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Consideration of Jolheon Jo Taek-seung(拙軒 曺澤承, 1841-1907)'s portrait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1

Share "Consideration of Jolheon Jo Taek-seung(拙軒 曺澤承, 1841-1907)'s portrait"

Copied!
8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 접수▸2012년 10월 31일 수정▸2012년 11월 28일 채택▸2012년 11월 29일 ▒ 교신저자 이은하, 서울시 성동구 성수1가 656-1066

Tel 010-3401-4552 Fax 02-927-4377 E-mail promise710@hanmail.net

拙軒 曺澤承(1841-1907) 肖像畵 考察

이은하

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강사

Consideration of Jolheon Jo Taek-seung(

拙軒 曺澤承

, 1841-1907)'s portrait

Lee Eun-ha

Department of Archaeology and Art History of Korea University

Jo Taek-seung(曺澤承, 1841-1907), who devoted himself to medical science mostly living in Haenam, and his son Jo Byeong-hu(曺秉侯, 1869-?) are significant in the history of Korean oriental medicine. The medical science of Jo Taek-seung appointed as Jusa(主事) of Hyeminwon(惠民院) in 1902 was handed down to his only son Jo Byeong-hu, who succeeded to his father's medicine and polished up the medicine, and recorded the results 󰡔Sanghangyeongheom bangyochwal(傷寒經驗方要撮)󰡕 in 1933.

Jo Taek-seung's portrait has been handed down to Jo Taek-seung's descendents' house in Munane-ri, Haeman. Not only does Jo Taek-seung's portraits well present the features of portrait mode of Joseon Dynasty period in the 19th century in their front view, exposure of two hands, expressive mode, background articles, etc, but also praises, poems, etc. giving information on manufacture intent, etc. to give prominence to the authors recorded by Jo Taek-seung, time of manufacture and position of medical official appears in one screen.

In this paper, through disaster-removing poetic sentence showed in Jo Taek-seun'sg portraits, it was found that the author of the portrait is Choi Byeong-uk who worked mostly staying in Seoul and the present portrait was the one re-painted in 1907 by revising the portrait painted in 1894 when Jo Taek-seung was 54 years old, after Jo Taek-seung died. With regard to revised portion, presuming through records on the picture and comparative analysis of mode with portraits of doctors in the 20th century, it seems that the clothing of Confucian scholars in the first version was revised into the clothing of medical officials showing the position of Jo Taek-seung who took office as Jusa of Hyeminwon at the time of re-painting the portrait.

Jo Taek-seung's portrait not only becomes important materials in the oriental medicine and historical world in the aspect of manufacture process, mode, etc. of Korean portraits including an aspect of medical official's portraits, but has significant meaning from the aspect of fine art history or clothing history.

Key Words : Jo Taek-seung, Jo Byeong-hu, Choi Byeong-uk, Hyeminwon, Medical official's portrait, Korean portrait

Ⅰ. 머리말

조택승(曺澤承, 1841-1907)과 그의 아들 조병후 (曺秉侯, 1869-?)는 해남에 근거지를 이루며 의학과 제세구민에 매진한 인물들이다. 조택승은 창녕 조씨로 자는 대안(大安)이며, 호가 졸헌(拙軒)이었다. 그의 아버지 석남(石南) 조석창(曺錫昌)은 20세에 생원시 에 급제했으며, 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조택승은 33세인 1873년

(2)

도1 <조택승 초상>, 개인소장 도2 <조택승 초상> 왼편 제찬과 제시 부분 도3 <조택승 초상> 오른편 제문과 제시 부분 (고종10)년에 부친의 공훈으로 진사가 되었으며, 1902년 에 혜민원 주사에 임용되었다. 조택승의 의학은 외아들인 조병후에게 이어졌는데, 조병후는 호를 행치(行癡), 당호를 병성각(缾城閣)이 라 했고, 해남에 회춘각(回春閣)이란 약포를 운영했다. 그는 부친의 의학을 물려받아 더욱 정미하게 연마했으 며, 그 결과를 1933년 󰡔상한경험방요촬(傷寒經驗方要 撮)󰡕에 담아내었다. 이들 부자 중, 조택승의 초상화가 해남 문내리 후손 의 집에 전해지고 있어 주목된다. 조택승의 초상화는 인물의 자세와 표현방식, 배경의 기물 등이 19세기 조 선 초상화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 니라, 아들 조병후에 의해 기록된 작가와 제작시기, 의 관의 신분을 부각하고자 한 제작의도 등의 정보를 알 려주는 찬과 시 등이 화면 안에 등장하기 때문에, 한의 학과 역사학계에서도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미술 사나 복식사적 측면에서도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본고 에서는 조택승 초상화의 기록과 양식고찰을 통해, 초상 화가 지니는 사적(史的) 의의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Ⅱ. 초상화의 작가와 제작시기

정면좌상의 자세를 취한 조택승은 머리에는 사방건 (四方巾)1)을 쓰고 포(袍) 위에 운문과 화훼문이 어우 러진 옥색 전복(戰服)2)을 입고 있으며, 오른손으로는 부채를 들고 왼손으로는 세조대(細條帶)를 쥐고 있다. 배경에는 바닥에 돗자리가 등장하고, 문방사우, 서탁, 서책, 차탁과 차 도구, 과일 등의 기물이 등장한다.(도1) 조택승을 중심에 두고 화면 좌우 상단에 있는 제발 과 찬, 시 등은 이 초상화가 제작된 시기와 작가, 제작 의도 등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제시하고 있다. 먼저 화면 왼편의 제는 정만조(鄭萬朝)가 지은 화상 찬과 화제시, 그리고 아들 조병후가 지은 시로 구성되 어 있다. 이 찬과 시들은 조택승의 문집 󰡔졸헌집󰡕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도2)3) 마지막 구절에는 “1954년 1 월에 불초자 병계가 삼가 쓰다. [甲午孟春 不肖子秉桂 謹書]”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동일한 내용이 실린 󰡔졸 헌집󰡕에는 “1954년 1월에 불초자 병후가 삼가 쓰다. [甲午孟春 不肖子秉侯 謹書]”로 되어 있고 조택승의 아들로는 조병후가 유일하기 때문에, 그림에 기재된 1) 사방건은 조선시대 사대부나 유생들이 평상시 집안에서 쓰던 관이다. 말총으로 섬세하게 엮어서 만들며, 아래가 좁고 위가 넓은 육면체 형태로 윗부분은 막혀있다. 사방관(四方冠)이라고 도 한다. 김영숙 편저. 󰡔한국복식문화사전󰡕. 미술문화. 1998. p.226. 참고. 2) 전복은 원래 조선시대 무관들의 군복으로 소매와 섶이 없으며 양 옆의 아랫부분과 등솔기가 허리에서부터 끝까지 트여있다. 전복은 고종 21년(1884) 의복 간소화에 따라 소매가 넓은 종 류의 옷을 입지 못하게 되면서, 문무 관리들이 평상복으로 입 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어린이들이 명절 때 입기도 한다. 김영숙 편저. 앞의 책. pp.329-330. 참고. 3) 󰡔졸헌집󰡕. 「拙軒先生畵像贊 【並附詩】, 茂亭居士 鄭萬朝題」 참고.

(3)

병계는 병후로 생각된다.4) 화면 오른편에는 조택승의 본관과 자, 생몰년 등을 기록한 글과 화제시, 그리고 그림의 작가와 제작시기 등을 언급한 구절이 등장한다.(도3)5) 제시를 한 사람 이 언급되지 않았고 자체가 왼편의 찬, 시와 동일한 것 으로 보아, 오른편의 제화시문은 모두 조병후가 짓고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6) 제화시문 다음으로는 “1894년 1월 9일 서울 사는 석치 최병육이 모사하였 고, 1907년 9월 9일 관직관복을 최병육이 다시 고쳐 그렸다. [甲午(1894년)孟春九日(1월9일) 京城 崔丙六 石痴 摹寫 丁未(1907년)菊秋重陽(9월9일) 官職 冠服 崔丙六 改摹]”라는 구절로 마무리된다. 이 마지막 구절은 초상화 제작과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시사하고 있다. 첫째, 초상화의 작가가 석치 최병육이라는 점이다. 최병육은 미술사학계에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 그의 생애나 활동에 대한 자 세한 사항은 알 수 없지만, 현전하는 개인소장 󰡔명심보 감󰡕에 병신년(1896) 여름에 경성북촌(京城北村) 자하 동거사(紫霞洞居士) 최병육(崔丙六)이 필사했다는 기 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최병육은 서울 북촌 자하 동에 살면서 화업을 했던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7) 둘째, 초상화의 제작시기에 관한 것이다. 이 초상화 는 1894년 1월 9일 조택승이 54세 때 최병육에 의해 처음 그려졌는데, 이후 1907년 9월 9일에 최병육에 의해 다시 수정되었다고 한다. 조택승은 1907년 2월 에 졸하였으므로, 이 그림은 조택승의 생전에 제작되 4) 󰡔졸헌집󰡕의 「졸헌선생묘갈문」에는 조택승에게 아들로는 조병 후가 유일하다고 기록되어 있다.[“子一, 秉侯, 孫二, 瑾煥․瑩 煥, 餘幼, 不能盡記焉”] 따라서 조병후의 원래 이름이 조병계 였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현재로서는 사실여부를 알 수 없다. 5) 拙軒先生曺澤承 貫昌寧 字大安 堂名省忍 申丑(1841)九月十三 日 茂時生 壬寅(1902)蒙天恩 陞惠民院主事 丁未(1907)二月初 二日(2월2일) 茂時卒 6) 부모님을 위하여 생원시를 무시험 통과하니 고향에서는 초유 의 일이라 칭송했지.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알려지지 않은 길을 열었으니 마음은 사람을 구제하는데 급급해서였지. 예술 에 노니느라 젊은 시절 재상의 집안에 출입하였고, 글 솜씨 뛰어났으나 늙어서는 산골짜기에서 구부정하게 지내네. 그림 으로 형상을 모사한다고 해도 누가 마음 속 굽이굽이를 형용 할 수 있으랴. 산중의 달은 밝고 환하며, 가을 물은 맑고 투 명하네.(爲親而闋小科 鄕稱破天荒 濟衆而開迷途 心存急人難 遊於藝 靑春出入宰相之門 工於詞 白首偃蹇山林之間 丹靑莫狀 孰形心曲 山月皎潔 秋水澄澈) 7) 개인소장 필사본 󰡔명심보감󰡕 참고. 고 사후 7개월 뒤에 다시 개모된 수정본인 셈이다. 셋째, 개모 시에 수정된 부분에 대한 것이다. “관직 관복을 개모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조택승의 생전에 완성된 초본에서는 현재의 관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그림상의 조택승은 사방건(四方巾)을 쓰고 포 위에 운문과 화훼문이 어우러진 옥색 전복(戰服)을 입고 있다. 그렇다면 초본에서의 조택승은 어떠한 차 림새였으며, 조택승 사후에 현재의 관복으로 수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졸헌집󰡕의 「졸헌선생묘갈문」에 따르면 조택승은 평소에 대중을 구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만 년에는 의학서적으로 의학을 정밀하고 깊게 연구하였 으며, 시술에 효험이 있었으나 명의로 자처하지 않았 다고 한다.8) 의학에 정진한 결과, 조택승은 62세 되던 해인 1902년에 혜민원(惠民院) 주사(主事)에 제수되 었으며,9) 그로부터 5년 뒤인 1907년에 졸했다. 따라 서 조택승은 초상화가 처음 그려진 1894년에는 혜민 원 주사가 아니었으나, 사망할 당시는 혜민원 주사 신 분이었던 것이다. 개모된 현재 초상본에서 조택승이 착용한 무늬가 있 는 옥색 전복은 19세기에서 20세기에 활약한 화가 채 용신이 그린 이기영의 초상화(1918년작)와 권기수의 초상화(1919년작)에도 동일하게 등장한다.(도4, 5) 주 목되는 점은 이기영과 권기수 모두 중추원의 의관이었 다는 사실이다.10) 따라서 조택승의 의복 또한 20세기 의관들을 상징하는 차림새로 추정된다.11) 그림 왼편 화상찬의 “부의박대(裒衣博帶)12) 차림의 공의 모습, 그 안에 있으니 [裒衣博帶 公像在中]”라는 언급으로 미루어 보아, 초본에서의 조택승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초상화에 주로 등장하는 포(袍)나 학창의(鶴 氅衣)를 입고 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초 상본의 의복은 초본에서 그려진 포 종류의 옷 위에 무 8) “平素以濟衆急人爲己任 晩以醫書自娛 精究邃觧 試之無不應 亦 不以自命” 9) “上皇壬寅 拜惠民院主事 知舊貢賀 子孫獻壽” 10) 󰡔석지 채용신, 붓으로 사람을 만나다󰡕. 국립전주박물관. 2011. p.79 참고. 11) 현재까지 미술사학계나 복식사학계에서는 조선 의관들의 의 복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대한 추후의 연 구가 필요하다. 12) 부의박대(裒衣博帶)는 품이 넓은 옷과 폭이 넓은 띠라는 뜻으로, 유학자의 복장을 말한다. 포의박대(襃衣博帶)라고도 한다.

(4)

늬가 있는 옥색 전복을 덧 씌워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수정하기가 비교적 용이한 의복에 비해 관모는 형태 를 수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므로, 현재 초상본의 사방건은 초본의 것을 그대로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원래 사방건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평상시에 착용하던 것이었으므로, 이 또한 초본에서의 조택승이 유학자의 풍모로 그려졌음을 말해주는 근거가 된다. 조택승 주위에 등장하는 기물 또한 개모 시에 의복 의 수정과 더불어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조택승 뒤편 서탁의 각이 진 필통 안에는 붓, 종이 두루마리, 편지봉투가 들어 있고, 그 주변으로는 세 권의 책과 네 장의 흰 봉투가 등장한다.(도6) 세 권의 책 중 가장 앞 에 있는 책의 표지에는 󰡔졸헌요결󰡕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는데, 제목의 의미로 보아 이 책은 조택승의 의술에 관한 비결을 정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 이러한 책이 실제로 존재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조택승 사후 에 아들 조병후가 아버지의 의술을 정리하여 편찬하고 자 한 책의 가제일 수도 있다. 필통 앞의 흰 봉투들은 편지봉투라고 보기에는 좌우가 넓고 상하가 짧아, 처 방전이나 다른 의학적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 된다. 따라서 이 기물들 또한 의복을 수정하면서 의원 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용도로 부가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관직관복을 개모하였다”는 말은 조택승이 혜민원 주사가 되기 전에 그려진 초상화 초본에서는 일반 사대부의 복식으로 그려졌던 부분을 조택승이 혜 민원 주사의 신분으로 사망한 이후에 의원의 관직을 나타내는 복장으로 수정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 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조택승 초상화의 작가와 제작시기, 제작의 도 등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다음으로는 조택승 초상 화의 양식적 특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Ⅲ. 초상화의 양식적 특징

조선시대 초상화의 양식적 흐름에서 본다면, 이 초상 화는 19세기 초상화의 과도기적 표현양식을 보여준다 고 할 수 있다. 얼굴표현에는 18세기 초상화에서 유행 하던 필선과 선염법이 사용되고 있으며, 정면상의 자세 와 손에 기물을 쥐고 있는 것, 배경에 기물을 배치하는 방식 등은 19세기와 20세기에 유행한 양식을 따르고 있다. 조택승 초상화의 양식을 1)안면표현과 자세, 2) 배경의 기물표현으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안면표현과 자세

초상화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안면의 표 현이다. 얼굴은 초상화에서 외형 모사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인물의 정신표출 [傳神]이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 나는 부위이기 때문이다. 화가들은 시대별로 다양한 회 화적 기법을 적용하여 안면 표현에 많은 공을 들였다. 도4 채용신, <이기영 초상>, 1918년, 개인소장 도5 채용신, <귄기수 초상>, 1919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6 <조택승 초상>의 배경 기물부분

(5)

도7 <조택승 초상> 안면 부분 도8 <남구만 초상> 안면 부분 도9 <윤증 초상> 안면 부분 현전하는 조선시대 초상화 작품을 통해 대략적인 시대양식을 살펴보면, 16, 17세기의 초상화에서는 얼 굴에 색이나 음영을 거의 가하지 않고 오악(五岳, 이 마, 턱, 양쪽 뺨, 코)과 육리문(肉理文, 살갗의 미세한 결)을 표현한 선들을 얼굴색 톤에 맞추어 두드러지지 않게 그리는 것이 특징이었다. 18세기에는 얼굴의 선 표현이 이전보다 조금 더 명확해지면서 음영법이 시 도되었는데, 주로 눈 두덩이의 가장자리와 입 양쪽의 법령에 어두운 기를 넣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는 정확한 필선이 아닌 여러 번의 잔 붓질로 오악과 육리문을 표현하여 안면에 자연스러운 입체감을 부여 하였다. 일례로 안면의 코 표현을 보면, 18세기에 분 명하고 진하게 도드라졌던 코의 윤곽선이 19세기에 들면서 사라지고 코의 형태는 여러 번의 붓질을 통해 완성되었다. 눈두덩이와 법령 주위에만 가해지던 음 영 또한 잔 붓질의 강약조절을 통해 오악 전체에 골고 루 표현되었다.13) 조택승 초상화의 안면표현을 보면 전체적으로 갈 색기가 도는 어두운 색을 주조로 하여 가는 선으로 육 리문을 표현하고 있으며, 눈두덩이 가장자리와 입 양 쪽의 법령 등에는 미세한 선염으로 어두운 기를 살짝 넣었다.(도7) 이처럼 필선과 선염으로 얼굴의 오악과 육리문을 묘사한 것은 18세기 초상화에서 시도된 것 으로, 18세기 남구만 초상, 윤증 초상 등을 그 예로 13) 조선미. 「한국 초상화의 세계」.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 박물관. 2011. pp.261-262. 참고. 들 수 있다.(도8, 9) 다음으로 조택승의 자세를 보면, 정면좌상의 자세 를 취하고 있으며 두 손 중 오른손으로는 부채를 쥐고 왼손으로는 남색의 세조대(細條帶)를 잡고 있다. 부채 와 세조대는 화려한 매듭과 장식으로 구성된 술이 길 게 달려있어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조선시대 초상화에서의 주인공들은 정면상보다는 좌우로 살짝 틀어 앉거나 선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 가 많았다. 정면상은 19세기 들어 많이 등장하며, 20 세기 초반 사진술의 도입과 함께 더욱 선호되었다. 조 택승 초상은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적당한 입체감이 부여되었으나, 옷의 주름이나 굴곡의 표현 에서는 다소 도식적인 느낌을 준다. 주인공의 두 손이 옷 밖으로 드러나는 것 또한 18세 기까지는 흔치 않은 사례였으나, 19세기와 20세기의 초상화에서는 정면상의 유행과 함께 선호된 양식이었 다.14) 밖으로 표출된 손에는 주인공의 지위을 은유적 으로 드러내기 위한 용도로 등장하는 부채와 책, 안경 등이 들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부채와 세조대 를 쥔 조택승의 두 손은 안면에 비해 육리문이나 음영 이 거의 가해지지 않고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14) 조선시대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대개가 두 손을 도포 속으로 넣어 가지런히 모은 공수자세인 경우가 많았다. 손이 노출 된 18세기 초상화로는 <조영복 초상>(1725)과 <신임 상> (1722), <강세황 71세 초상>(1783)과 <채제공 초상>(1792) 을 들 수 있다. 중국 초상화에서는 17세기 이후 정면상의 유행과 함께 주인공의 두 손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6)

도10 <조택승 초상>의 배경 기물 부분 도12 <조택승 초상>의 배경 기물 부분 도11 이형록, <책가도 8폭 병풍> 부분, 19세기, 지본채색, 140.2×468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도13 작자미상, <책가도> 부분-귤,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 배경의 기물표현

조택승의 초상화에는 여러 가지 기물들이 등장하여 주인공의 신분과 내면의식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택승 뒤편 서탁의 󰡔졸헌요결󰡕 책과 그 앞의 봉투들은 의관으로서의 조 택승의 신분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 외의 책과 목제필 통, 붓과 종이, 과일과 차도구 등은 민화 책가도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18세기 이후 성행한 조선 사대부들의 문방청완과 고동 취향을 나타내는 것이다.(도10, 11) 조택승의 앞에 놓인 작고 낮은 탁자 위에는 붉은 색 과 옅은 녹색을 띄는 과일들을 담은 접시와 주전자, 찻잔이 놓여 있다. 흰 바탕에 푸른 당초문이 시문된 주전자는 청화백자로 보이며, 찻잔과 접시 또한 백자 로 추정된다.(도12) 과일들은 전체적 형태와 잎의 모양으로 보아 귤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귤(橘)은 길하다는 의미의 ‘길 (吉)’과 중국어 발음이 비슷하여 행운을 의미하는데, 옛날 황제가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썼으며 주나라 목 왕이 요지에서 서왕모에게 주었다고 전한다. ‘귤중지

(7)

도14 <조택승 초상>의 배경 기물 부분 도15 고구려 고분벽화 <안악3호분 묘주초상>, 357년,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오국리 소장. - 가운데 주인공은 크게, 주변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작게 표현되어 있다. 도16 <조숙하 초상>, 1871년, 견본채색, 66.6×41.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락(橘中之樂)’이라 하여 귤을 둘로 쪼개었더니 그 안에 서 두 노인이 바둑을 두며 즐기고 있더라는 전설이 있 으며, 귤의 풍미는 선계의 맛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15) 이처럼 접시에 담긴 귤은 책가도 등의 민화에도 등장 한다.(도13) 이상의 기물들은 시점이 다양하고 사물의 크기가 주 관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을 보인다. 조택승을 정면상으 로 표현한 것에 비해 돗자리는 화면 왼편에서 비스듬히 조감한 구도로 그려져 있다.(도14) 반면 작은 탁자 위의 귤이 담긴 접시와 차 도구들은 화면 오른편에서 조감한 시점으로 표현되었다.(도12) 조택승 뒤에 놓여있는 서탁은 화면 왼편에서 조감한 시점으로, 필통과 그 속의 종이 두루마리, 편지 봉투와 붓은 화면 오른편에서 조감한 장면으로 그려졌다. 또 한 󰡔졸헌요결󰡕을 포함한 세 권의 책들은 아래에서 위 를 올려다본 시점으로, 의약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 15) 경기도박물관. 󰡔조선 선비의 서재에서 현대인의 서재로󰡕. 책 거리 특별전. 2012. p.170. 참고. 되는 봉투들은 정면시점으로 그려져서 마치 서탁 위의 기물들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도 10) 이처럼 한 화면에서 여러 기물들이 다양한 시점으 로 표현되는 것은 책가도 그림에서의 기물표현 방식과 동일하다. 경물들은 시점이 다양하게 적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크기 또한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택승 앞의 탁자 와 과일 접시, 차 도구, 그리고 뒤편 서탁의 책 등의 크기는 주인공에 비례해 현저하게 작다. 이처럼 경물 들이 다양한 시점과 크기로 그려진 것은 동양화 특유 의 시점과 인물 표현방식 때문이다. 서양화에서는 소실점 하나를 정해 그것을 기준으로 사물을 ‘보고 있기’ 때문에, 소실점의 사물을 기준으로 하여 그 앞의 사물은 소실점의 사물보다 크기가 크고 뒤편의 사물은 크기가 작게 그려진다. 그러나 동양화 에서는 내 [我]가 화면에 이입되어 사물을 ‘보아 가기’ 때문에 작가의 보아가는 시선에 따라 사물을 다양한 시점으로 담아낸다. 또한 고분벽화나 초상화 등 우리

(8)

나라의 전통 인물화에서는 화면내의 중요도나 신분 고 하에 따라 주인공은 크게 주변의 인물들이나 배경기물 은 작게 그려서 크기에 차등을 두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도15) 따라서 조택승 초상화의 배경기물에 보 이는 다양한 시점과 크기의 표현은 이러한 동양화의 특수성에 근거한 한국 전통회화의 양식과 관념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초상화에 다양한 시점과 크기의 경물이 다수 등장하 는 것은 전통 초상화의 말기적 양식을 보여주는 19세 기 초상화의 특징이었다. 기물을 그린 시점과 표현방 식이 조택승 초상화와 유사한 예로는 <조숙하 초상> 이 있다. (도16) 이 그림은 주인공이 돗자리 위에 앉아 있는 점과 등장하는 배경기물의 종류, 여러 가지 시점 으로 기물들의 다양한 측면을 담아낸 점과 주인공에 비해 기물들을 현저하게 작게 그리는 방식 등이 조택 승의 초상화 양식과 유사하다.

Ⅳ. 맺음말

이상으로 19세기 해남을 근거지로 하여 의술활동을 펼친 졸헌 조택승의 초상화를 고찰하고 사적(史的) 의 의를 밝혀보았다. 본고에서는 조택승 초상화에 부기되어 있는 제화시 문을 통해 초상화의 작가는 서울에 근거지를 두고 활 동한 최병육이며, 현재의 초상화는 1894년 조택승이 54세 때 그려진 것을 1907년 조택승의 사후에 수정한 개모본임을 살폈다. 조택승 초상화의 기록과 양식, 20세기 의원 초상화 의 양식을 분석함으로써, 초본에서의 조택승은 유학자 의 복식을 갖춘 모습으로 그려졌으나, 개모시에는 옥 색 전복을 추가하여 의원의 관복을 갖춘 모습으로 수 정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배경에 등장하는 기물들 또 한 사대부들의 문방청완과 고동취향에 기반한 것이면 서도 의학적 용도로 추정되는 󰡔졸헌요결󰡕 표제의 책과 흰 봉투들은 조택승의 의원 신분을 부각하기 위해 개 모시에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고찰하였다. 이러한 개모 작업은 조택승의 의학을 이어받은 아들 조병후가 평생을 제세구민에 매진하고 혜민원 주사까 지 지낸 부친의 의술과 지위를 기리기 위해 조택승의 사후에 추진한 것이기 때문에, 조택승 초상화의 양식 은 이들 부자의 내면의식과 함께 의원 초상화의 양상 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조택승 초상화에 표현된 회화적 기법은 19세기 조 선시대 초상화의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안 면은 전체적으로 가는 선으로 육리문을 표현하고 눈 두덩이와 법령 등에는 선염을 통해 음영을 주는 18세 기 조선 초상화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정면상과 두 손의 노출, 배경의 기물 표현 등은 19세기에서 20세기 에 유행한 초상화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배경의 기 물들은 동양화 특유의 다양한 시점과 크기의 표현방식 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19세기 책가도, 초상화에 보이 는 기물 표현 방법과 연관이 있었다. 이처럼 조택승의 초상화는 의원 초상화의 양상을 비 롯하여 한국 초상화의 표현기법과 양식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자료이다. 다방 면에서의 심도 있는 연구가 기대된다.

참고문헌

문집 󰡔졸헌집󰡕 󰡔행치집󰡕 단행본 조선미. 󰡔한국초상화 연구󰡕. 열화당. 1983. 진홍섭, 강경숙, 변영섭, 이완우. 󰡔한국미술사󰡕. 문예출판사. 2006. 사전과 도록 김영숙 편저. 󰡔한국복식문화사전󰡕. 󰡔미술문화󰡕. 1998. 국립전주박물관. 󰡔석지 채용신, 붓으로 사람을 만나다󰡕. 2011.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2011. 경기도박물관. 󰡔조선 선비의 서재에서 현대인의 서재로󰡕. 책거리 특별전. 2012.

참조

관련 문서

USDA는 목표 지향적 수출지원계획(Targeted Export Assistance Program, TEA)을 이어받은 이전의 시장촉진계획(Market Promotion Program, MPP)인 시장접근계획(Market

[r]

Department of Japanese Language and Literature, Graduate School, Cheju National University. Supervised by Professor

따라서 본 P(S-co-TNa) 아이오노머의 동적 기계적 실험 결과를 해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전적으로 앞에서 P(S-co-ANa) 아이오노머와

STEAM 학습능력 연구 STEAM 교육과정 편성 운영 STEAM 프로그램 개발 및 적용. ▶ STEAM 교육을

본 연구에서 사용된 고분자용 단축 스크류와 다이스의 모델링은 CFdesign의 기준의 시뮬레이션 수행을 위해 CATIA를 사용하여 모델링 작업을 수행하였다.단축 스크류의

Seung Soo Jang Sung Gyun Shin Min Jae Lee Sang Soo Han Chan Ho Choi Sungkyum Kim Woo Sung Cho and Song Hyun Kim POSTECH Yeong Rok Kang Wol Soon Jo Soo Kyung Jeong and

Chang Goo Kang, Ah Hyun Park, Jang Ho Ha, Young Soo Kim, Joon-Ho Oh, Jeong Min Park, Soo Mee Kim, Seung-Jae Lee, Seung Hee Lee, and Han Soo Kim(KAERI). Fabric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