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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즈 야타로(出水彌太郎)의 대련신사설립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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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련일본인사회와 신사설립

2.1 데미즈 야타로(出水彌太郎)의 대련신사설립계획

1904년 2월 시작된 일본과 러시아 간의 전쟁은 1905년 8월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 대련의 일본인은 307명이었지만, 러일전쟁이 끝난 1906년 말에는 8,248명 급증하였다.244) 1905년 1월 4일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장래 만주에서 일본의 상권(商權)이 발전하기를 바라며 대련 의 도항상인과 도항자 재류 등에 관한 규정을 마련하였다.245) 같은 규정의 제3장 도항상인의 자격에 따르면 “제국신민으로서 상당의 자산과 신용을 가진 자”여야 했으며, 도항상인은 “호적등본과 소득세액 증명서” 등을 갖추어 육군대신에게 제출 해야 했다.246) 이와 같은 규정은 일본정부가 무분별하게 일확천금을 노리고 대련으 로 도항하는 자들을 저지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244) 柳澤遊, 『日本人の植民地経験-大連日本人商工業者の歴史』, 靑木書店, 1999, p.25.

245) 大連市役所, 『大連市史』, 1936, p.240.

246) 大連市役所 앞의 책, p.242.

오사카 출신인 데미즈 야타로는 1905년 4월 육군대신 데라우치에게 대련도항영업 소의 허가청원서를 제출하였다.247) 데미즈는 1895년부터 자본금 30만 엔으로 오사 카에 가요우철도주식회사(河陽鐵道株式會社)248)를 설립한 이후 철도사업에 종사하 고 있었다.249) 데미즈가 대련에 도항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06년 3월 그가 대련실업회(大連實業會)의 간사로 선출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도항 시기는 1905년 4월부터 1906년 3월 사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1905년 9월 대련으로 민간일본인의 자유도항이 허가됨에 따라 대련에는 일본국내 뿐만 아니라 조선과 대만 등지에서 몰려든 일본상인들로 북적였다. 그 결과 상업질 서의 확립과 영업활동 조건 정비를 위한 실업가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1906 년 1월 10일 대련실업가 18명은 실업상의 의견교환과 친목을 위한 조직으로 헤이 고다화회(丙午茶話會)를 결성하였다.250) 같은 해 3월 10일, 제3회 모임에서는 헤이 고다화회를 실업단체조직으로 개편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어 간사 9명, 서기장 1명 등이 선출되었다. 데미즈는 이때 대련실업회의 간사로 선출되었다.251) 대련실업회 는 관동도독부의 대련 이전 청원을 비롯해 “특종(特種)은행설립문제, 특종대출증자 문제, 자유항철폐반대운동”과 같은 활동을 진행하며 당해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을 확 보해 갔다.

1905년 9월 대련으로의 자유도항이 허가됨에 따라 대련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점 차 증가하였지만, 신사가 설립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거나 국경일이 되더라도 신사를 찾아가 참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데미즈를 중심으로 한 유지자들 은 약 20만 엔의 예산을 들여 대련신사의 설립을 계획하였다.252)

데미즈의 대련신사설립이 추진되고 있을 때 다른 한 쪽에서는 이즈모오야시로쿄 의 대련포교사였던 마츠야마 테이조(松山珵三, <그림7>)가 이즈모오야시로쿄의 대 련분사설립과 신자모집을 위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대련에는 우부스나신 사(産土神社)가 없었기 때문에 대련의 일본인 대다수는 마츠야마 포교사가 이즈모 타이샤(出雲大社)와 관계가 있는 신사를 대련에 설립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

247) 「大連渡航営業所許可証交付付願の件」, 『陸満普大日記 明治39年4月』, 1906, 日本國立公文書館, C030270241001906.

248) 현재 近畿日本鉄道(近鉄)의 전신이다.

249) 「河陽鉄道の仮死」, 『大阪毎日新聞』, 1926년 1월 10일.

250) 柳澤遊 앞의 책, p.32.

251) 福昌公司互敬會, 『滿洲と相生由太郞』, 1932, p.370, 柳澤遊 앞의 책, p.32.

252) 松山珵三編, 『大連神社創立誌』, 大連神社社務所, 1920, p.1.

다.253) 데미즈가 마츠야마에게 자신들과 함께 대련신사의 설립을 추진하자고 제안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07년 7월 25일 이시모토의 집에 마 련된 이즈모오야시로쿄 분사설립사무소에서 데미즈의 건의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회의 결과 대련신사 합동설립안은 무산되었다. 경영방법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 이 유였다. 『大連神社創立誌』에 따르면 이후 데미즈는 대련신사의 설립계획을 단념하 고 일본으로 귀국하였고, 데미즈와 함께 대련신사설립에 참여하였던 “木村, 佐藤, 北條”254) 등도 신사설립사업을 포기하였다고 한다.255)

대련신사의 합동설립이 무산되었다는 이유로 데미즈가 일본으로 귀국하였다는 서 술에는 보충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데미즈의 대련도항 목적은 데라우치 육군대신 에게 제출한 서류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대련에서의 사업에 있었다. 신사창립이 대 련진출의 목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데미즈가 귀국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 는 무엇이었을까. 그 답은 당시 대련의 경제상황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1906년 10월부터 1907년 5월까지 대련실업회의 지도부는 빈번한 교체를 겪었다.

그 이유는 대련의 경제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1906년 10월 회장에 취임한 미요시 테이지로(三好程次郞)는 같은 해 12월 영업 부진으로 사임하였다. 뒤를 이 어 회장대리로 취임한 야마가타상회(山縣商會) 대련지점의 고호우 센키치(五寶仙 吉) 역시 업소의 영업부진으로 1907년 5월 그 직을 사임하고 일본 본국으로 돌아 갔다. 1907년부터 1908년까지 대련경제는 전쟁특수의 소멸과 일본 국내의 공황 등의 영향으로 도산하는 상점과 영업실적 하락을 겪는 기업이 속출하였다. 대련실 업회의 간사도 그 영향으로 인해 빈번한 교체를 피할 수 없었다.256) 이와 같은 상 황으로 미루어 볼 때 데미즈의 귀국과 나머지 관계자들의 신사사업 포기는 1907년 부터 1908년에 걸친 대련의 경제공황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추측의 범위를 조금 더 넓혀본다면 데미즈 측이 이즈모오야시로쿄 측에 대련신사 의 합동건설을 제안한 이유도 경제적인 이유였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즈모 오야시로쿄의 활동에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던 이시모토는 아편전매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시모토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

253) 松山珵三編 앞의 책, p.2.

254) 木村, 佐藤, 北條는 데미즈와 함께 대련실업회에서 활동하였던 인물인 木村 政平, 佐藤至誠, 北條三野夫인 것으로 추측된다. 福昌公司互敬會 앞의 책, p.370.

255) 松山珵三編 앞의 책, pp.21-22.

256) 柳澤遊 앞의 책, p.33.

은 후술하도록 하겠다.

대련신사의 설립은 최초 데미즈 등 대련실업회의 회원들에 의해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데미즈 측의 신사설립계획은 이즈모오야시로쿄 측과의 협상결렬 그리고 대련경제에 닥친 불황의 영향으로 인해 좌절된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대련의 일본인들은 여전히 아이가 탄생하거나 국경일이 오더라도 신사를 찾아 참 배할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련의 일본인들에게 이즈모오샤시로쿄의 대 련분사설립 활동은 한층 더 시마네현의 이즈모타이샤와 관계 깊은 신사가 설립되 는 모습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다음에서는 이즈모오야시로쿄의 대련분사 설립과 대련신사로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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