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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관] 프랑스 혁명의 두 얼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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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10] 프랑스 혁명의 두 얼굴

[학습목표]

1. 프랑스 혁명의 맑스주의적 해석과 수정주의적 해석의 차이점에 대해 알 아본다.

2. 알퐁스 올라르의 맑스주의적 프랑스 혁명 해석에 대해 알아본다.

3. 알프레드 코반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맑스주의적 해석 비판에 대해 알 아본다.

[학습과제]

1. 프랑스 혁명의 세계사적 의미를 강조하다보니 혁명을 지나치게 이상화 하고 의미를 과장하는 경향은 비유럽인의 역사인식에게는 상당히 큰 문제 를 야기해서 이를 당연히 바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알아보자.

2.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모든 인류의 이름으로 혁명을 주장하 고 선전했으나 실제로 그들의 목표는 좁게 제한되어 있었는바, 재산 있는 자의 지배라는 자유주의적 태도가 그것이며, 더구나 구질서와 항상 타협하 려 했고 대중의 진정하게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열망을 좌절시키려 했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보자.

3. 프랑소아 퓌레가 프랑스 혁명의 해석에 있어서 영미의 수정주의 학자들 이 사회경제적인 측면에 중점을 둔 데 비해 그는 정치와 이데올로기 면에 중점을 두었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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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프랑스 혁명의 두 얼굴

1. 7월 14일의 의미

매년 7월이면 프랑스는 한 차례씩 들썩거린다. 프랑스 최대의 국경일인 프 랑스혁명 기념일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을 기리는 갖가지 기념행사들이 전 국 각지에서 성대하게 열린다. 7월 14일에는 파리의 가장 큰 거리인 샹젤 리제에서 군사 퍼레이드가 화려하게 펼쳐지고 모여든 관중들은 혁명을 상 징하는 삼색기를 흔들며 열렬히 환호한다.

프랑스공화국 대통령은 이 날을 맞아 프랑스가 혁명의 이상과 전통을 이어 받았음을 당당하게 선언한다. 프랑스인들은 다시 한번 조국이 200여 년 전에 혁명을 통해 전제적인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적인 공화정을 세웠으 며 전세계에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을 전한 것을 확인하며 뿌듯함과 자 랑스러움을 느낀다.

프랑스를 근대 세계사의 최고봉에 세우는 이런 역사적 사건을 가진 나라에 태어난 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프랑스인들이 이런 영광스러운 과 거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 이상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렇게 프랑스인들이 매년 7월마다 감동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은 프 랑스 혁명이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막중한 위치 때문이다. 그 혁명이 바로 세계사에서 전근대와 근대를 나누는 커다란 전환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다. 우리가 그 후의 시대사를 보통 근대사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1789년 늦봄부터 프랑스는 혁명의 폭풍 속으로 빠져 들었다. 당시 루이 16세의 정부는 만성적인 국가재정의 고갈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는 프 랑스가 식민지를 둘러싸고 영국과 7년전쟁(1756-63)을 벌이고 미국독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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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에도 간여함으로써 국고를 지나치게 낭비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왕은 그 동안 면세 특권을 부여받던 귀족 계급에게 토지에 대한 재산세를 내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안 내던 세금을 요구받은 귀족계급은 그 결정을 삼부회에 게 미뤘다. 삼부회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중세의회인 삼 부회는 프랑스의 왕권이 강화되면서 1614년 뒤에는 한번도 열리지 못했었 다. 1789년 5월 초에 왕이 마지못해 삼부회를 소집하며 일이 시작되었다.

삼부회는 원래 성직자, 귀족, 평민의 대표로 구성되었고 각 신분별로 회의 체를 만들어 의사결정을 해 왔었다. 세 회의체로 구성되었다고 해서 삼부 회이다. 고위 성직자들은 대체로 귀족 계급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므로 이 들은 제3신분인 평민들과는 이해관계가 달랐다. 그래서 삼부회는 대개 2:1 로 특권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왔다.

이번에도 왕이 삼부회의 전통적인 의사결정 방식을 고수하려 하자 평민 대 표들이 이에 격렬히 반발했다. 18세기를 통해 부유해지고 교육을 받았고 계몽사상에 의해 정치의식이 높아진 제3신분 대표들이 더 이상 특권세력 의 독단적인 지배를 허용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제3신분 대표들은 스스로를 국민의회라고 부르며 헌법을 제정하겠다고 선 언했다. 처음 왕은 이를 억누르려 했으나 사세가 불리해지자 그것을 받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왕이 군사력을 동원하리라는 소문이 퍼 지며 7월 12일에 파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수년 동안 흉년이 계속되고 경제사정도 나빠 민심이 흉흉한 상황이었으므 로 이는 곧 대중적인 혁명으로 발전했다. 7월 14일에는 악명 높은 바스티 유 감옥이 점령되었고 혁명은 곧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혁명이 발발한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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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혁명의 두 얼굴

프랑스 혁명은 보통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했으며, 귀족과 평민의 신분적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었고, 모든 봉건적 족쇄를 없애고 자본주의의 기틀을 만들었으며, 전시대의 낡은 이념이나 가치관을 파괴하 고 합리적인 근대문화를 만들어냈다고 생각된다.

또 그 이념을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체로, 나중에는 전 세계로 파급시켰다 고 주장된다. 그러니 그것은 매우 중요한 세계사적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 고 또 긍정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처음부터 그렇게 환영 받은 것은 아니었다. 기존 질 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과정에서 프랑스 정치와 사회에 엄 청난 소용돌이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왕이 처단되고 귀족들이 쫓겨났 으며 카톨릭 교회는 핍박을 받고 공포정치 시기에는 수만 명의 프랑스인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 사회는 계속 무질서와 혼란에 시달렸다. 또 1792년부터 4월부터 시작된 혁명전쟁은 그 후 20여 년간 프랑스뿐 아니라 전 유럽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그러니 혁명의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찬양 하는 반면, 구체제에 가까이 있었거나 혁명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 적대감과 증오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그 후 한 세기 내내 혁명은 프랑스 내 정치적 논의의 중심 주제였다.

혁명에 대한 태도가 바로 그 사람의 정치적 입장을 보여주는 기준이 되었 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상의 정치논쟁에서 혁명은 끊임없이 논쟁의 시발점 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정을 거부하는 공화주의자,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 반교회 주의자들은 혁명을 옹호했다. 이들 사이에도 물론 견해의 차이는 있으나 혁명을 진보적인 것, 바람직한 것, 인류의 이상과 합치시키려는 경향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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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났다. 그래서 이들은 혁명이 보여준 자유와 평등, 봉건제 폐지, 인권선 언, 헌법 제정, 입헌군주제와 공화제의 수립을 높이 평가했다. 공포정치를 불가피한 것으로 옹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반면 군주주의자, 귀족주의자, 교회주의자, 보수주의자들은 혁명의 원리를 폭도의 원리라고 끊임없이 비난했다. 믿을 수 없는 추상적인 원리에 의존 하여 오랜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기존 사회질서를 파괴하려 했다는 것이 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는 '이 무서운, 파괴적이고 형상이 없는 야수가 민 주주의라는 형태로 프랑스 정치를 위협한다'고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정도는 다르나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이다.

혁명의 해석이 시대의 정치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전반에서 3/4분세기까지 그것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사회주의가 전 세 계적으로 세력을 확장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 온 것 이 대체로 맑스주의적 해석이다.

반면 80년대 이후에는 수정주의적 해석이 점점 세력을 확대하며 지금은 오히려 맑스주의적 해석을 압도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적인 사회주의의 퇴조 및 보수주의 흐름의 확대와 어느 정도 관계를 갖고 있다.

이런 정치적 흐름과도 관계가 있으나 오늘날 맑스주의 해석에 대한 많은 비판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갖고 있는 많은 문제점과 한계 때문이다. 맑스 주의의 계급투쟁 도식에 맞추어 전형적인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하려 하니 역사현실과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 세계사적 의미를 강조하다보니 혁명을 지나치게 이상화하고 의미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을 서양사에서 가장 유럽중심주 의적인 해석의 하나로 만들고 있다. 이는 비유럽인의 역사인식에게는 상당 히 큰 문제를 야기한다. 당연히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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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전적 해석이 된 맑스주의적 해석

프랑스혁명이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혁명 100주년이 되는 1889년부터이다. 이 해에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 프랑스혁명사 강좌 가 개설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1875년에 수립되었으나 보수세력의 저항 으로 힘든 시절을 겪어온 프랑스 제3공화정이 이때 와서 자신을 정당화하 는 수단으로 프랑스 혁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혁명시기의 공화주의적 전 통을 제3공화국과 연결시키려 한 것이다.

이 강좌의 책임을 맡은 인물이 알퐁스 올라르(1849-1928)이다. 그는 사회 주의를 신봉하는 역사가로서 그가 맡은 일은 혁명 해석을 통해 민주적 공 화주의를 고취함으로써 제3공화정을 지지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혁명 이전 구체제의 전제를 비난하고 1789년의 폭력혁명을 정당화했다. 또 1791년의 입헌군주제 헌법은 과소평가한 대신, 1792년에 국민공회가 공화정을 수립한 것은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는 그것을 혁명 의 절정으로 보았으며 그 독재적 성격은 문제시하지 않았다. 그의 자리는 그가 물러난 후에도 프랑스 혁명사 연구와 관련해 가장 큰 권위를 누리게 되었다.

1차대전이 끝난 후 알베르 마티에즈(1874-1932)가 올라르의 뒤를 이었는 데 그는 아예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맑스주의에 헌신했으며 그의 후계 자들도 모두 이를 본받았다. 그는 특히 1917년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에 고무되어 공포정치를 주도한 로베스삐에르를 권력에 굶주린 독재자가 아니 라 독재를 통해 프랑스를 구하려 한 애국적인 인물로 전력을 다해 옹호했 다. 그가 파리 노동자들이 대중적으로 원하는 바를 실현시키려 한 민주적 인 정치가라는 것이다.

마티에즈를 이은 사람이 조르주 르페브르(1874-1959)로 그는 폭 넓은 연 구로 맑스주의적 해석을 완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시대의 탁월한 연구자로서만이 아니라 혁명사를 연구한 모든 세대의 어느 누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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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 탁월한 연구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는 혁명가들이 추구하려 한 것을 자신의 생각과 동일시했고 따라 서 혁명에 반대하거나 그에 비판적인 해석들은 싫어했다. 그래서 그의 글 은 상당히 실증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이라는 비판 을 피할 수 없었다.

르페브르의 뒤를 이은 사람들이 알베르 소불(1914-1982)과 현재도 활동하 고 있는 미셀 보벨(1933-)이다. 이렇게 70년대까지 약 80년 동안 혁명사 해석을 주도한 사람들은 다 맑스주의자들이다. 프랑스 혁명이 주로 귀족계 급과 부르주아 계급의 계급투쟁으로 해석되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리하여 맑스주의적 해석은 1970년대까지도 프랑스혁명사에 대한 표준적 인, 그래서 ‘고전적’ 해석의 위치를 차지했다. 이것을 자코뱅-맑스주의적 해석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이 해석이 과격파인 자코뱅파의 입장을 많 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주의가 이렇게 정통적 지위를 차지하자 그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거 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그에 대한 도전이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과 미 국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맑스주의 해석은 과연 무엇일까?

맑스주의적 해석은 프랑스 혁명을 앞에서 말한 대로 새로 흥기한 부르주아 계급과 전통적인 질서를 유지하려는 귀족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으로 본다.

따라서 부르주아 계급의 흥기가 혁명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물론 르페 브르는 혁명에서 농민의 역할을 중시했고, 나중에 소불은 도시 소시민들의 민중혁명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부르주아 혁명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생각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수 세기 동안 성장하여 18세기에 오면 경제력이나 개인 적 능력,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 귀족계급보다 우월한 상태에 도달해 있었 다. 이들은 토지가 아니라 동산적(動産的)이며 상업적인 새로운 형태의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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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인권선언문

산에 기초해 있었고 또 계몽사상가들이나 경제학자들이 만든 새로운 이데 올로기의 의해 지지되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목적은 시민적 평등이다.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의 특권을 없애고, 모든 사람이 같은 법의 지배를 받고, 같은 기준에 따른 세금을 내고, 같은 공직 취임의 기회를 갖고, 같은 조건으로 재산을 소유하는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1788년 군주제의 약화는 부르주아계급에게 그들의 꿈을 실현할 기회를 제 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세력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농민과, 도시의 소시민 대중들이 그것이다. 1788-9년의 경제위기로 고통을 받은 농민들은 혁명 초기에 광범한 농촌지역에서 소요를 일으키며 봉건적인 영주권에 강 력히 저항함으로써 혁명을 진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상큘로트라고 불린 도시의 소시민들은 혁명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들고 일어나 혁명을 급진화시켰고 마침내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때로는 반자본주의적 태도를 보 이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봉건제의 파괴라는 혁명의 목표를 달성하게 만들 었다.

이리하여 1789년의 혁명은 새로운 시대 를 대표하는 부르주아 계급이 과거의 특 권을 대표하는 귀족계급을 전복하고 새 로운 체제를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것은 봉건제의 폐지(1789년 8월 4일) 를 통해 과거의 특권적인 질서를 전복하 고, 프랑스인권선언(1789년 8월 26일)을 통해 시민의 자유와 평등, 인민주권, 인 간의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 법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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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민의 평등, 언론과 출판의 자유, 사유재산의 신성성 등을 선언했다.

또 헌법(1791년 9월)을 만들었고, 입헌군주제를 넘어 민주적인 공화제 (1792년 9월)까지 달성했다. 국민공회가 집권했던 공화국 시기가 혁명의 절정기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은 모든 인류의 이름으로 혁명을 주장하고 선전했으 나 실제로 그들의 목표는 좁게 제한되어 있었다. 재산 있는 자의 지배라는 자유주의적 태도가 그것이다. 따라서 구질서와 항상 타협하려 했고 대중의 진정하게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열망을 좌절시키려 했다(자유주의 와 민주주의를 아주 간단히 구분하면 자유주의는 일정한 수준 이상의 재산 을 소유한 성인남자에게만 참정권을 주는 것이고, 민주주의는 재산에 관계 없이 모든 성인남자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이다).

그들의 계급이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이 로베스삐에르를 실각시킨 1794년 7월의 테르미도르 반동이다. 1799년에 나폴레옹이 저지른 군사쿠 데타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프랑스혁명은 세계사를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또 근대세계로 넘어가게 만든 결정적인 단계이다. 그리고 혁명이 만들어낸 자유와 평등은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인 이념이 되어 전 세계를 일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프랑스혁명을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으로 만든 것은 맑스에 의하면 그 속도와 폭력성, 완전성이다. 가장 성공한 혁명이라는 말이다.

맑스주의 역사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점은 혁명을 자신과 일체화 하는 경향이다. 특히 소불이 그런데 그의 논조는 마치 자신이 혁명을 대변 하는 듯한 웅변조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역사적 객관성을 잃게 될 가능 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4. 수정주의 해석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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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해석에 대해 처음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영국의 알프레드 코반 (1901-1968)이다. 그는 1954년의 런던 대학 프랑스혁명사 교수 취임 강 연에서『프랑스혁명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맑스주의적 해석을 처음으로 비판했다.

그는 우선 혁명이 파괴했다고 하는 봉건제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했다. 토 지소유에 기초한 통치체제로서의 봉건제는 프랑스에서 이미 오래 전에 사 라졌고 18세기에 남아 있던 것은 단지 그 의미 없는 흔적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봉건제 폐지의 의미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혁명적인 부르주아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삼 부회의 제3신분 대표들의 출신을 분석하여 그 가운데 13%만이 상인, 제조 업자, 금융업자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 외 대부분의 대표들은 지방의 낮은 직위의 관리들, 검찰관, 판사 같은 직을 역임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맑 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라고 하기는 어려 웠다. 이렇게 보면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용어가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코반의 주장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건드릴 수 없는 금기를 깨뜨 리는 중요한 일을 한 셈이다. 1964년에 그는 자신의 논지를 더 보강하여

『프랑스혁명의 사회적 해석』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때쯤이면 다른 사람들 이 이 일에 가담하게 된다.

미국 학자인 조지 테일러는 1967년에『비자본주의적 부와 프랑스혁명의 기원』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가 한 일은 혁명 이전의 부르주아계급 과 귀족계급의 투자 행태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결과 는 비슷했다. 두 계급의 이해관계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1973년의 콜린 루카스의『귀족, 부르주아, 프랑스혁명의 기원』이라 는 글에 의해 다시 뒷받침 되었다. 많은 경험적 증거를 제시하며 루카스는 구체제 말의 부르주아와 귀족이 동질적인 지배 엘리트 집단의 구성원이었 음을 밝혔다. 귀족이 특권을 독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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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주의에 대한 비판은 아직 소수파이기는 하나 학계에 확고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혁명 연구의 본산은 프랑스였으므로 이런 주장들이 프랑스에서 받 아들여지지 않는 한 큰 의미가 없었다. 1978년에 전기가 왔다. 그 해에 프랑소아 퓌레(1927-1997)가『프랑스혁명을 생각한다』라는 책을 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는 이미 1971년에『혁명의 교리문답』이라는 글을 통해 맑스주의자들의 천편일률적인 계급투쟁론이, 논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카톨릭의 ‘교리문답’

적 성격을 가졌고 민족적 영광과 레닌주의적 이론에 사로잡혀 있다고 통렬 하게 비판한 바 있다.

영미의 수정주의 학자들이 사회경제적인 측면에 중점을 둔 데 비해 그는 정치와 이데올로기 면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혁명 해석의 전반적인 전복을 꾀했다.

맑스주의자들은 자코뱅파에 의해 혁명이 과격해진 1792년 8월 - 1794년 7월의 시기를 높이 평가하나 1789-1792년의 온건한 시기에 이루어진 성 취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는 본다. 특히 봉건제 폐지 선언 같은 것은 자본 주의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계로 높이 평가한다.

또 전통적으로 크레인 브린튼을 비롯한 영국과 미국의 자유주의 역사가들 은 1789-92년의 온건했던 시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왔다. 다만 93-94년 의 공포정치 시기는 혁명이 국내의 물가고나 정치적 혼란, 대외 전쟁 등으 로 과격해졌고 그래서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난 시기로 보았다.

그러나 퓌레는 혁명이 1789년의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국 민의회가 처음부터 신중한 토의 끝에 루소의 인민주권설과 일반의지론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이론에 의해 만들어진 민주주의는 동의 에 의한 통치나 개인적 인권을 존중하는 형태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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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혁명이 인민주권이라는 과격한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임으로써 어떤 권력남 용도 인민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한 변명될 수 있었으므로 혁명은 처음부터 독재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공포정치시기에 공공연하 게 표출되었을 뿐이다. 또 그는 나폴레옹의 제국도 그 독재적 본질에서는 혁명기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 종막에 해당한다는 것 이다.

그래서 혁명 시기의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으로서의 프랑스인이 자유롭게 된 것뿐이며 개인은 국가에 예속적이 되었 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반대도 혁명의 통일성을 해치는 분파투쟁으로 거부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매우 급진적인 것으로 코반까지도 사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이었다. 그럼에도 80년대로 들어서며 퓌레의 주장은 점점 많은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고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은 점점 더 많은 주제로 확산되었다. 그 리하여 혁명 200주년이 된 1989년 즈음에는 퓌레가 혁명사 연구에 있어 프랑스 내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최근 2, 30년 사이의 프랑스혁명사 연구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맑스주의 적 해석이 삽시간에 거의 붕괴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 했지만 그 연구가 지나치게 맑스주의 도식에 의존함으로써 역사현실과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그렇게 오랫동안 주류해석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1930년대, 2차대전의 혼란기와 그 이후에 혁명사 연구가 대체로 부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르페브르 같은 사람의 주장이 과도하게 오랫동안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실증적인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면 더 이상 정통적인 지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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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지금도 물론 맑스주의적 해석을 지키려는 사 람들이 일부 남아 있다. 그러나 숫자도 작고 영향력도 미미하다. 맑스주의 자들 가운데에도 계급투쟁설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으니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최근의 연구들을 통해 프랑스혁명의 모 습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다음 강의에서 한 번 살펴보자.

참조

관련 문서

따라서

A반을 나타내는 그래프가 B반을 나타내는 그래프보 다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으므로 A반 학생들이 B반 학생들보다 도서관 이용

미지수 x, y가 분모에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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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pt.. 교사 는 제가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일이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국어교육과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전주 대학교 국어교육과 커리큘럼이

 잔여접근법 (residual approach) 또는 차감법 : 거래가격에서 판매가격이 알 려진 이행의무의 판매가격을 차감한 나머지 금액을 판매가격이 알려지지 않 은

진행기준에 의한 수익인식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특정 회계기간 의 의무이행활동과 성과의 정도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제공.. ① 거래가 발생하는 기간에 거래의 영향을 보고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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