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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지하 동아리 중 “인간 걱 정”이라는 이름을 지닌 동아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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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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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제18강

죽음은 언제든지 일어난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뜬금없는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내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을 때부터 가장 좋아한 말은 ‘자유’였다. 아마도 그 때가 중학교에 다닐 쯤이었는데, 그 시절에는 중,고등학생들은 머리를 빡빡 깎은채 교복을 입고 다녔다. 나는 그 획일적인 것이 너무 싫었 다. 어떻게든 그 올가미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 당시에 올가미를 벗어날 길은 비행 소년이 되는 것밖 에 없었지만 비행소년이 될 만한 자질도 없고 용기도 없어서 자유를 꿈 속에서만 꾸었다. 이윽고 대학 에 들어와서 뒤늦게 항거를 한답시고 방종에 가까운 자유를 누렸다. 그 때 지하 동아리 중 “인간 걱 정”이라는 이름을 지닌 동아리가 있었다. 나는 거기에서 인간 걱정 해가면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 후로 30여년이 지났다. 석사 학위 논문을 자유에 관하여 썼는데, 그 제목은 “인간의 유한성과 자유”였 다. 박사 학위 논문 역시 자유에 관해 논문을 썼고, 그 제목은 “존재와 자유”였다.

91년도에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어느새 18년이 지났다. 자유를 추구한다지만, 인생은 그리 자유롭지 못한 것 처럼 느껴진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그러하다. 그렇다고 인간의 모습이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20세에 보는 인생과 0세에 보는 인생, 80세에 보는 인생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인생을 다 정확하게 보지 못한다. 어떻게 "정확“이란 말을 쓸 수 있겠는가? 그저 삶의 그런 단계 고 지평일 뿐이고, 각 단계에서 그 단계에 맞게 볼 뿐인데 말이다.

자유와 반대되는 것, 즉 자유와 대립하는 항목은 무엇인가? 정치,경제적으로 말하면 억압, 소외다. 정 치적 “억압”과 경제적 “소외”라는 표현은 그 좋은 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자유의 대립 항이 그런 것들은 아니다. 삶을 놓고 볼 때 자유와 반대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운명이다. 운명과 자 유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두 마리 토끼로 읽힌다. 적잖은 사람들은 그 둘이 한데 얽혀야 한다고 주 장하지만, 그 이전에 그 둘이 대립항임은 확실하다. 문명 속에서 자유가 운명의 견제의 축으로 서 있 지 않으면 운명은 숙명으로 전락한다. 숙명은 결정주의다. 그렇다면 자유에서 운명을 배제하면 어떤 말을 쓸 수 있을까? 방종은 자유와 책임이라는 관계에서 나오는 말일 것이다. 자유 없이 책임만 이야 기하면 강박이 되고 책임 없이 자유만 말하면 방종이 된다. 그렇다면 운명없는 자유를 무엇이라 부를 까? 운명없는 자유는 생각하기 힘들다. 이론적으로는 그 둘이 팽팽한 긴장 관계를 엮는 것 처럼 보이 지만 삶에서는 그러하지 않다. 그 둘은 50 대 50의 균형관계를 이루고 있지 않다.

물론 삶 속에는 자유와 운명 뿐 아니라 다양한 요소들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 운명과 자유라는 이분법 은 이것은 훨씬 복잡다단한 것을 추리고 추려도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대립항으로 엮은 것 뿐이다. 하 지만 둘로만 갈라질 수 없으면서도 줄이고 줄이면 더이상 줄일 수 없는 둘이 남으며, 그 둘은 팽팽한 대립을 이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분법을 즐겨쓴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서양 사상도, 동양 사상도 다 이분법이다. 하지만 이분법에는 무엇인가가 따라붙는다. 즉 둘로 나눈 후 그 둘 간의 연합 이나 통일을 논하거나 나뉘기 전의 원초적인 통일성과의 관계를 논하곤 한다. 1, 2는 이 세 개의 관계 를 읽는 것이다. 0에서 출발하는 문화 전통이 있고 1에서 출발하는 문화 전통이 있다. 신현적 종교전 통이 1에서 출발한다면 성현적 종교 전통은 0에서 출발한다. 0에서 출발하든 1에서 출발하든 다 2를 말한다. 여기서 2는 영원한 평행일 수밖에 없다. 같이 가고는 있으나 만나서 하나가 되지 않는다. 그럼 2는 어떤 관계일까? 영원한 평행선이고 그것이 삶이 생겨먹은 모습이니 그대로 살면 된다고 말하면 되는가? 그건 아니다. 이런 눈으로 삶을 보면서 경험이 축적된 인간은 그 다음 단계로 이미 그렇게 보 일 수밖에 없는 것 또는 그 사이에 대하여 수정적인 제안을 한다. 그것이 바로 3이다. 3은 단순히 2에 다가 1을 더한 것이 아니라, 2를 어떤 식으로든지 묶어내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근세 후기의 변 증법을 들 수 있다. 결국 1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 1이 곧 0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개념 전개 과정 속 에서는 3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이 세계를 0, 1, 2, 3, 이 4개의 숫자로 설명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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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구조가 이렇다면 그 틈바귀에서 자유는 어느 지점쯤에 위치하는가? 0에서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가? 1은 자유를 허가하는가? 2는 어떤가? 그렇다면 3은 어떤가? 2와 3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앞서 설명했듯 2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두 마리 토끼다. 2의 차원에서 한 쪽을 주장하려면 저 쪽을 제거하는 형식논리학을 따라야 한다. 모순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에 동일률이 나올 수밖에 없다. 3은 그 동일률, 비모순을 다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여기서는 동일률이 아니라 비동일성이기에 이미 모순이 다. 그런데 모순을 모순으로 보지 않는다. 변증법은 모순을 ‘지양’한다. 3은 동일적이지 않고 비동일적 일 수밖에 없다. A나 not A 중 하나만 옳지 않다. A 나 not A 동시에 다 옳을 수 있다. 이것은 형식 논리학의 차원에서 보면 배중률이다. 형식논리학에서 중간 상태, 알딸딸한 상태는 배제되어야 한다. 그 런데 3은 바로 그 중간 상태인 것이다. 2는 그것을 배제시키지만 3은 그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다. 3에서 다른 한 쪽은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지양의 대상이 된다.

현대에 와서 저 둘은 역설이라는 차원으로 더더욱 얽힌다. 변증법과 역설은 다르지만 서로 얽힌다.

“역설적 변증법”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현대 철학자는 이런 식의 표현을 즐겨 쓰곤 한다. 근대적으로 역사적 변증법은 하나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둘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둘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셋 이라는 구도가 필요했다. 하지만 역설은 같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다름으로 가는 것이 다. 예전에는 다름을 폐기처분했지만 이제는 폐기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고 함께 얽힌다. 다름 이 얽힌다. 이제 같음과 다름의 경계설정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이미 우리 안에 다름이 많다. 그 다름 이 자유의 공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미 같음 안에 다름이 무수히 얽히는 것은 운명이기도 하다. 내 선택이 아니다. 이 다름, 저 다름을 골라서 내 같음 안으로 넣은 것이 아니다. 같음과 다름이 그렇게 얽혀있고 자유와 운명이 그렇게 얽혀 있다.

삶 속에는 자유의 공간이기도 한 다름이 많다. 그러한 것 자체도 이미 삶 속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그 런데 그 내던져진 것은 운명이다. 사르트르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자유하도록 운명지어졌고, 자유하도 록 저주받았다. 삶이란 그렇다. 삶 속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본다. 통념적으로 보기 싫은 것은 어떻게든 처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할 수는 없다. 삶이 그럴 수 없다. 여러분 나이 때에는 상대적으로 자유에 무게를 두고 살고 싶어한다. 당연하 고 바람직한 것이다. 여러분들이 지금부터 운명주의자가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분의 연령층에 적 절하지 않다. 모든 연령에서 자유와 운명을 함께 엮어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개인에게 있어서 삶의 여정의 때마다 다르게 말할 수 밖에 없다. 20대 시절에 젊은 청년의 패기로 자유의 소중함을 주 장하면서도 60대처럼 자유와 운명 사이의 적절한 조화에 대해 읽을 수 있는 지혜를 미리 가질 수 있 다면 여러분의 24시간은 48시간, 72시간이 될 수 있다. 크로노스적으로는 24시간이지만 카이로스적으 로는 2배, 3배의 진한 질적인 삶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반추해보면 그런 진한 시간이 있는가하면 흐리멍텅하게 보낸 시간이 있다. 이런 차원에서 24시간이라는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론 매시간 질적인 삶을 만들어야한다고 스스로를 질책하면서 살 수는 없고, 그것이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저 생에 대한 감을 가지게 되면 같은 이야기라도 질적인 상승을 도모할 수 있 지 않을까 싶다.

오늘 종교학과 신학 마지막 장을 할 차례인데, 이 부분은 여러분이 읽으면 된다. 신학 바깥에서 종교 를 성찰하는 작업이 신학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면 된다. 과목 이름은 종교철학 이었지만 여러분에게 철학이라는 분야를 밀도있게 가르치지 않았고, 이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철학의 내용들은 ‘종교철학’이라는 제목 아래 내가 의도한 것 중 일종의 전초작업으로만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과목에서 내가 여러분에게 요구한 것은, 인간과 종교의 관계는 물음과 대답의 관계라는 것, 그러한 물음과 대답의 관계가 일방성, 선험성이 아니라 쌍방성이고 상호적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 을 지금까지 우리는 종교학적 반성에 대한 철학적 검토들을 통하여 질문과 대답의 관계가 종교 현실 속에서는 오히려 대답으로부터 일방성, 구체적으로 교리의 형태로 나타났음을 살폈다. 또 중요하게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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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봐야할 것은 <현대 종교철학의 이해> 1장에서 말하는 “현대로의 전환”이다. 2장에서는 비트겐슈타 인에서 논리실증주의, 즉 앎의 논리에 희생되고 있는 주변의 비종교인, 반종교인들이 있음을 보았고 그런 앎의 차원으로 종교를 축약시키는, 축소시키는 오류들을 극복해낼 수 있는 삶의 성찰로서의 비트 겐슈타인의 신앙주의를 살폈다. 이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플란팅가의 주장인 “교리없는 신앙”과 같은 뜻이다. "교리없는 신앙"도 앎 없는, 앎 너머의 삶을 말한다. 삶이 앎으로 축소되고 믿음이 앎으로 축 소되는 것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

린드벡이 말하는 교리의 세 단계 중 마지막 단계인 언어문화 차원도 다 삶이다. 종내 교리가 명제로 정리되고 명제진리적 차원에 머물렀던 것이 인식대상으로 추려진 것으로부터 경험표현적 차원으로 넘 어서고 마침내 언어문화적인 것으로 나아간 것이다. 단순히 동일선상에서 나열될 수 있는 범위 중에서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층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종교적인 진리를 명제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명제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를 두고 고민한다. 신앙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소위 무신론자들은 그것을 못 믿겠다, 인정 못하겠다는 근거 위에서 무신론을 말한다.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이러한 입장은 모두 다 삶을 앎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무신론의 근거도 아주 빈약하고 유신론의 근거도 아주 빈약하다. 나 자신 속에서도 그런 유신 론과 무신론을 많이 만난다. 자기가 하나님을 알량한 종교에 대한 이미지로 알고 이래서 종교는 아니 다, 틀리다 할 가능성이 많다. 통칭 무신론자들만 그런가? 유신론자들도 그렇다. 모두가 다 철학적 검 토의 대상이다.

복잡한 이야기를 여기서는 다 덮어두고, "앎에서 삶으로"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할 수 있다. 이 "

삶"은 막연하다. "있음"은 애당초 주어진 것 같고 "앎"은 그 있음과 어떻게 관계지을 수 있을 것 같은 데 "삶"은 대책없고 막연하다. 우리가 본 사람들의 견해는 삶에 대해 어떻게 가닥을 잡고 표상하면서 이해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나름대로 고민하고 나온 산물들이다. 종교를 거부하는 입장을 살펴보면, 대 부분 종교가 해온 짓에 대한 인상을 바탕으로 한다. 이는 부분적으로 종교의 책임이다. 종교도 내내 명제인식적 방식으로, 기껏 진도 나가봐야 경험표현적인 방식 정도까지만 나아갔다. 더 근본차원으로 가야 한다. 시대적으로 보아도 고전적, 근세적, 현대이다. 고전은 형이상학의 시대이고 근세는 인식론 의 시대이고 현대는 탈형이상학의 시대이다. 편하게 말하면 있음, 앎, 삶이다. 고전은 있음을 강조했다.

있음에 대해서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 있음이 명제를 다 설정한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뜻으로 여겨진 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진리명제 인식적, 경험표현적인 것, 언어문화적인 것이다. 이것들은 각각 있음, 앎, 삶이다. 진리명제는 동일성의 원칙에 지배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것으로 다가가야 한다.

뜻도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 자체가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진리명제에서는 삶이 하는 몸짓으로서의 의미새김을 이룰 겨를이 없다. 한편 경험표현은 삶을 경험이라는 영역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앞의 틀보다는 좀 더 진보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전인수가 될 수 있다. 그래 서 앞의 것을 객관주의적인 접근이라고 하고 뒤의 것을 주관주의적인 접근이라고 한다. 하지만 언어문 화는 객관도 주관도 아니다. 오히려 객관의 일방과 주관의 일방을 다 극복한 쌍방성이다. 있음에서 앎 으로, 앎에서 삶으로는 단순한 차원 전환이 아니라 일방에서 상호로의 전환, 모순에서의 역설로의 전 환이라는 뜻을 가진다. 모순에서 역설로 바뀜은 곧 다름을 보는 눈을 말한다. 전통적으로는 다름을 모 순으로밖에 못 보았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다름은 모순이 아니라 역설이다. 모순은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버리는 일이지만 역설은 둘다 취하는 것이다.

결코 쉽지 않지만,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본능은 한쪽 면으로만 보려한다. 한 쪽 면만 보면 명확성, 정확성이라는 강점을 가진다. 정확성, 명확성이 왜 중요한가? 우리에게 안정성을 주기 때문이다. 안정성은 삶의 진면을 덮고서 앎을 통해 표상된다. 앎은 왜 하는가? 안정욕구 때문이 다. 인간에게 있어서 지식은 생존을 위한 몸짓이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모르는 상태에서 야기될 수밖에 없는 불안, 위험을 극복한다는 것이다. 즉 생존하는 것이다. 다 살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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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성적 생존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정확성, 명확성의 추구!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안정감! 이 도 식을 근거로 이분법은 꽤 긴 세월동안 승승장구해왔다. A면 A이고 not A이면 not A다. A면서 not A 일 수는 없었다. 그런 모호하고 불안을 이야기한 것은 접수가 안 된 것이다. 꽤 긴 세월을 그렇게 왔 다. 그런데 서로 다른 것을 외면할 수 없어서 그걸 싸잡아가지고 올라간다. 이것이 바로 변증법이다.

외면할 수 없어서 싸잡은 것이다. 그런데 끌고 올라가서는 또다시 하나, 같음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근 세가 끝나고 현대가 시작된다. 현대는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 공유한다. 더 이상 A만 볼 수 없다. not A도 있다. 어떤 사람은 A만 봤고 어떤 사람은 not A만 봤다. 현대에 이르면, 두 대립항을 동시에 봐야 한다. 합리주의는 역시 이분법을 기초로 한다. A는 A고 not A면 not A여야 했다. 즉 합리주의는 동일 성의 원칙, 비모순율을 기초로 한다. 하지만 신비주의자들에게는 이것이 함께 읽혀진다. 저 유명한 "대 립의 일치"라는 말을 생각하라. 이것이 바로 신비주의자들의 통찰이다. 하지만 신비주의자들의 견해는 합리주의자들이 지배하던, 동일성, 비모순율의 패러다임 속에서 시종일관 비주류였다.

오늘날 "삶"을 이야기하는 동네를 보면 삶으로의 현대적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 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앎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 깨달음에 비해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성찰은 이 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삶"이라는 화두는 새롭다. 여기서 텍스트는 바로 여러분이다. 또 다른 동료의 삶이 Cotext이며, 그 Text와 Cotext들 간의 얽힘이 Context이다. 인문학은 바로 이를 탐구 해야한다. 그러지 않는 한, 인문학의 위기는 점점 더 심해진다. 대중의 삶으로부터 시작해서 대중의 삶 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과정 중에 학문적 과정을 거치더라도 그렇게 가야 한다. 거기에 종교가 있고 철학이 있고 종교철학이 있고 신학이 있다.

삶에 대해서 그림, 삶의 그림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여러분은 여러분 현재 나이에 걸맞는 나름의 버 전을 그려야 한다. 그 버전은 언제나 수정될 수 있다. 그것이 어느 순간 완성되겠는가? 완성된 상태로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는가? 끝없는 미완이다. 아니 미완이라는 말, 불완전이라는 말조차 적절하지 않 다. 언젠가 말했지만 고중세 때에는 신의 완전성을 기준으로 인간의 불완전성을 말했다. 그건 신 앞에 서 인간을 찌그러뜨려서 신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은 신의 완전성이라는 기준을 인간에게 들이대서 신의 반열에 인간을 들어 올린 것이다. 그러고나서 인간을 일컬어 불완전이라고 한다. 물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런데 불완전이라는 개념은 신 기준을 인간에게 들이댄 것이다. 즉 인간 의 신격화이고 신성모독이다. 이것이 고전적 패턴이었다. 그럼 근세는 어떤가? 이제 인간의 유한성을 긍정개념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을 인간성의 기준으로 그린다. 그랬더니 신은 인간의 유한성과 반대되는 무한성이다. 이와 같이 근세는 인간 중심주의였다. 고중세는 신 중심주의였고 신의 완전성이 기준이다. 그래서 인간은 불완전이었다. 근세도 중심주의, 고중세도 중심주의이다. 중심주의, 일방주의 다 같은 이야기이다. 있음, 앎에서는 그런 요청이 있었다. 그런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그림이 그 려졌다. 미완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완성의 당위성을 전제할 때 사용가능하다. 미완에서의 미는 아직 아니라는 것이다. 언젠가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완성될 수 있는가? 그 것은 있음이든 앎이든, 삶 아닌 것이 삶을 압박하면서 나온 표현이다. 불완전, 미완 모두 다 완성, 완 전에 대한 강박이다. 그건 삶을 외면한 것이고 있음과 앎의 같음이 그려낸 그림이다. 이제 삶은 거기 에서 벗어나야 한다. 삶은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유는 말할 것도 없지만 운명도 우리에게 완전, 완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운명은 우리가 완전, 완성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쳐준다.

여러분의 삶의 버전을 만들어라. 그걸 위해서 우리는 종교학, 신학, 철학 뿐만 아니라 삶을 논하는 모 든 것이 동원되어야 한다. 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모두가 다 우리 삶의 이야기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만물의 척도로서 인간이 이리저리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간에 어디 있는가? 우리가 자연을 보는 것도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인공적인 건물들도 인간의 키에 맞추어서 지어진 것이다. 인간의 키가 전부 50cm이면 거기에 맞추어서 건물을 지을 것이고 인간의 키 가 3m면 거기에 맞추어서 건물을 지을 것이다. 다 인간이 척도가 되어서 반영이 된 것이다. 자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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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다. 개가 보는 자연과 인간이 보는 자연이 같은가? 바퀴벌레가 보는 자연과 같겠는가? 이미 우 리는 내 버전으로 생존본능적으로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와 같은 생각을 삶에 대해서 적용해야 한다. 이제는 믿음, 종교 등에 대해서도 그런 식의 작업이 필요하다.

요즘 통섭을 말한다. 왜 통섭인가? 앎은 통섭을 말할 수 없다. 전 영역에서 전문성이 중요하기 때문이 다. 하지만 삶이기 때문에 통섭을 요구한다. 삶은 어떤 앎의 한 측면, 한 각도, 또는 몇 각도만 종합해 서 될 일이 아니다. 그래서 통섭이다. 여러분은 어떤 전공에 있든 간에 통섭해야 한다. 그렇다고 다 때 려부시고 두루뭉실하게 통합과학 식으로 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문화읽기가 필요하다. 그런 것을 참고해서 여러분의 버전을 만들길 바란다. 그리고 시대의 버 전을 만들어라. 20대의 버전을 만들고 그것을 30, 40대 때 보라. 그럼 여러분도 인생이나 삶에 대해서 한 마디 할 수 있다. 왜 비트겐슈타인만 이야기해야 하는가? 왜 린드벡만 해야 하는가? 그들이 그렇게 잘났는가? 왜 이들만 해야 하는가? 우리 동네 버전도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마치 The Text 인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참고자료다. 내가 이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야 하는가?

이 사람의 삶이 내 삶은 내 삶이 아니다. 하지만 나 중심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중심주의 봉착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인간은 중심주의를 통해서 중심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인간이 소외 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중심이 있다고 해서 행복하고 즐겁고 잘 모셔지는 것이 아니다.

신 중심주의가 신을 잘 모시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라. 여기에서 말하는 신 중심주의가 교회 성경 공부 책에 나오는 하나님 중심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문화사적으로 해왔던 신 중심주의 를 말한다. 실제로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신 중심주의가 얼마나 많이 남용되고 오염되고 악용되었는 가? 권력자들에 의해서 신의 이름을 빌어서 절대 군주적인 억압과 절대군주적인 지배를 정당화했는 가? 그런 이야기이지 신앙 관련 서적에서 말하는 하나님 중심이 아니다. 물론 그 중심이라는 말도 다 른 말로 바꾸면 좋다. 중심이라고 했을 때 중심과 주변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 간을 주변으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성서에 사람을 일컬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도 인간과 교통하시기를 원했다. 중심이라는 단어가 자칫 그런 왜곡이 나올 수 있다면 다른 말로 대체할 일이 필요하다. 인격적인 교류를 살리는 단어가 필요하다. 다시 한번, 여러분 나름대로의 삶의 버전을 만들어라. 여러분이 Text가 되어라. 한 학기 동안 수고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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