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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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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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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주차강의안(궁중머리)

어유미

궁중에서의 예장용 머리로 큰 다리로 만든 어여머리에 떨잠을 꽂은 형태이다.

비빈에서부터 상궁, 나인에 이르기까지 했으며 궁중 내의 가례(嘉禮), 진찬(進饌), 친현(親見) 등 의식을 차려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신분별 복식과 함께 했던 머리 이다. 그러나 궁중 내의 의식은 수시로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때마다 예장을 하기가 번거로워 대개 일상적으로 하고 다녔다.

영조 때 학자인 이형상의 문집인 <병와집(甁蝸集)>에는 복식과 머리모양에 따 른 격식이 장황할 정도로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명부(命婦) 중 거두 미는 내명부(內命婦), 어유미는 외명부(外命婦)가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명 부는 부녀로서 국가가 그 권익을 인정해주는 신분을 말하며 주로 왕족녀인 내명 부(內命婦)와 왕족녀이지만 출가해서 산다거나 고위 관리의 부인인 외명부(外命 婦)를 말한다.

어유미는 그 형태가 사진으로도 많이 남아 있다. 사진이 국내에 들어올 무렵 국 내엔 아직 윤비를 비롯하여 왕실의 여인들이 다수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고 있던 예장용 머리 어유미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이에서 보면 어유미는 어염 족두리를 이마 위에 받치고 어여머리를 고정시키는 데 그 시술은 대개 상궁들이 맡았지만 시중의 솜씨있는 수모들이 할 때도 많았 다. 수모들이 할 때는 침선비(針線婢)로 하여금 도와주도록 했다.

어유미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량의 다리가 필요하다. 궁중 내의 행사가 벌어지면 전국 관아에 공문을 보내 다리를 수집하는데 그때 모아진 다리는 대부분 어유미 를 만드는데 사용된다. 가례도감의궤에는 수식(首飾)을 하는데 체발 즉 다리가 얼 마나 필요한지 기록되어 있다. 그때의 수식은 왕비의 관을 만드는데 필요한 것으 로 어유미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어유미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으로 거두미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왕비를 제외 한 내명부들의 궁중 내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예장용 머리가 거두미이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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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어유미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유미는 궁중 용어이고 민간에서는 어여머리, 어임머리, 어잇머리라고도 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옛말에 어여머리라는 말이 있는데 어여는 두 른다는 뜻이고, 마리는 머리라는 뜻이라고 되어 있다. 즉 어유미는 두른 머리라는 뜻인데 그것이 민족 고유의 머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머리모양이 궁중의 머리가 된 시기나 연유가 있을 텐데 아직 그에 대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명나라의 제도 정비 이후인 조선초부터 궁 중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로는 왕비가 관을 착용하지 않을 때는 어떤 식으로든 수식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두미

어유미에 목제 가발을 얹은 머리로 어유미와 함께 대표적인 궁중 예장용 머리이 다. 목제 가발이란 어유미 뒤에 올린 머리모양으로 나무로 만들어 가발처럼 부착 해 놓은 걸 말한다. 왕비를 제외한 모든 내명부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비도 했었다는 것을 문헌이나 사진으로 알 수 있다. 명성황 후로 추정되는 사진이나 인물화만 보더라도 거두미를 한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윤비는 거두미를 한 모습이 없다. 왕비는 하지 않았다고 알려진 것은 실은 대한제국 때의 일로 황후로 승격되자 왕비 시절의 거두미를 하지 않았기 때 문인 것으로 보인다.

거두미는 원래는 목제로 하지 않고 다리로 엮어 만들었다. 수식의 일종이었기 때문에 대수와 함께 모두 체발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양이 엄청났기 때문에 정조는 가체금지령을 내리기 전에 먼저 거두미부터 목 제로 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다리로 했을 때와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 거기 에 다리 모양을 새겨 넣었다.

그런 후에 비녀를 이용하여 어유미에 끼워 넣어 부착시켰다. 목제 가발 아래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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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에 큰 비녀 두 개를 만들고 그것으로 어유미에 고정시킨 것이다. 그 비녀를 떠 꽂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거두미를 일명 떠꽂이머리라고 했다.

정조 때부터 목제로 했기 때문에 그 이전의 거두미는 모두 체발로 제작했다. 그 때의 거두미는 크기도 컸지만 무게도 만만치가 않았다. 이형상의 <병와집>에 나 오는 거두미는 그것이 영조 때의 기록이므로 체발로 제작된 것이었다.

이렇듯 비용도 많이 들고, 번거롭자 진모 대신 다른 것으로 한 것은 고대 중국 의 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즉 목제로 형상을 만들어 쓰는가 하면 철사에 다리를 감아 머리모양으로 만들어서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로 볼 때 조선의 거두미 는 중국의 예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 중 안악3호분에 비교적 상태가 좋은 귀부인 그림이 있다. 이 귀부인의 머리 역시 거두미와 비슷해서 이미 오래 전에 왕비의 관으로 사용된 것 이 거두미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한국 복식의 역사>를 저술하 신 이은창 선생은 이 귀부인의 머리모양을 보고 거두미의 시원일지 모른다는 견 해를 밝힌 바 있다. 이 여인은 진(晋)나라 망명객 부인이라는 설이 있다.

거두미에서 목제 가발을 내리면 곧 어유미이다. 그 모습과 비교해 보면 거두미 는 다분히 권위적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왕조의 권위가 약화되었을 때 거두미의 모양새는 훨씬 축소되었다. 위로 치켜 올라간 날개 부분이 평평해진 거두미도 있 다. 왕권이 확립되어 있을 때의 거두미는 마치 날아갈 듯 활짝 펼쳐져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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