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퀴어정치의 운동적 계기들

문서에서 '퀴어'정치의 가능성 (페이지 33-37)

Ⅱ. 새로운 정치로서 ‘퀴어’에 대한 이론적 논의

2) 퀴어정치의 운동적 계기들

1960년대 미국은 반동성애가 공식적으로 가능했다. 동성애를 병리적으로 치료 가능하다는 흐름을 따라 성소수자들은 전기고문을 당해야 했으며 공공의 영역에 서 제거되어 갔다. 동성애자들이 유일하게 동료와 애인을 만날 수 있던 곳은 몇 몇 게이바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 몇 안 되는 술집 중 ‘스톤월 인’이 있었다.

1969년 6월 28일 새벽에 경찰이 ‘스톤월 인’을 습격해 손님들과 종업원들을 체 포했다. ‘스톤월 인’은 주로 가난한 유색인종 동성애자들, 집에서 쫓겨난 젊은 동 성애자들과 드랙퀸들 같은 밑바닥 사람들이 모이던 곳이었다. 심지어 흐르는 물 이 없었고 결정적으로 주류면허가 없어 항상 경찰의 단속 대상이 되었다. 그날도 경찰들은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말로 바에 있던 사람들을 농락했다. 손님들의 성 별, 신분을 확인하고자 욕실,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남자로 분장한 여성, 드랙퀸, 종업원, 미성년자들을 우선 체포하려 했다.

이 사건을 지켜보던 군중은 이전과 달랐다고 한다. 경찰의 동성애 혐오적 발언 과 폭력적 진압과정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군중들의 반격으로 인해 경찰들은 막 다른 골목에 갖혀 있던 상황을 전투경찰의 투입 이후에야 마무리되었다. 스톤윌 인 사건 이후로 게이 해방운동이 많은 추동력을 받음과 동시에 그 당시 형성되 던 대항문화운동과 맞물리면서 중앙 집중적 권력과 지배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엄청난 비판을 집단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야고스, 2015:59).

스톤월 인 사건 몇 주 뒤에 뉴욕의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자해방전선(Gay Liberation Front)를 결성했다. 이들은 기존의 ‘점잖은’ 동성애자 모임에서 언급하 지 않는 주제들을 다루며 파격적인 운동방식을 선보였다. 1969년과 1973년 사이 에 미국의 동성애자 조직은 두 배로 성장했다. 1970년 10월에는 런던의 동성애자 해방전선이 미국 동성애자 해방전선의 정치를 바탕으로 설립되기도 했다.

오늘날 스톤윌 항쟁은 성소수자운동의 역사적 기점으로 남아있으며 매년 6월

새로운 탈중심적 운동과 정체성을 고착화하지 않으면서 그것에 대한 관심을 유

안적 정치실천으로 진전되기 위해서는 ‘연대’,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에 대한 보 다 성찰적인 반성이 요구될 것으로 보았다.”(이승원, 2009: 224)

오늘날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주도·참여 주체에 대한 논의가 대두되는 가운데 다양한 개인과 이해집단들이 특정한 저항의 국면에서 어떻게 하나의 커다란 정 치세력 혹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으로 협력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제고 하는 데 있어 ‘연대성’(solidarity) 개념이 재고찰 되고 있다고 보았다(이승원, 2009).

기존의 경계 내에서는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배제된 채 그 일상의 삶이 보호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탈구적 상황에 직면해 있으며 그들을 다시 인식지평 으로 끌어내서 새로운 정치적 과제 또는 해방의 정치로 담론적 재구성을 실천하 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퀴어운동은 탈구를 경험한 개인들을 모으고 정의 (justice), 민주주의(democracy), 인권(human right)이라는 보편적 이데올로기의 체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서영표, 2015:138). 이는 새로운 정치를 향한 필요를 분 출시켰으며 새로운 정치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하지만 게이·레즈비언 운동, 여 성 운동진영에서 퀴어운동의 부상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낳았다. 앞선 기대에 못지않게, 다양한 형태로 주변화 된 성적 신분 사이의 차이를 무시한다는 불안과 격분을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야고스, 2015:159).

문서에서 '퀴어'정치의 가능성 (페이지 3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