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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문헌고찰을 통해 조선시대 청화백자의 발생 배경에 대해 알아보고 국내 청화백자의 제작과 사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또한 조선시대 청화안료개발 개요 를 살펴보고 선행연구에 나타난 국내 청화안료에 대한 연구현황을 살펴보았다.

문헌자료를 통해 조선시대 토청개발이 시작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으 며 일부 선학들의 연구를 통해 보편적으로 토청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었고 과학적 분석을 통해 구분한 철분과 망간의 함유량과 가시적인 발색의 차이 그리고 시대적 배경을 통해 토청과 회회청을 구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국내 토청은 기존 회회청의 발색과는 다르게 어두운 부분이 검정색에 가까운 발색이 나타 난다. 이는 국내에서 채취한 청화안료가 회회청보다 철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기 때 문이다.

청화안료에 관한 연구는 많이 진행되어 있으나 보편적으로 중국에서 수입된 회회 청에 대한 연구가 중점적으로 진행되어왔고, 국내산 청화 안료인 토청에 관한 연구 는 극히 미약하다. 토청은 수입산 회회청과 구분이 어려워 많은 부분에서 엇갈린 주 장이 존재하며 절대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실존여부에 대한 의구심 또한 제기되고 있다. 최근 연구논문에 토청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대다수를 이루는 이유이 기도 하다. 현재 토청에 관한 연구는 청화백자 연구의 일면으로만 이루어지고 있으 며 절대자료가 부재하여 여러 가지 학설과 추측들이 난무한다. 하지만 토청은 국내 에서 채취된 안료로써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가지는 안료이며 이는 전통도자의 연구 에 있어 마땅히 더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청화안료에 대한 문헌을 검토해 보았을 때 중국에서 수입이 단절되고 재기되는 사 이에 청화가 사용되는데 당시 조선과 중국의 관계에 있어 우리나라는 중국의 율법을 따르고 있었다. 이런 시대상황 속에서 수출금지 품목에 속한 회회청으로 청화백자를 제작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 시기에 제작된 청화백자는 국내산 청화안료인 토청으로 제작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1986)은 국내산 토청을 사용해 청화백자를 제작한 유물로 청화백 자매조문항아리를 예로 들었다. 토청을 사용한 청화백자는 회회청이 내는 남청색과 는 다르게 부분적으로 흑갈색을 나타내는데 이 청화백자매조문항아리는 이를 가시적 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강경숙은 자신의 저서인 한국도자사의 청화백자 묘지에 관한 글에서 국내산 토청 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하여 토청으로 번조된 청화자기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 묘지의 시기는 1508년, 1568년, 1589년으로 중종때 제작되었다. 이 시기 는 조선왕조실록과 용제총화에서 회회청 무역의 어려움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기이다.

또한 호암미술관연구실 저서인 청화백자에 대하여(조선백자전2)에서도 박공묘지 (1576)의 지석이 하청 또는 토청 번조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였다. 이 또한 회회청 의 무역이 어려운 중종년간에 번조된 것이다. 지석은 묘지에 죽은 사람의 이름·생일·

사망일·세덕(世德)·사적(事蹟)·자손 등을 각자(刻字)해서 무덤 앞에 묻는 판석(板石:陶 板)으로 미리 제작할 수 없는 특성으로 편년을 구분하는데 정확한 자료가 될 수 있 다. 도자로 제작된 지석은 그 기법과 안료를 사용한 부분에서 도자사 연구에 더욱 많은 자료를 제공한다. 선행연구에서 토청 번조례로 제시한 지석에서 확인할 수 있 는 어두운 발색 또한 국내산 토청으로 번조 되었음을 뒷받침한다. 이들은 세조연간 국내산 토청으로 시험번조 했다는 문헌 내용에 부합되는 단적인 예들이다.

최근 연구 논문에서의 토청개발은 부정적인 견해가 주를 이룬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국내산 청화안료를 찾기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다는 점에서 같은 견해를 나타내 고 있으나 절대유물에 관한 학자들의 이견(異見)들로 토청연구의 방향에 혼란을 초 래한다. 최근 연구에서는 토청개발은 시도만 되었을 뿐 제작되지 않았다는 견해가 다수를 이룬다. 이는 문헌상 존재하는 청화백자의 제작기록이 없기 때문이며 확실한 편년자료만을 연구의 기준으로 삼는 현재 연구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 연구에서 확인한바와 같이 토청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시기와 가시 적인 특성 그리고 과학적 분석을 통한 구분법이 이미 널리 사용되고 알려져 있다.

또한 지석의 존재로 시기적 구분 또한 정확하여 국내산 청화안료인 토청을 사용한 청화백자가 제작이 되었음을 적극적인 자세로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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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