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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재도(文以載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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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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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송·원대(宋元代) 문학

1. 시(詩)

송대(宋代)는 중국문학의 윤리적 바탕이 되어 온 유학(儒學) 이 성리학(性理學)이라는 새로운 차원이 학문으로 발전한 시대 였다. 송대에는 공자(孔子)의 이상(理想)을 비롯하여 우주를 생성 존재케 한 기본 원리를 추구하겠다는 기백이 넘쳤고, 아 울러 불도(佛道) 특히 선종(禪宗)의 영향으로 성리(性理)의 학 풍이 일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리학의 영향은 자연 ‘문이재도(文以載道)’를 주장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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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시(說理詩)>--- 宋代의 이치를 말하는 시

「관서유감(觀書有感)」

반무(半畝)되는 방당이 한 거울 같이 열려 있는데, [半畝方塘 一鑑開]

하늘 빛 구름 그림자 함께 배회하네. [天光雲影共徘徊]

그에게, 어디서 이처럼 맑은 것을 얻었나 물으니, [問渠那得淸 如許]

원두에서 활수가 흘러옮이 있기 때문이라네. [爲有源頭活水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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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朱熹: 1130-1200)

※당시(唐詩)가 감정의 토로를 본령으로 한다면 송시(宋詩)는 설리적(說理的), 사변적(思辨的)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고, 당 시에 비해 산문적 성격이 강하며, 시풍이 평담(平淡,平澹)하다 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당시에는 뜨거운 정감(情感)이 넘쳐흐 른다면 송시에는 냉철한 이성(理性)이 흐르고 있다. 당시를 술 에 비유하고 송시를 차에 비유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전당시(全唐詩)에는 2,200명 48,000여 수가 수록되어 있고, 전송시(全宋詩)에는 9,000여 명의 40여 만수가 수록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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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고려 시인 李奎報가 당시 젊은 학자들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는 과거용 문체를 익히기에 급급하다가 일단 과거에 급제 하여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너도나도 소식(蘇軾)의 시를 배우 는 기풍을 두고, “세상의 학자들이 처음에는 과거시험에 필요 한 문체를 익히느라 풍월을 일삼을 겨를이 없다가 과거에 급 제하고 나서 시 짓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소동파 시 읽기를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에 매년 과거의 방이 나붙은 뒤에 사 람마다 금년에 또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고 여긴다” (世 之學者 初習場屋科擧之文 不暇事風月 及得科第 然後方學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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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則尤嗜讀東坡詩 故每歲牓出之後 人人以爲今年又三十東坡 出矣 <東國李相國集, 答全履之論文書>라고 하고,

조선의 대학자 김종직(金宗直)이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는 오로지 만당 시만 익혔고 고려 중엽에는 소동파 시만 배웠 다.”(羅季及麗初 專習晩唐 麗之中葉 專學東坡<靑丘風雅序>라 고 했을 만큼 소식의 시풍은 고려 중엽 이후 우리 나라 시단 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강서시파(江西詩派)의 개조(開祖) 로 송대의 시단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황정견(黃庭堅)의 시풍 은 조선 중종(中宗) 이후 우리 나라 시인들에게도 크게 추앙을 받아 이른바 해동강서시파(海東江西詩派)가 형성되기에 이르 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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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성리학의 영향 내지는 재래의 부유(腐儒)들에 대한 비 판은 그대로 송대 문학의 비평 정신을 크게 자극시켰다. 특히 시가의 황금시대라고 하는 당대(唐代)가 거의 시의 비평문학을 갖지 못하였던 데에 비하여 송대에는 시화(詩話)가 대성하여, 구양수(歐陽修)의 <<육일시화(六一詩話)>>와 진사도(陳師道)의

<<후산시화(後山詩話)>> 그리고 엄우(嚴羽)의 <<창랑시화(滄浪 詩話)>>등과 같이 실제로 시를 지었던 시인들로서 시론 및 비 평을 내세운 사람들이 많았다.

송시의 발전은 대략 4기로 나누어 볼 수 있겠는데, 제 1기는 10세기 후반 곧 북송(北宋) 초기 유미주의(唯美主義)의 경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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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인 서곤체(西崑體)가 성행하던 시기이고, 제2기는 11세기 곧 북송 중기와 후기로서 송시가 평담화·논리화·산문화의 경향 으로 발전한 시풍(詩風) 변전기이며, 제3기는 12세기 곧 북송 에서 남송으로 들어서 남송 중기에 이르기까지 강서시파(江西 詩派)를 비롯하여 송시가 전성하던 시기이고, 제4기는 13세기 곧 남송 말기 송시가 쇠퇴기를 들어선 시기이다.

제1기인 송대 초기에는 만당(晩唐)의 시풍이 그대로 계승되 어, 특히 만당의 대표적 시인이라 할 이상은(李商隱)의 감상적 이고 유미적인 시풍을 열심히 모방해 쓰고 대우(對偶)를 중시 하며 전고(典故)를 즐겨 사용하고 섬세한 기교를 숭상하였는 데, 이들의 문체를 ‘서곤체’라 하였다. ‘서곤체’라는 명칭은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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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종(眞宗) 경적(景德) 연간(1004-1007)에 양억(楊億)이 펴낸

<<서곤수창집(西崑酬唱集)>>이라는 작품집에서 유래되었다.

서곤체의 대표적인 시인은 양억·유균(劉筠)·전유연(錢惟演)을 들 수 있겠는데, 이들의 시는 내용 없는 감상과 형식적인 미 문(美文)의 극단적인 추구로 매우 난해하였고, 또 이들은 모두 조정의 중신들이어서 자연 출세를 위하여 이러한 풍의 시를 지을 수 밖에 없었겠지만, 이들이 다 현직(顯職)에 있으면서 서로 수창(酬唱)했기 때문에 그 영향이 더욱 컸고 결국 그들의 시풍이 당시의 사회를 풍미하는데 결정적인 기능을 했다.

제2기인 북송 중기에 들어서면서 매요신(梅堯臣)·소순흠(蘇舜 欽)·구양수(歐陽修)가 나타나 시의 개혁을 부르짖고 서곤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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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극력 반대함으로써 시풍을 일변시켰다. 그들은 서곤체의 농염(濃艶)한 면을 배척하여 아주 평담한 시를 썼고, 용어도 서곤체의 난삽하고 편벽된 것을 피하여 아주 쉽고 통속적인 말을 골라 썼다.

매요신(梅堯臣; 1002-1060)은 자가 성유(聖兪), 선성(宣城) 사람으로, 세칭 ‘완릉선생(宛陵先生)’이라 했다. 그의 시는 서 곤체에 반하는 평담(平澹/平淡)한 경향의 작품으로 알려졌고, 당시(唐詩)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섬세한 관찰과 서술이 산뜻한 맛을 안겨준다. 이전의 시인들이 주로 크고 깊은 정서를 중점 적으로 표현하여 독자의 감흥을 일으키려 애썼다고 한다면, 그는 분석적이고 이지적인 감각을 꾸밈없이 섬세하게 서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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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썼다.

망호루에서 六月二十七日 望湖樓醉書

검은 구름 먹물을 뒤엎는 듯 산허리 뒤덮고 黑雲飜 墨未遮山

흰 빗발 구슬이 튀듯 배 안에 들이친다. 白雨跳 珠亂入船

땅을 말며 바람 문득 불어 구름 흩뜨리고 捲地 風來忽吹散

망호루 아래 물 하늘같이 펼쳐 있다. 望湖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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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水如天

제3기인 북송 말 남송 초에 들어서면서 송대의 시단은 완전히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지배 아래 들어가 송시의 전성시대를 가져온다. 강서시파는 황정견(黃庭堅)으로 대표된다.

황정견(黃庭堅 ; 1045-1105)은 자가 노직(魯直), 호가 산곡 (山谷) 또는 부응(涪翁)이며, 강서(江西) 분녕(分寧) 사람으로, 강서시파의 대표자인데, 그가 강서 출신인 때문에 그의 시파 를 ‘강서시파’라 하였다 그는 원래 장뇌(張耒)·조보지(晁補之)·

진관(秦觀)과 함께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라 불린 소식의 문 하로서,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 문학사상 시(詩)에서 가장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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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위치를 차지했다. 곧 그는 소식과 함께 시의 새로운 일면 을 개척함으로써 송시를 완성시킨 시인이 되었던 것이다.

제4기인 남송 말기에 들어서면서 국운(國運)과 함께 시단도 빛을 잃고 만다. ‘영가사령(永嘉四靈)’으로 불리던 조사수(趙師 秀)·옹권(翁卷)·서조(徐照)·서기(徐璣)가 나와 강서시파의 폐단 을 공격하며 만당(晩唐)의 가도(賈島)·유득인(劉得仁) 등에서 보인 고담(枯淡)한 시풍을 내세웠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나타 내지 못했다.

다만 나라가 더욱 기울자 문천상(文天祥)·사고(謝翶)·왕원량 (汪元量)·임경희(林景熙)·사방득(謝枋得) 등과 같은 우국시인(憂 國詩人)들이 나와 조국의 멸망에 항거하는 시인의 의기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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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었던 것이 주목할 만하다.

2.소설(小說)

중국 소설사에 있어 송대(宋代)에는 당대(唐代)에 이어 계속 해서 전기(傳奇)·귀신지괴(鬼神志怪) 등의 문언소설(文言小說) 을 쓰는 한편 백화소설(白話小說)이 대두하여 그 토대를 잡은 일대 전환기였다.

송나라가 중국 전역을 통일하자 전국의 도서를 수집하고, 아 울러 전대 항왕(降王)의 구신(舊臣), 즉 오대(五代)의 명사(名 士)들에 대한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그들을 관각(館閣)에 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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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록(厚祿)을 주어서 <<태평어람(太平御覽)>>과 <<문원영화(文 苑英華)>> 각 1천권을 찬집케 하고, 또 한대(漢代)부터 오대까 지의 야사(野史)·전기(傳奇) 및 귀신지괴 등 각종의 소설가언 (小說家言)을 모아 내용 500권 목록10권에 이르는 방대한

<<태평광기(太平廣記)>>를 찬집케 하였다.

<<태평광기>>는 문학사상 실로 특기할 만한 집대성으로, 송 태종(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977)에 칙명으로 이방(李 昉;925-996)이 서현(徐鉉;916-991)·오숙(吳淑;947-1002) 등 12인과 함께 찬집(撰集) 감수(監修)한 것이다.

내용은 신선(神仙)·도술(道術)·이인(異人)·보응(報應)·호협(豪 俠)·초목(草木)·곤충(昆蟲) 등 92류로 분류하여 수록하였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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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채집하는 데 동원된 서적만도 345종에 달했다.

송대에는 특히 시정에서 군중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는 ‘설 화(說話)’가 현저하게 발전하였다.

송대의 설화에는 그 설화의 원고가 있었고 그 원고가 이른바

‘화본(話本)’이라는 것으로서 송대 백화소설의 기원이 된 것이 다. 송대에 설화 내지 백화 소설이 유행하게 된 원인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교의 포교(布敎) 때문이다. 당대 이후 경문(經文)이나 권선징악(勸善懲惡)적인 갖가지 고사(故事)를 평이한 백화로 일반 평민에게 강창(講唱) 또는 강설(講說)하여 보급했다.

둘째, 어록(語錄)의 영향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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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썼던 선가(禪家)와 성리학자(性理學者)들의 어록이 소위 구두어 즉 백화를 많이 발달시켰다.

셋째, 사(詞)의 영향이다. 특히 많은 사인들이 거침없이 속어 를 사용함으로써 속문학(俗文學)의 발달이 조장되었다.

넷째, 인쇄술의 발달 때문이다.

다섯째, 평민의 대두와 이민족(異民族)과의 잡거(雜居) 때문이 다.

이상의 다섯 가지를 기반으로 하여 송대에 백화문학이 더욱 발달하게 되었고, 또 백화소설을 결정적으로 발달시킨 중요하 고 직접적인 원인은 역시 설화의 유행이었다. 그리고 이 설화 는 그 내용에 따라 대략 소설(小說)·담경(談經)·강사서(講史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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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생(合生)의 4종으로 분류된다.

소설은 인정담(人情談)이나 괴담(怪談)으로서 대체로 화본(話 本)은 단편이고, 강사서는 역사담(歷史談)으로서 이를 ‘평화(平 話)’라고도 하며 대체로 그 화본은 장편이었다. 훗날 송대의 소설로부터 단편의 소설이 발달되었고, 강사서로부터 장편의 연의소설(演義小說)이 발달되었다. 물론 후세에 이르러 꼭 역 사물만이 아닌 내용의 장편으로 된 각종 장회소설(章回小說) 도 발달했으나 그 기원은 결국 송대의 백화소설에 있다고 하 겠다.

강사서로는 <<신편오대사평화(新編五代史平話)>>와 <<대송선 화유사(大宋宣和遺事)>>가 대표적인 것이다. 이밖에 담경류(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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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類)에 포함시킬 수도 있는 <<대당삼장법사취경기(大唐三藏 法師取經記)>>도 매우 중요한 작품인데, 이들은 모두 장편으 로 되어 있다.

<<대송선화유사>>는 요(堯)·순(舜)에서부터 시작하여 송 고종 (高宗)이 임안(臨安)에 정도(定都)하기까지를 편년체(編年體)로 연술(演述)한 것으로, 전·후 2집(集)으로 나뉘어 모두 10절(節) 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10절 가운데 제2·3·8·9·10절은 문언(文言)으로 쓰여 있 고 나머지는 백화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처럼 문체가 통일되 지 못한 것은 그 내용이 여러 구적(舊籍)에서 베껴 모아 이루 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4절의 내용은 송강(宋江)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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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영웅들이 양산박(梁山泊)에서 취의(聚議)한 것을 다루었 는데, 이는 훗날 <<수호전(水滸傳)>>의 저본(底本)이 되었다.

<<대당삼장법사취경기>>는 당나라 삼장법사가 서방으로 불경 (佛經)을 가지러 가는 도중에 요마(妖魔)들을 만나 일어나는 여러 가지 신괴한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모두 3권 17장으로 되어 있다. 화본에서 창작으로 넘어가는 과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훗날 <<서유기(西遊記)>>의 저본이 되었 다.

송대 화본의 체재를 살펴보면, 소설은 편마다 독립된 단편으 로 되어 있고 본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모두(冒頭)에 개장 (開場)을 위한 인자(引子)가 있다. 이 인자가 사(詞)로 되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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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러한 것을 ‘사화(詞話)’라 하고, <<대당삼장법사취경기>>

처럼 시로 되어 있으며 ‘시화(詩話)’라고 하여 이 작품을 <<대 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라고도 한다. 송대 설화 인(說話人)들은 이러한 것을 ‘득승두회(得勝頭廻)’라고 불렀는 데, 본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노래나 다른 짧은 이야기로써 청중을 모으면서 흥미를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본 이야기를 시작할 때 ‘화설(話說)’·‘각설(却說)’·‘차설(且說)’

하는 상투적인 말을 쓰고, 또 이야기가 절정에 다달았을 때나 장면이 바뀔 때 일단 이야기를 매듭지으면서 “뒷 일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으면 다음 회의 이야기를 들어라(欲知後事如 何, 且聽下回分解.).” 라는 말을 써서 더욱 청중의 호기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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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하곤 한다. 이러한 상투적인 용어는 훗날의 장회소설(章回 小說)에 까지 사용되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3. 원곡(元曲)

‘원곡(元曲)’이란 원대(元代)에 발생하여 원대에 성행한 문학 이어서 흔히 이렇게 부른다. 이 원곡에는 산곡(散曲)과 희곡 (戲曲) 곧 잡극(雜劇)의 두 가지가 있는데, 산곡은 송사(宋詞) 를 이어 발달했던 원대의 새로운 시가이고, 잡극은 원대에 비 로소 발달하게 된 중국의 고극(古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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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곡과 잡극은 음악의 측면에서 볼 적에는 같은 성질의 것이 나, 문학의 측면에서 볼 적에는 그 표현 양식이나 구성이 근 본적으로 다르며, 그 발생 과정도 전혀 다르다. 산곡이 국풍 (國風)·악부(樂府)·사(詞)를 계승한 순수한 민간 가요 계통의 시가라 한다면, 잡극은 고대의 가무(歌舞)와 가무회(歌舞戱)로 부터 발달한 연극(演劇)의 대본(臺本)인 것이다.

1) 산곡(散曲)

송대에 들어와 사(詞)가 문인들에 의하여 창작되기 시작하면 서 그 음률과 수사(修辭)가 더욱 세련되고 내용도 풍부해짐에 따라 사의 격률(格律)이 매우 엄격해졌다. 때문에 사는 민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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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라는 본래의 성격을 벗어나 민중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종 의 전문적인 학문으로 변해버렸고, 문인들조차도 자신의 창의 성이나 개성을 살리기 어려운 극히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말았 다. 이런 상황 아래 새로운 시가에 대한 갈망으로 해서 대두 된 것이 바로 산곡(散曲)이다.

2)잡극(雜劇)

원대에는 원곡 즉 산곡과 잡극 가운데서도 잡극이 특히 성행 하여 원대의 대표적인 문학이라면 바로 이 잡극을 지칭하게 된다.

작가 가운데 가장 이름이 난 사람은, 원대 전기의 작가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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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원곡 사대가(元曲四大家)’로 알려진 관한경(關漢卿)·왕 실보(王實甫)·백박(白樸)·마치원(馬致遠)이 있고, 또 후기의 정 광조(鄭光祖)와 교길(喬吉)을 합쳐 ‘원곡육대가(元曲六大家)’라 고도 하는데 후기의 작가들은 질적·양적으로 전기의 작가들을 따르지 못한다.

왕실보(王實甫;1234 전후)는 이름이 덕신(德信), 대도(大都) 사람이다. 실보는 자이나, 원곡 작가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그 역시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고 예부터 으레 그의 자만 불 리어왔다. 현재 그 완본이 전하는 것은 <서상기(崔鶯鶯待月西 廂記)>·<여춘당(四丞相歌舞麗春堂)>·<파요기(呂蒙正風雪破窰 記)>의 3종뿐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서상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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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이는 당(唐) 원진(元稹)의 전기소설(傳奇小說)<앵앵전(鶯鶯 傳)>의 이야기를 잡극으로 개편한 것이다.

마치원(馬致遠;1251 전후)은 호가 동리(東籬), 대도(大都) 사 람이다. 현재는 <한궁추(破幽夢孤雁漢宮秋)>·<황량몽(邯鄲道省 悟黃梁夢)>·<청삼루(江州司馬靑衫樓)> 등 9종이 전한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귀족 생활이나 신선(神仙) 이야기에서 즐겨 제 재를 취하여 몽고족 지배하에 있는 한족(漢族) 지식인의 비분 (悲憤)과 실의(失意)를 암암리에 나타내었는데, 특히 그의 대 표작으로 꼽히는 <한궁추(漢宮秋)>도 한(漢) 원제(元帝)의 사 랑을 받으면서도 흉노(匈奴) 선우(單于)에게 시집가는 왕소군 (王昭君)의 이야기를 씀으로써 이민족 지배에 대한 항거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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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양적인 면에서도 가장 많은 산곡 작품을 남긴 작가이다.

정광조(鄭光祖 ; 1294 전후)는 자가 덕휘(德輝), 산서(山西) 평양(平陽)사람이다. 현재는 <한림풍월(㑳梅香騙翰林風月)>·

<천녀이혼(迷靑瑣倩女離魂)> 등 8종이 전한다. 그는 화려한 문사로 유약한 느낌을 지닌 작품을 쓴 왕실보(王實甫)계열의 영향을 받은 작가로서, 그의 작품은 내용이나 문장을 보면

<서상기>의 직계라 할 수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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