서 시회를 주관하였으며 당시 거처가 일정치 않던 박한영만이 최남선의 일람각을 빌려 모임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경고실음고󰡕에 기 록된 25회의 모임들 중 이들 모임들에만 이기가 참석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당대 한시단(漢詩壇)의 원로인 이기를 맹주로 하여 시회를 결성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기가 병으로 참석하지 못 한 1월 8일의 서원춘초(西園春初)에는 한학자인 우당(于堂) 윤희구(尹喜求, 1867~1929)가 대신 참석하 여 이기의 역할을 대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세창과 박한영의 기록을 정리해보면, 이들의 시회는 이기를 맹주로 하여 결성되었으며, <표 3>

의 ①부터 ⑦에서 보듯 춘곡서실·관재서옥·일람각 등 동인들의 서실(書室)을 돌면서 일곱 차례 개최 되었다. 그리고 동인들은 “그런대로 규모를 갖춘” 한동오집부터는 󰡔한동아집첩󰡕·󰡔문진입실첩󰡕·󰡔차 좌동림첩󰡕과 같은 시회첩을 꾸몄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으로만 전하는 󰡔문진입실첩󰡕·󰡔차좌동림첩󰡕

이 발굴된다면 이들이 시회에서 즐긴 서화의 내용과 화풍(畵風)을 보다 구체적으로 고찰할 수 있으 리라 기대한다.

<도 10> 이도영 외, <탑동시회도>, 1925, 지본담채·지본묵서, 19.9×120.0㎝, 개인소장

40) 박한영, 「차좌동림수창서(借座東林酬唱序)」, 󰡔석전문초󰡕, 法寶院, 1962, 45~46쪽. “……酬唱主餉之序, 已轉六子之輪 壇殿及石顚子……洛下七子者, 爲誰, 李蘭坨琦 吳葦滄世昌 金惺堂敦熙 李貫齋道榮 高春谷羲東 崔六堂南善 沙門石顚 漢永, 乙丑正月二十九日.”

(18)

한편, 󰡔경고실음고󰡕에 보이는 다른 모임들은 때에 따라 구성원을 달리하는 여기적이고 즉흥적인 회합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1925년 3월 23일 오세창·김돈희·안종원·이도영·이응균·고희동이 함께 탑동 승사에서 가진 모임에서 제작된 시권(詩卷)이 개인소장으로 전하여 주목된다.<도 10>

이 시권의 앞부분에는 이도영이 <탑동시회도(塔洞詩會圖)>를 그리고 김돈희가 ‘기인(奇人)들이 다 리뻗고 쉬다’라는 뜻으로 ‘기인산각(畸人散脚)’이라는 제를 달았으며, 뒤이어 6명의 동인들이 지은 칠 언율시가 있다. 이도영은 소나무와 석탑 주변에 모인 동인들과 차를 끓이는 동자의 모습을 수묵담채 로 소략하게 그렸는데, 각 인물들의 동태와 정겨운 모임의 운치가 잘 살아나 있다. 인물들이 앉아있 는 풀밭의 표현에서 수채화풍이 간취되는 것은 고희동의 영향으로 보인다. 󰡔경고실음고󰡕에는 이 모 임이 열리기 전인 2월 22일의 기록에 박한영과 최남선은 장차 두류산을 여행한다는 내용이 보이며, 3월 2일 모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참석자 명단에서 박한영과 최남선의 이름을 볼 수 없다.41) 따라 서 <탑동시회도>는 주유(周遊)에 나선 최남선·박한영이 빠지고 난 뒤 안종원과 이응균 등과 가진 조촐한 모임에서 남긴 것으로 보인다.

2. 한동아집의 성격과 1920년대의 시회문화

지금까지 살펴본 󰡔한동아집첩󰡕과 󰡔경고실음고󰡕의 기록, 그리고 시회에서 제작된 서화작품들을 통 해 오세창이 활동하였던 시회의 성격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즉, 19세기말 여항시사의 계승, 방고적(倣古的)인 시회 문화, 은일지사(隱逸之士)를 표방하는 동인들의 태도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오세창의 시회활동을 통해 알 수 있는 이 시기 시회의 특징은 19세기말 여항시사의 잔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19세기말 여항시사는 개화사상을 빠르게 받아들인 기술직 중인집안 출신들이 중 심이 되었다. 이들은 시회활동을 통해 유대와 결속을 다지는 한편 개화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 였고 개화기를 거치며 근대문물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문명개화와 근대화운동을 주도하였 다.42) 한동아집의 동인 중 오세창·고희동·이기·최남선 등은 모두 기술직 중인집안 출신들로서 이 들은 가계를 통해 19세기말 여항문인들의 문예전통과 서화취미 등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특히 오세 창과 고희동은 육교시사 동인이었던 부친과 이기를 통해 전통시사의 문풍을 계승할 수 있었고 따라 서 시회결성의 주축이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아울러 이들이 활동하였던 서화협회에는 육교시사의 동 인인 이기·현은(玄檃, 1860~?)·지운영(池運永, 1852~1935) 등이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육교시사에서 활동하는 문인들과 서화가들 사이의 교류는 매우 자연스러웠을 것이다.43)

41) 실제로 박한영의 󰡔석전시초󰡕에는 3월 5일 여정을 시작한 ‘속남유기행(續南遊紀行)’ 시 21수가 있다. 박한영, 앞의 책, 1999, 67~73쪽.

42) 정옥자, 「정조대 玉溪詩社의 결사와 眞景詩畵」, 󰡔韓國學報󰡕 28, 한국학보, 2002, 4~9쪽.

43) 최경현, 「六橋詩社를 통해 본 開化期 畵壇의 一面」, 󰡔한국근대미술사학󰡕 12,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220~22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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