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면적의 77배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호 주의 수도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드니나 멜버른 이 아니라 인구 32만 명의 계획도시인 캔버라다.
190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국가수 도의 건설이 논의되었으며 1913년부터는 도시건 설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만남의 장소’라는 의미를 가진 캔버라의 입지선정, 계획 및 설계, 건 설과정에서 제기된 다양한 논의와 사업진행방식은 행정중심복합도시를 건설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 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수도건설의 배경
캔버라 건설은 영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과 밀 접한 관련이 있었다. 자치권을 요구하는 식민지 주 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빅토리아 여왕은 1900
년 사실상의 독립을 명시한 호주연방헌법에 서명 하게 되었고 1901년 1월 1일 호주연방이 정식 출 범하였다. 호주는 6개의 주(State)로 이루어진 연 방국가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상징 성이 높은 국가수도를 어디에 건설할 것인가 결정 하는 것이었다.
입지선정을 위한 치열한 경쟁
연방헌법에서는 수도를 신도시의 형태로 건설한다 는 내용만 포함되어 있을 뿐 구체적인 위치는 결정 되지 않아 많은 논란이 있었다. 특히 시드니가 있 는 뉴사우스웨일스주와 멜버른이 있는 빅토리아주 는 수도를 유치하기 위해 경쟁하였다. 시드니는 1788년 최초의 백인정착지로 건설된 이후 중심도 시로서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멜버른에서 금
전원도시에서 국가수도로, 캔버라
이왕건|국토연구원 책임연구원 세 계 의 도 시 ∙ 8 3 C a n b e r r a
전원도시에서 국가수도로, 캔버라
이왕건|국토연구원 책임연구원 세 계 의 도 시 ∙ 8 3 C a n b e r r a
의회와 중심지역의 모습 의회와 중심지역의 모습
광이 발견되면서 19세기 후반부터 급성장하자 시 드니는 중심도시의 지위를 위협받게 되었다.
1899년 1월 주지사 회의에서 수도는 뉴사우스 웨일스주에 건설하되 임시수도는 멜버른으로 하자 는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졌다. 연방정부는 입지선 정을 의회에 위임하였는데 의회는 토론을 거쳐 수 도의 입지기준을 다음과 같이 최종 결정하였다. 첫 째, 뉴사우스웨일스주에 위치하되 시드니로부터 100마일(약 161km) 이상 떨어진 지역에 있어야 한다. 둘째, 다습하지 않고 쾌적한 기후조건을 갖 추어야 한다. 셋째, 주민들을 위한 생활용수뿐만 아니라 도시경관을 형성할 수 있는 충분한 수자원 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100평방마일(약 259km2) 이상의 토지를 연방정부에 무상으로 제공 할 수 있는 지역이어야 한다.
40개 지역을 추천받아 이 중 23개 지역이 검토 되었다. 상∙하원에서 선발된 조사단은 1902년부 터 조사에 착수하여 알베리(Albury), 아미데일 (Armidale), 봄발라(Bombala), 레이크 조지(Lake George), 오렌지-배서스트(Orange-Bathurst), 투 무트(Tumut) 등 6개 지역을 후보지로 선정하였다.
최종 후보지를 선정하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하였 으나 참여위원들조차도 의견이 달랐다. 처음에는 알베리지역을 추천하였으나 최종 후보지는 투무트 와 오렌지지역으로 변경되었다. 결국 의회에 이관 되었으나 해결되지 않았다. 1904년 상원의원과 전 문가로 구성된 조사단이 현지조사에 착수하여 달 게티(Dalgaty)지역을 최종 후보지로 추천하였으나 빅토리아주의 경계와 너무 근접해 있다는 이유로 반 대 여 론 이 비 등 하 자 조 사 단 은 마 쿨 마 (Mahkoolma), 캔버라, 레이크 조지지역을 후보지 에 추가하였으며 1906년 재조사가 진행되었다.
1908년 연방의회는 재투표를 통해 야스(Yass), 레
이크 조지, 무룸비쥐(Murrumbidge)지역을 경계로 하는 야스-캔버라지역을 개략적인 대상지로 최종 선정하였다. 그러나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가 큐 안비얀(Queanbeyan)시를 제외해줄 것을 요청해옴 에 따라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변경되었다.
최종 후보지의 확정과정
구역 내에서 가장 적정한 위치를 선정하는 과제는 찰스 스크리배너(Charles Scrivener) 조사팀에 의 해 이루어졌다. 조사팀은 5개월 동안의 현지조사 를 통해 캔버라, 야로룸라(Yarrolumla), 무가무가 (Mugga Mugga), 제라봄베라(Jerrabomberra)를 후보지로 추천하였으며 몰롱그로강의 광활한 범람 원인 캔버라를 최적의 대상지로 판단하였다. 캔버 라지역은 남쪽과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수 있고 북쪽과 북동쪽지역의 양호한 조망을 확보 할 수 있었다. 또한 캔버라는 몰롱그로강의 범람원 이므로 인공댐을 건설할 경우 도시의 중심지역에 양호한 경관을 갖춘 인공호수를 건설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조사팀의 추천이 승인되어 1909년 연 방 소 재 지 수 용 법 (the Seat of Government Acceptance Act)이 인준되었으며 1911년 1월 1일 정부소재지법안(the Seat of Government Bill)이 의회를 통과함으로써 910평방마일(약 2,357km2) 의 수도지역(Federal Capital Territory)이 최종 확 정되었다. 입지기준을 선정하고 최종대상지를 확 정하는 데만 10년이 걸린 셈이다.
건설의 초기단계
1823년 최초의 유럽인이 정착하기 시작한 캔버라 지역은 수도로 건설되기에는 부적절한 초원지역이
었다. 연강우량이 580mm 정도로서 여름에는 가뭄 과 화재가 빈번하였고 척박한 토양에 있던 수목들 은 방목된 가축에 의해 이미 황폐한 상태였다. 따 라서 수도를 건설하기 전에 토양침식을 막을 수 있 도록 1,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야 했다. 수도지 역으로 결정된 1911년 캔버라지역의 전체인구는 1,714명에 불과하였다.
정부는 1911년 4월 수도건설에 필요한 최고수 준의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국제현상설계방식을 채택했다. 세계 각국에서 공모한 137개의 설계안 중에서 시카고 출신의 건축 및 조경가인 월터 그리 핀의 안이 1등을 차지했다. 그리핀의 설계안은 대 상지의 자연지형, 즉 언덕과 몰롱그로강을 도시의 기하학적 공간구조와 절묘하게 조화시켰다는 점에 서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그리핀 계획의 기본이념 은 공공공간을 기념비적인 형태로 연결함으로써 강력한 축을 형성하는 도시미화계획의 전통과 주 거지역을 간선도로와 공공, 상업용지로부터 분리 하고 식재계획에 충실한 전원도시 개념을 혼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13년 10월 18일 정부는 국제현상공모에 당선 된 월터 그리핀을 연방수도설계 및 건설책임자로 임 명하고 부처위원회를 해체하였다. 그러나 그리핀과 정부가 임명한 위원들 사이에는 기본적인 시각차가 존재하였다. 그리핀은 그의 설계안이 1등으로 당선 되었기 때문에 사업집행을 위한 계획으로 인정된 것 이라고 생각한 반면 위원들은 그리핀의 계획안이 하 나의 참고사항이며 실행계획을 위한 최종결정이라 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양자간에는 지속적인 긴장과 불화가 조성되었다. 호수형태와 다리위치 등 중요한 설계요소에 대한 그리핀의 계획은 건설과정 에서 자주 변경되었다. 계획안을 유지하려는 그리핀 의 제안이 거부되고 재계약도 이루어지지 않아 그리
▲아인슬리산에서 바라본 전쟁기념관과 연방의회
▲전쟁기념관 전경
▼연방정부가 추천한 말발굽 형태의 대상지 경계와 정부에 의해 최종승인된 연방행정구역 경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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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은 1920년 캔버라를 떠나게 되었다. 그때까지 그 리핀의 계획에 따라 완성된 건물은 없었다.
1921년 1월 22일 연방수도자문위원회(Federal Capital Advisory Committee)가 구성되어 1924년 까지 운영되었다. 위원회는“기념비적인 건축물과 장식적인 토목사업으로 이루어진 그리핀의 계획은 스케치계획에 불과하다”며“도시 전체를 동시에 개발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핀의 계획은 재고되어 야 하며 의회와 정부부처를 위한 항구적인 건설계 획도 경제상황으로 인해 연기되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위원회는 그들 이 원하는 장소에 어떠한 건물도 지을 수 있는 권 한을 가지게 되었다. 위원회가 원하는 형태는 그리 핀의 설계를 일부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와 건 축물의 배치를 완전히 바꾸는 것이었다. 정부는 1923년 비용절감을 위해 임시의회를 캠프힐 (Camp Hill)의 경사면에 건설할 것을 결정하였으 며 의회건물은 1927년 완공되어 공식적인 업무를 시행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그리핀이 제시한 중요 한 설계개념인 의회를 중심으로 한 삼각형의 중심 축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원회는 도시 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이 없었다.
1925년에는 연방수도위원회(Federal Capital Commission)가 창설되었는데 위원들은 건설사업 에 대한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위원회는 최초 로 정치적인 지원을 받게 됨으로써 개발의 초기단 계에서 문제가 된 재정적 제약요건을 극복할 수 있 었다. 위원회는 연방수도자문위원회처럼 그리핀의 계획을 비판하고 연방수도자문위원회가 계획한 전 원도시형 개발계획을 고수하려 하였다. 연방수도 위원회의 캔버라 건설계획은 상징적인 수도를 건 설하기보다 초점 없이 교외지역으로 확산되는 주 거지를 개발한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1930년부터 1955년에 걸친 대공황, 2차 세계대 전, 전후 복구사업에 따른 물자부족 등으로 인해 캔버라 건설은 다른 사업에 비해 우선순위에서 뒤 지게 되었다. 내무부가 캔버라 건설을 책임지고 있 었으나 도시계획은 부서의 중심업무도 아니었다.
담당 부서는 개발사업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에 대한 확신도 없었기 때문에 도시의 일부지역에 대 한 설계안을 제출하는 데 그 역할이 한정되었다.
1938년 12월 17일 국가수도계획 및 개발위원회 (National Capital Planning and Development Committee)가 설립되었고, 1946년 시청을 중심으 로 한 주변지역(Civic Center)과 의회의 삼각형지 역(Parliamentary Triangle)에 대한 독자적인 설계 안을 준비하였다. 이것 역시 그리핀의 중요 설계개 념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었다.
건설사업의 본격화
1957년 10월 국가수도개발위원회법(The National Capital Development Commission Act 1957)이 통 과됨으로써 캔버라 건설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 다.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중앙정부의 역할이 중요 시됨으로써 과거 주정부에서 다루던 업무들이 1950 년대 후반부터 중앙정부로 이양되기 시작한 것도 중요한 변화요인이었다. 총리인 로버트 멘지스 (Robert Menzies)는 도시계획가인 윌리엄 홀포드 (William Holford)의 자문을 얻고 국가수도개발위 원회(National Capital Development Commission) 를 발족시키면서 캔버라 건설은 활기를 띠었다. 위 원회는 다양한 부서로 나누어진 창구를 일원화하였 고 계획과 건설에 필요한 주거용 토지, 주택, 학교, 커뮤니티시설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개별 부처나 장관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권한
을 가진 집행위원회의 성격을 가짐으로써 일반적으 로 거쳐야 하는 공공사업위원회(Public Works Committee)의 심의를 거치지 않아도 되는 권한도 가지게 되었다. 홀포드는 1958년 그리핀의 기하학 적 계획안을 검토한 후, 경관효과를 중시하였고 의 회건물을 그리핀호수 주변에 배치하는 계획안을 준 비하였다. 1964년 공공건축물의 배치계획이 실현되 었고 레크리에이션시설로 활용될 수 있는 그리핀호 수가 완성되었다. 1961년부터 1965년까지 도심주 변에 있던 상업∙업무지역은 대부분 사무실, 상가, 은행, 극장, 법원 등의 용도로 채워졌다.
국가수도개발위원회의 초대의장이며 1958년부 터 1972년까지 국가수도개발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한 존 오버롤(John Overall)은 그리핀이 주장 한 기하학적 도시형태를 무시하였다. 그는 캔버라 가 현대도시에서 발생하는 교통수요를 수용할 수 있는 전원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도 시의 물리적 확산과 증가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 한 개발사업을 진행하였다. 이전에 홀포드가 수립 한 계획에 따라 인공호수와 우덴(Woden), 웨스톤 크릭(Weston Creek), 벨콘넨(Belconnen)과 같은 전원형 신도시가 캔버라의 북쪽과 남쪽지역에서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1962년 캔버라 도심에서 남 쪽으로 12km 떨어진 거리에 최초의 위성도시인 우 덴과 6만 명의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웨스톤 크릭 이 건설되면서 1964년 주민이주가 시작되었다. 우 덴과 웨스톤 크릭은 현재 독자적인 도심을 가지고 있으며 정부행정, 소매 및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인 력규모가 약 8천 명에 달한다. 1966년에는 북쪽지 역에 벨콘넨, 1973년에는 우덴-웨스톤 크릭의 남 쪽지역에 약 10만 명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투 거라농(Tuggeranong), 1975년에는 캔버라의 북쪽 에 있는 궁가린(Gungahlin)이 차례로 건설되기 시 작하였다. 궁가린에는 현재 미첼공업단지가 개발 되었으며 8만 5천 명의 인구를 수용할 계획이다.
캔버라 주변의 신도시들은 개별적인 상업중심시 설과 고용규모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족성을 가 지고 있으며 개성 있는 도시로 개발될 잠재력도 가 지고 있다. 도시들은 도로, 자전거전용로, 도시간 대 중교통 연결망을 포함한 종합교통시스템에 의해 상 호 연계되어 있으며 각 도시들은 국가수도로서 캔버 라가 수행하게 될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현재 캔버라는 시민들이 휴식공간으로 이용하 는 그리핀 호수를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1등으로 당선된 월터 그리핀의 설계안
▼연방수도가 건설된 지역의 개발 이전 모습
호수 남쪽에는 연방정부의 의회와 각종 관공서가 입지해 있고 그 주변지역에는 주택지가 형성되어 있다. 호수 북쪽에는 교육지구, 시청사지구가 형성 되어 있으며 배후지역에는 공업지역과 주택지역이 형성되어 있다.
캔버라는 국가의 수도로서 갖추어야 할 웅장함 과 상징성뿐만 아니라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는 주 민들도 동시에 고려한 설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중요한 국가기관이나 공 공시설물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 걸어서 접근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며 도시에서 보행자를 찾아 보기 힘들다. 또한 도시가 제공하는 다양한 즐거움 중 하나인 유흥이나 위락시설을 찾아보기 힘들다.
저녁시간 이후 소위 도심이라고 하는 지역에서도 시민들이 별로 없어 도시의 활력을 찾아볼 수 없는 적막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주말에 사람들 이 해변이나 시드니, 멜버른 등의 대도시로 이동하 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의 관리체계 및 특성
1988년 수도지역이 자치권을 확보함에 따라 수도
지역은 중앙정부인 국가수도청(National Capital Authority)과 자치정부인 호주수도지역(Australian Capital Territory)정부에 의해 관할되는 지역으로 나뉘어져 관리∙운영되고 있다. 국가수도개발위원 회는 1989년 국가수도계획공사(NCPA: National Capital Planning Authority), 1997년 국가수도청으 로 명칭이 변경되고 역할도 축소되었다. 국가수도 청은 국가수도로서의 상징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 요한 그리핀호수와 주변지역, 의회삼각지역, 국가 중심시설지역, 주요간선도로 및 주변 등을 관할하 고 있으며 나머지지역은 자치정부에 의해 관리되 고 있다. 동일한 행정구역에 대해 각 주체가 별도 로 개발 및 관리계획을 수립하여 관리함으로써 양 자간에 불필요한 긴장관계가 형성되고 비효율성이 제기되고 있다.
캔버라의 다른 두드러진 특징은 토지의 국ㆍ공 유화정책이다. 이러한 방식은 도시개발과정에서 난개발과 부동산투기를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 는 효과가 있다. 외교단지의 일부 토지를 제외하고 는 100년 동안 장기 임대하는 방식으로 토지자산 을 관리하고 있다.
캔버라의 현재 도시 모습▶ 국방부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