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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설화의 생태학적 인식

문서에서 제주 설화의 생태학적 인식 (페이지 50-67)

Ⅱ. 생태학적 인식의 준거

2. 풍수설화의 생태학적 인식

(1) 풍수 설화의 논의의 배경

우리나라의 풍수지리설은 민간신앙의 형태로 발전되어 실생활에 응용되어 온 독특한 문화 형태의 하나이다. 특히 민간에서는 조상숭배와 관련된 민간신앙의 형태로 발전되어 풍수신 앙으로 신봉되어 왔고 구전되는 설화 중에서도 풍수설을 소재로 한 풍수설화는 전승량이 매 우 풍부하다.121) 따라서 여러 분과 학문의 연구 대상이 되어 왔다.

풍수설은 중국에서 시작되어 후한 말에 일어난 음양오행설에 기초하여 집, 무덤 같은 것 의 방위 지형 등의 좋고 나쁨이 사람의 회복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는 학설로 영혼불멸설 과 인간의 행복추구가 종합된 하나의 신앙으로 정착된 것이라고 본다.122) 이러한 풍수지리 설이 중국에서 전래되어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성행한 것을 일반적으로 보 고 있다. 그러나 고조선의 단군신화나 탈해신화, 고구려, 백제의 사신도에서 보이는 풍수적 사유를 보면123) 우리나라에서도 자생적인 풍수설이 존재하다가 신라 말, 도선에 의해 체계 화되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명의 발달과 함께 풍수설은 하나의 미신행위로 여겨져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 이 분분했다. 풍수설화의 연구에 있어서도 설화의 서사구조에 대한 연구나 권력가의 명당 발복의 예라든가, 민중들의 억압된 삶이 구복적 풍수 행위에 집착하게 되고 그런 것의 사례 가 이야기가 되는 심리적 측면의 해석이 주류였다. 그러나 점차 풍수설을 하나의 과학이자 자연관에 의한 생활철학으로 인식하려는 움직임과 연구가 늘어났으나 일부 학계에서는 여전 히 과학적 비학문성을 들어 공허한 역리(易理)로 간주하기도 한다.124) 그러나 이글에서는 풍수설화 속에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관념했으며 어떻게 관리하고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았는가’하는 자연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관심을 두어, 그것이 생태학적 인식으로 까지 나아가 자연과 함께 공생하며 사는 공생적 문화의 틀이 되는 것을 조명해보려 한다.

동양에서 사람의 몸을 소우주로 보고 맥과 혈을 찾듯이 풍수에서 자연을 보는 관점도 산 의 맥과 혈을 통한 정기의 흐름에 의해 그 지역과 땅의 기운이 죽기도 살기도 한다는 관점 을 취하기 때문에,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물적 힘(기운)들이 서로 상호작용에 의해 영향을

121) 임갑낭, 「음택풍수설화 연구」, 『한국학논집』 제13권 1호,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86, 153쪽.

122) 이길환, 「풍수설화 연구」, 『모악어문학』 2권,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회, 1987, 107쪽.

123) 현승환, 「제주도 풍수설화의 이해」, 『탐라문화』 22호, 탐라문화연구소, 263쪽.

124) 임재해, 「풍수지리설의 생태학적 이해와 한국인의 자연관」, 『한국민속학보』 제9권, 한국민속학회, 45 쪽.

주고받으며 생명을 만들어 간다는 생태학적 관점을 취하고 있음이 보인다. 즉, 산과 땅, 물 이 살아 있는 존재로써 역시 살아 있는 유기체인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인간 역시 살아 있는 땅과 물에 영향을 미쳐 자연을 해하기도 하고 상생하기도 한다는 유기체적인 세계관이 엿보인다. 풍수설화의 연구에 있어 이러한 점을 조명하여 생태학적 사유에 접근한 연구가 드문 실정이지만 이글에서는 풍수설화에 나타나는 이러한 생태학적 인식을 조명하고 의의를 찾아본 후 그것이 현대 사회에 던져주는 시사점이 무엇인지 소박하게나마 밝혀보려 한다.

허춘은 제주 설화와 본토의 다른 지역 설화를 비교한 결과, 전체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음 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단 제주는 좁은 지역인데 반해 풍수설화가 많다고 하여 큰 인물이 나기를 바라는 소망의 표현으로 보았다. 그런 인물이 없었던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하기 위 해 단혈설화가 많이 나타난다고125) 하여 역시, 심리적인 해석에 치중한 결론을 도출한다.

현승환은 제주도의 풍수설화를 민속현상과의 관련 속에서 분석하여 전승민들의 인식을 살 폈다. 특히, 음택풍수에 대하여 고대인들의 영생불사 사상에서 출발되었다고 하며 제사를 정성껏 지내야 복을 받는다는 관념과 풍수에서 명당에 묻힌 조상의 영향으로 복을 받는다는 것은 동일하다고 결론 맺으며 이러한 영향이 부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여126) 음 택풍수의 영향과 부계계승에 주목했다.

김문기는 제주도의 음택풍수설화와 양기풍수설화를 유형별로 분류하고 양기풍수설화는 단 형을 모티브로 한 고종달형 전설이 상당부분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이는 척박한 땅에서 삶 을 포기하지 않고 인물을 기대하며 살았던 제주민의 인식이라고 하여 역시 심리인식에 치중 했고 양택풍수설화는 설화로 구연되지는 않아도 생활면에서 꾸준히 이어져 왔다고 하였 다.127)

그러나 이글에서는 제주도 풍수설화의 해석에 있어, 제주도민이 가지고 있었던 자연관과 그러한 자연관에 기초한 생태인식을 엿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의 표현으로서 자연 과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그러한 생활태도가 결국 어떤 문 화를 만드는데 기여했는지의 태도나 가치에 주목한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문제로, 이글에 서 제시하는 설화 속의 생태학적 인식이 제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하며 글의 전개 상 육지부 설화나 우리나라 전체의 사유방식의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 른 지역에 비해 풍수설화가 많이 전래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인식이 제주에 강하게, 또한 늦게까지 분포했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자연의 생명성에 주목하고 그러한 땅을 가질 수 있는 도덕적 조건에 대한 함의를 표현했던 제주의 풍수설화를 살펴 오 늘날 우리가 자연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와 행위의 반성을 삼고자 한다.

(2) 제주의 풍수설화와 자연관

제주도에는 많은 풍수설화가 전해온다. 그 중에서도 묘자리와 관련된 음택풍수설화가 많 이 전하는데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눠 보면, 능력이 뛰어났던 지관에 대한 이야기인 명풍담, 상주가 덕을 쌓거나 우연으로 명당을 얻는 상주담, 명당에 묘를 서서 발복했거나 혹은 관리 의 소홀, 금기 위반 등으로 인하여 명당자리가 효험을 상실하였다는 명당지형설명을 중심으

125) 허춘, 「제주 설화의 특성 연구」, 『제주도연구』 제16집, 제주도연구회, 1999, 168~169쪽 참조.

126) 현승환, 앞의 논문 참조.

127) 김문기, 「제주도 설화연구, -풍수설화를 중심으로-」, 『국문학보』 제14집, 제주대학 국어국문학회, 1997, 참조.

로 전개되는 명당담이 있다.128)

그리고 마을이나 도읍지의 선택에 관련된 양기풍수설화의 종류는 비보압승형이 있고 명당 설정의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인 혈을 끊어 생기를 흩어지게 하거나 정기가 흐르지 못하도 록 하여 큰 인물이 나지 못하게 하는 단맥형설화는 비교적 많은 편이다. 양기풍수설화 중 그 외 내용의 설화는 몇 편 전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거주하는 주택과 관련된 양택풍수설화는 음택이나 양기풍수와 비교해 얼 마 되지 않으며 여기에서는 각 유형별로 대표적인 설화 한 두 편과 그 생태학적 자연관을 찾아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먼저, 음택풍수설화 중 지관에 대한 이야기인 명풍담(名風談)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훈장과 정지관>

250여 년 전, 오조리에 삼읍 도훈장을 지내고 지리에도 능한 오훈장이 있었다. 그리고 고성에 는 오훈장한테 배운 정지관이 살고 있었다. 정지관의 지리는 오훈장보다 훨씬 밝았으나 오훈장은 자존심에 정지관을 자주 나무랐다. 그래도 정지관은 선생의 말이라 조용하였다. 정의현에서는 의 례 상사가 나면 정지관을 부르며 오훈장도 함께 청해 의논을 해야 했다. 어느 해 난산리 김씨댁 에 상사가 나서 묏자리를 보러 다녔다. 정자리를 찾는데 오훈장은 목장의 담장 안을 좋다 하고 정지관은 바깥으로 앉으면서 ‘여기도 만 아니카마씀?’ 하는 것이었다. 상주는 판단을 못하고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올라앉으라 하여도 정지관은 계속 그 자리가 좋다고 하며 밥을 먹었다. 장 사는 오훈장이 본 자리에 치러졌다. 그 후 이삼 년이 지나자 김씨 집엔 흉사가 자주 생겼다. 김 씨가 정지관을 찾아와 말을 해보고는 밥 먹을 때 그 자리에만 앉겠다고 고집했던 정지관의 말을 해석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이 오훈장의 귀에 들어가 오훈장은 정지관 의 기를 죽일 요량으로 자신의 어머니 산터가 어떤지를 물었다. 정지관은 산을 보면 사체가 눈을 뜨고 있을 거라 말했는데 과연 정지관의 말대로였다. 오훈장은 그제야 놀라서 어찌할 지 물으니 정지관은 낫으로 시체를 덮은 장막을 걷어 햇빛을 비치게 하여 시체의 눈을 감게 하였다.

오훈장은 정지관에게 묏자리를 하나 봐달라고 하니, 정지관은 자신이 쓰려고 돌멩이를 모아 눈 가림을 해 놓은 땅을 양보한다. 그러나 오훈장은 아무래도 자리가 안좋다며 장사를 안했다. 그 후 정지관이 자신의 모친을 묻었는데 장삿날 오훈장이 와서 보니 묏자리가 참 좋았다. 그제야 오

오훈장은 정지관에게 묏자리를 하나 봐달라고 하니, 정지관은 자신이 쓰려고 돌멩이를 모아 눈 가림을 해 놓은 땅을 양보한다. 그러나 오훈장은 아무래도 자리가 안좋다며 장사를 안했다. 그 후 정지관이 자신의 모친을 묻었는데 장삿날 오훈장이 와서 보니 묏자리가 참 좋았다. 그제야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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