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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청화안료 개발사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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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2년 6월 석사학위논문

조선시대 청화안료 개발사에 관한 연구

조 선 대 학 교 디 자 인 대 학 원

디 자 인 학 과 도자디자인전공

장 세 미

(2)

조선시대 청화안료 개발사에 관한 연구

Study on Development History of Chosun Chunghwa Pigment

2012년 6월

조 선 대 학 교 디 자 인 대 학 원

디 자 인 학 과 도자디자인전공

장 세 미

(3)

조선시대 청화안료 개발사에 관한 연구

지도교수 서 경 석

이 논문을 디자인학 석사학위신청 논문으로 제출함.

2012년 6월

조 선 대 학 교 디 자 인 대 학 원

디 자 인 학 과 도자디자인전공

장 세 미

(4)

장세미의 석사학위논문을 인준함

위원장 조선대학교 교수 한 선 주 (인)

위 원 조선대학교 교수 서 경 석 (인)

위 원 조선대학교 교수 박 재 연 (인)

2012년 6월

조 선 대 학 교 디 자 인 대 학 원

(5)

목 차 ABSTRACT

I. 서론 ··· 1

A. 연구의 목적

··· 1

B. 연구방법 및 범위

··· 3

Ⅱ. 조선시대 청화백자에 대한 고찰 ··· 4

A. 청화백자의 의의와 발생

··· 4

B. 조선시대 청화백자의 제작과 사용

··· 12

C. 조선시대 청화백자의 시기별 특징

··· 14

1. 전기 (태종초년-인조말년,1649)

··· 14

2. 중기 (효종초년,1650-영조27년,1751)

··· 17

3. 후기 (영조28년,1752-순종말년,1910)

··· 19

Ⅲ. 조선시대 청화안료에 대한 고찰 ··· 20

A. 조선시대 청화안료에 대한 고찰

··· 20

B. 문헌에 보이는 시기별 청화안료에 관한 기록

··· 23

C. 문헌에 보이는 청화안료의 사용방법

··· 28

Ⅳ. 조선시대 청화 안료의 개발사 ··· 30

A. 청화안료의 개발 배경과 시작

··· 30

(6)

B. 문헌에 보이는 청화안료 개발에 대한 기록

··· 32

1. 고문헌에 나타난 청화안료 기록

··· 32

2. 선행연구에 나타난 청화안료 기록

··· 34

Ⅴ. 결론 ··· 42

참 고 문 헌 ··· 44

(7)

표 목 차

<표 1> 태종- 세종년간 조선왕조실록의 자기 유입기록 ··· 7

<표 2> 문종년간 조선왕조실록의 자기 유입기록 ··· 8

<표 3> 성종년간 조선왕조실록의 자기 유입기록 ··· 9

<표 4>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조선전기의 청화백자 전래 ··· 10

<표 5> 조선 전기 청화 안료에 관한 기록 ··· 24

<표 6> 문헌에 보이는 조선 중기 청화 안료에 관한 기록 ··· 25

<표 7> 문헌에 보이는 조선 후기 청화 안료에 관한 기록 ··· 26

<표 8>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국내산 청화안료의 채취에 관한 기록 ··· 33

<표 9> 국내 청화안료의 개발에 관한 긍정적인 견해 ··· 34

<표 10> 국내 청화안료의 개발에 관한 부정적인 견해 ··· 40

(8)

그 림 목 차

<그림 1> 백자항아리 (17-18세기전반) 국립중앙박물관 ··· 5

<그림 2> 청화백자용문병 (19세기)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 5

<그림 3> 백자철화매죽문항아리 (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 5

<그림 4> 백자진사인물엽문각병 (18-19세기)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 5

<그림 5>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난국초충문병 (18세기초), 간송미술관 ··· 6

<그림 6> 청화백자국중문각병 (17세기후반), 국립중앙박물관 ··· 14

<그림 7> 청화백자송죽문홍치이년명항아리 (1489), 동국대학교 박물관 ··· 15

<그림 8> 청화백자조어화병 (18세기), 간송미술관 ··· 18

<그림 9> 만력14년 명금상궁묘지 ··· 35

<그림 10> 청화백자매조문항아리 (15세기), 한국국립중앙박물관 ··· 36

<그림 11> 정덕3년(1508)명 숙의문씨묘지 ··· 36

<그림 12> 융경2년(1568)명 숙의윤씨묘지 ··· 36

<그림 13> 청자상감묘지 선덕10년명(1435),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 37

<그림 14> 청자상감묘지 선덕10년명(1435),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 37

<그림 15> 백자시묘 만력5년명(1577), 한국국립중앙박물관 ··· 38

<그림 16> 백자청화묘지 선조14년(1581),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 38

<그림 17> 도마리 1호 요지 청화백자 명문시편 ··· 39

(9)

Abstract

Jang Se Mi

Advisor : Prof. Seo Kyung-suk.

Department of Design Major in Ceramic Design, Graduate School of Design Chosun University

Chunghwa pigments used to produce Blue and White Porcelains was dependent on imports Through China in eary Chosen period, but the price was too expensive and it could not be widely used.

In addition, due to the Imjin war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the Manchu war of 1636 a Branch Ceramic Facility Management circumstances are deteriorating considerably. The Korea's economic situation and China's policy changes were not made due to the smooth supply and demand. For these reasons, To help with their need, their own pigments procurement was inevitable.

According to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in King Sejong year began to show the efforts to find a Domestic pigment called ‘Tochung’ and in King Sejo year culminated.

In the current academic research on Chunghwa pigment progressed a lot, but more commonly progresses ‘Hoehoechung’ imported from China for the research came to focus, Study on domestic cheonghwa pigments 'tocheong ' is extremely weak.

Reasons of conflicting claims are comming from difficulty of classification (distinguish) between ‘Tochung’ from imported ‘Hoehoechung’ and lack of absolute chronology research. Also those reasons raised the doubts of existence.

(10)

This thesis studies on development history of Blue and White Porcelains and its pigments. And the domestic pigment developed in Chosen period based on previous research and historical documentary records to clarify on the existence of ‘Tochung’.

(11)

Ⅰ. 서론

A. 연구목적

문화는 항상 보존되고 지켜야할 필요가 있다. 문화의 단일화가 급격히 진행되고있 는 현시점에서 민족 고유의 특성과 긴 시간동안 축적되어온 역사를 담고 있는 전통 문화의 보존은 더욱더 필요하다. 그 중, 한국의 백자는 가장 농후한 민족정서가 깃들 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두각이 되는 것은 화백자 종류인 청화백자1) 이다. 청화백자는 중국 원대 후반기인 14세기에 본격적으로 제작되어 고려말에서 조 선초에 국내로 유입2)되었으며, 세종조 때 어기로 지정되어 지배계층의 문화를 대표 하였고 조선후반에는 청화백자의 생산량이 늘어 민간에까지 보편화되어 조선시대 역 사 중 배제할 수 없는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다.

조선초 청화백자를 제작하는데 사용한 청화안료는 중국을 통한 수입에 의존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가격이 매우 고가여서 청화백자는 널리 사용될 수 있는 도자 기가 아니었다.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분원 경영이 악화 되었고, 당 시 중국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하던 청화안료는 조선의 경제사정과 중국의 정책변화로 인해 수급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수입되어 사용되던 일부 안료들은 자체 조달이 불가피해졌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세종 연간 조선 내에서 국내산 청화안료인 ‘토청’을 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고 세조연간3)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청화안료에 관한 연구는 많이 진행되어 있으나 보편적으로 중국 에서 수입된 회회청에 대한 연구가 중점적으로 진행되어왔고, 국내산 청화 안료인 토청에 관한 연구는 극히 미약하다. 토청은 수입산 회회청과 구분이 어려워 많은 부 1) 백자에 무늬를 나타낼 때 코발트 안료인 회청(回靑᠊回回靑)을 써서 그림을 그린 것을 청화백 자라고 한다. 청화백자는 한자로 표기할 때 「靑花」, 「靑華」, 「靑畵」등인데 「靑花」라 는 표기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청화백자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고 우리나라 제품은「靑畵」로 표기하는 경향이 많다. 강경숙(1989). 한국도자사. 서울: 일 지사, p. 347.

2) 김익환 (2010). 조선시대 백자청화안료의 과학기술적 연구. 중앙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p. 34

3)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을 살펴보면 세조9년 5월, 윤7월 세조 10년 8월, 9월에 회회청에대한 4번의 채취기록을 확인할 수 있으며, 세조 10년 8월과 예종1년 10월 2번에 걸친 회회청의 번조 기록을 확인 할 수 있다.

(12)

분에서 엇갈린 주장이 존재하며 절대 편년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연 구가 진행이 되고 있고 실존여부에 대한 의구심 또한 제기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한국의 문화역사 속에서 화려한 일면을 차지하고 있는 청화백자와 청화안료에 대한 고찰을 하고자 한다. 또한 조선시대 개발이 진행되었던 국내 청화 안료인 토청에 대한 연구를 문헌과 선행연구를 기반으로 진행하고 토청의 존재에 대 한 견해를 밝히는데 목적을 두었다.

(13)

B. 연구방법 및 범위

본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청화백자와 이에 사용되었던 청화안료를 문헌연구를 통 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구체적인 연구내용은 다음과 같다.

Ⅱ장에서는 조선시대 청화백자에 대한 고찰을 시행하고자 한다. 조선시대 청화백 자가 갖는 의의와 발생 배경에 대해 알아보고 국내 청화백자의 제작과 사용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도자사의 편년은 여러 학자들에 따라 다르게 구분되어 진다. 본 논문에서는 정양모의 구분법에 따라 조선도자의 시기를 전기: 태조초년-인 조말년(1649), 중기: 효종초년(1650)-영조27년(1751), 후기: 영조28년(1752)-순종말 년(1910)로 나누어 조선시대 청화백자의 시기별 특징을 살펴보았다.

Ⅲ장에서는 청화안료에 대해 고찰하였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그리고 개인 문집을 통해 문헌에 보이는 시기별 청화안료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고 청화안료의 사 용방법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시기별 청화안료의 수입과 자체 개발에 관한 연관성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Ⅳ장에서는 조선시대 청화안료의 개발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였다. 국내 청화안 료인 ‘토청’의 자체개발이 이루어진 시대적상황과 개발 개요를 살펴보고자 한다. 조 선시대 기록된 고문헌에 나타난 청화안료의 채취와 번조기록을 살펴보고 이를 근거 로 제시한 선학들의 연구 문헌을 통해 국내 청화안료에 대한 연구현황과 견해를 살 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현재 국내 청화안료인 ‘토청’에 대한 인식을 정리해보고 국내 청화안료인 토청의 존재에 대한 본 연구자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14)

Ⅱ. 조선시대 청화백자에 대한 고찰

A. 청화백자의 의의와 발생

한민족의 백자호상은 매우 자연스러운 민족정서의 전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조시대의 백자기에는 가장농후한 민족정서가 깃들어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중에서 도 특히 이채로운 것은 풍요한 항아리 종류의 존재이다.4) 하지만 조선시대 지배계층 이 가장 숭상하였던 것은 청화자기이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사람들의 소용(所用)하는 것중에서 도기(陶 器)가 가장 긴요하다. 지금 마포(麻浦) 노량(露梁)(서울 한강변(漢江邊))등처(等處) 에서는 모두 도식(陶埴)을 생업(生業)으로 살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와기(瓦器)로서 항(缸)이나 옹기류(瓮器類)이다. 자기(磁器)로 말할 것 같으면 모름직 백토(白土)를 사용해서 정치(精緻)하게 번조(燔造)하여야만 사용할 수가 있다. 외방(外方)의 각도 (各道)에서는 자기(磁器)를 만드는 자(者)들이 많으며 고령(高靈)에서 번조(燔造)한 것이 가장 정치(精緻)하다고 하나 광주(廣州)것의 더욱 정치(精緻)함만 같지 못하 다.’고 하였다. 여기서 자기(磁器)는 백토(白土)를 지칭하는 것일 것이며 정치(精緻) 한 백자(白磁)에 대한 그들의 높은 안목(眼目)을 알 수가 있다.5) 또한 점필제집(占 畢齊集)에 세종조(世宗朝)의 명신(名臣) 김종서(金宗瑞)가 고령(高靈)의 백자(白磁) 에 대하여 찬탄하여 마지아니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백자(白磁)가 왕(王)이 전용 (專用)하는 정밀하고 세련된 자기(磁器)일뿐 아니라 사대부(士大夫)들에게도 백자 (白磁)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정치이념과 부합하여 국용자기로 지정되어 조선시대 미술품을 대표하는 백 자는 여러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다. 조선백자는 순백자(純白磁) <그림 1>와 이를 바 탕으로 안료(顔料)로 시문하여 나타난 안료의 색상에 따라 청화백자(靑華白磁) <그림 2>, 철화백자(鐵畵白磁) <그림 3>, 동화백자(銅畵白磁) <그림 4>로 구분되며, 때로 철화와 청화를 같이 사용한 것과 철화, 청화, 동화 세 가지 안료를 같이 사용하며 다 채로운 문양을 나타낸 예 <그림 5>도 있다.

4) 최승우 (1972. 3. 1). 이조의 도자기. 박물관신문

5) 이해량 (1984). 한국예술사. 서울 : 대한민국예술원.p. 465

(15)

<그림 1> 백자항아리 (17-18세기전반) <그림 2> 청화백자용문병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그림 3> 백자철화매죽문항아리 (16세기) <그림 4> 백자진사인물엽문각병 (18-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한국 도자는 청자·분청사기·백자의 흐름으로 변모되어 왔고 그 중 조선시대에 들 어 제작되기 시작한 청화백자는 한국 도자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청 화백자는 중국을 통해 수입된 안료에 의해 제작이 가능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청화 자기 제작과 밀접한 관계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청화백자(靑畵白磁)는 1100년 중국 원대(元代)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며14세기말 경덕진(景德鎭)에서 본격적인 청화 백자를 완성하게 되었고, 그 후 아시아시장은 물론 유럽 및 아메리카대륙에 이르기

(16)

<그림 5>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난국초충문병 (18세기초), 간송미술관

까지 전세계의 도자기 시장을 장악하게 된다.6)

조선백자는 관영(官營) 체제로서 국가가 그 제 조를 주관하였다. 이것은 조선이 유교사회로서 항상 규격화된 제기 및 의기용 그릇들이 필요했 기 때문으로 조선백자는 중앙관청인 사옹원(司饔 院)이 주도한 분원(分院) 제품이라는 특징을 가 진다.7) 특히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된 관요백자는 조선자기 문화의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자료이 다. 청화백자는 백토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회청(回靑) 회회청(回回靑) 또는 토청(土靑)이라 불리는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그 위에 순백의 백자유를 시유하여 1,250℃-1,400℃의 고온에서 소성하여 맑고 고운 푸른색의 무늬가 기면에 나타나게 만든 자기이다. 코발트는 당시 한국에서는 채취하지 못하였으므로 아라비아 상 인들을 통하여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코발트 안료는 회청 또는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렀으며, 이것으로 만든 자기를 중국에서는 유리청(釉裏靑) 또는 청화백자(靑華白 瓷)라고 불렀으며 한국에서는 화사기(畵沙器) 또는 청화사기(靑畵沙器)라고 불렀다.

청화백자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효종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태종(太宗)이 1380년대 고려 국자박사(國子博士)로 있을 때 애용하던 청화잔(靑花盞)을 태종 즉위 후에 성균관에 하사하여 보장(寶藏)했다는 기록8)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자기의 유입을 검토해본 결과 중국에서 조선으로 자기가 유입된 횟수는 총 22건이고, 일본에서 들어온 경우도 12건이다. 유입된 자기는 백자 와 청자 두 종류가 주를 이루며 분색사기, 주기, 자완, 사발과 같이 막연하게 표기된 경우는 어떤 종류인지 정확한 확인이 어렵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경덕진에서 백자 를 활발하게 제작했고 용천(龍泉)에서는 청자를 만들어 내수 혹은 수출용으로 사용 했으므로, 조선에 유입된 자기의 대부분은 백자와 청자였을 것이다.9) 유입기록을 시

6) 이은미 (2011). 17・18세기 한・중・일 청화발색과 청화기법에 관한 연구. 한국도자학연구.

8(1), p. 133.

7) 강경숙, op. cit., p.347.

8) 孝宗實錄, 卷15, 孝宗6年 7月 乙未條

9) 전승창 (2009). 조선 초기 명나라 청화백자의 유입과 수용 고찰 미술사학연구 제264 pp.

(17)

기별로 살펴보면 태종연간(1400-1418년)에는 중국자기의 공식적 유입은 활발하지 않았다. 또한 수입된 그릇의 종류가 단순하며 수량도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종 연간(1418-1450년)에는 자기의 유입횟수와 수량이 증가를 나타내고 있다.

<표 1> 태종- 세종년간 조선왕조실록의 자기 유입기록

시기 종류 및 수량 출처 비고

태종 (太宗)

8년

(1408) 11월5일 분색사기(粉色砂器), 주기(酒器) 中國 사신상납 (使臣上納) 17년

(1417) 7월 21일

암화분색다종1(暗花粉色茶鐘1)

다병1(茶甁1), 분색다종1(粉色茶鐘1) 中國 사신상납 (使臣上納)

세종 (世宗)

5년

(1423) 9월 24일

청자분70개(靑磁盆70箇)

백자완대소20개(白磁椀大小20箇) 日本 진상(進上) 8년

(1426)

11월 1일 반100(盤100), 자완1,000(磁椀1,000) 日本 진상(進上) 12월 14일 자완1,000(磁椀1,000) 日本 진상(進上)

9년 (1427)

1월 13일 사발100(沙鉢100) 日本 진상(進上)

3월 27일 사반29(沙盤29), 사발180(沙鉢180),

사접290(沙楪290) 日本 진상(進上)

4월 24일 분색사종1(粉色沙鍾1) 中國 사신진상

(使臣進上) 10년

(1428)

7월 19일 백소자기10탁(白素磁器10卓), 소반5(小盤5)

백자청화대반5(白磁靑華大盤5) 中國 황제하사

(皇帝下賜)

8월 11일 자종1(磁鍾1) 中國 사신진상

(使臣進上)

11년 (1429)

1월 27일 청화백자종(靑畵白磁鍾)

백자화종(白磁畵鍾) 中國 사신진상

(使臣進上) 5월 2일 백자영양다종30(白磁羚羊茶鍾30)

백자파다병15(白磁吧茶甁15) 中國 황제하사

(皇帝下賜) 6월 10일 백자청화대종1사(白磁靑花大鍾1事) 中國 개인진상품 (個人進上品)

7월 15일 백자청화(白磁靑花) 中國 개인진상품

(個人進上品)

7월 18일 암화종4(暗花鍾4) 中國 사신진상

(使臣進上) 11월 2일

백자기15(白磁器15) 中國 황제하사

(皇帝下賜)

백자청화대접4(白磁靑花大楪4) 中國 사신진상

(使臣進上) 12년

(1430) 7월 17일

청화사자백자탁기3탁(靑花獅子白磁卓器3卓),

청화운용백자주해3(靑花雲龍白磁酒海3) 中國 황제하사 (皇帝下賜) 19년

(1437) 1월 23일 왜인기명(倭人器皿)10) 日本 민간구입 (民間購入)

37-39.

(18)

시기 종류 및 수량 출처 비고

문종 (文宗)

즉위년 (1450)

8월 5일 청화종6사(靑畵鍾6事)

화합2사(花榼2事) 中國 사신진상

(使臣進上)

8월 6일

청화백자종5사(靑花白鍾5事) 자색종6사(紫色鍾6事)

화완자10사(畵碗子10事)

순청소완자10사(純靑小碗子10事) 순청주주1사(純靑酒注1事)

대접중접소접60사(大楪中楪小楪60事) 청화사반9사(靑畵沙盤9事)

청화대잔1사(靑畵臺盞1事) 순청종6사(純靑鍾6事)

中國 사신진상 (使臣進上)

자접27사(紫楪27事), 화다종6사(花茶鍾6事) 청묘금주주1파(靑苗金酒注1把)

청화백제완10사(靑畵白堤碗10事) 청화다종6사(靑畵茶鍾6事)

中國 사신진상 (使臣進上)

10월 7일 청자주구급동대(靑磁酒具及同臺) 日本 진상(進上) 1423-1427년 사이 일본에서 다수의 자기가 진상되었고, 이어서 1427-1430년에 중국 황제 혹은 사신에 의해 다량이 유입되었다. 청화백자가 거의 대부분이고 종류 가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중국백자의 유입이 집중된 1427-1430년은 명의 선덕제 재위기간(1426-1435년)11)으로 중국에서는 경덕진에서 청화백자가 활발하게 제작되 던 시기이다.

<표 2> 문종년간 조선왕조실록의 자기 유입기록

세종대에 중국백자가 공식으로 유입된 기록은 1430년까지 확인된다. 이 후 중국백 자의 공식적인 기록을 확인 할 수 없는데 이는 세종30년(1448년), “듣건데 중국에서 는 청화자기를 외국 사신에게 팔거나 주는 것을 금하고 이를 범한 자의 죄는 사형에 까지 간다고 하니 이후로는 북경이나 요동에 가는 길에 자기 무역하는 것을 일절 금

10) 세종실록 76권 19년 1437 1월23일 계축 乃潛移官中魚物布貨於私第及用官物貿倭器皿等事也 관가의 물건을 사용하고 왜인의 기명을 사들인 것 등의 일에서 수입자기임을 확인 할 수 있 으며 청화백자 제작 추정시기인 1440~1250년대 이전의 일임을 추론할 수 있으므로 수입품 임을 알 수 있다.

11) Ibid., p.39.

(19)

시기 종류 및 수량 출처 비고

성종 (成宗)

2년

(1471) 12월 12일

염착발10매(染着鉢10枚)

백자발10매(白鎡鉢10枚) 日本 진상(進上)

5년

(1474) 12월 24일 청자대완2구(靑磁大碗2口) 日本 진상(進上) 6년

(1475) 5월 12일 화기(畵器) 中國 민간수입

(民間輸入) 7년

(1476) 8월 24일 기명(器皿) 中國 민간수입

(民間輸入)

8년 (1477)

윤 2월 10일 청화기(靑畵器) 中國 민간수입

(民間輸入)

윤 2월 13일 청화자기(靑畵磁器) 中國 민간수입

(民間輸入)

윤 2월 14일 화자기(畵磁器) 中國 민간수입

(民間輸入)

6월 6일

천축주옹2(天竺酒甕2), 중수기청자1대(種樹器靑磁1對) 청자향로1(靑磁香爐1)

日本 상납(上納)

11년

(1480) 6월 7일 청자주해1(靑磁酒海1), 청자발2(靑磁鉢2) 日本 민간수입 (民間輸入) 14년

(1483) 7월 26일 자기(磁器) 中國 사신진상

(使臣進上) 25년

(1494) 5월 11일

청자수기1개(靑瓷嗽器1箇)

부수다완1개(付嗽茶椀1箇) 日本 상납(上納)

하라”12)는 기록에서 당시의 사정을 엿볼 수 있다. 당시의 조선은 중국의 율법을 따 르던 시기였으므로 중국의 무역금지는 조선에서도 당연히 지켜져야 했을 것이다.

이후에도 자기유입은 지속되었는데, 1450년 문종 즉위년에 중국의 사신 윤봉과 정선 이 다수의 청화백자를 조선왕실에 진상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전과는 대조적으로 단종(1452-1455년)과 세조 연간(1455-1468년)에는 자기가 유입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세조연간에는 국내에서 청화자기 제작 에 필요한 국내청화안료를 찾으려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도되는데, 안료개발은 중 국자기의 유입기록이 보이지 않는 시기와 비슷해 이들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 는 것으로 보인다.

<표 3> 성종년간 조선왕조실록의 자기 유입기록

12) 세종실록 권119. 30년(1448) 3월3.“ 傳旨禮曹聞中朝禁靑花磁器賣與外國使臣罪至於死今後赴京及遼 東之行貿易磁器一皆禁斷”

(20)

성종연간(1469-1494년)에도 중국 사신이 자기를 소수 진상하고 필요한 물품을 받 아가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중국 황제가 조선에 보내는 물품에서 백자는 사라 졌고 사신이 자기를 바치는 일도 1483년 한 건에 그치는 등 세종 및 문종 시기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13) 위에서 살펴본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중 국산 청화백자의 유입은 세종연간(1418-1450년)에 집중되어 문종(1450-1452년)의 즉위년인 1450년까지 이어지며, 이후에는 뚜렷한 자기교류가 없었던 점에 주목할 필 요가 있다. 이미 1448년 조선의 사신이 중국을 방문할 때 청화자기의 거래를 금하라 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개인을 통한 중국자기의 유입도 더욱 감소했을 것이다.14)

<표 4>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조선전기의 청화백자 전래

시기 전래 자기의 내용 주체 성격

세종 (世宗)

10년 (1428)

선덕 (宣德)

3년

7월 19일 백자청화대반5개(白磁靑花大盤5箇) 소반5개(小盤5箇)

선덕제 (宣德帝)

황제사여품 (皇帝賜與品)

11년 (1429)

선덕 (宣德)

4년

1월 27일 백자청화종(白磁靑畵鍾) 백자화종(白磁畵鍾)

금만 (金滿)

사신진상품 (使臣進上品) 6월 10일 백자청화대종1사(白磁靑花大鍾1事) 윤중부

(尹重富)

개인진상품 (個人進上品)

7월 15일 백자청화(白磁靑花) 이빈처

(李彬妻)

개인진상품 (個人進上品) 11월 2일 백자청화대접4사(白磁靑花大楪4事) 금만

(金滿)

사신진상품 (使臣進上品)

12년 (1430)

선덕 (宣德)

5년

7월 17일

백자청화사자탁기3탁 (白磁靑花獅子卓器3卓) 백자청화운용주해3사 (白磁靑花雲龍酒海3事)

선덕제 (宣德帝)

황제사여품 (皇帝賜與品)

문종 (文宗)

즉위년 (1450)

경태 (景泰)

1년

8월 5일 백자청화종6사(白磁靑畵鍾6事) 정선 (鄭善)

사신진상품 (使臣進上品)

8월 6일

백자청화종5사(白磁靑畵鍾5事) 청화사반9사(靑花沙盤9事) 청화잔대1사(靑花棧臺1事)

윤봉 (尹鳳)

사신진상품 (使臣進上品)

백자청화완10사(白磁靑畵碗10事) 청화다종6사(靑花茶鍾6事)

정선 (鄭善)

사신진상품 (使臣進上品)

13) 전승창, op. cit., p.41.

14) Ibid.

(21)

중국으로부터 청화백자의 판매금지와 무역금지에 대해 살펴보면 조선전기 청화백 자의 전래는 문헌에 보이는 것처럼 명황실과의 공식적인 관계를 통한 유입과, 사신 들의 중국 왕래 과정에서 이루어진 무역을 통한 유입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졌다

<표 4>. 공식적인 관계를 통한 유입은 세종(1418-1450년)에서-문종(1450-1452년) 까지 두 번에 걸친 명황실과의 교류와 4번의 사신 진상품 그리고 2번의 개인 진상 품을 들 수 있다.15)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조선전기의 청화백자 전래에 관한 기록 은 다음과 같다. 명 황실의 황제사여품 형식으로 이루어진 세종10년(1428년)과 세종 12년(1430년)의 두 번과 4번의 사신 진상품(1428, 1429, 1430, 1450년) 그리고 두 번의 개인진상품(1428, 1429년)이 윤중부와 이빈의 처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윤중부 는 윤봉의 동생이고 이빈의 처는 윤봉의 양어머니이다. 결국 세종과 문종때 유입된 청화자기는 모두는 명 사신들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추정된다.16)

15) 김익환, op. cit., p.34.

16) Ibid., pp.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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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조선시대 청화백자의 제작과 사용

청화백자의 정확한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절대편년자료가 되는 문헌상의 기록이나 유물이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아 정확한 개시시기를 알 수 없으나 크게 세종연간인 1440년대와 세조연간(1455-1468년)을 포함한 1450년대의 두 가지 설로 요약된다.

우선 세종연간인 1440년대 제작이 되었다는 주장의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전하는 기록과 유물에 의하면 청화백자 제작의 가장 이른 시기는 세조 원년(1455 년)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의하면 중궁의 금잔을 화자기로 대체하도록 지시한 것으 로 보아17) 세조 원년(1455)의 화자기(畵磁器) 즉, 청화백자에 대한 기록은 문헌상 가장 이른 기록으로 확인된다. 위 기록을 확인 할 수 있는 세조 원년 윤 6월은 세조 가 등극한 달이어서 청화백자의 제작은 이미 세조원년(1455년)보다 거슬러 올라가는 시기에 일정한 성과를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어 이보다 앞선 시기에 청화백자의 제 작이 완성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어 이보다 앞선 시기의 문종(1450-1452년) 또는 그보다 앞선 세종(1418-1450년) 말기에 청화백자의 번조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 한다.

또 다른 견해인 1450년대로 청화백자의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절대편 년자료에 의한 주장이다. 현전하는 유물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경태7년명(景泰7 年銘) 인천이씨(仁川李氏) 청화백자묘지석이다. 묘지의 기록을 보면 지석(誌石)의 주 인은 세조의 장인 윤번의 부인인 인천 이씨로 1456년 7월에 사망하여 같은 해 10월 에 묘에 묻힌 것으로 확인되어 1456년 청화안료를 사용한 청화지석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18) 그러나 이 시기(1455-1456년)는 이미 청화안료를 사용하여 청화백자 의 제작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시점으로 볼 수 있어 1456년 이전에 청화백자의 제작이 시작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조선 청화백자는 중국 원∙명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알려졌는데, 고 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전래되었던 중국 청화백자들이 조선에서 청화백자의 사용 및 자체적인 제작에 직접적인 자극과 영향을 준 것은 당연한일 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나 당대에도 코발트 안료를 부분적으로 사용한 흔적이 보이지 만, 청화백자는 대체로 원대(元代)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명·청대(明淸代)에 크게 성

17) 성현 용재총화 권10 세종조어기 전용백자 지세조조 잡용채자(成俔, 慵齋䕺話, 卷10, 世宗朝 御器 專用白磁 至世祖朝 雜用彩磁)

18) 고려대학교박물관, 파평윤씨정정공파묘역조사보고서, 고려대학교박물관, 2003, pp. 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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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하였다는 것이 기존 인식이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14세기 말엽에 전래되어 생산 단계에 들어간 것은 15세기 중엽으로 추론된다. 그러므로 15세기 중엽경의 초기 청 화백자는 형태와 문양 등이 명나라의 청화백자와 흡사하지만, 15세기 후반에는 독자 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조선초에는 명 황실과의 공식적인 교류과정에서 다수의 중국 청화백자들이 조선왕 실로 직접 전해졌고, 왕실을 중심으로 청화백자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새로운 수 요가 창출되었을 것이다. 또한 세조1년(1455년)에 "공조(工曹)가 중궁 주방(中宮酒 房)에 금잔을 만들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화자기(畵磁器)로 대체하라고 명했고 동 궁(東宮)에서도 역시 자기를 만들어 쓰게 하였다.19)라는 기록으로 확인 할 수 있듯 이 왕실에서 금속기의 사용금지와 자기로의 대체는 청화자기의 또 다른 수요를 초래 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중국 청화백자의 전래와 유입이 1450년 무 렵부터는 원활히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30년(1448) 자기무역 금지조치의 결과 1448년 이후에는 무역에 의한 중국 청화백자의 유입이 엄격히 제 한되었으며, 명 황실을 통한 청화백자의 공식적 전래에 관한 기록이 문종원년(1450) 을 마지막으로 이후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어 1450년 이후 공식적 교류를 통한 중국 청화백자의 전래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1450년 이후 중국을 통한 청화백자의 공급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조 선에서는 사용할 수 있는 청화백자의 수량이 급감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중국을 통한 한정된 공급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중국으로부터 청화백자 판 매금지와 무역금지에 따른 공급부족이 필연적으로 자체적인 제작이 시도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19) 世祖 1卷, 1年(1455 乙亥 / 명 경태(景泰) 6年) 閏6月 19日(癸亥) 5번째기사 工曹請造中宮酒房金盞, 命以畫磁器代之, 東宮亦用磁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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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청화백자국중문각병 (17세기후반), 국립중앙박물관

C. 조선시대 청화백자의 시기별 특징

1. 전기 (태종초년-인조말년,1649)

이 기간의 백자는 새로운 왕조의 이념과 부합하여 분청사기와 더불어 제작되었 으며 점차 안정적이고 조선의 모습을 반영한 모습을 지닌 백자로 완성될 수 있는 사상적인 토대를 제공하였다. 이 시기에는 분원이 설치되었으며 중국백자의 영향에 서 벗어나 한국화 된 의장양식을 갖추게 되었다.

이 기간동안 상감백자가 제작, 소멸되었으며, 중국 청화백자의 영향으로 우리나 라 도자역사상 최초로 새로운 도자 유형인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대체로, 15·16세기경의 청화백자는 청화의 안료를 얻기가 어려운 때이므로 안료를 아껴 쓴 흔적과 사 용하는 데 서툰 점을 볼 수 있으며, 고려자기의 곡 선적인 형태를 벗어나 소 박하고 순수한 직선적인 형태로 바뀌었을 뿐만 아 니라 굽이 넓어져서 안정 감이 있고 실용적인 형태 로 기형이 바뀌었다.20) 그 릇의 형태는 항아리[壺]의 경우 어깨의 선이 부드러 워지고, 병(甁)은 수직으로 올라가는 긴 목으로 아래 부분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그림6>, 굽에서부터 곡선을 그 리며 위로 퍼져나간 대접 등은 조선시대 도자기의 새로운 형태를 나타낸다.21) 그 예

20) 이기백 (1999). 한국사신론. 서울: 일조각, p. 221

21) 장영도 (2011. 4. 5). 문화탐방/조선백자. 경북문화신문. 자료검색일 2012. 5. 7, 자료출처 http://gbmunhwa.news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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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청화백자송죽문홍치이년명항아리 (1489), 동국대학교박물관

로는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1489년(성종 20) 작품인 청화백자홍치명송죽문호(靑 畫白磁弘治銘松竹文壺, 국보 제176호)

<그림 7>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작 품의 제작은 1467년(세조 13) 도자기 제조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옹방(司饔 房)이 사옹원(司饔院)으로 개칭되어 그 기구가 확대되면서 경기도 광주시 일대 가 사옹원의 분원(分院)으로서의 성격이 뚜렷하여지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청화백자의 회화적인 문양에서는 일 반 도공의 솜씨가 아닌 도화서 화원의 전문화가의 그림솜씨를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관장제(官匠制) 수공업체제로 자 리잡아 가는 광주분원의 소임을 짐작하 게 한다. 이러한 시기의 가마터로는 광 주의 번천리·도마리·우산리·무갑리·학동 리 등의 가마터가 있는데, 이들 가마터

가 관요라는 사실을 뒷받침하여 주는 것이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慵齋叢話≫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도 광주목토산조의 ‘每歲司饔院官率畫員 監造御用之器(매 세사옹원관솔화원 감조어용지기)’라는 기록이다. 백자의 기종은 대접, 발, 합, 접시 마상배, 잔, 병, 주전자, 둥근 항아리, 긴 항아리 등으로 생활기명을 주로 하는 백 자가 많이 제작되었다. 이 가운데 접시의 종류중 하나인 전접시는 고려청자의 형태 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중국 도자의 기형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대접이나 완은 이전의 고려청자와는 달리 대부분 구연부가 밖으로 벌어졌으며, 굽이 높아졌 고 그 형태가 밖으로 벌어지거나 수직으로 내려간 형태를 띄었다.

병은 목이 짧고 몸체가 통통하며 구연부가 외반된 형태가 주를 이룬다.

편병은 접시 두 장을 별도로 제작하여 접합한 형태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제작기법은 분청사기의 기형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나 분청사기에서 찾아 볼 수 이쓴 기형인 자라병과 장군은 백자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항아리는 매병 형태의 긴 항아리 <그림 7>와 둥근 형태의 둥근 항아리로 나누어 진다. 긴 항아리인 입호는 구연부가 직립하고 S자형 몸체를 가진 것과 구연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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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반되어 도톰하게 말리면서 당당한 어깨를 이루다 굽 부근에서 변꼭점을 형성하 여 마무리 된 것으로 나뉜다. 둥근 항아리 형태의 원호는 구연부가 심하게 외반되 었으며 대부분 구연부의 지름이 굽의 지름보다 크다. 몸체는 타원형이며 무게중심 이 약간 아래로 내려온 형태이다.

조선시대 들어 자기로 묘지석을 제작하는 사례가 증가하였는데, 15세기에는 대 부분 분청사기로 제작되었다. 15세기 말에는 철화백자로도 제작되었으며 그 형태 가 위패형과 직사각형이 주로 제작되었다. 16세기에는 묘지석의 대부분이 음각백 자로 제작되었고 청화백자와 철화백자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그 형태는 주로 직사 각형이다. 16세기로 들어서면 상감백자는 사라지며 기형에도 변화가 생긴다. 납작 하던 전접시의 높이가 높아지며 둔하게 꺽이는 등의 기형변화가 나타난다. 15세기 의 상감백자는 전통적인 기형이 많은 편이며, 청화백자에서는 새로운 기형이 많이 보여진다. 새로운 기형에서는 중국 원∙명대 자기와 유사한 형태를 나타내었으며, 이는 중국에서 전래된 백자의 양식이 조선 전기의 백자 기형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 될 수 있겠다.

15세기 상감백자의 문양소재 중 가장 빈번히 사용된 소재는 연꽃이나 모란을 소 재로 한 연당초문∙모란당초문 등의 단초문 계열과 연화문∙모란문 등의 절지문 계열 이다. 상감백자에 나타난 식물문은 간략하고 도안화된 형태가 대부분이다.

15세기 전반의 청화백자의 문양은 주문양은 명나라 초기의 문양과 유사하였으 며, 종속문 역시 연화문 계통으로 명나라 초기의 문양과 흡사하였다. 그러나 점차 주문양이 중국과 다른 회화적 문양으로 바뀌었으며 15세기 중엽부터는 여백을 충 분히 살린 간결하고 소박한 회화적 주문양이 독립적으로 나타났다. 흰 백자 바탕에 청초한 쪽빛 그림을 그리는 청화백자는 원래 중국 원나라때 개발 되었다. 이 원 청화백 자의 뒤를 이어 명나라 시대에는 청나라 백자의 전성기 시대가 왔으며 우리 조선에서는 이 명나라 청화백자에서 자극을 받아 국산청화백자를 개발하는데 조야가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쪽빛나는 안료인 회회청은 먼 근동의 회회교의 나라에서 수입되는 고귀한 원료였으므로 명나라에서는 좀처럼 한국에 이것을 나누어주지 않았었다. 이 팔각 병은 그러한 귀한 회회청으로 그림을 그린 사흥원 광주 분원산의 뛰어난 작품이며 그림 도 도공의 그림이 아니라 도화원 그림이었다. 옥같이 맑고 화사한 백자바탕에 쪽빛 대나 무 한가지를 그린 깔끔한 맵시는 좀처럼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청초하고도 맵시있 는 한국의 미요 한국의 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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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기 (효종초년,1650-영조27년,1751)

17세기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초토화된 사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정치, 사회, 문 화전반에 걸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7세기 도자는 생산이 재게되 고 곧이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다음 시기 도자의 기초가 되었으며 도자수요 증가 및 확산이 이루어졌다. 그 원인으로는 전란이후 각종기명의 부족으로인한 대체재로 서의 자기의 가치 증가와 17세기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인구의 증가, 그리고 상공 없과 농업의 발달에 따른 생활수준의 향상과 시장경제의 확산, 상평통보의 발행과 유통에 따른 동기부족의 현상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17세기 전반에 걸 쳐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실제로 자기의 제작이 본격적으로 확대되는 시점은 국가 경제가 안정추세를 보이고 화폐경제가 시작되는 1675-1720년이다.

17세기 광주분원은 임란이후 계속된 국가제정의 결핍과 시장경제의 발달에 따른 사기장의 취업기피로 인해 사기제작에 큰 어려움을 겪었으나, 양질백자를 생산코자 하였다. 따라서 사기장의 확보, 백토의 굴취와 번목의 조달에 힘써 결국 17세기 말 에는 다시 양질백자의 생산이 정상화 되었다.

이 시기는 성리학자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붕당정치가 이루어진다. 그 혼란한틈을 타서 일본이 침략하게 되는데 임란 1592년부터 1636년의 병자호란까지 약 50년동 안 지속되었다. 그 영향으로 도공들은 잡혀갔다. 국가는 새로운 정비과정을 거쳐 관요를 활성화시키고자 노력하였는데 효종 초 중앙관요가 도마리에서 금사리로 이 전하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양질의 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분원은 10년마다 이동하 는 불편함과 함께 일부 개인적인 경제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숙종23년 이전부터 관 요에서 민요를 허용한다.

위와 같이 17세기 초반에는 임란과 호란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어려 웠음으로 백자의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해 분원작업이 중단되었다. 도자에 도 이를 반영하는 어두운 회백색의 유색이 나타난다. 특히 청화백자의 제작은 청화 안료를 구하지 못하여 불가능해지며, 구하기 용이한 철화로 청화안료를 대신하여 철화백자가 제작되었다. 때문에 이 시기는 철화백자의 제작이 눈에 뜨게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전기와 비교하여 연적과 제기의 생산이 뚜렷하게 증가하였다. 연적과 같은 문방 구의 제작이 증가한 것은 양반층의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며, 제기의 제작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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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청화백자조어화병 (18세기), 간송미술관

으로 파손된 제기의 보수과정에서 재제작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전반기에는 백자의 생산이 비교적 저조했던 시기로 전기의 양식을 계 승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변화가 엿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철화백자의 생산이 그 전대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이 시기의 후반에는 유태가 밝고 투명해지며 청화백자 의 경우 패랭이 꽃이나 난초와 같은 한국적 정취를 풍기는 문양이 시문된다.

17세기는 철화백자의 전성기라고 할 만큼 철화백자가 많이 제작되었는데 청화안 료의 구입이 어려워지자 철사를 사용하여 철화백자가 주로 제작되었으며 이는 분 원과 지방가마에서도 왕성하게 번조되었다.

조선시대의 궁중에는 사옹원이라고 일컫는 관청 이 있어서 왕실의 어주와 이에 필요한 기물과 시 설을 조달했는데, 이 관청은 여기에 필요한 사기 그릇을 구워내기 위하여 경기도 광주군에 분원을 두고 수백년동안 백자를 생산해왔다. 이러한 화병 은 바로 이 분원같은 틀잡힌 사기 가마가 아니고 는 구워낼 수 없는 세련된 물건이며 도공의 솜씨 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도화원에 배속된 화원을 동원해서 그린 작품이다 <그림 8>. 조선시대 도 자공예의 격조와 한국 도예미의 유연한 장점의 일 단을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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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후기 (영조28년,1752-순종말년,1910)

17세기에 생산이 부진했던 청화백자가 다시 제작되어 크게 유행하고, 사번의 허용 과 양반 수의 증가 등으로 왕실 뿐 아니라 문인사대부 취향의 그릇들도 다수 제작되 었다.

이 시기는 점차 청의 영향을 받게되고, 문물교류가 활발해 지면서 서구 문화가 유 입되었다. 18세기 말 정조 이후 북학이 형성되었으며 북학은 성리학에 반발하고, 근 대적인 실학사상을 수용하였다.

그 결과 민생고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상공업을 개혁하여 경제가 활성화되고, 민 간의식이 향상되었다. 이 영향으로 부농∙상공인이 출현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청화백 자의 수요증가에 영향을 끼쳐 서민층에서도 수요가 증가한다.

분원은 한강변에 정착하게 되면서 청화백자가 영∙정조대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맞 이한다. 특히 숙종때에는 분원에서 관요의 역할이 축소되고, 민요가 융성한다.

고종때에는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투로 그 변화 속에 1883년에는 분원이 민영화 되면서 6면이 운영하는 체제로 바뀐다. 그래서 이 시기의 백자는 누구나 구입하여 사용하였고, 전국의 부호로부터 각종 백자의 종류를 주문 받아 분원이 활성화되었다.

조선후기 사회는 중세국가에서 근대국가로 이행되는 과도기적 시기로 대의 관계가 활성화되고, 민간 경제가 활성화됨에 따라 민중의식이 크게 진작된 시기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 배경 위에서 조헌후기 백자의 문양은 다수 대중의 취향이 반영된 기 원적 문양으로 바뀌게 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산수문이 시문된 자기의 제작이 활발해졌는데 이는 사대부계층이 백자의 주 수요층으로 부상한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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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조선시대 청화안료에 대한 고찰

A. 조선시대 청화안료에 대한 고찰

코발트 계통의 청화 안료는 건축물의 단청(丹靑)·회화재료 등 여러 방면에서 사용 하는 까닭에 옛날부터 그에 대한 명칭과 종류도 다양하였다. 조선에서 도자제작에 사용된 청화 안료는 페르시아산과 중국산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전자를 회회 청(回回靑)·회청(回靑, 일명 마호메트 블루)이라 하고, 후자를 석청(石靑)22)이라 한 다.

조선청화백자의 발달에는 재료의 변화가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청화의 재료는 조선전기에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회회청(回回靑)을 근간으 로 그 기법이 정립되었고 조선중기에 이르러 중국 청화안료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 다. 이 후 19세기에 이르러 일본을 통한 서양청화 즉 합성청화안료(合成靑畵顔料)로 바뀌는데 이를 기본으로 다양한 형태의 청화백자(靑畵白磁)가 제작 된다.23)

청화안료는 처음에는 중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하였고, 세조연간(1455-1468년)에 국산 청화 개발을 시도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으로 부터 페르시아산 수입안료인 회청을 수입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예로 성현(成 現, 1439-1504년)의 개인문집인 용재총화에 의하면 “세종(世宗) 시기는 어기(御 器)로써 백자(白磁)를 전용(專用)하였고 세조(世祖)시기에 이르러 채자(彩磁)를 잡용 (雜用) 하였다. 회청(回靑)은 중국으로부터 구하였으나 또한 많이 얻을 수 없었다.”

고 기록하고 있어24) 세조시기에 백자와 채자를 혼용하여 사용하였으며 페르시아산

22) 동양의 벽화에서 중요하게 쓰인 청색 안료.

염기성 탄산구리이고 적동광(赤銅鑛)에서 산출한다. 탄산구리와 수산화구리로 이루어져 있는 석 록(石綠)과 거의 비슷하나 석록보다 좀 더 많은 탄산구리를 지니고 있다. 색감은 군청(울트라마 린 블루)이나 프러시안블루에 가깝다. 유발에 넣고 천천히 물을 뿌려 가며 곱게 갈아 만든다. 지 나치게 힘을 주어 생기는 청분은 안료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가능한 적게 나오도록 한 다. 간 것을 물에 두면 윗면에 가루가 생기는데 위로부터 삼단계로 나누어 두청(頭靑), 이청(二 靑), 삼청(三靑)이라 하였으며 바닥에 가라앉은 삼청이 가장 진한 색을 띤다. 출처 색채용어사전, 박연선, 2007

23) 이은미, op. cit., p.140.

24) 성현, 용재총화 권10 (成俔, 慵齋叢話, 卷10. 世宗朝御器 專用白磁 至世祖朝 雜用彩磁 求回 靑於中國 畵撙罍盃觴 與中國無異 然回靑罕貴 求中國亦未多得)

(31)

청화안료를 중국에서 수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국내에서 토청을 구하려고 노력한 시기인 1463년에서 1469년 까지는 명대의 천순(天順)7년에서 성화(成化)5년에 해 당되는 시기로 페르시아산 청화안료가 중국에서도 서서히 고갈되어가는 시기에 해 당된다.25) 청화안료는 매우 귀하여 많이 구할 수 없어 매우 비싼 원료였음을 알 수 있으며 안료 수급의 어려움으로 청화백자의 제작이 원활치 못하였을 것으로 추 정되었다.26)

현존하는 유물로는 토청과 회회청의 차이를 분명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 는 청화의 발색은 안료의 산지에 따라 차이가 있고, 같은 안료일 경우라도 번조할 때 가마 안의 불길의 변화, 안료에 함유된 여러 금속 산화물의 혼합 조성 비율과 발색도·소성온도·태토와 유약의 성질 등이 복합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것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만 화학 분석 결과에 따르면 코발트에 비소(As)를 함 유한 것이 회회청이며, 철분과 망간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이 토청이다. 철분의 함유가 많으면 암흑색을 나타내고, 망간의 함유가 많으면 회자색을 나타내므로 육 안으로 어느 정도 구별이 가능할 뿐이다.27)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세종조(世祖朝)에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청화안료 의 가격이 비싸 청화자기의 사용을 규제한다.”는 기록과28) 澹軒 李夏坤 (1677-1724년)의 개인문집 頭陀草에 “회청 한글자를 은과 같이 아꼈다”는 기록에 서 18세기 초까지도 청화안료 가격이 매우 비쌌음을 알 수 있다.29) 그 후 조선 후 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30년(1754년) 4월 29일 기록에 의하면 “회회청이 흙과 같이 흔하여 화기(畵器)가 나라 전체에 고루 퍼져 있으니 이것은 사치다.”라 고 하였으며30) 이규경(李圭景, 1788-1856년)은 오주연문장잔산고(五洲衍文長箋散 稿)에서 중국산 청화안료의 가격이 많이 하락했음을 기록하고 있다.31) 승정원일기 (承政院日記)나 오주연문장잔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금사리에서 분원리로 분원

25) 이상기 (1984). 조선전기의 청화백자.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p. 21.

26) 김익환, op. cit., pp.36-37.

27) 청화 백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료검색일 2012. 5. 4, 자료출처http://terms.naver.com/e ntry.nhn?docId=563941&mobile&categoryId=1631

28) 경국대전 형전 금제조(經國大典, 刑典, 禁制朝)

29) 이하곤, 두타초, 책3시;(李夏坤, 頭陀草, 冊3時, 回靑一字惜如銀)

30) 승정원일기, 1105책, 영조30년 4월29일조(承政院日記, 1105冊 英祖30年 4月29日條) 31)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상 권27 고금자요변증설 .. 역설청채이회청 위지경인사무연시 매

어요공 매전 중 고칙여금 근칙여점 하품오십문 색심불선..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上 卷 27 古今瓷窯辨證說, 亦設靑彩以回靑 爲之京人私貿燕市 賣於窯工 每錢 重 古則如金 近則如漸 下品五十文 色甚不鮮)

(32)

을 이설한 이후의 기록으로 18세기 중·후반 청화안료 가격의 하락으로 청화안료의 수급이 원활해졌다는 사실을 추론 할 수 있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는 일본을 통 한 서양청화가 다량으로 수입됨으로써 청화백자가 다량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32)

32) 김익환, op. cit., p.38.

(33)

B. 문헌에 보이는 시기별 청화안료에 관한 기록

도자사 연구의 방법 중 문헌학적인 해석과 양식사로의 접근 방법은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다. 공식기록과 개인문집을 통해 청화안료에 관한 기록을 시기별로 구분해보았다. 조선시대 청화안료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그 외 개인문집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조선전기 청화안료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세 조9년(1463)-광해군11년(1619)까지 10건의 기록을 확인 할 수 있으며, 중종20년 (1525) 용제총화와 인조16년(1638) 승정원일기에서도 각각 1건씩을 확인할 수 있 다. 조선 중기 청화안료에 관한 기록은 현종14년(1673) 승정원일기와 영조16년 (1740) 성호사설에서 나타나며 조선 후기 청화안료에 관한 기록은 영조30년(1754) 조선왕조실록 1건, 영조30년(1754)–정조19년(1795) 승정원일기 4건 그 외 개인문 집 기록이다. 그 내용은 <표 5>, <표 6>, <표 7>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조선 전기 청화안료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세조년간 국내에서 회회청을 구한 기록과 세조9년(1463년) 강진, 밀양, 의성에서 회회청과 회회청상사석33)을 구한 기록을 확인 할 수 있고, 세조10년(1464년)에도 회회청상사석을 구한 기록이 확인 된다. 예종1년(1469년)은 강진에서 회회청 시험번조의 기록이 나타난다.

성종9년(1478년)의 기록을 보면 상의원(尙衣院)에서 쓰는 회회청의 낭비를 지적 하며 중국 사람의 사용방법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어 수입 회회청의 사용방법의 미 숙함과 회회청의 가격이 고가임을 나타내고 있다. 성종9년(1478년)부터 광해군10 년(1618)까지 나타난 5건의 기록에서는 회회청의 구입과 무역의 어려움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다음해인 광해군11년(1619년) 이홍규의 회회청 구입에 대해 시상하 고 있는 기록을 보아 조선전기 국내 청화안료의 수입의 어려움을 나타내는 일면이 라 할 수 있다.

33) 回回靑相似石: 회회청과 비슷한 돌. 국내에서 회회청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회회청과 비슷한 발색을 내는 돌을 찾아 시험번조 한 것으로 사료된다.

(34)

기록시기 관련 내용 중국의 연호 청료의 용어 출처

세조9년 5월24일35) 강진에서 회회청 구함 천순7년(1463) 회회청 조선왕조실록

세조9년 윤7월3일36) 밀양,의성에서 회회청상사석 천순7년(1463) 회회청 조선왕조실록

세조10년 8월7일37) 순천에서 회회청상사석 천순8년(1464) 회회청 조선왕조실록

예종1년 10월5일38) 강진에서 회회청 시험번조 성화5년(1469) 회회청 조선왕조실록

성종9년 8월 11일39) 회회청의 낭비를 지적

회회청의 채취방법의 다름 성화14년(1478) 회회청 조선왕조실록 성종19년 1월23일40) 이계진이 회회청을 못사옴 홍치1년(1488) 회회청 조선왕조실록

중종 20년 회회청・토청구입의 어려움 가정4년(1525) 회회청, 토청 용제총화

중종36년 12월28일41) 회회청을 무역해오지 못함 가정20년(1541) 회회청 조선왕조실록

광해군9년 6월27일42) 영건도감의 염초구입 질책 만력45년(1617) 회회청 조선왕조실록

광해군10년 윤4월3일43) 청료 구득 불능 만력46년(1618) 푸른채색 조선왕조실록

광해군11년 4월17일44) 회회청구입에 대해 시상 만력47년(1619) 회회청 조선왕조실록

인조16년 10월21일45) 백준가화 한쌍을 대신진배 승정11년(1638) 회회청 승정원일기

<표 5> 문헌에 보이는 조선 전기34) 청화 안료에 관한 기록

34) 태종초년-인조말년(1649년)

35) 世祖 30卷, 9年(1463 癸未 / 명 천순(天順) 7年) 5月 24日(壬子) 3번째기사 全羅道敬差官丘致峒, 得回回靑於康津以進

36) 世祖 31卷, 9年(1463 癸未 / 명 천순(天順) 7年) 閏7月 3日(庚申) 1번째기사

庚申/慶尙道敬差官柳緩來復命, 仍進諸邑産物。 咸陽郡金、眞寶縣深重靑、密陽府回回靑相似 石、長鬐縣松鐵相似石丁粉、淸道郡綠礬石及鉛鐵相似石、盈德縣深重靑相似石、義城縣回回靑相 似石、大丘郡白鐵雜黃白石、蔚山郡雜黃石、慶州石鐵、金海府雜黃靑石、聞慶縣石鐵、機張縣銅 鐵相似石、昌寧縣雜黃沙石及石鐵、靈山縣鉛鐵相似石、寧海府綠石、熊川縣有光白土等物 37) 世祖 34卷, 10年(1464 甲申 / 명 천순(天順) 8年) 8月 7日(戊子) 3번째기사

全羅道敬差官丘致峒採順天府回回靑相似石, 畫沙器燔造, 竝採康津縣靑鐵以進 38) 睿宗 8卷, 1年(1469 己丑 / 명 성화(成化) 5年) 10月 5日(乙卯) 2번째기사

…康津縣所産回回靑, 曾已採取試驗, 間有眞實者。 卿可訪問, 公私沙器燔造時, 須用回回靑, 疑 似沙土, 試驗以啓。 邑人得此彩色以進者, 或賞職, 超資敍用, 或賞布五十匹, 廣諭本道居民…

39) 成宗 95卷, 9年(1478 戊戌 / 명 성화(成化) 14年) 8月 11日(庚子) 1번째기사

…知事李克培啓曰: “臣觀尙衣院用回回靑, 其費甚廣。 以鐵椎碎其靑塊, 取其中如粟粒者用之,

(35)

기록시기 관련 내용 중국의 연호 청료의 용어 출처

현종14년 7월5일47) 회회청의 사용법 강희12년(1673) 회회청 승정원일기

영조 16년 회회청발색의 아름다움 건륭5년(1740) 회회청 성호사설

조선 중기 청화안료에 관한 기록은 승정원일기와 성호사설에서만 확인 할 수 있 다. 17세기는 중국에서 개발된 청화안료의 수입이 재기되었던 시기이며 회회청의 사용방법과 회회청발색의 아름다움을 확인 할 수 있는 시기이다.

<표 6> 문헌에 보이는 조선 중기46) 청화 안료에 관한 기록

조선 후기 청화안료에 대한 기록은 승정원일기와 개인문집에서 확인할 수 있으 며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 시기는 회회청안료의 수입이 안정적인 시기로 범람,

通事張有誠謂臣曰: ‘中國之人其用之, 不如是, 吾習而試之, 可用。’ 請招有誠更問其法, 令今之 赴京畫工傳習。”…

40) 成宗 211卷, 19年(1488 戊申 / 명 홍치(弘治) 1年) 1月 23日(戊午) 3번째기사

…畫員李季眞曾受公貿易回回靑價, 黑麻布十二匹, 而卒不買來, 令本府徵其本色, 囚家僮累及數 百名…

41) 中宗 97卷, 36年(1541 辛丑 / 명 가정(嘉靖) 20年) 12月 28日(己卯) 1번째기사

…明珀纓子及擣鍊鴉靑、回回靑等物, 無之故未得貿來, 琥珀、獨活、馬牙硝等物, 亦未得貿來。

肉豆蔲, 出於南方交址之國。 中國, 近與交址不相通, 故無此物云…

42) 光海 116卷, 9年(1617 丁巳 / 명 만력(萬曆) 45年) 6月 27日(庚申) 3번째기사

…何必用萬里外采/回回之靑, 以彩正殿之瓦, 然後可以隆上都乎? 而況時詘擧贏, 國儲虛竭, 而 爲都監者, 每以移/侈大爲事, 曾無一人出一言陳一弊以救萬分之一, 惜哉

43) 光海 127卷, 10年(1618 戊午 / 명 만력(萬曆) 46年) 閏4月 3日(辛酉) 2번째기사

…朝家宴享所用畫樽, 自經亂後, 蕩無遺在, 每欲貿靑燔造, 而絶無貿易之路。 凡遇宴禮, 不得已 假畫而用之, 事體殊甚苟簡…

44) 光海 139卷, 11年(1619 己未 / 명 만력(萬曆) 47年) 4月 17日(庚午) 1번째기사

己未四月十七日庚午以回回靑貿來事。 傳曰: “此彩色, 命下累年, 無意貿來矣, 而李弘虬盡心貿 來, 極爲可嘉, 參酌施賞

45) 인조 16년 10월 21일 (경술) 원본67책/탈초본4책

…李命雄, 以司饔院官員, 以都提調意啓曰, 嘉禮都監移缺畫樽一雙, 白磁靑畫酒甁, 預先燔造, 及 時進排事, 知委, 而得聞前例, 回回靑, 自戶曹貿送, 燔造畫樽缺云。今亦所當依前例, 燔造進排, 而停燔之後, 匠人四散, 燔具掃如。況當缺日期且迫, 勢難燔造。本院所儲推拾, 則只有缺畫樽一 雙, 大立缸一雙, 畫樽則宴享時所用, 不合於內用, 白樽則體制不齊, 且有調畫。畫大之缸, 則蓋莫 重大禮之用, 似有未盡之患, 他無辦出之路, 勢不得以白樽假畫一雙, 推移進排之意, 惶恐敢啓。傳 曰, 知道

46) 효종초년(1650년)-영조27년(1751년)

47) 현종 14년 7월 5일 (임신) 원본234책/탈초본12책

…壽興曰, 束而納之, 似是勝矣。維重曰, 磁器與誌石, 有異, 當以回回靑, 書之, 而使未曾書者, 書之則筆頭必大, 不能作字, 而寫字官李益新, 曾經累書, 善於用筆, 此則與元誌石, 亦當有間, 不 必簡於朝士, 使益新書之, 何如? 上曰, 朝士中, 無有曾寫者耶? 壽興曰, 正英, 嘗書之云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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