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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토화작전과 그 후의 상황

Ⅱ. 제주4·3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

3. 초토화작전과 그 후의 상황

특징으로 보인다. 정부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상황을 완전히 해결할 때까지 그 해

11월 17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제주도 계엄령은 한국 역사의 모호한 부분

작전을 시작한지 한 달이 넘어 중요한 연대교체가 실시되었다. 12월 중순경부 터 말까지 대전 제2연대가 제주 제9연대의 일을 인수하여 전 부대가 바꾼 것이 었다. 제2연대가 여순사건을21) 진압한 경험이 있거니와 제주도 병사들보다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대교체로 인해 진압작전을 지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쟁 을 유발하여 12월 후반에 더욱 가혹한 사태를 일으킨 것으로 판단된다. 그 후에 야 제2연대도 서청 단원들을 진입시키고 경찰서를 늘린 것 등으로 전투력을 강 화시키며 3월초까지 잔인한 작전을 실행하였다.

<그림 5> 제2연대 토벌 사진

초토화작전은 3월초까지 이뤄졌는데 진상조사보고서에서 다음 시기인 1949년 3월 2일부터 1950년 6월 24일 한국전쟁이 벌어질 때까지 평정기라고 표시된다.

무장대가 약화되어 거의 궤멸된 상태이고 5·10선거도 성공하였기에 시기의 이름 이 적당하지만 4월까지도 굴에서 피신자들이 발견된 것은 많은 주민들이 아직 산에서 숨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22) 초토화작전이 끝났다고 해도 주민들에

21) 여수·순천사건, 1948년 10월 19일에 전라남도 여수와 순천에서 일어난 반란사건을 가리킨다.

22) 제주 4·3 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003, p. 329.

대한 학살이 감소하였지만 지속되었고 은신하는 경향도 유지하였다. 사건이 공식

4·3사건이 전개된 7년 동안 제주도 주민의 10분의 1인 3만 여명이 희생되었다.

그 중에서 폭력을 가한 무장대와 군인·경찰 피해도 있었지만 대부분 민간인 희 생이었다. 특히 1948년 10월부터 1949년 3월까지의 6개월은 전체 희생자의 80%

이상이 희생된 시기였다는 사실을 보면 초토화시기의 작전들이 얼마나 가혹하였 는지를 알 수 있다.24) 당시 희생자뿐만 아니라 연좌제나 잃어버린 마을처럼 사건 이 종결된 후에도 제주도민들의 삶과 제주도 자체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결론 적으로 이런 결과는 제주도 한국에서의 특별한 위치와 경제적·사회적 상황, 그리 고 냉전의 이념 투쟁이 초래한 것이다. 사건에 대한 애매한 성격과 해결되지 않 은 점들이 남아 있지만 그에 대한 의사소통과 연구, 교육이 필요하다. 그래야 현 재와 미래에 다시는 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게끔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24) 제주 4·3 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003, p. 5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