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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時憲 詩의 特徵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35-47)

이시헌 詩의 특징은 다섯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5언시보다는 7언시를 선호하였고, 둘째는 山水田園詩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셋째는 佛家를 긍정적으로 수용하였고, 넷째는 茶와 관련된 詩語들이 자주 사용되었으며, 마지막 다섯째는 당대 강지지역에 발자취를 남긴 유명 인사들이 많이 등장한다.

여기서 이를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이시헌은 5언시 보다 7언시를 선호하였다. 자이선생집 에는 모두 387수의 시 가 실려 있는데, 그 중 5언시는 26수에 불과하지만 7언시는 361수나 된다. 표로 정리하 면 다음과 같다.

<표5>

간지(연도) 7언절구 7언율시 5언절구 5언율시 기타 합

戊戌(1838) 8 3 11

己亥(1839) 3 3

庚子(1840) 1 1

辛丑(1841) 25 4 10 2 7언시(1) 42

壬寅(1842) 3 2 1 6

癸卯(1843) 5 11 1 17

甲辰(1844) 1 8 1 10

乙巳(1845) 7 18 7언시(1) 26

丙午(1846) 3 3

丁未(1847) 13 4 1 5언시(1) 19

己酉(1849) 4 22 26

辛亥(1850) 1 18 19

壬子(1852) 20 16 36

癸丑(1853) 12 48 5언시(3) 63

甲寅(1854) 10 18 28

乙卯(1855) 14 1 7언시(1) 16

丙辰(1856) 8 8

卷之中 14 35 1 5언시(2)/7언시(1) 53

合 126 231 13 7 10 387

둘째, 이시헌의 시에는 현실 참여시가 거의 없고 대체적으로 山水田園詩가 큰 비 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시헌이 살았던 19세기[순조·헌종·철종] 조선 사회는 왕권의 약 화와 외척의 권력독점으로 삼정이 문란해지고 매관매직이 성행하였으며, 특히 유학자 들 사이에서 학문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시헌

의 시에는 현실에 참여하거나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의 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시 헌은 산수 속에 閑居하며 仙人의 삶을 추구하였다.22) 이시헌의 이러한 은둔사상은 仙 境에서 仙經을 끼고 閑居하는 도가의식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陶淵明(365-427)에 의해서 시작된 산수전원시란 산수와 전원에서 생활하며 그곳의 흥취를 시로 읊는 시를 말한다. 산수전원시인은 佛家와 道家를 수용하여 전원에 은거 하고 명산대천을 유람하면서 隱逸의 삶을 추구하였다. ‘隱逸’이란 “세상을 피하여 숨 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은일의식은 出處에 근간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出處意 識은 論語 泰伯 의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머무르지 않는다. 천하에 道가 있으면 자신을 드러내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은둔한다. [危邦不 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에서 찾을 수 있다. 곧 군자는 나아갈 때와 물 러날 때를 잘 알아서 처신한다는 뜻이다.

‘隱’은 때를 기다리며 자연에 숨어 수신하는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세상을 등지고 자연에 숨어들어 유유자적하는 삶 속에서 동시에 언젠가는 세상에 나아가 자신의 뜻을 펼칠 날을 기다리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벼슬아치가 되는 길은 국가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는 방식과, 세상을 피해 은둔해서 살지만 학식이 뛰어 나 천거를 받는 방식, 그리고 공적으로 관직에 나아가는 방법이 있다. 그래서 공명에 뜻을 둔 학자는 적극적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아가기도 하고, 소극적으로 자 연에 묻혀 높은 학식을 인정받아 천거로 관직에 나아가곤 하였다.

이시헌은 젊어서 공명에 뜻을 두고 벼슬에 나아가려는 ‘出’을 추구하면서도 내면에는 늘 백운동에서 자연과 더불어 은거하고픈 ‘處’의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시헌은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낙방하면서 자신이 젊을 적부터 공명에 뜻을 둔 것이 완전히 잘 못되었다는 마음을 표현하며 다산초당의 벗 윤종민에게 화답하는 再疊 시를 살펴보 자.

백운으로 내 그대와 함께 돌아가니 白雲吾與爾同歸

깊고 깊은 작은 골에 세속의 기운 드무네 小峒深深俗韻稀

뒤늦게 임천을 깨달은 마음 거리낌이 없고 晩覺林泉心不累

일찍이 명리를 추구한 계책 온전히 그릇되었네 早求名利計全非

22) 自怡先生集·坤 에 실린 禁松禊面約序 · 金陵客舍重修記 를 보면 현실 참여의식이 전혀 없 지는 않았다.

낡은 거문고 가락 다하니 벗이 찾아오고 古琴彈盡來知己

외로운 학 울며 지나가니 신선을 꿈꾸네 孤鶴鳴過夢羽衣

시료가 부족하여 시를 다 짓지 못하였는데 詩料闌珊收未了

산 빛과 물빛은 서로 잘 어우러져있네 山光水色勢相圍

위의 시는 1852년 이시헌의 나이 50세에 지은 것이다. 석표는 윤종민으로 윤두서의 후손인데 다산초당의 동학들 중에서 이시헌과 가장 마음이 통하는 벗이었다. 이시헌이 사는 백운동은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거처 뿐 아니라 이시헌 자신에게도 세속의 기운[俗韻]이 적다. ‘俗韻’이란 말은 은일지사의 대표격인 陶 淵明의 歸田園居 에 “젊어서부터 세속에 적응할 정취 없고, 성정이 본래 산림을 좋아 하였네. [少無適俗韻, 性本愛邱山.]”라는 구절에서 나왔다.

오십 평생을 백운동에서 태어나 살아왔으니 애초에 이시헌에게는 俗韻이 적었을 것 이다. 그런 자신이 명리를 추구하며 부질없이 살아 온 지난날이 그릇되었다고 여기고, 자연 속에서 거문고 가락에 知音을 맞이하며 시를 수창하는 은일의 삶을 살고자 하였 다. 성현들의 경전에서 禮를 익히고 거문고 뜯으며 음악을 겸비하여 禮樂一體의 삶을 살고자 하였다.

같은 시기에 지어진 拈晦沙泮居韻偶吟 라는 한 편의 시를 살펴보자.

세월이 흘러 어느덧 오십의 나이 洽到光陰半百齡

백발에도 성인이 남긴 경서만을 끼고 있네 白頭猶復抱遺經

시혼이 한매의 그림자와 함께 지키고 詩魂共守寒梅影

병든 몸이 노학의 모습과 다투어 보네 病骨爭看老鶴形

일신의 계책에 어찌 반드시 득실을 논하리오 身計何須論得喪

마음공부로 오히려 스스로 허령함을 지켜야하리 心工猶自保虛靈

산에서 고요히 지내니 항상 일이 없어서 山居靜寂常無事

집을 푸르게 두른 천봉우리를 마주할 뿐 일세 只對千峯繞屋靑

위의 詩題에 나오는 회사 고미용은 선대부터 世誼를 이어온 忘年之友이다. 이시헌은 나이 50에 백발이 되도록 여전히 성현의 경전을 끼고 시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詩魂 은 매화와 함께 하였다. 세속과 단절된 산중에 은거하는 은자에게 매화는 진정한 벗이 었다. 이시헌은 병든 몸에 일신의 계책을 공명에 두지 않고 神靈한 상태로 만물의 이

치에 밝은 明德의 경지인 虛靈不昧한 마음공부를 추구하였다.

이시헌은 백운동원림에서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자연 속에 숨어서 자 연과 하나가 되는 삶, 그것은 은일지사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백운동에서 은거하며 신선처럼 지내는 자신의 모습을 노래한 又題襟 라는 시를 살 펴보겠다.

홀로 한가한 구름을 짝하여 함께 돌아오니 獨伴閑雲與共歸

시시와 비비를 모두 잊었네 都忘是是復非非

누워서 바람 소리를 들으니 귀가 맑아지고 臥聽虛籟能淸耳

일어나 빈 호리병을 두드리니 옷이 젖으려 하네 起擊空壺欲濕衣

소나무 물가에서 돌평상 쓸어 바둑을 두고 松水棊聲開石榻

대나무 숲에서 사립문 닫고 다구에 차를 빻네 竹林茶臼掩荊扉

집이 가난해도 늘 독서를 좋아하니 家貧好讀唯常事

쌀독은 비었으나 오히려 나를 살찌게 하네 糠竅猶看使我肥

단조의 신묘한 방술을 연단술에서 찾고 丹竈神方求煉術

청산의 영험한 약은 자지가에 담겨 있네 靑山靈藥有芝歌

평생의 수양은 오직 나로 말미암으니 百年自養惟由我

단전을 지킬 뿐 다른 것을 바라지 않네 保得丹田不願佗

위의 시는 이시헌이 아름다운 백운동에서 신선처럼 지내려는 자신의 모습을 구체적 으로 표현한 것이다. 세상의 시비를 모두 잊고 백운동 골짜기에서 백운과 더불어 유유 자적하다가 한가로이 누워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에 귀를 더욱 맑게 한다. 백운동 물 흐 르는 골짜기에는 높다란 소나무가 있다. 여름이면 시원하게 그늘진 널직한 돌평상에 앉아 바둑을 두는 이시헌의 모습이 바로 신선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구름과 짝하여 세 상의 시비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모습이다. 귀에 담는 것은 백운동 골짜기에 불 어오는 바람 소리23)와 골짜기에 흐르는 물소리일 뿐이다. 솔바람 소리와 물소리 들리 는 계곡의 돌평상에 앉아 紫芝歌24)를 부르며 바둑을 둔다. 백운동의 대나무 숲에는 야

23) 바람 소리 : 원문의 ‘虛籟’는 바람소리를 말한다. 莊子 齊物論 에 天籟·地籟·人籟가 있다고 했 다. 바람 소리는 천뢰로서, 虛籟라고도 한다.

24) 紫芝歌 : 秦과 漢의 교체기에, 商山四皓 즉 東園公·夏黃公·甪里先生·綺里季가 이 남전산에 은거하 며 세상에 나오지 않은 내용의 노래이다.

생차가 자생하고 있다. 바둑을 두고 난 후 대숲 속에 있는 집안으로 들어와 사립문 닫 고 차를 빻아 차를 달여 마시며 독서를 생활화하였다.

이시헌은 평소 속세의 소음에서 벗어나 자연속의 천석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며 지내 는 仙境을 동경하였고, 늘 仙經을 읽으며 단전수련을 통해 양생하는 도인의 삶을 추구 하는 도가적 사상도 지니고 있었다.

그 외에 그의 시 중에 “금보는 그대 때문에 자세하게 논해졌고, 선서는 나 때문에 분명하게 읽혀졌지. 〔琴譜憑君評細瑣, 仙書從我讀分明.〕”25), “이제부터 길이 매화 집 문을 닫고, 홀로 선경 안고 속된 이웃을 사양 하리. 〔從今永閉梅花屋, 獨抱仙經謝俗 隣.〕”26), “나이 들어 다만 전인의 비결을 믿노니, 홀로 선경을 안고 구름 속에 누워있 네. 〔老來只信前人訣, 獨抱仙經臥雲中.〕”27) 라고 읊은 부분에서 그 사례를 알 수 있 다.

다시 和釣巖 시를 살펴보자.

내 의관을 정제하고 용모를 수렴하여 整余冠服斂余容

밤기운이 짙을 때 홀로 단전을 지키노라 獨保丹田夜氣濃

미추는 거울을 거듭 닦아도 달아나지 못하고 姸醜莫逃重磨鏡

소리는 진실로 종을 치기 전에도 있는 법 聲音固在未撞鐘

허명한 이곳이 삼재의 주인이니 虛明這處三才主

동작하는 사이에 온 몸이 따르도다 動作中間百體從

잘 간직하여 잃지 않음이 가장 좋으니 持守最宜無放失

봄날 태화주에 항상 취하리라28) 春風常醉太和醲

위의 시는 1849년 이시헌의 나이 47세에 쓴 작품이다. 조암은 집안의 族人29)인데,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위 시는 이시헌이 1847년부터 1848년 사이에 하석 문하에서 공부하며 집안의 유묵들을 정리하기 위해 성근묵에게 7대조 서주 이빈의 행 장과 고조부 수졸암 이언길의 행장과 발문을 받아서 1849년에 강진으로 돌아온 후 쓴

25) 自怡先生集·乾 和晦沙 46쪽.

26) 自怡先生集·乾 偶吟 63쪽.

27) 自怡先生集·乾 與石瓢賦得雜詠十首 66쪽.

28) 태화주 : 술을 가리킨다. 宋代邵 雍의 无名公傳 에 “천성적으로 술을 좋아했는데 일찍이 술을 명 명하여 太和湯이라 했다.” 라 하였다.

29) 自怡先生集·坤 祭釣巖族叔文 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釣巖이 족숙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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