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지 석*1)
Ⅰ. 들어가면서
Ⅱ. 보편과 개별
Ⅲ. 형식과 내용, 그리고 매체
Ⅳ. 린네와 패러데이
Ⅴ. 나오면서
Ⅰ. 들어가면서
‘양식’은 미술사 서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시간적 자리매김(dating)’
과 ‘공간적 자리매김(placing)’으로 시작해서 상이한 시간, 상이한 공간에 산재해 있는 미술작품들을 연속성을 갖는 ‘양식’에 포괄하여 규정하고, 이를 다시 ‘시대정 신’이나 ‘계급의식’과 관련하여 해석하는 미술사의 전형적인 서술 모델1)은 ‘양식’
개념의 존재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빈켈만(Johan Joachim Winckelmann)이 근 대미술사학의 정초자로 인정받는 것도 그가 ‘양식’ 개념을 미술사에 적용한 최초 의 논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요한 개념인 까닭에 ‘양식’에 대한 담론과 논쟁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그 폭과 깊이 역시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요컨대 ‘양식’은 미술사 전반에 걸쳐 가장 복잡하고 애매한, 그리고 어쩌면 가장 높은 지위를 누
* 단국대학교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연구교수
이 논문은 한국미학예술학회 2011년 가을 정기학술대회 기획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 정보완하여 게재한 것임.
1) Karl Mannheim, Ideology and Utopia, trans., Louis Wirth & Edward Shils,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72, p. 276.
리는 개념이다. 하지만 오늘날 새로운 세대의 미술사가․미술비평가들은 양식 개 념을 낡은 개념의 대표로 받아들여 자신의 미술사 서술에서 회피하거나 다른 것 으로 대체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컨대 오늘날 미술사가․미술비평가들은 현대미 술사 서술의 범주로 ‘양식’ 개념 대신에 ‘운동(movement)’이나 ‘유파(school)’(Sam Hunter, John Jacobus & Daniel Wheeler, 1976), ‘작가’(Jonathan Fineberg, 1995),
‘연도(年度)’(Hal Foster, Rosalind Krauss, etc. 2004)2)를 전면에 내세우는 경향을 보인다.
현대 및 동시대 미술사 서술이 이렇듯 ‘양식’ 개념과 거리를 두는 현상을 어 떻게 이해해야 할까? ‘양식’은 현대미술 서술에 부적합한 낡은 개념에 불과한가?
이 글은 이러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일단 우리는 ‘양식’ 개념이 부정적으로 받아들 여지게 된 역사적 문맥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양식’ 개념에는 지 금 우리가 간단히 밀쳐버리기 힘든 유의미한 가치들이 내재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특히 주목할 논의는 ‘양식’ 개념으로 대표되는 고전 적․전통적 미술사 서술의 지향이 예전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 재의 상황에서 전이(transition)의 방식으로 이 개념을 되살리려는 시도들이다. 검 토과정에서 양식은 그저 낡은 개념이 아니라 현대예술의 의미심장한 양태를 지칭 하는 중요한 학적․비평적 용어로 재인식될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기대다.
Ⅱ. 보편과 개별
미술사의 역사에서 양식은 빈번히 ‘법칙’이나 ‘규칙’, ‘관습’과 같이 보편적인 형식이나 공통된 경향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됐다. 하우저(Arnold Hauser)의 표현을 빌면, 양식은 ‘구체적이면서 동시에 상호 분리된 수많은 요소들로 이루어 진 전체를 관념적으로 통일시킨 것’3)이다. 양식 개념이 갖는 이러한 보편적 성격 때문에, 하우저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미술사 일반의 근본문제를 구성할 수 있고’
2) Sam Hunter, John Jacobus & Daniel Wheeler, Modern art from post-impressionism to the present, N.Y; H. N. Abrams, 1976, Jonathan Fineberg., Art since 1940: strategies of being, N.Y.: Prentice Hall, 1995; Hal Foster, Rosalind Krauss, etc., Art since 1900:
modernism, antimodernism, postmodernism, N.Y: Thames & Hudson, 2004.
3) Arnold Hauser, 황지우 역, 예술사의 철학, 돌베게, 1983, p. 216.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양식은 ‘미술사에 필수불가결한 기초 개념’4)이라고 주장한 다. 즉 우리는 양식 개념을 받아들임으로써 ‘개별 예술작품을 비교하고 그것들의 역사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판단기준을 갖게’5) 된다. 어떤 의미에서 미술사는 양식 개념에 의지해서만 비로소 자신의 보편성 내지는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고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될 것이다. 소위 ‘인명 없는 미술사’를 내세운 하인리 히 뵐플린(Heinrich Wölfflin)이 미술사의 영역에서 누리는 높은 지위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미술사는 하우저의 말대로
‘작품의 구체적인 특성을 놓치게 되는 댓가’6)를 치러야 한다. 뵐플린에 대한 포스 (H. Voss)의 다음과 같은 비판, 곧 뵐플린式 ‘인명 없는 미술사’가 예술의 주체인 예술가 자신을 배제한다는 비판도 생각해 볼 일이다.7) 다시 하우저를 인용하면, 양식 개념은 개인적인 자유냐, 초개인적인 필연성이냐는 두 입장 사이에서 요동 하는 문제적 개념이다. 전체, 규칙, 집단, 보편 등 초개인적인 필연성을 강조하는 곳에서 ‘양식’ 개념은 존중될 것이지만 개인, 차이, 우연성이 강조되는 곳에서 그 것은 폄훼될 것이다. 물론 하우저처럼 ‘어느 한편을 신비화하거나 대부분의 경우 처럼 양자 모두를 신비화하지 않고 이 양자를 적절하게 취급하려고 노력하는 태 도’8)를 요구할 수도 있다.9)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이 1908년에 쓴 양식의 문제 를 검토하는 것 이 논의에 보탬이 될 것이다. 짐멜에 따르면 개별성이 부각된 작품과 보편성이 부각된 작품은 각자의 존재 의의를 갖는다. 즉 그것들은 다른 삶의 원칙을 대변 한다. 먼저 예술가적 인격의 신비로운 절대적 통일성과 오로지 자신만을 대변하 는 유일무이성을 원동력으로 해서 생긴 예술작품들은 인격의 자립성을 대변할 것 이다.10) 반면 작품에 담긴 보편적인 것, 전형적인 것을 캐묻게 되는 양식적인 작 품들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감정의 층들을 넘어서 ‘보편적인 삶의 법칙 아래 놓인
4) ibid., p. 216.
5) ibid., p. 206.
6) ibid., p. 206.
7) 이한순, 하인리히 뵐플린의 미술사의 기초개념 , 미술사학 제8집(1996), p. 114.
8) Arnold Hauser, op. cit.. p. 215.
9) 양식(보편성)에 매몰된 개인(개별성)을 구원한다는 차원에서 바사리(G. Vasari)식 미술가열 전으로 회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을 하우저가 요청한 ‘역 사적 필연성과 개인의 자유 양자를 적절하게 취급하려는 시도’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10) Georg Simmel, 김덕영, 윤미애 역,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새물결, 2005, p. 124.
광범위한 감정의 범주들’을 지향한다. 짐멜에 따르면 전자와 후자는 상하 관계로 파악할 수 없다. 그가 보기에 이 양자는 인간에 의한 형상화의 두 극단적인 가능 성들로 모두 중요하다. 상호배척이 아니라 상호협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후자(양식)는 ‘주관주의와 개체성이 전복성에 이를 정도로 극단화’된 현대 사회에 서 지나치게 개인화된 삶에 대해, 일종의 차분한 분위기와 전형적인 법칙성을 회 복시켜준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의의를 갖는다.11) 이러한 짐멜의 논의에서 주목할 점은 그가 말하는 ‘양식적 보편’이 ‘획일적인 것’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전적으로 단 한가지의 역사적 양식을 따르는 사물들로 이루어진 환경은 곧 그 자체가 완결 된 통일체로 집결되면서 그 안에 사는 개인들을 그로부터 배제시키는’12) 까닭이 다. 그래서 짐멜은 다양한 양식들을 자기 방식으로 조합해 새로운(개성적인) 전체 상을 창출하는 개인의 역량을 강조한다.
그러나 만약 개인이 다양한 양식을 지닌 물건들로 집안을 자신의 취향에 따라 꾸미게 되면 전혀 사정이 달라진다. 이 경우 이 물건 가운데 어디에도 있지 않지만 그것들이 조합되는 특수한 방식을 통해 새로운 중심이 드러난 다. 이러한 중심은 일종의 주관적인 통일체로서 그 안에서는 물건들 안에 침투되고 동화된 개인의 영혼을 감지할 수 있다. … 개개의 물건은 양식, 즉 초개인적인 형식법칙에서 나오는 행복감을 풍기고, 이들 물건의 조합에 서는 하나의 새로운 전체상이 형성된다. 그런데 이러한 전체상에서 나오는 총합과 총체적인 형식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성격을 갖게 되고 특별한 분위 기를 지닌 개인적 인격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13)
짐멜의 논의는 개별/보편 문제와 관련하여 양식의 문제를 다루는 하나의 대 안이 될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개성을 구가하는 개인의 예술을 보편적인 ‘양 식’과 분리시켜 이해하려는 태도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양식을 회화, 조각의 차원 이 아니라 건축이나 공예, 디자인의 차원에서 논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이 자신의 양식론을 공예(후기로마시대의 공예)에 대한 논의를 통해 발전시킨 전례를 떠올리게 한다. 즉 양식 개념은 (특히 근대)회화나 조각처
11) ibid., p. 128.
12) ibid., p. 127.
13) ibid., p. 127.
럼 개인의 창조성, 개성이 부각되는 영역에서보다는 건축이나 공예, 디자인에서처 럼 익명성, 집단성이 보다 강조되는 영역에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여러 예술 운동(내지는 사 조)들이 ‘새로운 양식’의 기치 아래 예술과 공예(건축)의 적절한 관계 정립에 나선 것(예컨대 Art&Craft Movement, Art Nouveau, De Stijl, Jugendstil, 그리고 Bauhaus)은 보편과 개별의 간극을 메우려는 예술적 실천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짐멜의 논의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가 양식을 ‘주관주의와 개체성이 전복성에 이를 정도로 극단화’된 현대 사회의 문제―우리는 지금 그것을 물화 (reification)라고 부른다―를 극복할 대안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 에서 본다면 양식은 학문적 관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윤리적 실천의 문제와 연관 된 것으로 부각될 것이다. 즉 양식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회복할 대상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뤼시엥 골드만(Lucien Goldmann)의 사회학적 시각을 참조할 수 있다. 홍성호에 따르면 ‘세계관’ 개념에 근거하여 사회집단을 진정한 예술창작의 주체로 보았던 골드만은 1960년을 전후로 세계관이나 가능의식 같은 집단적, 초 개인적 개념들에 회의적인 입장으로 돌아선다. 본격화된 자본주의의 거부할 수 없는 사회현상으로서 사물화가 집단의식의 소멸을 초래하고, 이에 따라 예술작품 은 집단의식과 개인의식의 접점이라는 예외적 지위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작품의 내재적 통일성이나 특정한 세계관에의 부합여부에 대한 판단은 불필요하 게 됐다는 것이 이 시기 골드만의 생각이다.14) 이러한 현실 인식은 뒷날 ‘예외적 개인’으로서의 작가에 대한 요청으로 이어진다. 이 예외적 개인이란 ‘자신의 개인 적 감수성을 통해 특정한 사회집단의 세계관을 되살려놓은 존재’로 이 창조적인 개인의 개입을 통해 ‘집단은 비로소 자기 스스로의 열망을 느낄 수 있을 것’이 다.15) 이는 조직화된 후기자본주의사회를 지양케 하는 새로운 노동계급의 잠재적 역량을 발견하고 고무하는 일과 연관된다.16) 이 시기 골드만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물화가 만연한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양식은 관찰될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 해 관철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학문적 치환이 아니라 양식 의 창출을 통한 물화(소외)의 극복, 사회변혁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다.17) 14) 홍성호, 문학사회학, 골드만과 그 이후, 문학과 지성사, 1995, p. 100.
15) ibid., p. 167.
16) ibid., p. 135.
17) ibid., pp. 135-136.
양식에 대한 이 같은 실천적 이해를 대변하는 논자가 바로 딕 헵디지(Dick Hebdige)다. 그는 하위문화: 스타일의 의미(1979)에서 특이하고 요란하며 반항 적으로 보이는 청년 세대 하위문화의 양식들―이를테면 스킨헤드족의 룸펜 프롤 레타리아적 스타일, 펑크족의 흑인취향적 스타일―을, 상실한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한 시도 내지는 가족․사회적 억압에 대한 저항의 방식으로 본다.
펑크의 미학은 글램록에 함축되어 있는 모순을 폭로하려는 시도로 읽혀질 수 있다. 가령 노동계급성, 즉 펑크의 더러움과 세속성은 글램록의 슈퍼스 타들의 오만함, 우아함, 그리고 장황함과 직접적으로 반대된다 … 펑크는 백인룸펜 청년의 홀대받는 소수 구성원들을 대변하지만, 그것은 전형적으로 글램이나 글리터 록의 뽐내는 언어 속에서 그렇게 했다. 즉 노동계급성을 은유적으로 체인과 움푹 꺼진 뺨, 더러운 의상(얼룩진 자켓과 속이 비치는 블라우스)과 거칠고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투로 표현했다.18)
헵디지에 따르면 하위문화의 양식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대와 경험된 모순들을 에둘러 표상된다. 곧 그것은 최종심급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과 종속적 위치와 이류 인생을 선고받은 이들 사이의 긴장을 나타낸다.19) 이러한 긴장은 장 서두에서 언급한 보편/개별 간 대립의 사회적 이면을 나타낼 것이다. 그리고 이로 부터 우리는 처음에 순전히 학문적 관심에서 미술사가(예술학자)들이 끌어들인
‘양식’ 개념이 좀 더 최근에 윤리적(실천적) 문제와 연루된 현장의 비평 용어로 전화되는 양상을 확인하게 된다.
Ⅲ. 형식과 내용, 그리고 매체
여기서 잠시 ‘style’이라는 단어가 미술사에서 뿐만 아니라 수사학 분야에서 도 중요한 단어라는 점을 상기해보기로 하자.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style’이라 는 개념은 미술사가 수사학에서 가져온 것이다.20) 수사학의 영역에서 ‘style’은 우 18) Dick Hebdige, 이동연 역, 하위문화: 스타일의 의미, 현실문화연구, 1998, p. 91.
19) ibid., pp. 178-179 참조.
20) 박정기, 알로이스 리글의 ‘양식사로서의 미술사’ , 미학예술학연구 제16집(2002), 한국미
리말로 통상 ‘문체’라고 번역한다. 문체란 무엇인가? 신수사학자인 장 코앙(Jean Cohen)에 따르면 ‘문체(style)는 표준(norm)과의 관련에서의 일탈(deviation)’이다.
따라서 문체를 문제 삼는다는 것은 먼저 ‘무엇으로부터의 일탈인가’를 묻고 ‘그 일 탈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일이 된다.21) 리쾨르(Paul Ricoeur)에 따 르면 그것은 ‘차이(일탈)가 감지되고 인식되며, 심지어는 측정되는 ‘수사학적 영도 (rhetoric degree zero)’’를 해명하는 일이 된다.22) 하지만 이 영도는 쉽사리 규정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일탈의 인식은 대개 어느 하나를 표준으로 삼아 다른 하나를 그에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예컨대 키케로 시대 에 아틱시스트(Atticists)라 칭했던 순수주의자들은 통상 용법(common usage)을 따라, 분명하고 단순한 절제된 문체를 추구했다. 반면 키케로는 이러한 아틱 문체 (Attic Style)가 적합한 경우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좀 더 장엄하고 인위적인 장 식적인 문체가 적합할 수도 있음을 역설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데코룸 원칙 (doctrine of decorum: 적절성 원칙)이다.23) 수사학에서 ‘style(문체)’의 이러한 용 례는 이 단어가 형식(form)의 문제와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반증한다. 이는 수사 학에서 그 개념을 가져다 쓴 미술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미술사에서 양식 (style)과 형식(form)은 빈번히 유사한 개념으로 인식된다. 실제로 뵐플린은 양식 의 문제를 ‘시각적 틀’, ‘지각방식’ 내지는 ‘재현형식’의 규명으로 인식했고,24) 잰슨 은 시각예술에서 양식이란 “작품의 형식을 이루는 요소들을 결합하는 방법을 가 리킨다”고 주장했다.25) 이러한 이유로 통상적인 미술사․비평 서술에서 형식과 양식, 형식주의와 양식주의는 (거의) 같은 의미로 통용된다.
문제는 이러한 사정 때문에 ‘양식’ 개념이 형식/내용의 이분법적 구도와 양 분 대립에 관여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학예술학회, p. 68.
21) Paul Ricoeur, The Rule of Metaphor: Multi-disciplinary studies of the creation of meaning in language, trans., Robert Czerny, Kathleen McLaughlin & John Costello, sj., London; Routledge, 1994, p. 136.
22) ibid., p. 137.
23) E. H. Gombrich, The Sense of Order: A Study in the psychology of decorative art, London: Phaidon Press, 1994, pp. 18-19. 참조.
24) Heinrich Wölfflin, 박지형 역, 미술사의 기초개념: 근세미술에 있어서의 양식발전의 문제
, 시공사, 1994, pp. 30-31.
25) H. W. Janson & A. F. Janson, 최기득 역, 서양미술사, 미진사, 2001, p. 7.
논의를 참조할 수 있다. 손택에 따르면 ‘스타일26) 대 내용’이라는 이분법은 비평 에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법에서 스타일이란 ‘장 식이요 부속품인 것’으로 부정적인 함의를 갖는다.27) 예를 들면 우리 비평에서도 흔히 만나게 되는 다음과 같은 (작품에 대한) 비난, 곧 ‘내용은 빈곤하고 스타일 만 강조된 작품’이라는 비난에는 스타일에 대한 반감이 내재되어 있다. 손택에 따 르면 이러한 스타일에 대한 반감은 형식과 내용이 대립된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하지만 손택이 보기에 그것은 얄팍한 이분법에 지나지 않는다. 내용이라는 알맹 이 없는 추방당한 망령이 맴돌면서 ‘형식’을 알맹이 없이 시비만 거는 이로운 허 울로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28) 그녀에 따르면 형식(그리고 스타일)은 내용/형식 의 이분 대립이 함의하는 그 이상의 것이다. 예컨대 손택은 형식의 중요한 기능 이 ‘정신 활동의 내용을 망각에서 보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코울리지와 발레 리를 인용하면서 형식(그리고 스타일)은 감각에 흔적을 남기는 방법이요, 감각에 직접적으로 남은 인상과 기억을 중재하는 수단이라는 점을 강조한다.29) ‘모든 스 타일이 반복이나 과잉 원칙에 의존하는 이유, 그리고 그런 원칙을 적용해 모든 스타일을 분석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기억 기능’이다.
한 작품이 어떻게 반복되는지 파악되지 않는다면, 그 작품은 그야말로 지각 되지 않으며 이해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머스 커닝엄의 <겨울가지>
나 찰스 워로닌의 실내 협주곡, 버로우즈의 <벌거벗은 점심>이나 애드 라 인하트가 그린 ‘검은색’ 그림을 감상하면서 관객이나 독자가 그 ‘내용’이 아 니라 변화와 반복의 원칙(또한 그 균형)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이 작품들은 지루하거나 흉물스럽거나 혼란스러울 수밖에, 아니면 셋 다 될 수밖에 없 다.30)
26) 손택에 한하여 잠시 이 단어를 스타일로 표기하기로 한다. 우리가 문제 삼는 글에서 손택 은 수사학적 의미의 ‘style’과 미술사적 의미의 ‘style’을 별다른 구별 없이 쓰고 있기 때문 에 그것을 ‘양식’으로도 ‘문체’로도 번역하기 난감하기 때문이다. ‘style’ 외에 수사학과 미 술사에서 통용되는 비중 있는 단어로 ‘figure’가 있다, 전자에서는 그것을 ‘문체’로 후자에 서는 그것을 ‘형상(형태)’으로 번역한다.
27) Susan Sontag, 이민아 역, 스타일에 대해 , 해석에 반대한다, 도서출판 이후, 2003, pp.
36-37.
28) ibid., p. 60.
29) ibid., pp. 64-65.
30) ibid., pp. 65-66.
여기서 더 나아가 손택은 스타일이 인식론적 결정, 즉 우리가 무엇을 어떻 게 인지할 것인가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즉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서) 일상적인 짧은 어휘를 선택한다. 그 어휘들을 한데 묶어 끊임없이 반복한다, 극도로 느슨한 구문을 구사한다…” 등의 결정은 우리의 주위를 무언가에 집중시 킴으로써 주의를 좁히는 행위 내지는 우리에게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행위 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스타일은 기피의 기술일 수도 있을 것이 다. 즉 침묵은 예술작품의 가장 효과적인 스타일일 수 있다.31) 이러한 손택의 주 장은 미술사에 있어서는 리글과 뵐플린의 ‘양식주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콘라드 피들러(Conrad Fiedler)의 주장을 상기시킨다. 그는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눈에 의한 지각 과정을 가시적인 표현을 향해 독립적으로 발전시키는 능력에 있 고’, 예술 활동이란 ‘시각표상을 능동적으로 형성하고 발전시키려는 중요한 활동’
이라고 주장하면서 (시)형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형식(양 식) 개념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논자에게 중요한 것은 형식/내용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왜곡된 형식(양식)의 본래적 의의, 즉 그 지각, 인지적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에르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의 영화 양식론을 다루 는 것이 설득력을 얻는 방법일 것이다. 그것은 손택이 우리 시대 최상의 비평 가 운데 하나로 꼽은 영화에서 양식과 매체 (1934)라는 글이다. 여기서 파노프스키 는 오로지 영화만이(우리가 그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지 간에), 동시대 문명에 지 배적인 유물론적 해석을 정당하게 다뤘다고 평가한다.32) 그가 보기에 과거 문학, 회화, 조각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관념론적 개념을 확증하는 것이었다. 즉 그것들은 항상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대상들이 아니라 형태 없는 재료에 투사될 관념에서 시작했다. 즉 문학과 회화, 조각은 위에서 아래로 이동했다. 반면에 영 화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 경우다. 즉 그것은 물질 사물과 사람을 조직하여 구
31) ibid., p. 68.; 시인 김수영은 일본어로 쓴 시작(詩作) 노트에서 손택의 스타일론을 한마디로
“Style is Soul”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그는 손택이 싫어졌고 잊어버렸노라고 말하지 만, 실은 이 글 전체에서 이 시인은 (손택의 관점에서) 시인이 언어에 밀착하는 문제, 침묵 하는 문제에 대해 사색한다.; 김수영, 시작 노우트 6 , 김수영 전집 2, 민음사, 1982, pp.
301-303.
32) Erwin Panofsky, “Style and the Medium in the Motion Pictures”, in: Three Essays on Style, Cambridge: MIT Press, 1997, p. 122.
성을 만들고 양식을 부여받고 환상적, 상징적으로 될 수 있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예술가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해석이 아니라 물질적 사물의 현실적 조작 과 기록 기계(recording machinery)였다.33) 이러한 견해는 다음과 같은 인식에서 비롯된다. 즉 파노프스키가 보기에 영화라는 새로운 예술의 발명과 점진적 완성 의 기초가 된 것은 특별한 주제에 대한 객관적 관심도, 주제의 형식적 제시에 대 한 미적 관심도 아니고 ‘그것이 무엇이든 단지 사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대한 순전한 기쁨’이었다. 그래서 초기 영화가 몰두한 것은―우리가 쉽게 그렇다고 예측하는 것처럼―연극을 모방하는 일이 아니라 그림을 움직이게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화가 ‘screenplay’가 아니라 ‘moving-pictures’(그 리고 간단히 줄여 pictures)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경위다.34) 파노프스키가 보기에 훗날 극영화가 발전한 이후에도 영화의 진정한 발전을 이끈 것은 문학적 가치들 의 인위적 주입이 아니라 새로운 매체의 독자적이고 특수한 가능성의 탐색이었다.
이를테면 변형, 사라짐, 슬로우모션, 패스트모션역전, 카메라의 초점, 커팅, 편집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정적 존재(stationary existence)라는 개념이 완벽하게 사라 진다. 집, 피아노, 나무, 또는 알람시계 모든 것들이 움직임, 표정, 그리고 분절음을 낼 수 있는 유기적 능력을 갖는다. 궁극적으로 버스터 키튼의
<제너럴>이나 <나이아가라>에서 옛날 철도엔진이 그랬던 것처럼 표준적 인 ‘사실적’ 영화들에서조차 역동화시킬 수 있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심지 어는 비활성의 사물마저도 주도적인 캐릭터의 역할을 할 수 있다.35)
파노프스키에 따르면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는 자신이 처한 특수한 조건에 맞게 자신만의 양식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영화는 비양식화된 현실 (unstylized reality)을 조작하여 양식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 면 <칼리가리박사의 밀실>에서처럼 예술적으로 선양식화된(prestylized) 현실을 영화에 덧씌우는 일은 퇴행적이거나 무용한 일이 될 것이다.36)
33) ibid., p. 122.
34) ibid., p. 95.
35) ibid., p. 108.
36) ibid., pp. 122-123.
이상에서 살펴본 바, 손택과 파노프스키의 주장은 내용/스타일의 이분법적 틀에서 내용을 우위에 두고 스타일을 부차적인 것, 또는 해로운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이 큰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 또한 이들의 논의는 양식과 밀접히 연관된 형식 또는 매체 개념에 대한 새롭고 진전된 이해에 따라, 양식 개념도 보다 새롭고 진보적인 함의를 갖는 용어로 전환될 가능성을 암시하 고 있다.
Ⅳ. 린네와 패러데이
이제 양식 개념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또 다른 문맥을 되짚어 보기 로 하자. 다음과 같은 문제적 기술에 대한 검토에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 다.
유명한 관촉사 미륵, 대조사 석조 미륵, 안동 이천동 석불 등은 이제 거대 한 석재를 다루는 능력을 상실한데서 오는 무계획, 체념적인 작품들이다.
특히 은진미륵의 경우, 허리 위와 아래를 각각 별개의 돌로 만들어 높이 18m나 되는 거대한 불상을 세웠다는 것은 큰 공로이지만, 비례가 맞지 않 는 두부(頭部)와 신부(身部), 과장된 얼굴과 지나치게 좁은 어깨의 폭이 보 여주는 부조화 등은 이 작품을 균형 잡힌 가작으로 보기 어렵게 한다. 석굴 암의 위대하고 명예로운 전통은 이제 은진미륵에서 종착역에 다다른 것이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37)
인용문은 지금 고전으로 대우받는 한국미술사 저서에서 가져온 것이다. 여 기서 저자들은 석굴암과 은진미륵의 비교 서술에 빈켈만에서 유래한 발생-성장- 쇠퇴의 양식 전개 도식을 적용하고 있다. 이것은 양식의 전개 과정을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시드는’ 식물의 성장 모델에 빗대어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설명 방식에서 꽃이 피는 시기로 상정된 석굴암 불상에 비해 꽃이 시드는 시기로 상정 된 관촉사 미륵상은 폄훼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방식은 한 번 채택된 이후 오랜 37) 김원룡, 안휘준, 한국미술의 역사, 시공사, 2003, p. 383.
기간 미술사 서술의 지배적인 접근방식으로 군림했다. 미술사가들이 부지불식간 에 ‘탄생(birth)’이나 ‘만개(flowering)’, ‘성숙(maturity)’ 같은 단어들을 채택하여 자 신의 대상을 기술할 때, 그는 ‘발생-성장-쇠퇴’라는 식물학적 은유의 모델을 따르 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전성기’, ‘쇠퇴기’ 개념, 또는 식물 은유 모델에 따른 미술사 서술은 단선적일 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 특정 미술 작품을 다른 것들에 비해 배 타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강요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즉 이는 다성(多聲), 다치(多 値)를 추구하는 논자의 입장에서 볼 때 간단히 받아들이기 힘든 서술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오랜 기간 양식사로서의 미술사 서술에서 중시된 식물 은유 모 델은 ‘양식’ 개념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중요한 계기 가운데 하나다.
물론 빈켈만에서 유래한 발생-성장-쇠퇴의 양식사 서술은 학문으로서 미술 사 성립기에 이미 거부됐다. 예컨대 뵐플린의 주장에 따르면 ‘15세기의 고전적 미 술과 16세기의 바로크 미술은 가치라는 측면에서는 동등하다고 할 수 있으며’, ‘바 로크는 고전적인 것의 몰락도 고양도 아닌 전반적으로 아예 다른 미술’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장미덩굴은 꽃이 필 때 절정을 이루고 사과나무는 열매가 열릴 때 절정을 이룬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자의적인가!”38) 리글이라면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차이를 예술의욕의 변화(차이)로 이해할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식으 로 말이다.
15~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은 인간 신체의 모든 부분이 하나의 의 지 충동을 따르도록 했다. 또한 이 그림들에서 그림 속 모든 인물들은 하나 의 단일 행위에 포함되어 있다. 이 인물들은 먼저 자신이 포함된 소집단에, 그 다음으로는 주된 사건에 종속되어 있다. 여기서 모든 요소들은 상호 연 관 관계를 맺고 있으며, 통일성을 저해하는 것들은 배격되었다. 하지만 동 시대 북구 미술은 그와 다르다. 여기서 종속은 존재하지 않으며, 개별 형상 들은 고립되어 동등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 15세기 네덜란드 회화에는 종속시키는 행위 대신에 동등한 주목이 들어선다. 이것이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와 그의 계승자들에 의해 지속된 네델란드 초상화의 원칙이다.
이 모든 초상화가 드러내는 것은 권위(grandeur)가 아니라, 감정들 (emotions)이다.39)
38) Heinrich Wölfflin, op. cit., p. 31.
뵐플린과 리글은 다치(多値)의 견지에서 바로크를 고전적인 것의 몰락으로 보던 종래의 견해를 반박한다. 하우저의 표현을 빌면 이러한 거부는 ‘그 전체가 너무나 급격한 변화를 겪은 탓으로, 하나의 고정된 시대의 양식적 판단 기준을 믿을 수 없었던 시대의 표현’40)이다. 하지만 뵐플린과 리글 역시 ‘양식’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해명하는 가운데 미술의 역사에 부드럽게 이어지는 인과적 내러티브 를 부여하고자 하는 역사적 욕망에 이끌리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크라우스의 비판, 곧 ‘새로운 것을 과거의 형태들로부터 점차 진화되어 온 것으로 보는… 새롭고 다른 것에 작용해서 새로움을 없애고 차이를 완화시키는 접근’41) 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여전히 양식 개념을 간직하면서 크 라우스가 요구하는 새로운 미술사, 곧 ‘결정적 단절을 수용하고 논리적 구성의 관 점에서 역사의 과정을 바라볼’ 가능성은 있는가,
1960년대~1970년대에 활동한 미술사가 조지 큐블러(George Kubler)는 양식 변동에 관한 식물 모델(은유)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리글과 뵐플린을 계승한다. 하 지만 인문학의 틀 내에서 식물 은유에 반대했던 선행 이론가들과 다르게, 큐블러 는 양식 변동의 모델을 자연과학에서 구한다. 그가 보기에 교육학적 목적에 아무 리 유용하다 할지라도 양식에 대한 식물학적 은유는 역사적 오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건들의 연속적 흐름에 유기체의 형상과 행동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많 은 경우에 양식은 식물과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이 같은 예술과 역사에 대한 생 물학적(유기체적) 은유에 의해서 양식은 종(species)이 되며 역사적 양식들은 그 분류학적 다양성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큐블러가 보기에 “각각의 사건들 을 전례 없는, 절대 반복될 수 없는 단독체로 다루는 대신에 특정한 종류의 사건 들의 되풀이(recurrence)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이를 극복하는 하나의 대 안은 생물학과 전혀 다른 곳에서 양식의 모델을 구하는 일일 수 있다.
39) Alois Riegl, “Geertgen tot Sint Jans's ‘The Legend of the Relics of St. John the Baptist’”, in: Modern perspectives in Western art history: an anthology of twentieth-century writings on the visual arts, ed., W. Eugene, Kleinbauer,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89, p. 136.
40) Arnold Hauser, op. cit., p. 225.
41) Rosalind Krauss, 유승민 역, 윤난지 편,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 , 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화두, 눈빛, 2004, pp. 151-154.
생물학적 모델은 사물들의 역사를 위한 가장 적합한 모델이 아니다. 아마도 예술 상황에는 현재 지배적인 생물학적 은유에 비해, 물질과학에서 가져온 은유 체계가 좀 더 적절하게 맞을 것이다. 특히 우리가 예술을 특정 종류의 에너지의 전달(transmission), 파동(impulse), 중심부의 생성, 전송 지점으로 다루려 할 경우에 그렇다. 또는 수송에 있어서의 증가와 손실, 회로상의 저 항과 변형으로 다루려 할 수도 있다. 요컨대 전기역학(electrodynamic)의 언 어가 식물학의 언어보다 좀 더 적합하게 들어맞을 것이다. 물질 문명의 연 구에 있어 적합한 멘토는 린네가 아니라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다.42)
큐블러가 요구한, 린네로부터 패러데이로의 전환은 인문학적 전통에 기반한 미술사, 예술학이 쉽사리 택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차라리 양식 변동과 관련된 종래의 모든 견해들 간의 갈등을 종합하여 하우저처럼 ‘양식 형성 과정이란 기술 적인 것과 공상적인 것,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 사회적인 관점과 개인적 관점들 사이의 모순에 의해 운동하는 변증법적 과정’43)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안전하고 적절한 길일 수 있다. 하지만 큐블러의 요구가 양식에 대한 사고의 지 평을 넓히고 양식 개념의 근본적인 재고에 기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그의 주장이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적극 수용되어 새로운 예술의 길을 제시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예컨대 로버트 스미드슨(Robert Smithson)은 큐블러의 일정 한 영향 아래서 <엔트로피> 작업을 전개한 바 있다. 스미드슨이 보기에, 주어진 모든 체계 내에서 “에너지의 소멸은 피할 수 없으며 유기적인 모든 구조는 소멸 하여 무질서와 미분화 상태로 된다”44)
42) George Kubler, The Shape of Time, New Haven &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62, p. 9.; 사실 이러한 인식은 이미 오래 전 뵐플린의 다음과 같은 서술에서도 발견된 다. 그는 여기서 르네상스로부터 바로크의 전환을 조심스럽게 산비탈을 구르는 바위의 낙 하법칙에 비유한다. “손에 잡히는 입체적인 파악에서 순수 시각적이자 회화적인 것에로의 진행은 자연적인 논리를 지니고 있어 결코 거꾸로 일어날 수 없다. 기계론적 의미로 받아 들여져서는 안 되겠지만 비유를 들어보자. 산비탈을 구르는 돌은 산의 경사진 정도나 바 닥이 딱딱하냐 부드러우냐에 따라 아주 다양한 양상을 띠며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모 든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동일한 낙하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Heinrich Wölfflin, op. cit., pp. 330-332.
43) Arnold Hauser, op. cit., p. 238.
44) Hal Foster, Rosalind Krauss, etc., 배수희 외 역, 1900년 이후의 미술사, 세미콜론, 2007, p. 233.
Ⅴ. 나오면서
동일성/차이, 집단/개인, 형식/내용의 이분법적 틀 속에서 ‘양식’ 개념은 동일 성, 집단, 형식의 극에 좀 더 가까운 개념이다. 따라서 차이가 강조되고 동일성이 배격되는 곳, 개인이 강조되고 집단이 폄훼되는 곳, 내용을 앞세우고 형식을 배격 하는 곳에서 양식은 부정적인 함의를 지닐 수밖에 없다. 왜곡을 무릅쓰고 다소 거칠게 요약하면 현대예술에서 ‘양식’이 부정되거나 평가절하되는 것도 같은 이유 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짐멜이나 헵디지, 손택, 파노프스키, 그리고 큐플러의 경우 에서 보듯 이분법의 틀을 다소 유연하게 이해하거나 틀 자체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을 통해, 양식은 억압적인 세계상을 대변하는 낡고 권위적인 용어 가 아니라 현대예술(미술)의 특징적이고 진보적인 양상을 서술하는데 매우 유용 한 학적․비평적 용어로 제고될 수 있다. 이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짐멜과 헵디지가 시사하듯, 양식은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보 편성들’을 위한 실천적 범주로 기능할 수 있다. 즉 새로운 양식은 ‘획일적인 총체 성’에 반하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총체성’(짐멜)이거나 지배문화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소수자의 언어, 소수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한 저항의 형식(헵디지)일 수 있 다. 이 경우 양식은 모든 것을 동질화하는 지배 문화에 맞선 개인의 언어, 소수집 단의 언어를 대변하는 용어가 될 수 있다.
둘째, 손택이 시사하듯, 양식은 현실과 동떨어진 표피적, 심미적 범주가 아 니라 현실에 대한 인간의 새로운 지각, 인지 방식(내지는 그 실천)을 지칭하는 범 주로 재고될 필요가 있다. 또는 파노프스키가 지적하듯, 오늘날 새로운 양식은 새 로운 물질 문명의 출현에 의하여 긴급히 요청되는 유물론적 해석일 수 있다. 이 런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매체는 그것이 직면한 특수한 조건에 맞게 그 자신만의 양식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셋째, 큐블러가 시사하듯, 양식 개념에 덧붙은 식물의 은유, 곧 발생-성장- 쇠퇴의 모델(린네)을 배제하고, 양식을 에너지, 파동, 전송의 수준에서, 달리 말해
자연과학의 모델에 따라 다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각은 어쩌면 인문학 으로서의 미술사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이념적 한계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형태의 미술사를 가능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
* 논문투고일: 2011년 10월 21일 / 심사기간: 2011년 11월 8일-11월 19일 / 최종게재확정일:
2011년 11월 19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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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bdige, Dick, Subculture: The Meaning of Style, 이동연 역, 하위문화: 스타일 의 의미, 현실문화연구, 1998.
Kleinbauer, Eugene. ed., Modern perspectives in Western art history: an anthology of twentieth-century writings on the visual arts,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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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mel, Georg, 김덕영, 윤미애 역,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새물결,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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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ölfflin, Heinrich, Principle of Art History: The Problem of the Development of Style in Later Art, 박지형 역, 미술사의 기초개념: 근세미술에 있어서 의 양식발전의 문제, 시공사, 1994.
홍성호, 문학사회학, 골드만과 그 이후, 문학과 지성사, 1995.
국문 초록
이 글은 미술사 서술에서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인 ‘양식’을 현대적 시각에 서 재고하고 있다. 동일성/차이, 집단/개인, 형식/내용의 이분법적 틀 속에서 ‘양 식’ 개념은 역사적으로 동일성, 집단, 형식의 극에 좀 더 가까운 개념이다. 따라서 양식 개념은 차이를 강조하면서 동일성을 배격하는 논자, 개인을 강조하면서 집 단을 폄훼하는 논자, 내용을 앞세우고 형식을 배격하는 논자들에 의해 배격됐다.
이에 따라 현대미술사 서술은 양식보다는 유파(운동), 개인(작가), 연도를 내세우 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짐멜이나 헵디지, 손택, 파노프스키, 그리고 큐플러 의 경우에서 보듯, 이분법의 틀을 다소 유연하게 이해하거나 틀 자체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을 통해, 양식은 억압적인 세계상을 대변하는 낡고 권위적 인 용어가 아니라 현대예술(미술)의 특징적이고 진보적인 양상을 서술하는데 매 우 유용한 학적․비평적 용어로 제고될 수 있다.
첫째, 짐멜과 헵디지가 시사하듯, 양식은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보 편성들’을 위한 실천적 범주로 기능할 수 있다. 즉 새로운 양식은 ‘획일적인 총체 성’에 반하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총체성’(짐멜)이거나 지배문화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소수자의 언어, 소수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한 저항의 형식(헵디지)일 수 있 다. 이 경우 양식은 모든 것을 동질화하는 지배 문화에 맞선 개인의 언어, 소수집 단의 언어를 대변하는 용어가 될 수 있다. 둘째, 손택이 시사하듯, 양식은 현실과 동떨어진 표피적, 심미적 범주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인간의 새로운 지각, 인지 방식(내지는 그 실천)을 지칭하는 범주로 재고될 필요가 있다. 또는 파노프스키가 지적하듯, 오늘날 새로운 양식은 새로운 물질문명의 출현에 의하여 긴급히 요청 되는 유물론적 해석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매체는 그것이 직면 한 특수한 조건에 맞게 그 자신만의 양식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셋째, 큐블러 가 시사하듯, 양식 개념에 덧붙은 식물의 은유, 곧 발생-성장-쇠퇴의 모델(린네) 을 배제하고 양식을 에너지, 파동, 전송의 수준에서, 달리 말해 자연과학의 모델에 따라 다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각은 어쩌면 인문학으로서의 미술사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이념적 한계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형태의 미술사를 가 능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핵심어
양식, 미술사, 미술비평, 수사학, 형식, 매체, 세계관
ABSTRACT
The Meaning and Significance of ‘Style’ in Contemporary Arts
Ji-Suk Hong*1)
This paper attempts to examine the concept of ‘style’, one of the main issues in the description of art history with a modern perspective. Within the binary opposition like identity/difference, group/individual. form/content, ‘style’
is the concept contiguous to the former(namely to the identity, group, content) historically. So, art historians and critics who want to revaluate the ‘difference’,
‘individual’ and ‘content’ in the history of art devaluating the concept of ‘style’
intentionally tend to substitute school(movement), artist, year for style as a category to describe art history. However the other art historians/critics like Georg Simmel, Dick Hebdige, Susan Sontag, Erwin Panofsky, George Kubler understand the concept of ‘style’ differently. They do not want to accept the frame of binary opposition unquestioningly. Instead they understand the frame flexibly or question the legitimacy of frame itself. In this sense, the style is not the old and authoritative concept speaking for a dominant world but a progressive and critical concept for a new art and society.
First. Style can be the concept for a new wholeness. This wholeness do not means ‘monolithic total’ but means ‘perfectly individualistic total’(Simmel).
Add to this, style can be the revolutionary language(expression) of minority in contemporary society(Hebdige). Second. Style can be the concept referring to the renewal way of perception and cognition suitable for a contemporary
* Research Professor of DanKook University
material culture(Sontag, Panofsky). Third. If we change the metaphorical model for a style, we can take another way to deal with the concept of style. For example, George Kubler had suggested that we could replace the botanical model with a metaphors drawn from physical science for a history of art.
Key Words
Style, Art History, Art Critics, Rhetoric, Form,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