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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

문서에서 야수파와 독일 표현주의 (페이지 7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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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단을 지배했던 구상회화의 한 경향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1962년

<뉴 리얼리스트>전 이후의 일이다. 영국이 미국보다 약 10여 년 전부터 그 전조가 있어온 것이다. 즉 1950년대 초부터 리처드 해밀튼(Richard Hamilton), 에두아르도 파올로치(Eduardo Paolozzi) 등의 젊은 작가들이 모여서 대중사회의 문화, 예술, 매스미디어와 같은 문제들을 토론하고 전 시회를 개최함으로써 팝아트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이 용어를 처음으 로 사용한 사람은 영국의 비평가 로렌스 알로웨이(Lawrence Alloway)이 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이 용어가 1950년대 초부터 런던의 소그룹에 의 해 사용되어왔다고 한다.

팝아트는 영국에서 먼저 발생하고 미국에서 이어졌는데, 그렇다고 양국에 서 동일한 양상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팝아트는 발생 초기부터 구태의연한 사회에 대한 비판 의도를 뚜렷이 갖고 사회와 예술을 접목시 키고자 했었던 반면에, 미국의 팝아트는 1950년대 초기의 미국화단을 휩 쓸었던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의 애매하고 환영적인 형 태와 주관적인 미학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으며 미국을 상징으로 하는 현대의 테크놀로지 문명에 대한 낙관주의에 기조하는 성격을 가졌다.

팝아트의 속성: 키치, 조롱, 일상성, 대중주의, 에로티시즘, 소비주의, 절 충주의

팝아트는 키치(Kitch) 이미지를 통해 현대 예술이 자기를 아이러니컬하게 보는 훈련을 조장 시켰다고 할 수 있다. 팝아트의 원류로 종종 다다 (Dada)가 거론되는데 언뜻 보기에 팝아트가 다다의 특성으로 간주되는 속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팝아트는 다다의 반예술적 철학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고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경향이었다. 팝아트는 예술에서 도외시 되었던 가치 없는 주제나 소재에 관심을 갖게 하는 태도 의 변화를 통해 우리의 세계에 대한 시각 개념과 인간과 생활과의 새로운

관계를 환기 시켜주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팝아트의 배경

영국의 런던과 미국의 뉴욕에서 1920년대와 1930년대 초기의 미술가들 은 이미 사회적으로 새로운 매체로서의 사진이나 영화에 노출되어 있고 그것에 더 많은 감화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영화처럼 재 생, 반복되는 영상의 존재와 구조에 흥미를 가졌고 이것을 시각예술의 새 로운 감수성과 언어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것은 사 회적으로 영상 이미지와 인쇄물들이 과거보다 더 많이 노출된 세계라는 것에 예술의 형식이나 매체도 변화를 시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2차 대전 이후 대중문화에 대한 입장이 과거와 같이 주류 문화를 카피하여 반복하는 수준이 아니라 현실의 문화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방 식으로 드러나 인식이 달라졌다. 팝아트의 중심지였던 미국은 산업국가의 한 모델이었으며 낙관적 분위기의 사회였다. 물론 팝아트는 미국만의 예 술이 아니라 산업문명에 의한 예술이다. 미국이 팝아트의 구심점이 된 것 은 정보와 소통이 극단적으로 빨랐던 전자 문명 시대의 중심에 있었기 때 문이다. 즉 고도의 기술적 실행이 가능했던 곳도 역시 미국이었기 때문이 다. 매스커뮤니케이션은 대중생활에 뿌리 깊게 내려가 문명도시의 유통속 도를 담당했으며 작가들의 모티브임과 동시에 예술자체도 폭넓게 전달되 게 하였다. 즉 대량생산과 영화, 광고, 만화, 과학소설, 팝뮤직 등은 팝아 트 작가들에게 예술의 주제로서의 어떤 자극을 환기시켰던 것이다. 과거 귀족사회에 있어서는 예술이 여가의 개념에 연관되었다면 민주사회에 와 서는 게임(레크리에이션)의 이상과 연결되어 있다. 팝송, 광고, 게임 등과 마찬가지로 저급문화야말로 우리시대의 솔직한 표현이며 팝아트에 있어서 는 현대의 오브제인 대중적 이미지의 즉물적 채용이 필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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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의 전개

- 영국의 팝아트

팝아트가 일반적으로 미국적인 현상으로 간주되나 실제로는 1950년대 중 반에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팝아트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로렌스 알로웨 이에 의하면 1952년 말에 런던에 있는 현대미술연구소에 일단의 젊은 화 가, 조각가, 건축가, 비평가들이 모여 회합을 가졌고 이른바 <인디펜던트 그룹>이라고 불린 이 그룹에는 알로웨이 외에 건축가 앨리슨과 피터 스 미드슨, 조각가 에두아르 파올로치, 건축사가 레이너 반햄, 화가 리차드 해밀턴 등이 참여했는데 이들은 서부영화, 광고게시판, 기계장치 등 대중 문화와 그것이 적용된 것들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반미학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당대 상황의 여러 측면들에 주목했고 이러한 회합으로부터 <뉴브루탈리즘(New Brutalism)>이라는 말이 나왔 고 리차드 해밀턴, 파올로치 등의 작품에서 그 후의 많은 팝아트적 어휘 와 태도가 나오게 되었다. 영국 팝아트의 선구적인 작품은 리차드 해밀턴 의 <오늘날 가정을 이처럼 색다르고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 가?>를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은 1956년 화이트 채플 화랑에서 [이것이 내일이다]라는 제명으로 열린 전시회의 주제로 사용되었다. 해밀턴은 마 르셀 뒤샹(Marcel Ducham)의 제자였는데 팝아트의 작가들에게 주로 영 향을 끼친 것이 마르셀 뒤샹의 예술철학 또는 반예술이라는 점을 주목해 둘 필요가 있다. 그 외에 그들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는 쿠르트 슈비 터즈(Kurt Schwitters)가 있다. 해밀턴과 그 후에 이어지는 팝아트 작가 들의 대중문화나 대중매체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들의 목적은 적대 적이거나 풍자적인 것이 아니었다. 즉 그들은 도시문명의 추함과 불평등 을 공격했던 1930년대의 사회적 사실주의 작가들이나 게오르게 그로츠 (George Grosz)와 같은 표현주의자와는 달리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 즉 대도시를 자세히 바라보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빈번히 그 현실을 처음

으로 자각하게 만드는 그러한 집중력과 침투력으로 주변의 사물과 이미지 들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해밀턴과 함께 1950년대 영국의 팝아트의 발전 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조각가는 에두아르도 파올로치이다. 1954년 이후로 미술과 기술공학의 관계에 몰두했고 팝문화의 진지한 대변자로서 활약했다. 그 외에 예술과 생활의 간격을 없애려는 팝아트적인 시도에 만 화, 광고 등을 끌어들이지 않았지만 자신이나 친구, 연인 등의 생활을 이 용하며 피카소, 마티스에게서 영감받기도 한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와 영국 팝아트 작가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피터 블레이크 (Peter Blake), 선정적인 이미지의 애렌 존스 등이 주요 작가로 활동하였 다.

- 미국의 팝아트

팝아트는 1960년대 미국에서 가장 왕성한 시기를 맞았다. 이미 만연되어 버린 소란스러운 산업적, 상업적 환경 속의 예술가들에게 자연스런 호소 력을 지닌 미술이었다. 1950년대 후반 영국의 작가들이 구사한 대다수 이미지들은 미국 영화, 대중의 우상, 만화, 간판 등으로부터 따온 것이어 서 그들에게는 얼마간 거리가 있는 것으로 비쳤고, 따라서 낭만적이고 감 상적인 의미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은데, 반면에 미국의 팝아트 작가들은 일단 새로운 주제를 창조하는데 있어서 자신들 주변의 일상적인 환경이 엄청난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자 그들의 작업은 유럽의 작가들보 다 더 대담하고 공격적이며 압도적이기까지 했다. 팝아트는 1940년대 후 반과 1950년대에 걸쳐 미국의 회화를 지배했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 작용으로 나왔는데 1950년대 후반의 미국회화는 새로운 종류의 구상과 인본주의로 회귀하는 많은 징후들을 드러냈고 르네상스적 분위기를 지닌 인물을 선택하는 많은 재능 있는 작가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단지 복고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새로운 주제를 위해 적극성을 필요로 했다. 마르셀 뒤 샹의 장기간 미국 체류와 그의 반예술적 프로그램은 1950년대 젊은 작가 들에게 점점 영향을 끼쳤고 페르낭 레제의 기계적 큐비즘의 경우도 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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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였는데 그는 1940년대에 미국에 머물면서 산업 경관을 찬미하는 일 에 전념하게 되었다. 뒤샹은 여기서 젊은 작가들을 다다로 이끌었고 이들 의 대부분은 쿠르트 슈비터스에 관심을 보였다. 슈비터스는 뒤샹을 제외 하고는 팝아트 작가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미국 팝아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는 로버트 라우센버그 이다. 그는 1940년대 후반에 팝아트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제스퍼 존스, 요제프 알버트와 더불어 노스캐롤라이나의 블랙 마운틴대학에서 학업을 쌓았는데, 알버스에게서는 양식보다는 태도를 배웠다. 그의 발전에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작곡가 존 케이지이다. 존 케이지는 해프 닝, 환경미술, 음악, 연극, 무용에서의 무수한 실험들, 그리고 혼합매체 (Mixed media)라 불리는 제작물 등 팝아트 이후의 발전에도 가장 독보적 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라우센버그는 1955년 1월에 이 건 화랑에서 캔버스에 오브제를 결합시킨 컴바인 페인팅을 선보였다. 그 는 추상표현주의에서 시작하였고 결코 거기서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으나 팝아트의 선구적인 경향과 개념미술의 여러 형식들로 확장되는 등 좁은 범위로 한정해서 분류하기가 힘들다.

라우센버그와 같은 시기인 1955년에 재스퍼 존스가 혁명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뉴욕화단에 등장하였는데 과녁, 성조기, 숫자, 번호표, 미국지도 등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물들을 재현한다기보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사물 이 되도록 오브제들이 자기완결성을 지니게끔 제작하였다. 존스는 이러한 비개성성의 요소, 즉 작품이 인식 가능한 요소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 자 체가 오로지 대상으로서만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 1960년대의 많은 조각 가와 화가에게 핵심적인 것이 되었다. 존스는 뒤샹의 말 그대로 작가가 예술작품이라고 했기 때문에 예술작품이 되는 일상적인 오브제로써 팝아 트의 문제를 진술하는 다수의 조각을 제작했으나 주제가 무엇이든 상관없 이 예술 작품의 창조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의 제작동기

는 팝아트의 그것과는 다소 다른 점이 있다.

리히텐스타인은 미국의 어느 화가보다도 정확하게 팝아트의 기본전제를 명확히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진부한 만화나 광고물을 기본 주제 로 삼아 그것을 유화, 아크릴 물감 등으로 충실하게 확대시켰다. 리히텐 스타인의 그림은 톰 위셀만, 제임스 로젠퀴스트, 앤디 워홀의 그림과 마 찬가지로 산업화된 현대미국의 일상적이고 진부한 이미지, 또는 속된 이 미지에 집착했을 뿐 아니라 그 이미지들을 개성을 배제한 중성적인 방식 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 같이 논평을 가하거나 공 격을 가하지 않으며 광고 전문가들처럼 고양시키지도 않았다. 단지 동시 대의 세계이자 도시풍경으로 다가온 것이다. 팝아트 작가들은 이상화된 통속성, 새로운 것, 가게에서 살 수 있는 것을 다룬다.

앤디 워홀은 팝아트를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코카콜라, 캠벨 스 프 통조림 등 유명 상표나 상품을 집중적으로 그려서 주목받게 되었는데 그의 특징적인 방법은 반복으로 마치 텔레비전 광고에 지나가듯이 배열하 는 것이었다. 워홀은 기계적인 반복을 위해 실크스크린 공정을 활용함으 로써 작가의 개성적인 서명을 배제하고 우리시대의 삶과 이미지들을 아무 런 논평 없이 묘사하고자 하였다. 1960년대 후반 워홀은 언더그라운드 영화에 몰두하게 되는데 자신의 반복 원리를 사용해서 점차로 자신이 살 고 있는 세계를 다큐멘터리로 기록했다. 워홀의 영화에로의 전환은 팝아 트 작가들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매체의 종합(Mixed media)을 암 시하는 징후적인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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