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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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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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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시대

(2)

• 고려시대 가족의 특성

– 가족성격의 변화는 사회사상의 변화보다 지체 but 결국 사회사상을 반영하며 이 는 생활양식과 그 에 따른 주거의 대응으로 연결됨

• 서류부가제가 여전히 존재: 남편이 아내의 친정에서 생활한 기간은 3-24년, 남편 집으로 간 나이는 18-39세

• 근친혼, 동성혼이 행해졌으나 말기로 내려올수록 감소추세

• 혼인연령은 전기에서 후기로 내려올 수록 낮아지는 경향

• 혼인형태:

– 일부다처제, 다처간의 신분차이가 없음, 처와 첩의 지위에 따른 차이가 별로 없고 첩의 신분의 귀천에 따라서 차이가 있음

– 첩이 한 집에 살거나 본체와 다른 주택에서 각각 살기도 함 – 조강지처의 지위가 견고했던 것으로 보임

• 왕실, 양반, 양인 모두 자유롭게 재혼가능

• 가족형태: 결혼한 차남, 삼남, 딸이 배우자와 함께 가족원이 되는 경우가 많 음

• 상속: 자녀균분상속, 친손과 외손의 차별이 거의 없음

– 고려시대는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의 가족 정형과는 성격이 달랐음

고려의 주거

(3)

음양 풍수도참 사상의 유행

– 풍수지리설과 도참사상이 결부되어 정치, 사회, 및 일반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침 – 풍수사상: 고대 중국사회에서 음양사상과 오행사상을 바탕으로 땅의 길흉을 판단하

는 사상과 방법

– 음양사상: 자연계의 변화와 순환의 이치를 음기(陰氣)와 양기(陽氣)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려는 일종의 자연관이며 우주관

• 하늘은 양: 만물에 빛과 열 제공

• 땅: 땅의 덕이 만물을 양육, 신장시킴

• 음양사상에서의 우주관, 자연관은 주택을 형상화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침

• 집은 자아와 가족집단의 확장이며 이들의 삶이 지속되어 나가는 유일하고 고유 한 세계

• 집은 그 민족집단의 우주관을 담은 소우주

– 이상적인 집은 대자연의 질서가 갖추어진 소우주의 인공적 창조

– 도참: 징후, 전조, 신화 등의 의미로 점차 닥쳐올 길흉화복을 예언, 암시, 약속하는 신비적, 미신적 성격이 농후한 사상체계

– 왕건의 훈요십조에도 풍수적 사고 관념을 표출

• 2훈: 기존 사찰 이외 사찰건립방지 다른 지방 호족의 세력기반을 없애자는 의도

고려의 생활상과 주거상황

(4)

• 지배계급의 사치

– ‘고려사절요’, 왕과 귀족계급이 주거에 대한 사치가 심했던 것으로 나타남

• 뜰의 넓이가 100보, 집의 면적이 수 리(理)에 다다름, 단청, 금은으로 장식, 누각 설치, 청자기와 등

• 고려에 귀화한 아라비아인 장순용: 기와와 자갈로 담을 쌓으면서 화초무늬 를 박았다는 기록이 있음(고려사) 이후 담장에 화초무늬를 장식하는 방법은 귀족들 사이에 널리 유행하였고 조선조 궁궐 담장에까지 이어짐

– 신라시대와 같은 가사규제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

• 문벌귀족이 사치스러운 주택을 건설함에 따라 최승로가 가사규제의 필요성 을 상소 but 규제가 잘 실현되지 않은 것으로 보임

• 단청에 대한 규제 나타나지 않음. 단지 층수가 높은 집은 규제하고 平屋을 권장한 기록 있음

– 민가의 형상

• 문헌 ‘고려도경’에 따르면 “백성의 집이 벌집과 개미구멍같이 보였고 지붕 은 풀로 이었으며 열에 한 두 집은 기와를 덮은 집도 있었다”

• 움집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 손쉽게 지을 수 있는 주거형태

• 고려시대에 움집은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형태의 일반 민가인 것으로 보임

귀족주거의 발달

(5)

• 별서(별장)건축의 유행

– 엘리트 계층으로부터 도시를 떠나 전원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는 증거

• 귀족들의 농장경영과 관계 있음

• 당나라 사대부들의 은둔생활을 모방, 도가적 신선생활을 추구

– 인공적인 자연경관보다는 자연적인 모습에 가치를 두는 도가적 자연관 유행 – 자연을 인공적으로 조성하는 삼국시대 조원방식으로부터 경관이 수려한 입지를

찾아 건축과 연관시키는 방법으로 발전 전원적 별서건축과 조원방식은 조선시 대까지 연결됨

• 누정 건축의 발달

– 누정 건립은 삼국시대부터 시작했으나 고려시대에 증가, 보편화

• 삼국시대문헌 10여 개 미만, 고려시대(고려사) 32개, 정이 52개

• 삼국시대: 왕족계층에서 공적인 목적으로 건립, 고려시대에는 지방 귀족계층 에서 사적인 목적으로 건립되는 경우가 많았음

• 장소

– 삼국시대: 도성 안에 조경과 함께 건설 – 고려시대: 경관이 좋은 자연 속에 세워짐.

귀족주거의 발달

(6)

• 건축을 위한 대지 선택 폭이 넓어짐을 의미

– 산봉우리, 계곡, 물가 등 자연경관과 관련된 입지에 건립된 기록이 많이 나타남 – 지면이 고르지 않은 대지에 건축을 위해 루, 축대와 같은 건축적 방법이 사용됨 – 사륜정기(동문선, 이규보)

• 새로운 개념의 정자

• 수레처럼 이동해 다닐 수 있는 정자(수레와 정자를 합한 형상)

• 한자리 면적 (2척x 2척), 중앙에 바둑판 위치,출입공간과 거문고를 놓아두는 공간, 6척 X 6척의 정사각형 평면: 6명이 바둑판을 둘러싸고 앉을 수 있도록 함

• 주변에 난간설치: 기댈 수 있음

• 대나무와 대자리로 엮은 지붕을 얹어 지붕을 가볍게 함

(7)

• 온돌의 발달과 확산

– 왕궁에서는 여전히 온돌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됨

• 침상, 평상, 용상 등 입식 생활 (고려도경)

– 고려시대에 이르러 온돌이 지역적 계층적으로 확산되는 양상

• 발해의 상경 용천부 궁성 안의 살림집(상류계층 주거로 추정): 온돌이 발견

• 고려시대: 한반도 전역에 전파

– 익산 미륵사지 서편에 온돌시설 발견: ㄷ, ㄱ 자 쌍줄 고래, 아궁이가 방 안에 시설

– 감은사 온돌시설 발견: 4줄 고래, 아궁이가 건물밖에 고래 방향으로 설 치 온돌면적이 넓어지고 한 단계 발전함

• 고려시대 건물터에서 고래수가 증가됨

– 고래수의 증가는 난방면적의 증대 의미

» 방 일부분에 설치된 원시형 온돌이 방 전체를 데우는 시설로 발전 함을 의미

• 아궁이와 온돌의 분리

– 부엌과 방이 벽체로 구획 됨

– 난방공간은 무연의 청결한 공간, 연기가 없는 청결하고 쾌적한 주거공 간이 만들어짐.

주택내부와 바닥구조

(8)

• 온돌과 마루의 결합

– 고려시대주택은 온돌과 함께 마루도 시설되었을 것으로 추정

• 문헌 기록(동문선): 온실(온돌)과 냉재(마루), 욱실과 냉청으로 묘사 한 집 에 시설된 다른 용도의 공간 의미하며 온돌과 마루로 이해 됨

– 일반화를 의미하지 않음 but 따뜻한 방과 시원한 마루를 겸비한 주거 형식의 출현 의미

• 온돌과 마루는 칸막이 벽 또는 문으로 구획되었을 가능성 공간의 기능별 분리를 시사

• 맹씨 행단의 평면형식

– 중앙에 대청마루 양 옆에 온돌방을 배치, 온돌방은 앞뒤 두 부분으로 나뉘어짐

(9)

충남 아산의 맹씨행단

고려시대 상류계층 주거의 건축 방식 추정에 도움 기둥

초익공 형식의 공포설치, 앙서형 쇠서(조선중기 이후에 나타나는 초익공 형식과 다름

창방이 없음 창호

정면: 대청 2칸부분에 설치-각각 3짝 창호 구성-조선시대는 짝수로 구성

죄측의 중앙부분만 외여닫이문, 나머지는 모두 들문으로 처리

창호 아래 위에 모두 머름을 설치

우물 정자의 격자살 사용 –조선시대에는 주로 띠살문 사용-

창호구성수법: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등 고려시대 건물의 창호방식과 유사함

창호

문과 창의 기능이 혼합되어 출입과 통풍, 채광이 가능, 전면개방 가능 창은 머름대를 설치 그러나 문과 기능상의 차이는 없음

고려시대 주택의 형태와 공간

참조

관련 문서

청색당초풍 초화문라 부분(靑色唐草風草花紋羅 部分)

분석결과로 첫째, ‘개’는 지장보살을 모시는 동물로서 신비로운 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비현 실적으로 형상화되었으며 보살의 지시에 따르고 수행을 돕는 호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