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1. 서론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전통주거에 대한 선행 연구들이 주로 물적 형태 나 공간연구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넘어서 거주자 의 삶을 중심으로 공간을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오늘의 시점이 아니라 전통생활이 살아 있으며 기억 가능한 과거 시점1)의 주거를 복원하 고자 한다.
1-2. 연구 대상과 내용과 방법
연구대상 주거는 조선시대 상류주거인 중요민속 자료 제 205호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동(薑洞) 의 정온(鄭蘊) 종택이다.
이미 거주자들 대부분이 역사 무대에서 사라진 과거 생활을 복원하기 위하여 연로한 主提報者 (informant)와의 면담에 의존한다. 거주자의 공간 속에서의 다양한 활동들과 건물을 포함한 물적 형 태와의 연관을 복원하고, 그 이유 즉 공간과 형태 의 뒤에 숨어있는 의도를 찾아낸다. 소위 과학적 혹은 객관적이라고 하는 통상적 건축연구자 외부 인 관점이 아닌, 거주자 내부인 관점에서 사실을 파악하고 의미를 해석하는 문화 연구이다. 문화인 류학적 현장연구(anthropological field study) 바탕
1) 본 논문에서의 과거 시간은 전통생활이 살아있던, 즉 대가족 제와, 토지소작제가 유지되고 경제적관계로 완화되었지만 노비 신분제가 살아있던 해방 전후에서 6.25 전쟁 이전의 1940년대 를 연구대상 시기로 한다.
의 문화기술학적 면담(ethnographic interview)을 행한다. 이 연구는 현장에서의 개방형 질문과 반복 관찰을 통하여 넓은 데서부터 점차 좁은 주제를 발견해나가는 틀을 갖는 순환적 과정(cyclic pro- cess)의 연구이다.
주제보자는 14대 종부(최희, 76세)와 마을에 사 는 친척(9촌할머니)과 몇몇 동네어른들이다.
1-3. 집의 역사
조선 중기의 文臣인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 9∼1641)의 생가이다.2) 소슬대문에 인조 왕이 하사 하신 정온 선생의 충절을 기리는 ‘문간공동계정온 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이라는 붉은 현판이 걸 려있다. 이 집은 ‘忠信堂‘3)이라고도 불린다. 초계 정씨의 강동 입향시조는 정온의 조부인 정숙(鄭淑) 이고 그 연대는 약 460여년전으로 추정한다. 현재 의 종택은 순조 20년(1820)에 후손들에 의해 중창 되었다. 현재 15대 종손 정완수씨는 외지에 나가있 고 14대 종부만 거주하고있다.
2) 그는 광해군의 영창대군의 강화도 귀양후 살해와 대군의 모 인목대비를 폐출한 데 대해 인륜에 크게 어긋남을 상소하여 제 주도로 위리안치(圍籬安治)되는 10년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그 후 인조시 방면되어 벼슬을 하였고, 병자호란 때 화의에 적극 반대하였으나 왕이 무릎꿇고 항복하자 할복 자결을 시도하였으 나 살아남게되어, 덕유산 모리에서 칩거하다 죽었으며, 사후 이 조판서에 추증된 분이다.
3) 제주도 유배 후배인 추사 김정희가 정온 선생의 충절에 감 동하여 고택을 방문해 당시 후손인 정기필(鄭夔弼)에게 충신 당(忠信堂)‘이라고 현판을 써줌.
상류 전통주거 居昌 동계(桐溪) 정온(鄭蘊) 종택의 공간과 생활의 복원을 통한 해석
박 희 영
(중앙대 건설대학원 실내건축학과 석사) 이 희 봉
(중앙대 건축공학과 교수)
주제어 : 전통상류주거, 거주자 생활 중심, 정온 종택, 문화기술학, 복원 해석
2. 공간의 복원
2-1. 집의 위치 및 배치
덕유산 거창쪽 남쪽 줄기의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쪽에는 금원산이 보이고 동쪽에는 위천 이 흐르고 있다. 집 앞 너른 논들에는 서에서 동으 로 흐르는 작은 개천이 있다. 壬座丙向의 (정남향 에서 약간 동향) 배치이다. 문간채, 사랑채, 안채와 제일 뒤 사당이 배열되고 사랑마당과 안마당이 튼 ㅁ자로 구성되어있다.
바로 옆 담을 인접하여 친척집인 반구헌이 있고 5분거리 위천가에 이 집의 정자인 능허정이 있다.
2-2. 문간채
현재 문간채는 소슬대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2 칸씩 인데, 당시에는 각각 1칸씩 더 있었다. 머슴 방 둘과 과객방, 광, 아궁이와 잿간이 있었다.
2-3. 사랑채 (1) 큰사랑채
대문에 들어서면 19세기초 지어진 것으로 알려 진4) 사랑채가 나타난다. 높은 기단 위에 ㄱ자형의
4) 사랑채의 상량문의 '崇禎紀元後四庚辰三月'로 순조 20년 서 기 1820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
큰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 반인데, 꺾여 돌출 된 누마루의 화려한 눈썹지붕 차양이 특이하다.
그림 4. 1940년대 복원 배치평면도 그림 1. 전경 (오른쪽 끝이 반구헌)
그림 2. 집의 위치도
그림3. 현재 배치도 (강영환, 「 한국의 건축문화재 7.경남편」 에 서)
133 왼편으로 낮은 작은사랑채가 있고 둘 사이에 안채
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다.
현재 내부 평면은 1940년대와 거의 같은데, 누마 루와 빈소방 사이에 사랑마당-안마당을 분리하는
분리담이 있었고, 담 옆 안마당 쪽으로 평상이 있 었다는 것이 다르다.
(2) 작은사랑채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사랑채는 큰사랑채 옆에 중문을 사이에 두고 큰사랑채 보다 낮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데 거의 과 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2-4. 정침
이 집에서 안채를 정침(正寢)이라 부른다. 남향 으로 정면이 8칸이고, 측면 2칸의 양통계에 반칸의
전퇴간이 있는 겹집이다. 현재까지도 주로 생활을
하기 때문에 가장 많이 보수와 변형이 이루어졌다.
현재의 큰 안방은 원래 벽이 있는 4개의 방이었 고,5) 건넌방도 원래는 2개의 방이었다.
그림 8. 정침 평면도 (1940년대)
또 눈에 띄는 것이 반간방6)과 반간마루라는 공 간인데, 음식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정침의 복원평 면은 다음과 같다.
복원된 평면에서 보면 앞에서 말한 반간방․반 간마루가 꽤 큰 규모라는 것과 큰마루․제청․높 은 마루 등 다양한 마루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특 이하다. (그림 9)
그림9. 정침 마루 (제청과 높은 마루가 큰마루에 비해 1자(30cm)정도 높게 구성됨) 2-5. 사당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된 단청을 입힌 사당
5) 선행연구에서 “중앙에 기둥이 세워진 4칸 통방이 만들어지 는 등 이해할수 없는 평면이 되었다” (강영환, 「한국의 건축문 화재」 7 경남편. 320쪽)는 의문은 과거 겹집의 내부 간막이 벽 체를 현재 헐어버려 가운데 기둥만 남은 것으로 쉽게 이해하면 된다.
6) 경상도 말로 ‘방감방’으로 발음되는 이 방은 동네의 대부분 의 집들에서 현재까지도 ‘정지방’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조선 궁중에서 음식물과 진상품을 맡아본 벼슬아치를 ‘반감(飯 監)’이라 부르는 용어의 어원으로도 볼 수 있으나, ‘반빗간’과 관련하여 ‘반간(飯間)방’으로 추정하였다.
그림 5. 사랑채 본채 (사진에 나오지 않은 왼쪽에 작은사랑채와 중문이 있다)
그림 6. 복원한 사랑채 평면도 (1940년대)
그림7. 정침 전경
건물은, 정온 선생의 위패를 모신 이후 그대로 모 습인, 이 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사당은 외부 바깥담 안에 대나무를 심고(과거 복원), 다시 사당 담을 쌓아서 중요한 영역이라는 공간의 겹을 보인다. 정면에 정조 왕이 지은 어제시 현판이 있 다. 사당 안에는 4대까지의 윗 조상들의 위패와 불 천지위(不遷之位)인 정온 내외분의 위패를 합쳐 5 대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2-6. 아래채
정침 왼편에 위치한 아래채는 며느리에게 안방 을 물려준 시어머니가 기거하던 공간이다. 현재 정 면 4칸인데, 예전에는 광 옆으로 2칸의 방앗간이 있어서 정면 6칸 규모였다.
옆 반구헌의 안채와 통하는 샛문이 아래채 아궁 이 뒤로 보이지 않게 뚫려 있었다. 이 집에서 유일 하게 마룻바닥인 아래채 광은 방앗간에서 찧어 온 쌀을 보관했다. 마루의 벽감은 어른 내외분 중에 한 분만 돌아가셨을 때, 임시로 신위를 모시던 곳
이다.
2-7. 사랑광채
면담에 의하면, 현재 작은사랑채 앞의 화단이 과 거의 사랑광채가 있던 자리이다. 안광채와 같은 규 모의 정면 4칸, 측면 2칸이었는데, 이 중 3칸은 광 이었고 1칸은 외양간이었다. 광에 추수후 나락을
저장했다. 통나무를 바닥에 깔고 나락 가마니를 쌓 았다고 한다. 그 옆에는 외양간과 사랑뒷간이 나란 히 있었고, 농사철이 되면 거름자리에서 외양간의 오물과 문간채 잿간의 재를 모아 퇴비를 만들었다.
2-8. 안광채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된 안광채는 안채 오른 편 정지 옆에 위치하고 있다. 외형이 그대로 보존 되어 있는데, 다만 예전에는 장독을 장광에 넣어두 었지만 지금은 안마당에 내놓았다. 다른 지방에서 장독을 건물 안에 저장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 은데 이 동네는 거의 모든 집이 과거에 장광이나 심지어 부뚜막 위에 장독을 놓았다고 한다. 이는 추운 산지 기후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안광채 뒤로 지금도 안뒷간이 있고, 그 옆에 과 거 목욕간이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 영역이 여성 전용의 뒤안7) 공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7) ‘뒤안’은 보통 안채의 뒷공간으로서, (이 집에서는 옆공간) 목욕 등 여자들만의 폐쇄된 은밀한 공간이다.
그림 10. 사당 전경
그림 11. 사당채 정면
그림 12. 아래채
그림13. 아래채 복원 평면도
그림14.
사랑광채 복원평면
135
2-9. 능허정(凌虛亭)
능허정은 이 집의 정자로 강천리 벚꽃공원 안에 있다. 조선초기 정온의 증조부 확계 정옥견(鄭玉 堅)이 은거하며 소요하고 강학하던 곳으로, 원래 사마 마을 불고대(不孤坮) 앞 학담(鶴潭)위에 있었 는데, 당시 건물은 정유재란때 소실되고, 1634년에
중창했다가 그 뒤 1839년 후손들이 현위치로 이건 했다.8) 凌虛는 헛된 명리를 업신여긴다는 뜻이다.
정자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네 처마를 활주로 버티고 팔작지붕 형태 를 하였다. 정자 안은 가운데 한 칸을 방으로 만들 고 양쪽을 마루로 넣었으며, 방의 크기를 작게 하 여 마루를 통하여 사방으로 다닐 수 있도록 했다.
정자 앞은 벚꽃 공원이 보이고, 옆은 위천(胃川)이 흐르고 있어 뒷산의 숲과 앞 냇물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이 능허정은 1940년대 당시 손님접대에 있 어서 중요한 장소였다.
2-10. 반구헌(反球軒)
정온 종택과 담을 이웃하여 나란히 있는, 문화 재자료 232호인 반구헌은 哲宗때 英陽 현감을 지 낸 정기필(鄭夔弼)선생이 기거하던 조선후기 건물 이다. 가계도를 보면 9대 단성 현감 정식(鄭軾)의 둘째아들로서 형님이 자식이 없어, 큰아들 기상(璣 相)을 양자로 보내 종가의 대를 잇게 하고, 두 안 채끼리 조그만 샛문을 달아 내통하게 했다고 한다.
이 집은 6.25때 안채가 타서 문간채와 사랑채만 남 아있었는데, 최근 복원을 했다. 공간의 배치나 구 성은 정온 종택과 비슷했다고 한다.
2-11. 공간의 복원 개요
이상과 같이 여러 차례 변화한 공간을 본 연구
에서 1940년대로 복원하여 현재와 비교하면 표1과 그림17. 장광 내부
그림 15. 안광채
그림16. 안광채 복원평면도
그림 18. 능허정 평면
그림19. 능허정 전경
표2. 현재 공간과 1940년대 복원된 공간 비교
현 재 공 간 1940년대
대문을 중심으로 2칸 씩
대문간 채
대문을 중심으로 3칸씩
없음 사랑광
채
정면 4칸, 측면 2칸 규 모로. 작은사랑채 앞에 존재
새로 생긴 바깥화장실 있음
사랑 뒷간
사랑광채 옆으로 1칸으 로 존재
정침과의 분리담 없음 사랑채 정침과의 분리담 있음 4개의 방이 1개로 통
합. 반간방과 반간마 루는 통합되어, 입식 부엌으로, 그 옆으로 수세식 화장실을 둠
정침 (안채)
현재의 큰방이 4개(큰방, 윗방, 뒷방2)의 방으로 분리. 반간방과 반간마 루 존재
정면 3칸 반 아래채 광 옆으로 정면 2칸 크 기의 방앗간이 있었음
1칸 안뒷간 안뒷간 옆으로 1칸 더
둬서 목욕을 할 수 있는 무쇠솥을 넣음.
같다. 사랑광채가 지금은 완전히 없어졌고, 예전에 는 대문간채와 아래채의 칸이 더 있었다.
3. 거주자 생활로 본 공간
면담을 통해 거주자 생활은 크게 기본적인 일상 생활, 접객관련 생활, 제사관련 생활, 실질생산관련 생활로 분류되는데, 이 중 접객과 제사 관련 생활 이 가장 중요한 생활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림 20. 생활 내용 분류
3-1. 접객 관련 생활
1940년대 당시 제일 큰 어른은 종부의 시조부인 정태균(鄭泰均: 1883∼1964)님이었다. 당시 승지까 지 지내고 귀향했는데, 찾아뵙는 손님이 수없이 많 았고, 손님접대가 끊이지 않았다. 접객 관련 생활 은 사랑채에서 직접 손님을 맞는 것 외에 음식 준 비․제공의 생활이 포함된다.
(1) 음식준비와 제공
손님의 음식준비에 관련된 면담을 살펴보면 다 음과 같다.
“손님오시면 청지기가 와서 손님 몇 분 왔다 그라면 상을 차려 나가고. 어른이 뒷문열고 손님 몇분왔다 그카기도 하고.
술상먼저 앞에 내주지. 저녁에는 저녁차려갔고 나가고, 저녁잡 숫고 나면 또 술상이 나가야되고. 손님 자꾸 오시니까 우짜겠 노. 손님이 끊이질 않았지. 그기 양반집 범절아이가. 그러니까 옛날 부잣집 며느리는 고통이라. 고통. 그런걸 못하면 사람들이 범절없다카고, 그집에 가면 무모하다고케. 육포도 뜨고, 유과, 약과 같은거. 강정, 잔치하고 나면 떡같은거 하고 마른안주 대 구포. 그런거 다락같은데다가 넣어놓고 꺼내고 장광에서 술 꺼 내서 내가고 그랬지.” (종부)
손님 접대는 먼저 술상차려 내가고, 그 다음 밥 상, 밥상을 물리고 다시 술상을 차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손님접대를 위해 안주거리로 육포, 대구포, 유과, 약과, 강정, 과일 등을 상시 준비했고, 술은 장광에 보관했다.
60년전 당시 수많은 식구와 손님들의 식사준비 는 엄청난 일이었다. 이 집의 작은집에 해당하는
8) 박기용, 「거창의 누정」 거창문화원 1998
상매댁이 며느리로 생활한 면담을 인용하면 다음 과 같다.
신행을 하자마자 너거 할머님께서 밥주개(주걱)는 가모가 맡 아야지 하인을 줘서는 안된다시며 날더러 퍼라고 안하시나? 찬 모 식모하며 아래것들이 수두룩한데 말이다.
그런데, 그때는 밥이란 것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라. 본식 구 말고도 손님이며 과객하여 한끼에 적어도 삼사십 그릇이고, 많으면 육칠십 그릇이라. 더운 철에 밥을 다 담고나면, 땀이 비 오듯 쏟아져 옷이 똑 물에 담궜다 건진것 같아. 하루에 세번씩 옷을 갈아입어야 했단다. 그리고, 그 밥이란 것이 그 큰 솥에다 말밥을 해서 청지기가 이르는 숫자대로 외상, 또는 겸상으로 상을 차려 사랑으로 내보내면, 조금있다가 손이 또 왔으니 세 사람 상을 다섯 사람 상을 더 차려오라하니 이러다 보면 맨날 나하고 정지년들은 먹을밥이 모자라 그저 물누른밥이나 조금씩 먹고 안했나? 9)
다음의 면담 내용을 통해 어떤 공간에서 술상과 밥상이 차려지는지 살펴보자.
“육포나 강정 같이 미리 만들어 놓은 거는 반간방 우에 다 락에 넣어두고, 과실, 곶감 같은 거는 아래채 광에 넣어두고, 술은 장광에 넣어두었다가 꺼내서 반간방에서 술상을 차리는 기라. 술상 내가고 때되면 밥상 내가야지. 정지에서 국 끓이고 밥해서 반간방에서 상 차려서 청지기가 내가지. 그때는 상도 많았어. 반간마루하고 실겅에 전신에 다 상이었어. 그래서 상차 리는 것도 일이라.” (종부)
안주거리인 육포․강정 등은 다락에, 과일, 곶감 등은 아래채 광에 보관하였고, 정지에서 밥과 국 을 준비해서 반간방에서 밥상을 차려 내갔다.
반간방에서 다 차려진 음식들은 청지기에 의해 서 사랑채로 옮겨지는데, 그에 대한 면담은 다음과 같다.
“술하고 안주하고. 술상은 술상대로 나가고, 밥상은 밥상대 로 나가고. 청지기가 그랬지. 뒤에 툇마루가 있어야 상도 갔다 놓고, 거서 나오는 것도 들어 내고. 그기 없으면 어찌 댔노. 밋 밋한데 어찌 상을 대놓고 그라노. 그리 쓸라고 있는 툇마루지.”
청지기가 상을 들고 내가기 위해서 사랑채의 뒷
9) 정량원, 「강동 이야기」 187쪽, 1999
그림 21. 술상을 차리기 위한 음식 준비
137 툇마루10) 공간(그림 22)을 사용한다. 만약 상을 사
랑채 앞으로 들이려면 중문을 지나 먼길을 돌아서 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르는데, 뒷툇마루는 정지 -사랑채의 최단거리 이동이다.
(2) 손님 접대
안에서 손님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손님 을 직접 맞는 것은 사랑채의 남자 어른들이다.
그림 23. 손님 음식제공 평면
시조부님을 뵙기 위해 많은 손님이 오셨고 그 성격도 다양했음을 면담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 시조부님 옛날에 참 인물도 좋으시고 참 훌륭하신 어 른이다. 정자 태자 균자하면 일본에서도 안다. 학자는 아니라도 참 훌륭하시지. 꼭 친척분이 아니라도, 사돈의 손도 오고, 저멀 리 친구분도 점잖은 분 오시면 것도 손님이라. 친구분이라도 다 격이 안있겠나. 과객은 손님이 아니지. 우리 시조부님을 뵐 려고 오는 점잖은 분은 한 이틀 사흘 지내고, 한 열흘도 지내 고 가시고 그러지. 이강공, 마지막 왕세자 이석이 아버지도 독
10) 건축계 일부에서 (이를테면 신영훈, 「한국의 살림집」) ‘툇마 루’를 퇴간 기둥과 짜여진 마루로 제한하여, 기둥없는 처마 마 루를 ‘쪽마루’로 별도 구분하여 부르고 있으나, 본 논문에서는 거주자가 부르는 명칭에 따라 보편적인 ‘툇마루’라 칭한다.
립운동하신다고 한 2달 계셨어.” (종부)
“큰사랑에서 와갔고 글도 쓰고, 좌담도 하고 그렇지. 옛날에 우리 사랑에 누마루 있제. 그 밑에 노루를 키웠다케. 우리 할아 버지는 풍류라. 노루도 좋아하시고, 노는 것도 좋아하시고. 가 마, 사인교도 있고. 지금은 다 부싸졌지만. 누마루는 여름되면 문 열어가지고 바둑도 두고 시조도 읊고 그라신데거든. 다 풍 류를 즐기시려는 분이지. 능허정에서 배도 띄우고 노시고” (종 부)
손님 접대는 주로 큰사랑방에서 이루어졌다. 손 님접대의 생활은 좌담, 글쓰기, 시조 읊기, 바둑이 다. 손님의 격에 따른 접대 내용은 시조부와 절친 했던 의친왕 방문시 일화를 통해서 명확히 볼 수 있다.
각 고을 수령이나 벼슬이 삼품 이상을 지난 손님은 큰사 랑 웃방에서 인사(절)을 드리고 주안상을 내고, 그 이하 초 시까지는 마루에서 인사를 드리고 사랑 대청이나 공루에서 대접하고, 그 외의 백성들은 마당에서 덕석을 여러장 깔아놓 고 거기서 절을 하고는 주식(酒食)간 하인들이 대접을 하도 록 임시규칙을 정했다고 한다.11)
종택을 찾는 손님들은 대부분이 남자 손님으로 친척12)․제관․관직의 높은 사람․일가․친구․사 돈 등에 따라 격이 달랐고, 그에 따라 큰사랑방․
큰마루․누마루의 이용 순서로 접대를 받았다. 그 러나 사랑채 건너방은 전혀 손님접대에 이용이 되 지 않았고, 빈소방이라 이름하여 다른 집과는 달리 특별한 유보 공간임을 보여준다.
그외 손님으로 분류되지 않는 과객이 2-3명 정 도 늘 있었다고 한다.
본가 이외에도 빈번히 손님접대가 이루어진 곳 이 종택에서 5분 떨러진 거리의 위천(胃川)가 정자 능허정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인 능허정은 앞에 넓은 마당이 있어서 손님을 모시고 연회를 베풀고, 배를 타는 등의 본가에서보다 풍류를 즐길 수 있 었다.
지금까지의 본가 주거공간에서의 접객관련 생활 을 보면 그림 24와 같다.
3-2. 상례 제례 관련 생활
11) 의친왕(義親王 李堈 1877-1962)이 1909년 10월초에 강동에 들른 일화. 정량원, 「강동 이야기」 122쪽
12) 가까운 10촌 이내의 대소가 어른을 일컬어, ‘일가’와 구분하 고 있다.
그림 22. 사랑채 뒷툇마루
이 집에는 윗대 4대 조상과 불천지위(不遷之位) 인 정온 선생 내외분까지 10번의 기제사뿐만 아니 라 설, 추석, 동지 등 명절에 지내는 차례까지, 제 사 관련 활동이 빈번하였다. 이를 반영하여 종택에 는 상례, 제례와 관련된 특별한 공간들이 있다.
(1) 상례(喪禮)
이 집에서 실제 있었던 시조부님 喪中에 있었던 의례(儀禮)에 관한 면담은 다음과 같다.
“시조부님 돌아가신지 한, 40년, 38년째다.(1964년). 시조부님 돌아가셨을 때 상을 아주 크게 치렀지. 한 보름. 십 오일장했 지. 시신을 뫼시고 제상놓고 병풍쳐놓고, 손님들 오시면 곡을 하고 그라는데.. 남자들은 공로마루에 앉아있고, 여자들은 그 평상에 앉아있고. 절은 누마루 거서하고.. 3년상 같은거 받들면
빈소방 옆에 평상도 있었거든. 마루장 같은게 있었는데 뜯어서 그렇지. 안상주가 되면 안상주도 고기서 울고 해야 될거 아이 가. 집상같은거 하면.. 3년 동안 빈소 차려놓고 아침 저녁으로 상식을 올리는데 고때도 평상으로 나르지.“ (종부)
喪中 3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上食을 차려놓고 빈소를 모셔야하는 빈소방이 따로 필요하였고 누 마루는 엄숙한 배례공간이 된다. 빈소방 옆 안마당 으로 열린 평상은 안상주가 곡을 하는 장소로 사 용되기도 하고, 음식을 빈소방으로 나르는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27. 상례 관련 생활 공간
한편 사랑채 옆 아래채의 벽감에는 내외분 중 한 분만 돌아가셨을 때 신위를 임시로 모셔두었다 가 내외분이 모두 돌아가셨을 때, 함께 위패로 만 든 후 사당으로 모셔졌다. 상례 관련 생활에 따른 공간은 그림 27과 같다.
(2) 제례(祭禮)
종택에서 제례는 10번의 기제(忌祭)와 명절마다 의 차례(茶禮)가 있다.
기제사와 관련된 면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청에서는 기제사때 제상을 놓고 지내지. 기제사는 신위를 뫼시고 나오는 기라. 신위 뫼시고 나오는 거를 출주라 한다. 출 주. 그래서 요서, 마루에서 지내는 거라. 제청에다 병풍치고, 제 상놓고, 신위모시고. 신위 모시는 그기 있어. 교위라고 하는 신 그림 24. 접객관련 생활로 본 공간
그림 25. 빈소방을 바라보는 엄숙한 배례공간으로서의 누마루
그림 26. 아래채 벽감
139
위모시는 기 있어. 다 차려놓고 향상을 그 앞에 놓고, 향상을 놓고 향을 놓고, 상이 따로 있어. 제상 앞에다. 제청밑에다 놔.
고으는(떡) 거는 마루에서 하고, 마루에서 재기 내놓고 차려가 지고 마루에서 다하지. 내갈때는 욜로(반간방→큰방) 내가서 차 려놓지. 절은 마루에서. 끝에 마루에서. 제관이 많으면 뭐, 거 서가 하지.” (종부)
면담에 의하면, 기제사는 정침의 제청에서 지낸 다. 기제사 과정을 보면 제청에 병풍과 제상을 놓 고, 음식을 차리고, 제관들이 사당에서 위패를 모 셔 와서(출주: 出主) 제사를 지낸다. 제상의 음식을 내갈 때는 정지와 반간방에서 음식을 준비해서 큰 방과 웃목을 통해 내간다. 기제사 과정과 그에 따 른 공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 28. 기제사 과정과 그에 따른 공간 다음으로 설, 추석, 동지 같은 명절에 지내는 제사 가 차례와 관련된 면담은 다음과 같다.
“차사(차례)는 모두 사당에서 지내지. 사당에서 하는 제사도 마루에서 다 채려가지고 뒷문 내가지고 가고. 설, 추석, 차례 때.. 상에 안놓고 사발에다가 놔놓으면 제관들이 받아가지고 놓 을데 놓고. 사당문 열어놓고 신위 벗겨놓고, 거기다 음식 차려 놓고 절하고, 제관들이 많으면 요 마당에다 덕석을 펴고.” (종 부)
그림 31. 제사관련 생활로 본 공간
그림 29. 사당으로 음식 나르는 경로
그림 30. 정침 뒷툇마루 제청과 연결된 툇마루는 다른 툇마루보다 높게 지어졌다. 이 높이는 제청의 높이와 같은 것으로 사당으로 음식을 내갈 때 편 의를 꾀한 것이다.
차례는 모두 사당에서 지낸다. 먼저 사당 문을 열어 신위를 벗겨놓고 사당 앞마당에 덕석을 깔아 차례준비를 한다. 그 다음 정침의 제청에 차려진 제수 음식을 뒷툇마루를 통해 사당으로 옮겨서 사 당의 제상에 놓고 차례를 지낸다.
제수 음식은 정침의 뒷툇마루를 (그림 30) 통해 서 내갔는데, 나르는 경로는 그림29와 같다.
이상의 공간에서의 제사관련생활을 정리하면 그림 31과 같다.
3-3. 일상 생활 (1) 기거취침
먹고 자고 하는 기본 일상생활 중 낮의 기거와 더불어 밤의 취침생활을 가족 구성원 별로 공간 사용에 대해 파악한 면담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시집왔을때는 식구들 다 계셨지, 뭐. 시조부님도 계시 고, 시조모님도 계시고, 시아바님도 계시고, 시어머님도 계시고.
울 영감님 형제가 2남 1녀라. 그때만 해도 우리 시누이가 시집 안가고 있었고, 시동생은 공부하러 객지 나가 있었지. 식구 말 고는 청지기가 있었고, 하배(종)들 몇명 되고, 농사짓는 머슴도 큰머슴, 작은머슴이 있었지. 다들 밑의 사람이지. 손님도 많았 지. 울 시조부님이 참 훌륭하신 분이라. 거창에서 모르는 사람 이 없었는데, 뭐.. 오시마, 사랑에서 주무시고 그랬지. 손님마다
격이 있지.” (종부)
면담상 종택에서 기거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보 인다. 크게 가족, 아랫 사람, 외인으로 분류 될 수 있다. 분류에 따른 기거 취침 공간은 다음과 같다.
표2. 거주자 별 기거취침 공간
성별 거주자 기거취침공간 비고
가족 남자
시조부님 큰사랑방 호주 시아버님 작은사랑방 종손 건넌방
여자
시조모님 아래채방 시어머님
시누이 정침 큰방 살림주도 며느리 건넌방
아랫 사람
남자
청지기 큰사랑채 뒷방남자어른모심 하배(종) 밖 집안일 머슴 문간채방 농사주력 여자 하배(종) 밖 집안일
외인 남자
친척
큰사랑방, 큰사랑채 윗방
10촌 이내
일가 10촌 이상
친구
사돈 남자사돈
높은사람
과객 문간채방
1) 가족-윗사람
1940년대 당시 이 집의 가족은 시조부님, 시조 모님, 시아버님, 시어머님, 종손, 종부, 시누이, 시 동생이 있었다.13) 이들의 관계를 표로 나타내면 다 음과 같다.
가족들 기거취침에 대한 면담은 다음과 같다.
“큰사랑은 시조부님 계시고, 작은사랑은 시아버님이 계셨 지. 큰방(안방)에는 시어머님하고 시누이가 같이 주무시고, 건넌방은 새색시들 거취하는 데라. 우리 영감님은 객지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내려오면 나랑 건넌방에서 거취하고 그 랬지. 아래채에는 시조모님이 거취하는 데라.” (종부)
그림 32. 가족 구성 (1940년대)
정리하면 사랑채의 가장 높은 곳인 큰사랑방에
13) 원칙상 본문의 시조부가 종손에, 종손이 손자에 해당하나 본문에 계속나오는 피면담자의 대를 종손으로 표기한다.
141 제일 큰 어른인 시조부가, 작은 사랑방에는 시아버
지가 기거취침을 하였다. 정침에서 가장 높은 곳인 큰방에는 시어머님과 시누이가 함께, 건넌방에는 며느리가, 아래채에는 연로하신 시조모가 기거취침 을 하였다. (그림 33)
그림 33. 가족(윗사람)들의 기거취침
2) 아랫사람
집의 내부인에 속하는 아랫사람들의 분류는 다 음 표4와 같다.
표3. 아랫사람 분류
성별 명칭 하는일 명수
아랫 사람
남자
청지기 남자어른 모심 1명
하배(종) 집안일 2-3명
머슴 큰머슴 농사주력(밭농 사)
1명
작은머슴 1명
여자 하배(종) 집안일(가사) 2-3명
종택에서 아랫사람은 머슴과 청지기, 하배(下 輩)14)이다. 그러나 하배들은 자기 집에서 자고 아 침에 들어오기 때문에 종택에 거주하는 아랫사람 은 머슴과 청지기이다. 머슴은 문간채의 방에서, 청지기는 시조부님의 시중을 들기 위해 큰사랑방 뒷방에서 거주했다. 기존 연구에서15) 큰사랑방 뒷 방을 서고라하여 수장 공간에 포함시켰는데, 면담
14) 하배(下輩)란 하인배(下人輩)의 준말. 머슴과 하배의 차이 는 머슴은 얼마의 돈을 주고 부리는 사람이고, 하배는 이 집에 종속된 종이라는 것이다.
15) 하종한, “조선중기 이후 상류주거의 수장공간에 대한 연구”
영남대 석사 논문 1995
결과 큰사랑방 뒷방은 청지기가 거주했던 공간으 로 확인되었다.(그림 34)
2) 외인
外人이란 손님 뿐 아니라 지나가는 과객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접객 관련 생활에서 본 것처럼 손 님의 격에 따라, 접대 공간에도 격이 있다.
“시조부님 손님들 오시면 큰사랑에서 주무시고, 시아버님 손 님오시면, 작은 사랑에서 주무시지. 큰사랑에는 큰사랑방에서 같이 주무시고, 손님이 많으면 윗방에서도 주무시고, 골방에서 도 주무시고, 빈소방은 방이 모자르고 빈소가 없으면 자지, 잘 안자. 과객은 사랑에서 안자. 문간채 고 고 옆에 자는 방이 딱 고레 있어.” (종부)
손님의 기거 공간은 사랑채, 과객은 문간채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손님은 큰사랑방에서 시조 부님과, 작은사랑방에서 시아버님과 함께 자고, 손 님이 많으면 사랑채의 윗방, 골방도 손님의 취침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빈소방은 빈소가 차려져 있 지 않더라도 불가피할 경우에만 손님의 공간으로 배정했다. 면담 내용에서 또 흥미로운 것은 과객과 손님을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객은 이 집에 특별히 볼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 로 그들의 기거취침 공간은 문간채의 방으로 한정 되었다.
(2) 식사
식사와 관련된 생활은 준비, 나르기, 식사의 3가 지로 나눌 수 있다. 식사 준비란 말 그대로 밥을 짓고 상을 차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고, 나르기는 독상을 기본으로 하는 음식상을 나르는 행위이고, 식사는 밥 먹는 행위를 말한다.
1) 식사 준비 (상차리기)
밥, 국, 반찬이 기본인 우리 식사는 많은 준비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음의 면담을 통해서 종택에 서의 식사 준비 모습을 살펴보자.
“뭐, 맨날 밥상 차리는게 일이었지. 뒤주에서 쌀 꺼내고, 광 이나 반간마루에서 반찬거리 꺼내서 세미가에서 씻고 다듬고
그림 34. 청지기가 거주한 큰사랑채 뒷방
장광에서 장꺼내서 반간방에서 나물 같은거 무치고... 정지에서 는 밥하고 국 끓여 갔고 남아있던 반찬들 찬장에서 꺼내서 반 간방에서 상차려서 가고 그랬지.” (종부)
면담의 내용을 통해 식사 준비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 35. 식사 준비 과정에 따른 공간 2) 상 내가기
반간방에서 상을 다 차린 후에는 상을 내가는 데, 독상을 기본으로 하는 우리네 식사에서 내가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반간방에서 상을 차려서 바로 뒷방을 통해 큰방으로 내갔다고 한다.
그림 36. 상 내가기 3) 식사 (밥먹기)
밥은 모든 식구들이 정침에 모여 함께 밥을 먹 었다고 하는데, 그와 관련된 면담은 다음과 같다.
“큰방에서 다 드셨지. 남자 어른들도 건너오셔서 큰방에서 드셨어. 독상하시는 분도 계시고, 겸상하시는 분도 계시고. 아 랫대는 윗목에서 자시고 그래. 어른 먼저 챙겨드리고 우리는 반간방에서 먹지. 머슴들은 정지에서도 먹고.” (종부)
어른들은 큰방과 웃방에서 식사를 하셨고, 며느 리는 반간방에서, 머슴들은 정지에서 밥을 먹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16)
그림 37. 식사 (밥먹기) (3) 위생 목욕
1) 배설
이 집에서 배설과 관련된 면담을 살펴보자.
“옛날에는 사랑 뒷간도 있고 안뒷간도 있었어. 지금은 없는 데 사랑광채 있을 때 사랑광채 옆에 안뒷간처럼 두칸이 있었는 데, 안뒷간은 여자들이 쓰고, 사랑뒷간은 남자들이 썼지. 밑의 사람하고 나눠 쓰는 거는 없었어. 어른이나 하배나 안뒷간 2칸 중에 아무거나 썼어. 똥은 더러운게 아이고 잘 모아둬야 되는 기라. 봄에 농사 거름하는데 써야되니까네. ” (종부)
남자들은 사랑뒷간을 사용하고, 여자들은 안뒷 간을 사용하는 남녀의 구분을 두었다. 그러나 상하 의 구분은 없었고, 뒷간의 배설물은 농사의 중요한 거름으로 사용되었다.
2) 목욕
전통가옥 공간에서 목욕 공간을 따로 찾아보기 어려운데,17) 안뒷간 옆에 별도 목욕실과 무쇠솥이 있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면담 내용은 다음과 같 다.
그림 38. 목욕용 무쇠솥
“세수는 어른들은 물떠다 마루끝에다 갖다 드리면 하고. 하
16) 정침 큰방에서 식구들이 일상시 식사했다는 면담내용은 조 선시대 유교의 남녀유별이 생활의 편리성으로 어느 정도 변화 한 것으로 추정된다.
17) 박선희, “조선시대 반가의 주생활과 공간사용에 관한 연구”
연세대 박사논문, 1991. 121-23쪽. 김계옥씨가에 유사한 무쇠솥 이 보인다.
143
인들이. 안뒷간 옆에 한 채가 있었지. 그 앞에는 문이 있었어.
나무문 해가지고 달아놨지. 문이 크진 않았어. 불땔때는 뒤에서 아궁이질해서 불때고. 목욕탕이 다 없거든. 요만치만 목욕탕이 고 나머지는 그냥 바닥이라. 그라면 물 뜨시면 퍼내가지고 씻 고. 들어가도 되지. (솥) 밑에 까는게 요만한게 있었거든. 나무 로 되갖고 발판같은게 있었지. 뜨거운께나. (몸을) 불라서 나와 야 된께나.” (종부)
(4) 빨래 및 의복관련
종택에서 옷은 직접 하지 않고, 마을의 침모들 이 필요하면 들어와서 해 주었다고 한다. 그에 따 른 면담은 다음과 같다.
“길쌈은 옛날에 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 맡기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와서 일하지.뭐, 남편도 없고 자식이 없다던가 그 런 사람이 침모로 앉아서 방에 머슴 데리고 앉아서 바느질 짓 고 그라거든. 빨래는 큰솥(건넌방 밑) 걸어놓은데서 불때가지고 소쿠리에 받쳐놓고 물떠 퍼부우면 재가 물에 씻기서(씻겨서) 물 이 빠지는게. 그게 잿물이라. 거(거기) 다가 빨래를 치대가지고, 냇물에 씻지. 집에서 빨래를 하진 않지.” (종부)
면담 내용을 보면 길쌈은 마을의 길쌈을 하는
이를 불러 했다. 빨래는 먼저 잿물을 내고, 잿물에 빨래를 담그는 일이 집안에서 이뤄졌고, 집 밖 냇 물에서 씻었다. 빨래 관련 공간은 그림 39와 같다.
이상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공간의 배치는 그림 40과 같다.
3-4 생산관련 생활 (1) 농사 경영
1940년대만 해도 집앞 들의 논이 전부 이 집 소 유였다고 하는, 천석규모의 집으로, 정온 선생의 제사를 지내라고 하사하신 사답(私畓)이라 한다.
당시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 도지를 주었다. 그러 나 밭농사는 직접 경영하면서 채소 등을 길러 먹 었는데, 주로 머슴들이 담당하였다.
논농사와 관련된 면담을 살펴보자.
“논농사 도지 받았지. 땅 줘 갖고 쌀로 받는거. 한 천석했지.
옛날에는 주인을 더 많이 줬지. 반반이 아니라. 짓는 사람이 더 작게하고. 가을되면 그 농사가 잘됐나 못됐나 보고, 잘됐으면 많이 메기고, 딱 그레 하는 사람이 있어. 가져 온 나락은 큰 광 에 넣고.” (종부)
가을에 도지 준 사람들에게서 수확된 나락을 받 는 일이 이 집의 주요 경제생활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 소작지를 관리하는 마름이 있었 고, 수확량을 확인해서 정해주면 그 만큼의 나락을 주인집에 주었다. 받은 나락은 사랑광채와 안광채 에 채웠다. 그리고 나락은 아래채의 방앗간에서 찧 어서 쌀로 만들어 아래채 광에서 보관하였다.
다음으로 밭농사와 관련된 면담을 보자.
“10마지기 고거는 집에서 밭농사 짓고. 밭농사는 뭐, 보리도 갈고, 밀도 갈고, 콩..10마지기는 집안에서 부치던게 있어. 집 뒤로 샛문도 하나 있었지. 채소같은거 따로 골로 다녔어. 밭농 사 있고 그라니께네 머슴이 있어야 될거 아이가. 콩이니 팥이 니 하는 건 장도장에다가 넣고. 옛날에는 우리가 와서 소 있고 그때 다 있었지. 그래야 거름을 밟히지. 퇴비를 만들지. 소같은 게 있어야. 소똥같은거 모아가지고 거름을 해야 밭에 심고 하 지. 그거는 한쪽 구석에. 지금 사랑뒷간 있는 그 구석에 만들었 어.“ (종부)
그림 39. 빨래와 관련된 공간
그림 40. 일상 생활로 본 공간
10마지기의 밭농사는 집안 머슴들이 지었다. 밭 농사를 짓기 위해 외양간에서 나온 오물과 잿간의 재를 모아 거름자리에서 퇴비로 만들었고, 뒷간의 오물을 밭에다 퍼다 부었다. 정침에는 여자 하배들 이 채소 등의 부식물을 얻을 수 있는 밭으로 가기 쉽게 샛문이 있었다. 밭농사를 통해 보리․콩 등의 잡곡류를 수확해서 장광에 보관하였다.
(2) 땔감마련
예전에는 난방과 취사의 연료원이 나무였다. 땔 감을 마련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봄에 소 나무 가지를 치는 작업을 ‘발미’라고 하고, 발미해 서 얻은 소나무 가지를 ‘소깝’이라 불렀다. 발미는 남자 하배들이 하는데, 발미는 산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소깝의 높이는 부의 상징이 된 다. 소깝은 산에 쌓아두었다가 필요한 만큼 싣고 와서 정침 모서리․사당 쪽․사랑채 등 집의 구석 구석에 집채만하게 쌓아뒀다. 또 다른 연료인 통나 무를 쪼갠 ‘장작’은 소깝 옆에도 쌓아뒀지만, 작은 사랑채 마루 밑에 차곡차곡 쌓아두기도 하였다. 이
것은 큰사랑채의 아궁이와의 관계 때문이다. 주로 돼지를 잡거나 장을 끓이는 센 불을 요할때 장작 이 필요했고, 이런 이유로 편리를 위해 마루 밑에
장작을 쌓아두었다.
(3) 물건 보관
거주자의 생활상 각종 물건에 따라 다양한 보관 공간이 표 4와 같이 존재한다.
표4. 물건 보관에 따른 공간
공간 물건보관
대문간채
광 농기구
잿간 재
아궁이위 다락 이불
사랑광채 외양간 소
광 나락
큰사랑채 못방 이불
뒷마루 책, 소품
작은 사랑채 벽장 소지품
안광채 광 나락
장광 장독, 잡곡
아래채
벽감 신위
광 과실, 쌀
방아실 디딜방아
정침 안마당
뒷방 장, 농 못방 제사 건어물 반간마루 상, 그릇 다락 유가, 엿
찬장 반찬
제청 상, 제기, 뒤주
이상의 생산관련 생활로 본 공간은 그림 43과 같다.
그림 41. 거름자리
사 랑 광 채
외양간
사랑뒷간
거름자리
나무빼까리 외양간과 사랑뒷간 의 오물을 모아 거름 자리를 만들고 짚을 넣고 퇴비를 만듬 사
랑 광 채
외양간
사랑뒷간
거름자리 나무빼까리
사 랑 광 채
외양간
사랑뒷간
거름자리
나무빼까리 외양간과 사랑뒷간 의 오물을 모아 거름 자리를 만들고 짚을 넣고 퇴비를 만듬
그림 42. 작은사랑채 마루 밑에 장작을 쌓아둠.
145
그림 43. 생산 관련 생활로 본 공간
지금까지의 복원한 다양한 생활을 주거의 각 공 간 속에 종합하여 배열하면 그림 44와 같다.
그림 44. 제반 생활에 따른 공간 배열
4. 종합해석 -공간과 생활의 복원을 통해 본 집의 특성
복원한 종택의 배치 평면상의 특징은 앞에서부 터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이 일자로 차례로 놓 여있는데, 안광채와 사랑광채가 튼ㅁ자 형의 안마 당과 사랑마당을 형성한다. 집의 제일 뒤에는 이 집의 거의 1/4 면적을 차지하는 넓은 사당 영역이 있다.
일반적으로 반가에서 집의 동쪽 뒤편에 치우쳐 위치하는 사당이 이 집에서는 바로 중심축 상에 위치한다. 더구나 사당영역의 외부담장 안에 대나 무 밭을 이루고 다시 사당 담장을 두른 영역의 겹 을 이루어 중요공간임을 표시하고 있다.
이 집의 가장 큰 해석은 중시조인 동계 정온의 불천위를 모신, 사당 최우선의 집의 배치가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후손들은 왕이 하사하신 현판과 어 제시(御製詩)를 보유한 충신의 후예인 것을 큰 자 랑으로 여기고 조상을 모시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선행연구에서 “사당이 살림채 뒤 주축상에 위치한 것이 다소 특이하고 경직된 배치”18)라고 한 것을 다시 해석하면 사당이 곧 이 집의 가장 중요한 정 신적 지주이기 때문에 기인하는 배치라고 재해석 할수 있다.
위와 같은 사당중심 배치 결과, 일반적으로 집 의 안채 뒤에 위치하는 뒤안은 사당에 의해 자리 를 내어주고, 대신 안채 옆의 샘물가 공간으로 이 동 배치된다. 이것은 제사가 많은 이 집에서 정침 의 뒷공간이 사당으로 드나드는 통로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뒤안 공간의 담장을 밖으로 약간 돌출한 배치를 하여, 취사 위생등의 일상생활을 위 하여 협소한 외부공간을 보다 넓게 사용할수 있게 되었다.
반가에서 제사를 중요시함은 당연하나, 특히 이 집에서 정침의 대청 뒷 두칸을 1자씩이나 한단 높 여서 제청이라 부르고, 앞 두칸만 큰마루로 부른 다. 평시에도 대청이 일상생활 중심이 아닌 제사중 심의, 실질적인 공간을 넘어서 상징적 공간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 건물 안채, 사랑채 모두가 경상도 남부지방 에 흔하지 않은19) 양통계 겹집 평면이다. 구조적
18) 강영환, 앞책 318쪽
모듈로서의 보방향으로 2열의 방과 앞툇마루 반칸 의 3칸의 공간이 기본단위가 된다. 사랑채 뒷방은 청지기가 거주하고, 윗방은 손님이 많으면 손님의 취침공간이 되는 방이었다. 안채 안방은 지금은 밭 田자 형태의 아랫방, 웃방, 뒷방, 못방의 4개방을 터서 가운데 기둥이 있는 큰방으로 사용하고있다.
애초부터 두줄백이 겹집에 앞뒤 툇마루로 설계되 어있었다.20)
대가족제의 많은 수의 가족 구성에 머슴까지 포 함되는 식구를 충당하고, 사랑채의 많은 손님을 맞 이하기 위한 방들이 필요하였을 것인데, 이 집은 대지의 동서 폭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옆집 반구 헌과 담을 사이에 두고) 앞뒤방향으로 발달하여 양통형 겹집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겹집화 현상의 첫 단계로 설명되는 툇마루를 보 면, 뒷툇마루는 이 집에서는 통로라기보다, 다른 채와 생활의 연결을 위해 이용된다. 사랑채로의 음 식상 공급의 전단계 공간으로서, 또 안채 뒷툇마루 는 제청에서 사당으로 음식을 내가는 중간 공간으 로서 뚜렷한 목적의 공간이었다.
봉제사 접빈객의 음식준비와 공급의 측면에서 특히 정지중심으로 공간이 배열되어있고, 주공간인 전면의 후면에 정지로부터 최단거리 위치에 툇마 루라는 공급공간이 발달되어있다.
이 집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대주의 손님의 접 대 생활을 통하여, 본가 뿐 아니라 본가 영역에서 어느정도 떨어져 있는 능허정까지가 집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또 생산지인 마을앞 들의 논과 친척집인 옆집 반구헌도 집의 범위에 포함되 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복원한 집의 형태는 정온의 창건당시 1600년대 와 어느 정도 다른지는 알 수 없다. 상량문의 1820 년 중창된 기록이 있고, 1903년 계묘년 흉년에 정 태균의 생모 선산김씨가 종택 몸채를 다시 지으며 공사판을 벌여 배고픈 사람들을 구제했다는 집안 구전의 기록이 있다.21)
선행 연구에서 강영환은 이 집에 대해 전반적으 로 “경직된 배치와 답답함, 목구조의 장식성의 빈
19) 최일, “조선 중기이후 남부지방 중상류주거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영남 남부지역에서 1800년 이후 조선후기 세도가층에 나타남. 64쪽.
20) 전봉희, “조선후기 주거사에 잇어서 겹집화 현상에 관한 연 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96.10. 197쪽에서 겹집의 분류 참조.
21) 정량원 앞책 134쪽
약, 비례감과 심미감의 부족, 통일성의 부족” 등으 로 전통식이 아닌 근대식으로 보면서 가치를 폄하 하는바,22) 본 연구에서는 년대의 오래됨이나 특정 심미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전 통 생활과 공간과의 적합성으로 이해 해석하고자 하였다.
5. 결론
면담을 통하여 동계 정온 종택의 공간을 전통생 활의 시간대로 복원한 다음, 공간에서 거주자의 생 활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복원하였다. 내용을 요 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정온 사당 최우선의 중심축 배치가 이루어졌 고 이는 집안의 정신상 또 실제 그에 따른 의례상 중요한 역할을 한다.
2) 정침의 대청은 상징적 중요공간이 된다. 제사 와 관련하여 사당을 중심으로 집안 곳곳에 위계가 높은 신성한 공간들이 건축적 세부까지 표현되어 있다.
3) 그중 상례와 관련된 사랑채 건너방은 빈소방 이라 하여 일상생활이 배제된 상징공간으로 오랫 동안 남게 된다.
4) 상징적은 물론 의례상 사당과 정침의 제청을 잇는 최단 동선축이 형성되며, 정지에서의 음식공 급을 고려한 배치가 이루어져있다.
5) 봉제사와 접빈객은 물론 머슴을 포함한 대가 족 식구의 술과 음식 준비를 위하여 넓은 정지와 반간방 반간마루 공간이 형성되어있다.
7) 접빈객은 물론 남성인 대주 중심으로 사랑채 방과 마루와 문간채 각 공간이 손님의 급에 따라 부여되었는데, 집에서 떨어진 능허정 영역이 중요 한 풍류 접대공간이었다.
8) 종가로서 위토답으로 시작된 천석규모의 작 지않은 농지를 가지나 소작제에 의해, 일부 직영 밭농사를 제외하고는 실질적 농사 생활의 공간보 다는 곳간채의 저장공간만 발달하게된다.
9) 일상생활에서 유교원리에 따른 생활이 이루 어진다. 기거취침은 남녀구분과 상하 위계에 따라 공간이 정해져 있었다. 상하 위계적 공간이 철저히 지켜지나, 일상시 정침에서 식구들이 공동식사를
22) 강영환 앞글 318-320
147 하는 것으로 보아 기능적 편리성이 남녀유별을 어
느정도 완화시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0) 전통주거연구에서 생략되기 쉬운 일상생활 중 배설 및 목욕, 빨래 및 의복 관련 생활을 복원 하였다.
11) 전통주거에서 실질생활인 노동의 경감을 고 려하여 각 채와 방들이 연결되도록 배치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상으로 전통 상류주거인 거창 정온 종택의 공 간과 생활을 복원하여 상호 관련을 살펴보았다. 이 연구의 의의는 내부인 거주자의 생활을 바탕으로 정온 종택이라는 특정 주거 공간을 깊이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데에 있다.
<참고문헌>
강영환, 「한국의 건축문화재 7.경남편」 기문당, 1999
고영훈, “경남서부지역 민가의 평면종류에 관한 연 구”, 경상대, 1997
김광언, 「한국의 주거 민속지」, 대우학술총서, 1988 김종태, “조선시대 상류주거의 지역성에 관한 연 구”, 울산대, 1997
김진성, “조선후기 상류주거 사랑채의 사회적 변화 에 따른 공간 특성에 관한 연구”, 홍익대, 1995 박선희, “조선시대 반가의 주생활과 공간사용에 대 한 연구” 연세대, 1991
윤일이, “조선시대 상류주거 사랑채 영역의 지역별 동질성과 차별성”, 부산대, 1998
이희봉, 이향미, “상류전통주거 해남 녹우당으 해 석” 「건축역사연구」 2002.3
전봉희, “조선후기 주거사에 있어서 겹집화 현상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1996,10 정량원, 「강동이야기」, 1999
최 일, “조선중기 이후 남부지방 중상류 주거에 관 한 연구”, 서울대, 1998
「거창군사」
Spradley, James. Participant Observation. 이희 봉 역, 「참여관찰방법」 대한교과서, 1988
Interpretation of the Jeong-On's Mansion, Traditional Upper Class House, in Geochang
Focused on Dweller's Life
Hee-Young Park
(Master, Dept. of Interior Architecture, Graduate School, Chung-Ang University) Hee-Bong Lee
(Professor, Dept. of Architecture, Chung-Ang University)
Abstract
This study has main purpose to understand the traditional house, not by outside researcher's but by inside dweller's view. The house in Geochang, is descendent house of Jeong-On who was faithful scholar at Chosen Dynasty. In order to understand, I restore firstly the house form and space at traditional era, 60 years ago, and every dwellers not only family members but also servants and guests, by interviewing old matriarch.
One of the main rules of the house disposition is Ancester worshipping life. Worshipping floor of Anchae, main building, is located unusually in front of Shrine for Jeong-On, in order to connect all activities directly. Sarangchae, men's building, opened to the funeral mourners, is separated by a wall because women have to serve foods and wail at the backside.
Space for everyday life is separated by man/woman, insider/outsider, master/subordinate.
Agricultural production is also key factor of the space allocation: big storage buildings for rice crop needed to tenant farming.
Both activities of ancestor worship ceremony and guest greeting need large kitchen annex area for food preparation and serving space of rear veranda floor.
A number of guests visit the house: guest-greeting activity is taken place from the family pavilion, Neungheo-Jeong and Saranchae by the social position.
This study show that architectural space and form of the house reflects exactly dwellers life.
Keywords : Jeong-On's Traditional House, Interpretation, User's Life, Ethnographic Field Stu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