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1598-1142 (Print) / ISSN 2383-9066 (Online) https://doi.org/10.7738/JAH.2019.28.6.055
일제강점기 도시기반시설의 설치를 통해 본 강경의 도시화 과정
Modern Urbanization Process of Ganggyeong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focused on Installation of Urban Infrastructure
현 태 준 Hyun, Tae-jun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건축공학부 석사과정) 김 기 주
Kim, Ki-Joo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건축공학부 교수) 이 연 경*1)
Lee, Yeon-Kyung
(인천대학교 지역인문정보융합연구소 책임연구원)
Abstract
Ganggyeong, a city which is located at riverside of Geum River, played a role to connect the inland cities and the coastal cities through the Geum river waterway. In Chosun dynasty, Ganggyeong was one of the three major markets in Korea, and at the same time, it was one of the two river docks in Korea. However, after the railway was installed in Korea, railroad was more important than waterway in transporting logistics and in 1911 Honam railroad and Ganggyeong railway station was installed. Thus it was necessary to reorganize urban structure of Ganggyeong city from the traditional river-dock city to modern railroad city. In addition, urban infrastructure to prevent flood damage was needed because Ganggyeong suffered from floods and water shortages every year. Therefore, between 1910s and 1930s large-scale social infrastructures including road, water and sewage system, river bank, floodgate was constructed not only to revitalize the declining city but also to prevent flood damage and water shortages that hinder urban development. The installation of urban infrastructure has enabled the urban expansion and development of Ganggyeong city, and it is still served as a basic urban structure.
주제어 : 일제강점기, 강경, 도시화, 도시기반시설, 상하수도, 제방시설
Keywords : Ganggyeong, Japanese colonial period, urbanization, infrastructure, water supply & sewage, riverbank
1. 서 론
강경은 금강 하류에 면하여 위치하여 도시의 중심을 굽이 돌아 흐르는 ‘구 강경천’을 이용한 수운 교통을 중심으로 발달한 곳이다. 조선시대 강경은 조선 3대 시 장, 2대 포구로 불리던 곳이었는데1) 이처럼 전국적 상
* Corresponding Author : [email protected]
이 논문은 2018년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수연구제 파견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1) 坂上富藏, 『最近江景事情』, 1911, 2쪽
권의 중심지가 될 수 있던 배경에는 자연적 입지가 크 게 작용하였다. 강경은 대하천인 금강 하류에 위치하였 기 때문에, 육상교통보다 수상교통이 대량운송에 유리 했으며, 상류에 위치한 도시들에 드나들 수 없는 큰 배 가 다닐 수 있어 수운의 요충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배후지역에 강경평야와 논산평야 등 넓은 곡 창지대가 있어 이곳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운송의 요 지인 강경포로 집산되어 강경시장에서 거래되었다.2) 2) 최완기, 「조선후기 강경 포구에서의 선상활동 – 그 입지를 중 심으로」, 역사교육, 79, 2001
그러나 1911년 대전에서 연산을 거쳐 강경을 연결하 는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강경에 근대적 도시 변 화가 시작되었다. 대량 물류의 주요 수단으로 철도가 이용되면서 금강 수운의 영향력은 점차 약해졌고, 이 에 따라 강경 시장의 위상도 점점 낮아지게 되었다.
강경의 서쪽으로 흐르는 금강과 외곽을 굽이치면서 흘 러가는 구 강경천과 지류들은 강경이 중심 포구와 시 장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었지만, 동시에 강경을 물리 적으로 고립시키는 요소이기도 하였다. 또한 매해 여 름 장마철마다 금강의 역류로 인해 구 강경천을 비롯 한 주변 하천들이 범람하여 발생하는 수해는 강경의 성장을 방해하였으며, 강경은 기존에 수상교통을 주요 운송 수단으로 사용하였기에 상대적으로 육상교통이 매우 열악한 상황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강경이 근대 도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근대 적 도시기반시설의 설치가 필요하였다.3) 일제강점기 동안 강경은 도로 및 하천 개수, 제방 설치 및 상하수 도 부설 등 도시기반시설을 확충해 나갔다. 1917년 지 정면(指定面)이 된 강경은 1931년 읍으로 승격되었고, 1914년 5,320명이었던 강경의 인구는 1924년 8,694명, 1935년에는 13,598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처럼 강경은 1910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도시기반시설을 부설하 며 근대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인구 가 증가하고 도시의 물리적 범위가 확장될 수 있었다.
강경에 대한 기존 연구는 그동안 주로 지리학 분 야4)와 사회학, 경제학 분야에서 이루어졌다.5) 도시건 축분야에서는 강경의 근대 건축물 개별 연구 및 보존 및 활용 방안, 혹은 도시 재생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 3) 근대 도시로의 성장을 위해서는 도시기반시설이 필요하다. 도시기 반시설의 확충을 통하여 산업 집중과, 경제적 이익이 축적되면서 장 기적으로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도시기반시 설의 설치 및 확충은 향후 도시의 성장을 보장하는 것이었기에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의 도시에서는 도시기반시설의 설치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서일수, 「1930년대 海州의 도시기반시설 확충과 ‘식민 권력’」, 한국사연구, 167, 2014, 156쪽
4) 나도승, 「강경수운의 변천에 관한 지리학적 연구」,공주교육대 학 논문집, 16, 1980 ; 나도승, 「강경수운 하항시장권의 변천에 관 한 연구」, 공주교육대학 논문집, 17, 198 1; 윤여향, 「강경의 성쇠 와 세력권에 대한 지리학적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 문, 1985 ; 김선문, 「江景의 盛衰過程과 都市構造에 關한 地理學的 硏究」, 공주대 교육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6 ; 최완기, 「조선후 기 강경 포구에서의 선상활동–그 입지를 중심으로」, 역사교육, 79, 2001
5) 나도승, 「금강 수운 중계하항의 변천에 관한 연구-강경을 중심 으로」, 공주교육대논문집 19, 1983 ; 송경언, 「금강유역 관문도시 의 교통 변천에 따른 공간적 특성 변화 : 군산과 강경을 대상으 로」, 한국지역지리학회지 제15권 제3호, 2009 ; 정연태, 「조선말 일제하 자산가형 지방유지의 성장 추구와 이해관계의 중층성 – 포 구도시 강경지역 사례」, 한국문화, 31, 2003
룬다.6) 하지만 강경의 도시성장과정을 도시기반시설의 부설 과정을 통해 살펴본 연구는 부족한 상황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 강경의 근대 도시화 과정을 도시기반시설의 설치 과정을 통해서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각종 보고서 및 문헌기록, 지도, 항공사진 등의 자료 분석을 통하여 도시기반시설의 확충 과정을 도시기반 시설 유형별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강경의 근대도시화과정을 도시기반시설의 부설이라는 측면에 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2. 철도 및 도로
1900년대 강경의 도로는 도시를 관통하는 유선형의 하천인 구 강경천7)을 따라 불규칙적인 그물망 형태로 형성되었다. 하천의 형태에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강 경의 도로 상황은 수운 교통에 비하여 매우 열악하였 다. 타 도시와 연결되는 간선도로로는 충청도로 향하는 방향와 전라도로 향하는 두 방향이 있었다. 충청도로 향하는 도로로는 강경에서 논산을 지나는 공주가도와 대전가도, 상시장의 북쪽으로 논산천을 건너 부여를 향 하는 부여가도가 있었다. 전라도로 향하는 간선도로로 는 강경 시가지에서 구 강경천을 건너 황산의 남쪽으 로 연결되는 전주가도와 군산가도 있었지만, 이 도로들 을 이용하여 강경을 지날 때 강경 주변의 여러 하천을 건너야 했으며, 하천의 형태에 따라 유선형으로 형성되 었기에 매우 불편하고 비효율적이었다. 또한 주요 도로 들은 상시장과 하시장을 중심으로 한 구 강경천의 북 쪽 지역에 밀집되어 있어, 구 강경천의 남쪽으로 가는 도로 사정은 매우 열악하였다. 한편 황산에는 취락지구 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구 강경천의 북쪽 시가지와 연 결되는 도로는 대화정 도로가 유일했다. 이러한 도로 사정으로 인해 1909년 강경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통
6) 우종환·김정동, 「논산 강경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에 관한 연구- 역사성 고증을 중심으로」, 건축도시환경연구, 10, 2002 ; 백주현,
「옛 남일당한약방의 보존과 활성화 방안 연구」, 지방사와지방문화, 14권, 2호, 2011 ; 임초롱·이정수, 「지역 정체성 분석을 통한 탐방로 계획」, 대한건축학회연합논문집, 14권, 3호, 2012 ; 박철희, 「역사문 화유산을 활용한 중소도시의 가로 재생방안 : 논산 강경 중앙로의 근대건축물을 중심으로」, 한국도시설계학회지, 14권, 6호, 2013 7) 본래 강경 시내를 관통하여 흐르는 하천을 ‘강경천’ 이라고 지칭했 지만, 1931년 강경 도시의 북쪽으로 새로운 물길을 내어 하천을 형성 하고 ‘강경천’으로 불렀다, 1932년 기존에 시내를 관통하는 하천을 운하 형태로 개수하였다. 따라서 1932년 이전까지 도시를 관통하는 하천을 ‘구 강경천’, 1931년 강경의 북쪽으로 개수된 하천을 ‘강경천’, 1932년 구 강경천을 개수한 하천을 ‘신 강경천’라고 지칭한다.
그림 1. 1910년 무렵 강경의 도로와 주요 건축물 (『最近江景事情』1911년 지도를 바탕으로 재작성)
그림 2. 1916년 무렵 강경의 도로와 주요 건축물 (국토지리정보원, 1916년 강경지형도를 바탕으로 재작성) 감부에 도로 개수 사업을 청원하게 되었다.8)
1910년경 강경의 주요 건축물을 살펴보면 상사장과 구 강경천 사이의 시가지에 경찰서, 우편국을 비롯한 관공서와 일본인회역소, 신탁회사 등의 시설이 밀집되 어 있었다. 지방금융조합과 한호농공은행 등 금융시설 은 상시장에서 상강경으로 가는 본정(本町)로에 위치 하고 있었으며, 상강경에는 소학교와 재판소가 설치되 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상시장 남쪽의 중정과 서정 (西町) 그리고 상강경이 1910년경 강경의 중심지였음 을 알 수 있다. (<그림 1>)
1911년 3월 군산과 강경 사이 호남선 부설공사가 시 작되며 강경역이 설치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논산-강 경-익산을 잇는 간선도로9)(현 계백로)가 부설되었다.
이후 상시장, 하시장을 지나 간선도로에 연결되는 중
8) 『황성신문』 1909년 09월 18일 기사
9) 시의 도로 등급은 1등 도로, 2등 도로, 3등 도로, 등외 도로로 구분하 여 관리하였다. 이 중 3등 도로는 인접하는 부청 혹은 군청소재지를 연 결하는 도로, 부청 군청 소재지에 서 중요한 지점, 항만, 철도정거장에 달하는 도로로서 도로폭 3m, 부지폭 4m인 도로를 지칭하는 도로이다.
강경의 중심을 관통하는 간선도로 ‘계백로’의 경우 3등 도로로서 약 3m 의 폭을 가진 도로로 추정된다. (굉박지, 「20世紀前半 韓半島 道路交 通體系 變化 - “新作路” 建設過程을 中心으로」, 지리학총논, 54권, 2004, 44쪽)
정(中町)로와 간선도로와 금강을 연결하는 황금정(黃 金町)로 등 간선도로와 수직 방향으로 만나는 도로들 이 신축되었다. 간선도로와 기존의 시가지를 잇는 지 선도로로 이루어진 도로망 형성 방식은 ‘강경역’ 주변 을 새로운 도시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한 것으로, 이러 한 측면에서 강경역의 위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 진다. 강경역은 상시장과 하시장이 있어 이미 옛날부 터 조선인의 상권이 형성되어 있던 기존 시가지인 구 강경천의 북쪽 지역이 아닌, 채운산의 북쪽, 즉 구 강 경천의 남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기존 시가지에는 이미 한인 상권이 형성되어 있어 일본 상인들이 침투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에, 기존의 시가지와 떨어진 곳에 철도와 간선도로를 부설하여 철도역 중심으로 새 로운 일본인 상권을 형성함으로써, 도시의 중심을 이 동시키고 도시의 물리적 범위를 확장시키고자 한 것으 로 볼 수 있다. (<그림 2>)
1911년 철도역과 간선도로를 부설한 데에 이어 1920 년대에는 강경역의 북서쪽에 새로운 도로들이 형성되 며 직교하는 도로체계와 직사각형의 블럭 구조를 만들 어 냈다. 새로 생긴 도로들 주변으로는 농업창고, 전기 회사 등이 새롭게 설치되었다. 여전히 상시장 남쪽의
그림 3. 1937년 무렵 강경의 도로와 주요 건축물
(국가기록원, 『강경읍 남정금정지내 강경천 및 금강제방 공작 물 설치의 건』및 1937년 강경지형도를 바탕으로 재작성) 중정로와 서정로 주변 지역에 관공서 및 여관, 음식점 등 많은 주거 및 상업 시설들이 분포하여 강경의 중심 시가지로서 역할을 하였으나, 강경역 주변으로 직교하 는 도로 체계의 도시 공간에 새로운 시설들이 설치되 면서 계획 시가지의 초기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1930년대에는 대규모 제방공사가 실시됨에 따라 제 방과 함께 도로가 부설되었고, 강경천 개수공사가 실 시되면서 도시를 관통하는 구 강경천을 대체하는 새로 운 물길이 강경 시가지의 북쪽으로 돌아가는 형태로 개수되었다.10) 이와 동시에 개수된 강경천을 지나는 상강경교와 하강경교 그리고 개수된 논산천을 지나는 강경대교가 설치되었다. 하강경교와 강경대교의 설치 는 부여 방면으로 논산을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도 로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근대식 교량의 설치는 다른 도시기반시설의 부설과 마찬가지로 중요 한 의미를 지녔고, 따라서 강경대교의 완공 후 도교 (渡橋) 행사를 성대하게 열기도 하였다.11) 또한 단순한 형태로 개수된 신 강경천 양 옆으로 평행한 도로가 수
10) 제방과 하천 개수공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3장에서 다룬다.
11) 『조선중앙일보』 1933년 10월 10일 기사
축되었다. 뿐만 아니라 간선도로에서 채운산 방향으로 향하는 도로들을 개수하여 강경의 기존 시가지인 상시 장, 하시장 주변 및 황산의 취락지구과 더불어 채운산 북쪽의 지역이 도로로 편리하게 연결되었다. 이후 이 세 지역은 확장하며 하나의 도시로 합쳐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강경역 주변이 근대 도시 강경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림 3>)
1910년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진 강경의 도로개수공 사는 수운 교통 중심의 포구도시에서 육상 교통 중심 의 근대도시로 변화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도로의 확충은 교통의 편리함과 접근성의 향상으로 인한 도시 의 확장 뿐 아니라 다른 도시기반시설의 설치와 밀접 한 관계를 갖는다. 도로의 개수와 신축은 도시의 주요 시설들의 위치 선정에 큰 영향을 미치며 제방, 상수도, 하수도, 전기, 전화 등 다른 도시기반시설의 설치와 관 계되어 진행되기 때문에 도로의 변화는 도시의 변화에 가장 기본적인 틀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3. 제방 및 하천개수
강경의 시가지는 금강의 지류인 구 강경천이 도시를 관통함에 따라 침수 피해에 노출되어 있었고, 강경의 가옥들은 대부분 여름철 홍수에 따른 침수를 피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어 강경 주민들의 홍수 피해는 매 우 컸다.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도로를 점차 높이거 나 각 호별로 성토 및 매립 등을 실시하여 점차 침수 호수가 줄어들긴 하였으나, 홍수 범람 중에는 교통이 두절되어 어린이들이 도선(渡船)을 이용하여 통학하기 도 하였다.12) 1920년 9월 대홍수 당시에는 강경, 논산, 황등, 이리 등 호남선의 연로(沿路)에 금강 상류의 물 이 넘쳐 농작물이 모두 잠기고, 호남선 선로 주변의 도로가 다 끊기기도 하였으며, 1921년 9월에도 이같은 상황이 반복되어 많은 농작물 피해와 교통 단절의 불 편을 야기했다.13) 이에 사카가미(坂上富藏) 강경면장14) 은 1921년 6월 14일 강경면사무소에서 민협의원회를 소집하여 제방 및 갑문 공사를 비롯한 수해방지공사비 보조를 요구하기로 결의하고,15) 사카가미(坂上富藏)를
12) 국토해양부, 『1928년까지 조선토목사업지 하천개수편』(국토해양부, 2011, 224∼225쪽; 朝鮮總督府, 『朝鮮土木事業誌』, 1937, 505∼506쪽.
13) 『동아일보』, 1920년 09월 02일 기사, 1920년 09월 06일 기사 14) 1905년 조선 강경으로 들어와 강경일본인회평의장, 학교조합의 원, 강경면장, 강경읍장, 강경번영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35년 대 전 중선일보 부사장에 취임하였다.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db,history.go.kr)
그림 4. 1924년 설치된 강경 갑문 배치도 및 입면도
(국가기록원, 『강경 갑문 보수공사 변경 설계서 및 도면』, 1932년 도면을 바탕으로 재작성)
그림 5. 1924년 무렵 강경 하천 및 제방 현황 (국토지리정보원, 1916년 강경 지형도를 바탕으로 재 작성)
비롯한 5인은 1921년 07월 26일 조선총독부를 방문하 여 방수공사비에 대한 국고보조를 진정하였다.16)
총독부에서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1922년 제방 설치 공사가 실시되었다. 제방 공사는 상강경-장항산 구간, 황산-강경산(옥녀봉) 구간, 강경산-상강경산 구간의 총 세 개의 구간에서 시행되었다. 또한 상강경-장항산을 있는 제방 설치와 더불어 호안 240칸(間)17), 관개 수문 71.9척(尺)을 연장하는 공사가 같이 진행되었다.18)
상강경산 - 장항산 길이 412간 (약 750m) 황산 – 강경산(옥녀봉) 길이 352간 (약 640m) 강경산(옥녀봉) - 상강경산 길이 597간 (약 1,086m) 표 1. 1922년-1924년 진행된 제방 공사 구간과 길이, (국토해양부, 『1928년까지 조선토목사업지 하천개수편』, 2011, 224·225쪽) 1924년에는 구 강경천 하구에 총 연장 210척, 높이 24척의 근대식 갑문을 설치하였다. 강경 갑문의 준공 은 조석간만의 차에 지장을 받지 않고 화물의 하역과 선적을 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홍수 범람 시 물을 강으로 퍼내는 취수탑으로서 역할을 하기도 하여 홍수 피해를 방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19) 강경 갑문은 총 3개의 문으로 구성되었는데, 제1문은 홍수 시에 금강 으로부터 범람하는 물을 막기 위하여 건설되어 제방과 비슷한 높이로 설치되었고, 제2문과 제3문은 선박의 출입을 위한 시설로서 평소 배의 출입이 가능할 정도 의 수량을 확보하는 정도의 높이로 건설되었다.20) 제2 문과 제3문은 50m정도 이격되어있는데, 이는 배를 정 박시키고 하역 및 선적 작업을 할 수 있는 갑실을 만 든 것이다.21) 갑문은 이후 1933년에서 1934년 사이 보 수공사를 실시하였다.
1920년대에 제방 및 갑문을 설치하였음에도 불구하 고 또 다시 홍수로 인한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 1925 년 을축년 대홍수22) 당시 금강이 범람하면서 금강 연
15) 『동아일보』(1921년 06월 21일 기사 16) 『동아일보』(1921년 07월 03일 기사
17) 1간(間)은 약 1.82m, 1척(尺)은 약 0.3m와 같고, 1촌(吋)은 0.03m와 같다. (국토해양부, 『1928년까지 조선토목사업지 하천개수 편』의 단위환산표를 참조)
18) 朝鮮總督府, 『朝鮮土木事業誌』, 1937, 506∼507쪽 19) 논산시, 『강경갑문 기록화조사보고서』, 2017, 34쪽 20) 논산시, 앞의 책, 2017, 50쪽
21) 논산시, 앞의 책, 2017, 53쪽
22) 1925년 을축년 대홍수는 7월 6일부터 20일까지 15일 동안 전국 에 걸쳐 연간 강수량의 80%인 700-900mm의 비가 내림에 따라 전
안 일대의 연락이 두절되었고 ‘강경 평야가 망망대해를
국에서 사망자가 647명, 가옥유실 6,363호, 가옥붕괴 17,045호, 가옥 침수가 46,813호에 이르렀다. 또한 유실한 논이 3,218ha, 밭이 6,755ha 등으로 그 당시의 피해액은 무려 1억여원으로 조선총독부 1 년 예산의 58%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 국가기록원 기록정보컨텐 츠(http://archives.go.kr)
그림 6. 1935년 무렵 강경 하천 및 제방 현황
(국가기록원, 『강경읍 남정금정지내 강경천 및 금강제방 공작 물 설치의 건』 및 1937년 강경지형도를 바탕으로 재작성) 이루었고 밭과 논의 농작물은 거의 전멸상태에 이른 듯 하다.‘라 표현할 만큼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에 강경 과 논산의 일본인 지주 주도로 모인 20여 명의 지주들 은 1928년 8월 논산천·강경천 개수 기성회를 조직하였 다. 이들은 총독 등 고위 관료들을 방문하여 엄청난 수 해 피해를 호소하면서 논산천과 강경천 하구의 개수 공 사를 추진하기 위한 대대적인 움직임을 보였다.23)
이러한 노력으로 1931년 제방공사와 하천 개수공사 가 실시되었다. 우선 금강연안에 추가로 제방을 설치 하여 1920년대에 구축된 옥녀봉과 황산까지만 있던 제 방이 황산의 남쪽으로 금강을 따라 확장되었다. 1931 년 5월에는 논산천과 그 주변 하천들을 단순한 형태로 정비하여 강경 시가지의 북쪽으로 물길을 돌림으로써, 현재의 강경천이 형성되었다. 하천 개수 공사를 통해 형성된 강경천의 양 옆으로는 제방이 설치되었다. 이 는 1935년 3월에 완공되었다.24) 덕분에 강경을 관통하
23) 坂上富藏,『江景事情』(1928), 8쪽
『호남일보』 1929년 04월 27일 기사, 1928년 10월 07일 기사, 『京城 日報』 1928년 10월 06일 기사, 『동아일보』 1928년 08월 22일 기사, 1929년 04월 28일 기사, 『조선일보』 1929년 07월 07일 기사, 정연태, 앞의 논문 46쪽, 재인용
며 흘러갔던 강물이 시가지의 북쪽으로 돌아 흘러가 고, 그 물길을 따라 제방이 설치되어 홍수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시를 관통하며 흐르던 자연곡류하천인 구 강경천을 더 단순한 형태로 정비하 여 신 강경천을 만들었으며 개수공사 실시 후 폐천이 된 구 강경천은 1936년 매립 공사를 진행하였다.25)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시행된 제방공사와 하천 개수공사로 인하여 강경에서는 홍수로 인한 피해가 줄 어들었다. 1920년대 설치된 제방과 갑문은 구 강경천 북쪽 일대에 한정되어 상시장과 하시장 주변의 기존 강경 시가지는 홍수에 의한 피해가 줄어들었다. 그러 나 강경역 주변과 황산 지역은 여전히 홍수로 인한 피 해가 컸으며, 이는 1930년대의 제방설치 및 하천개수 공사 이후에야 줄어들었다. 도로 개수와 더불어 시행 된 제방 설치와 하천 개수공사는 도시 환경의 개선 뿐 아니라 도시의 물리적 범위 확장에 직접적 영향을 미 쳐 1910년대 구 강경천의 북쪽의 상시장과 하시장 주 변으로 한정되었던 강경의 시가지는 1930년대에 이르 러서 황산의 취락지구와 강경역 주변까지 확장되었다.
4. 상수도 및 하수도
상수도 설치 이전 강경 주민들은 강물을 길어 며칠 동안 두어 침전물을 가라앉힌 다음 식수로 사용하였 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얻은 식수는 수질이 일정치 않았으며, 잦은 홍수로 인한 범람은 전염병 창궐과 수 질 악화라는 문제를 만들기도 하였다.26) 이에 강경으 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상대적으로 수질이 좋은 상수를 얻을 수 있는 상강경에 거주하며 공동 우물을 파서 사 용했지만 그 양이 충분하지 않아 식수 정도만을 사용 하였고, 금강의 상류의 맑은 물을 배로 옮겨 와 사용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로도 충분치 않아 1918년 간 이수도 부설 인가를 받은 후 채운산에 큰 우물을 굴착 하여 시내의 각 호에 운반차를 이용하여 보급하였다.
간이수도는 그 요금이 비싸 지방민의 경제 부담이 컸 고, 위생상의 우려도 있었다.27) 또한 그 양이 겨우 약 70석(약12,600ℓ)28)에 불과하여 주민들은 금강의 탁수
24) 『조선중앙일보』 1935년 03월 19일 기사 25) 『조선중앙일보』 1936년 03월 28일 기사 26) 朝鮮總督府, 『朝鮮土木事業誌』, 1937, 1143쪽 27) 『동아일보』 1920년 07월 14일 기사
28) 부피단위 1석(石)은 180ℓ와 같고, 1입방척(立方尺)은 0.027㎥으 로 물 27ℓ와 같다. (국토해양부, 위의 책의 단위환산표를 참조)
그림 8. 상수도 정수지 평면도 및 전경
(평면도 : 『조선수도지』, 1928, 사진 : 『조선토목사업지』, 1937)
그림 9. 강경 상수도 분포도
(『조선토목사업지』1937년 강경 수도 평면도를 바탕으로 재작성) 그림 7. 강경 상수도 수원지 및 정수장 배치도 (『조선토목사업지』, 1937)
를 침전하여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19년과 1920년의 콜레라 유행으로 인해29) 정수시설을 갖춘 근 대적 상수도의 부설이 시급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당시 강경면장 겸 학교조합관리자였던 사카가미 (坂上富藏) 등 5인은 강경수도기성동맹회를 조직하고 1921년 7월 26일에 총독부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30) 29) 1919년 블라디보스톡과 만주에서 유입된 콜레라는 조선에서 크게 유행하여 콜레라 환자 1만 6,991명, 사망자 1만 1,084명에 이르는 큰 피해를 입었다. 1920년에는 진남포에서 처음 발생한 콜레라가 대규모 홍수와 함께 크게 퍼져 콜레라발생환자 총수는 2만 4,229명, 사망자 는 1만 1,570명에 이르렀다. 충청남도에서도 1919년 환자 943명, 사 망자 617명, 1920년 환자 765명, 사망자 483명이 발생하였다. - 백선 례, 「1919·20년 식민지 조선의 콜레라 유행과 방역활동」, 한양대 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11, 6∼12쪽
30) 『동아일보』 1921년 07월 03일 기사
그 결과 1922년 5월부터 상수도 부설공사를 시작하여
1924년에 완성하였다. 강경 상수도는 공주(1923년)에 이어 충청남도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것이었다.
당시 부설된 상수도의 급수량은 하루에 1인당 2입방 척(立方尺) 약 55ℓ를 1만명에게 보급할 있는 수준이었 다. 수원지는 논산군 구자곡면 소룡리로 현 연무읍 소 용리 소용저수지의 자리였으며. 수원지의 저수량은 6,204,000입방척으로 약 172,657ℓ의 물을 저장할 수 있 었다. 수원지의 저수지에서 강경 채운산 정수장까지는 7,387간(약 13.4km)의 거리로, 6촌(吋=1/10尺, 약 18cm)
그림 11. 1937년 강경 하수도 분포도(국가기록원, 강경하수 국고 보조공사 준공인가의 건(1937) 도면을 바탕으로 재작성) 또는 8촌관경의 철관으로 연결하여 송수하였다. 정수장
은 강경면 채운산 공원지에 위치하였으며 정수장은 ‘여 과지’ ‘배수지’ ‘용수기실’ ‘사세장(沙洗場)’으로 구성되 었다. 수원지에서 송수된 물은 여과지와 정수지를 거치 며 정수된 후 강경 시가지로 배수되었는데, 정수장에서 황산∼대화정(大和町) 구간은 6촌(吋)관경의 철관으로 송수하였으며 대화정부터는 4촌 철관이 분기되어 중정 로와 서정로를 따라 설치되었다. 중정로와 서정로의 4 촌 철관에서는 2촌 관경의 철관이 뻗어 나와 상강경로 를 타고 상강경 지역과 북정까지 급수되었으며, 황산의 경우 정수지에서 나오는 6촌 관경의 철관에서 바로 연 결되어 황금정에 급수되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주 요 거리를 제외한 도시의 곳곳에는 2촌 관경의 철관과 토관이 사용되어 물을 공급하였다.31) 뿐만 아니라 사설 전용수도 역시 설치가 가능하였는데, 사설전용급수는 공용수도를 가입하여 신청하면 수도국에서 부설한 수 도관에서부터 거리를 따져 설치 요금을 내면 원하는 곳에 전용수전을 설치할 수 있었다.32)
<그림 9>는 1937년 경 강경의 상수도관 분포 현황을 보여준다. 이 분포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듯이 채운산 에서 정수되어 강경 시가지로 급수되는 상수도의 중심 은 황산을 지나 대화정을 통해 강경의 기존 시가지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부설된 6촌 철관인데, 1911년 부설 된 직선도로인 간선도로가 아닌 기존의 도로를 따라가 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는 여전히 간선도로보다는 상시장, 하시장 부근의 시가지와 황산을 잇는 기존의 도로 주변으로 급수인구가 많이 분포하고 있었기 때문 으로 판단된다. 한편 황금정에서 중정 사이에는 공용전 과 소화전이 전혀 분포하고 있지 않아 이 지역은 상수 도가 부설된 1920년대 중반까지 시가지로 발달되지 않 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기존 시가지의 중심가로인 중 정로와 서정로를 중심으로 많은 공용전과 소화전이 분 포되어 있다. 즉 상수도 급수구역 및 소화전과 공용전 의 분포 상황은 1920년대 강경의 급수인구 분포 및 시 가지 상황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강경 상수도와 비슷한 규모의 상수도 시 설의 부설이 이뤄진 도시로는 군산, 공주가 있다. 군산 은 1915년, 공주는 1923년에 상수도가 설치되었다. 두 도시의 상수도는 강경과 비슷한 규모로 1일 1인당 2입 방척(약55ℓ)을 1만명에게 보급할 수 있는 급수량의 규 모였는데, 1930년대 군산의 급수구역 내 총인구는
31) 朝鮮總督府, 『朝鮮土木事業誌』, 1937, 1144쪽 32) 『동아일보』 1923년 12월 15일 기사
24,828명이었고, 공주는 22,237명이었다. 이에 비해 강경 의 급수구역 내 총인구는 11,148명으로 군산이나 공주에 비해 상수도 보급률이 2배 정도 높았음을 알 수 있다.33)
그림 10. 길가에 설치된 구거 <좌 : 중정거리, 우 : 서정거리>
한편 일제 강점기 강경의 하수처리 방식은 강물에 바로 오물을 흘려보내거나, 길가에 면한 구거를 따라 하천으로 흘려보내거나, 혹은 관거를 설치하여 관을 통하여 하천으로 흘려보내는 3가지 방식로 나타난다.
1920년대 이전 강경에서는 도시 내부의 작은 하천들 에 바로 하수를 흘려 구 강경천이나 금강으로 흘려보 내거나, 시가지의 도로 한 켠에 구거를 만들어 구 강 경천과 연결하여 그곳에 오수를 버렸다. 그러나 1924 년 상수도를 부설함에 따라 위생적인 하수 처리 역시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그러나 실제 관거를 설
33) 朝鮮總督府, 『朝鮮土木事業誌』, 1937, 1141쪽, 1143쪽, 1147쪽
그림 12. 도로양변에설치된측구단면도<좌: L형측구, 우: U형측구>
(국가기록원 강경하수 국고 보조공사 준공 인가의 건 , 1937)
그림 13 . 1937년 설치된 제1간선 1부 평면도 일부
(국가기록원, 강경하수 국고 보조공사 준공 인가의 건(1937) 도면을 바탕으로 재작성)
그림 14. 1937년 설치된 강경 하수도 처리 방식
치한 하수도 공사는 약 10여년이 지난 1936년 이후 시 작되었다. 당시 하수도는 강경의 시가지뿐만 아니라 황산 지역과 채운산 지역까지 부설되었다. 1936년 부 설 공사의 경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1937년 강경하수공사 관련 문서철에 포함된 분포도(<그림 11>)에서 1937년 부설된 하수도를 이전 해인 1936년에 부설된 하수도에 연장하여 공사를 진행한 내용을 찾을 수 있어, 1936년에 부설한 하수도 역시 1937년과 거의 유사한 방식의 하수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37년에는 대화정에 제1간선 1부와 제3지선 등 콘 크리트를 이용하여 하수관 및 집수정을 매립하는 하수
도 공사를 실시하였다.34) 1937년 설치된 하수도 시설 은 철근콘크리트 관을 매립하는 형태로, 대화정과 염 정 일부 구간에 설치된 하수도는 제1간선 1부와 제3지 선 2개 구간이었다. (<그림 12>) 하수를 처리하는 방 식은 도로의 양변에 L형 측구 또는 U형 측구를 설치 하여(<그림 13>) 집수 후 일정 구간마다 설치된 오수 저(汚水杵)를 지나 도로 중앙에 설치된 암거(<그림 13>)로 흐른 후 신 강경천으로 흘러가도록 구성되었 다. 암거는 철근 콘크리트 관을 사용했는데 구형(矩形) 암거와 원형(円形)암거를 사용하였는데, 주요 구간에는 밑변 1.5m, 높이 1.3m의 구형 암거를, 그 외 구간에는 1.3m에서 0.5m 관경의 원형 암거를 사용하였다. 또한 오수저와 암거를 연결하는 관은 0.3m 관경의 관을 사 용하였다.
1930년대 중반 이후의 관거형 하수도 설치는 상수도 부설 이후 위생적인 하수처리가 필요했던 상황과 함께 당시 구 강경천을 개수하여 단순화된 형태의 신 강경 천을 새롭게 준설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한 하수도 역시 상수도와 마찬가지로 시가지화가 먼저 이루어진 상시장, 하시장 주변 및 황산의 주요 도로들 을 따라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 결론
강경은 금강의 하류에 위치하여 수상 교통의 중심지 로서, 내륙 도시와 해상 도시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 지 역할을 수행하며 조선시대부터 포구와 시장이 발달 하였다. 그러나 철도의 부설 이후 수운보다 대량 물류 수송에 유리한 철도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고, 강경에도 1911년 호남선 철도가 설치됨에 따라 강경 역시 기존의 수상교통 중심지에서 철도와 도로를 이용 한 육상교통 중심의 근대도시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근대도시화가 진행되며 강경의 인구도 함께 증가하 여 1910년에서 1920년 사이 강경의 인구는 4,417명에서 6,033명으로 1,616명이 증가한 수준이었으나, 1920년에 서 1930년 사이에는 6,033명에서 12,639명으로 약 2배 정도의 성장세를 보였다. 1930년대 이후의 성장세는 더 뎌졌으나 지속적으로 인구는 증가하여 1930년부터 1935년 사이에는 959명이 증가하여 13,598명이 되었다.
강경의 도시변화는 철도 및 도로부설, 제방 및 하천 개수, 상하수도 부설이라는 도시기반시설의 설치 과정 34) 『강경하수 국고 보조공사 준공 인가의 건』, 1937 (국가기록원, 관리번호:CJA0015804)
1910년 이전 1911년∼1920년 1921년∼1930년 1931년∼1945년
도시변화
특징 •수운교통 중심의 포구 •철도부설과 도로망체계의 구
축을 통한 시가지형성 •치수사업(제방공사, 갑문)과
상수도부설 •하천 준설 및 개수와 하수도
부설 행정
구역 •충청남도 은진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강경면으로 개칭
•1917년 지정면(指定面) 으로 지정•1921년 금정(錦町) 편입 •1931년 강경읍으로 승격
•1935년 강경읍 구역확장
도로 및 철도
•1911년 호남선 개통 및 강경 역 설치
•1911년 간선도로 부설
•간선도로와 직교하는 지선도로 부설
•1933년
강경대교, 상강경교, 하강경교 완공
•1935년03월 제방도로 부설
하천 개수
및 제방 •1924년11월
강경 제방 공사 및 갑문공사
•1934년07월 신강경천 개수공사
•1935년03월
강경천 개수공사 및 제방 설치
상・하수도 •1918년10월 간이수도 설치
•1924년 상수도 부설 •1936년∼1937년 하수도 부설
표 2. 강경의 시기별 도시변화과정
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이를 종합하여 시기별 특 징을 살펴보면, 호남선 철도 개통 이후 도로부설로 시 가지화가 이루어진 1910년대와 1920년 홍수 및 1921년 행정구역 확장 이후 치수(治水)사업과 상수도부설이 주가 된 1920년대, 그리고 1931년 강경읍으로의 승격 이후 대대적인 강경천 개수와 시가지의 확장이 이루어 지는 1930년대의 변화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1910년 이전의 강경은 구 강경천 북쪽의 상시장과 하시장을 중심으로한 시가지와 황산 근처의 취락으로 이루어진 수상교통 중심의 포구였다. 그러나 1911년 호 남선의 개통과 강경역의 설치에 이어 논산과 익산을 잇는 간선도로가 부설되고 이들 간선도로와 직교하며 기존의 시가지를 연결하는 도로들이 설치되었고, 이는 현재까지 강경의 기본적인 도시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처럼 1910년대 강경은 수상교통 중심에서 육상교통으 로 재편되며 시가지화되는 과정을 겪었고, 1917년에는 인구가 많고 도시화가 이루어진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지정면(指定面)이 되었다. 1920년에는 충청남도 최초로 전기가 설치되는 등 당시 강경은 전국 24개 지정면 중 하나로 충청남도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하였다.
1910년대의 변화가 철도부설과 도로신설 등이 위주
가 되었다면, 1920년대의 변화는 지형상 홍수의 피해 가 잦았던 강경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치수(治水)사 업이 중심이 되었다. 홍수로 인한 범람 피해를 막기 위해 금강 및 강경 북쪽과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 주변 으로 제방을 구축하였으며, 금강과 강경천이 만나는 위치에는 갑문이 설치되었다. 또한 식수 부족 및 수질 개선을 위하여 상수도 부설 공사가 이루어졌다. 강경 수질의 문제 역시 홍수로 인한 피해 중 하나였음을 고 려했을 때, 1920년대 강경의 도시 변화는 치수(治水)사 업을 위주로 전개되었으며, 1921년 상수도 정수지가 위치한 금정(錦町)이 강경면 내로 편입된 것 역시 이 에 따른 결과였다.
1930년대에는 지정면이었던 강경이 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하천의 경로를 변경하고 새로운 물길을 만드는 등 대대적인 하천개수작업과 제방 건설이 이루어졌다.
또한 이와 동시에 새롭게 준설된 강경천을 지나 논산 지역으로 연결되는 교각들이 건설되며 대대적인 시가 지확장이 이루어졌다. 이같은 공사가 마무리된 1937년 에는 인견공장 유치를 위해 강경읍 주변의 일부 리를 편입시키고자 하는 등의 도시 확장 시도가 계속하여 이루어지기도 하였다.35) 또한 기존의 강경천을 매립하
고 강경운하를 구축하면서, 대대적인 하수도 부설 역 시 이루어져, 강경은 1930년대 중후반 상·하수도를 모 두 갖춘 근대적인 도시가 되었다.
이로써 강경은 구 강경천의 북쪽에 한정되었던 포구 도시에서 철도와 상하수도가 부설된 근대적 도로가 설 치되었을 뿐 아니라 제방, 갑문 등을 갖춰 홍수 피해 를 막을 수 있는 근대 도시로 변화하였다. 새로운 도 로의 부설과 하천 개수, 제방의 설치는 기존의 시가지 를 벗어나 신시가지를 형성할 수 있는 기틀이 되어, 강경역을 중심으로 옥녀봉, 황산, 채운산 주변까지 시 가지를 이루게 되었으며, 1930년대 후반에는 기존의 강경읍을 넘어 논산과 익산 방향으로 확장할 수 있는 도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와 같이 강경의 변화 과정에서 도시기반시설의 설치는 도시의 환경을 개선 할 뿐만 아니라 도시의 물리적 범위를 확장시키고 새 로운 도시의 중심지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침을 살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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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2019. 10. 28) 수정(1차:2019. 12. 16) 게재확정(2019. 1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