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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부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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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용두산신사의 사격청원 1 배경

3.2 통감부의 대응

1907년 1월 25일 경신회와 신직으로부터 용두산신사의 사격부여의 청원을 보고 받은 부산거류민단의 민장 이시하라는 같은 해 5월 31일 통감 이토의 앞으로 그 사안을 정리하여 사격의 부여를 청원한다. ‘신사사격부여에 관한 품신’이라는 제목 으로 작성된 용두산신사의 사격청원문은 용두산신사의 제신‧신전과 배전 등 건조물 의 형태‧유서 등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래는 그 청원내용의 일부를 정리 한 것이다.

용두산신사는 쓰시마의 영주 소 요시자네(宗義眞)가 본방인(本邦人)에게 위안의 마음 을 제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봉사한 이래 거류민의 숭경이 날로 두터워졌으며, 이경 (異境)에 있는 본방인에게는 크게 정신상의 위안을 주고 거류지의 발전에도 적지 않은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생각건대 신영토 또는 보호국과 같은 토지에서 민심의 감화통 일 상 경신의 염려를 증진시키는 것은 긴요한 일이므로 관폐사에 상당하는 사격을 부 여해주길 청원한다.233)

이상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용두산신사의 사격신청은 재부일본인사회가 러일 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일본의 지배력이 강화된 것을 의식하며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6월 24일 통감부는 용두산신사의 사격청원안을 내무성으로 보내 조회를 의 뢰하였다. 1907년 7월 6일 내무차관 요시하라 사부로(吉原三郞)는 내무성 통갑(統 甲) 제2호를 통해 통감부의 총무장관 츠루하라 사다키치(鶴原定吉) 앞으로 용두산 신사의 사격에 관한 사안은 통감부의 주관에 속하는 사항이라는 답신을 보냈다.234) 대만과 같이 일본의 식민지에 설립된 신사에 관한 주관관청은 내무성의 신사국이 아닌 식민지정부의 담당부서였으며, 내무성은 식민지정부의 신사 담당부서를 지도 하는 역할을 하였다. 아오이 아키히토(靑井哲人)에 따르면 일본 국내에서 제사(諸 社)의 관리는 “내무성과 지방청에 의한 인가제도를 기본”으로 했는데, “식민지에서 도 당해지역 관할관청의 인가제가 일반적이었다.” 식민지에서 제사의 관리를 정한

233) 山川鵜市 앞의 책, pp.74-75.

234) 「神社社格附與ノ義ニ付稟申」,  『宗教ニ関スル雜件綴』, 1906-1909, 대전국가 기록정보센터, CJA0004731-0027159067.

법규는 ‘현사(縣社) 이하 신사의 창립‧이전‧폐지‧합병 등에 관한 규칙’ 혹은 ‘**신사 규칙’ 등으로 불렸는데, 1915년 8월 조선총독부령 제82호 ‘신사사원규칙’은 그 대 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용두산신사의 사격으로 요청한 관폐사 즉 관사 의 경우는 제사와 사정이 달랐다. 관사의 경우에는 그 존립을 일본 본국정부가 결 정하였고, 창립 후에는 당해 신사의 관리를 식민지정부에 위탁하는 ‘이중구조’였다.

예를 들어 “각 식민지를 총진수235)하는 관폐대사를 비롯한 관사가 창립되는 경우, 일반적으로 제국의회에서 건의안의 검토를 받고, 제신이나 사격은 내무성‧궁내성에 서 전의(詮議)하며 창립은 내각의 고시라는 형식을 취했다.”236) 용두산신사의 사격 에 관한 사안이 내무성을 거쳐 다시 통감부로 돌아오게 된 것은 용두산신사가 관 폐대사에 해당하는 자격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용두산신사의 사격에 대해 통감부와 내무성에서 논의를 진행했다는 사실은 재부일본인사회의 신사가 일본 국내법이 적용되는 범위로 진입한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용두산신사의 사격청원 사례를 통해서 재부일본인사회의 신사가 당 해지역사회 일본인들의 국민적 통합의 상징으로서만이 아닌 타민족의 교화수단으 로도 언급되기 시작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07년 중순에 진행된 용두산신사의 사격에 관한 사안에 진전이 없자 부산거류민 단에서는 1908년 9월 14일 재차 통감 이토에게 사격부여를 청원한다. 이번의 청원 에는 일본전국신직회의 의견을 사격신청서에 첨부하였는데, 이것은 신직 히라마츠 와 경신회의 고토가 일본전국신직회에 미리 요청해 둔 것이었다. 아래는 일본전국 신직회의 용두산신사의 사격에 관한 의견이다.

1. 한국에서의 신사행정에 대해 당국은 신속히 적당한 제도를 설정하여 장래에 생겨날 유폐(가령, 내지에 있어서의 부현사 이외의 신사에 대해 지금 정리의 필요를 느끼는 것과 같은 것:원문)를 미연에 예방할 것을 희망함.

2. 부산 용두산신사는 현재 한국에 있는 신사 중 최고의 역사를 가지며, 사전 및 경내 등도 다른 곳과 비교 할 수 없음을 인정함으로 이에 상당한 사격을 정해줘야만 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함.237)

235) 당해 식민지의 전인구를 우지코‧숭경자로서 포섭하는 것을 뜻한다.

236) 일본의 식민지 신사제도에 관한 내용은 靑井哲人, 『植民地神社と帝国日本』, 吉川弘文館, 2005, pp.69-73을 참고하였다.

237) 山川鵜市 앞의 책, pp.79-80.

일본전국신직회에서는 용두산신사의 사격에 관한 사안을 접한 후 일본 국내와 같은 유폐 즉 부현사 이하 신사의 정리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지 않도록 대한제국 내 신사에 적용할 수 있는 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제언하고 있다. 1873년 약 12만 개에 이르던 일본 국내의 신사는 러일전쟁 이후인 1906년 약 19만 개로 급증했다.

무라카미에 따르면 일본정부는 신사를 국가의 종사로 삼고 사적으로 존재하는 신 사를 인정하지 않는 방침을 세웠다. 이후 농촌이나 도시에 설치된 “토착의 소사사 (小社祠), 가족동족(家族同族) 등을 모시는 사제(私祭)의 사사(社祠)가 공적성격을 가진 신사로 인정”됨에 따라 일본 전국의 신사 총수는 증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길옆(路傍)의 소사(小祠)라도 일단 형태를 갖춰 신사라고 부르게 되면서 자동적으 로 공적성격을 부여받았고, 관리‧운영상에서 공비의 지출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 다. 그러나 다수의 군소신사가 방임상태에 놓여 관리되지 못하게 되자 일본정부는 구촌(舊村)을 통합하여 행정촌을 두는 작업에 대응시켜 신사의 통‧폐합을 단행하였 다. 신사의 통‧폐합은 1908년-1909년에 정점에 달했는데, 일본의 지방당국은 신사 의 통‧폐합이라는 내무성의 뜻을 수용하며 “반강제적으로 규모가 충분하지 못하다 거나 봉사가 되지 않는 소신사를 적당하게 다른 신사로 합병시켜, 원칙적으로 촌사 는 행정촌 마다 1사(社), 무격사는 구촌에 1사 내지 수(數)사로 줄이는 방침을 강 행”하였다. 이러한 결과 1910년대 중반까지 약 8만 개의 촌사와 무격사의 신사가 합병 또는 폐지되어 신사의 총수는 약 11만 개로 격감하였고, 이나리(稻荷)‧하치만 (八幡)‧곤삐라(金比羅)‧텐신(天神)이 모셔진 4개의 신사가 합병되어 이나하치콘텐신 사(稻八金天神社)와 같은 기이한 신사가 탄생되기도 했다.238)

일본전국신직회에서는 이상과 같은 일본 국내의 신사문제가 재한일본인사회에서 도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용두산신사의 사격문제를 통해 신사정리를 실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보인 것이다. 실제로 1907년 5월 31일 부산거류민단에 서 이토 통감에게 보낸 용두산신사 사격청원문을 살펴보면 부산일본거류지 내 다 른 신사인 벤텐신사(辨天神社)와 이나리신사(稻荷神社)가 용두산신사의 경내신사로 기재되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239) 즉 일본 국내에서 진행된 신사의 통‧폐합이 재부일본인사회에서는 통감부 시기 용두산신사의 사격문제와 결부되어 진행되었던 것이다. 단 재부일본인사회의 신사 통‧폐합이 용두산신사의 사격청원과 마찬가지로

238) 일본 국내의 신사 통폐합에 관한 내용은 村上重良, 『國家神道』, pp.166-167 을 참고로 정리하였다.

239) 山川鵜市 앞의 책, p.73.

통감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닌 당해지역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재부일본인사회에서는 일본신직회의 의견서까지 준비하여 용두산신사의 사격부여를 통감부에 청원했지만 결국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였고, 이 사안은 1910년 한일병탄 이후로 이어지게 된다.

재부일본인사회에서는 거류민단법의 시행 이후인 1907년과 1908년 두 차례에 걸 쳐 용두산신사의 사격을 통감부에 청원했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용 두산신사의 사격청원안이 통감부를 거쳐 내무성까지 전해져 논의된 사실은 해외에 임의로 설립된 용두산신사가 일본의 법 테두리 속으로 진입했음을 알려준다. 또한 사격청원 과정에서 재부일본인사회 내 기타 신사들이 용두산신사의 경내신사로 포 함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당시 일본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던 신사의 통‧폐합 정책의 영향을 받아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단 재부일본인사회에서 진행된 신사의 통‧폐합은 자발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할 수 있겠다.

4. 결론

본장에서는 재부일본인사회가 근대국민국가 일본의 일부로 편입되어가는 과정에 대해 거류민단법의 시행 이후 신사행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 내 일본인의 인구증가로 재한일본인사회에서는 학교, 병원, 수도시설과 같은 시설의 확충이 요구되었다. 재한일본인사회에서는 부족한 재원을 공채의 발행을 통해 보완하고자 했으며 이는 일본정부에 대한 거류지의 법인화 요 구로 이어졌다. 1906년 7월 통감부령으로 거류민단법이 시행되었고 대한제국 내 일본인단체에는 일본 국내의 시정촌과 같은 법인격이 부여되었다.

거류민단법의 시행으로 재부일본인사회에도 부산거류민단이 설치되었다. 부산의 신사와 신직에 대한 규정은 거류민단규칙의 제정과 함께 보다 구체적으로 명문화 되기 시작하였다. 거류민단규칙으로 정한 호적구와 총대의 자격을 기반으로 하여 우지코총대의 선발규정 등이 마련된 것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1871년 이후 메 이지정부는 신사를 국가의 종사로 규정하고 호적제도와 우지코제도의 일체화를 통 해 전 일본국민을 지역신사에 결박시키고자 했다. 재부일본인사회에서는 그와 같은 양상이 1907년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거류민단규칙의 정비와 연동되어 신사‧신직에 대한 규정의 명문화가 진행된 것은 1907년부터 제기된 용두산신사의 사격청원과도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 격을 청원하기 위해서는 당해신사의 연혁과 규모, 제신 등의 항목을 완성하여 제출

해야했기 때문이다. 재부일본인사회에서는 1907년과 1908년 두 차례에 걸쳐 용두 산신사의 사격을 통감부에 청원하였다. 사격제도는 일본 국내의 신사에만 적용되는 법이었으나, 거류민단법의 시행으로 재부일본인사회가 일본의 시정촌과 같은 법지 위를 확보하게 됨에 따라 사격에 관한 논의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용두산신사의 사격은 경신회와 신직 히라마츠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이들 은 최초 부산거류민단의 민장에게 용두산신사 사격으로 최고등급에 해당하는 관폐 대사를 청원하였다. 관폐대사의 사격이 청원된 것은 용두산신사의 오랜 역사, 러일 전쟁 이후 재부일본인사회의 규모확대와 함께 일본과 대만의 관폐사에서 신직으로 서 근무했던 히라마츠의 영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용두산신사의 사격청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 재부일본인사회 내 벤텐신사와 이나리신사는 용두산신사의 경내신사로 통합되었다. 1908년 무렵 일본 국내에서도 급격히 증가한 신사의 관리 를 위해 정부의 주도로 신사의 통‧폐합이 진행되고 있었다. 재부일본인사회에서 진 행된 신사의 통합은 일본 국내에서 진행된 신사정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 겠다. 용두산신사의 사격청원과 마찬가지로 신사의 통합 역시 재부일본인들이 자발 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은 특기할 사실이다.

통감부 시기 재한일본인들은 대한제국을 이미 식민지와 다름없이 인식하였고, “한 국의 개발과 한인 계도의 임무”를 강조하며 때때로 통감부 당국자보다 더 강한 제 국주의적 성격을 보였다고 한다.240) 이러한 모습은 용두산신사의 사격을 청원하는 가운데 신사를 통한 교화의 대상으로 대한제국민(韓民)을 포함시키고 있었던 사실 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재부일본인사회의 국민적 통합을 위한 상징적 장소였던 용두산신사가 통감부 시기에 들어서는 타민족의 교화수단으로서도 거론되기 시작 한 사실도 본장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상 재부일본인사회와 신사를 통해 해외에 형성된 일본인사회가 근대국민국가 일본의 지역사회로서 자리잡아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본 연구에서는 재부일본인 사회의 신사설립을 살펴보기 위해 당해지역사회의 구조분석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재부일본인사회의 경우 쓰시마인과 비쓰시마인이라는 구도로 나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재부일본인사회의 신사는 당해사회의 구조적 특징을 담고 있었 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보론에서는 러일전쟁 이후 대련일본인사회의 신사설립에 대해 이상과 같은 재부 일본인사회의 신사설립에서 사용된 분석방법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240) 박양신 앞의 논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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