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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화리 마을 다랑쉬굴 피신생활

Ⅲ. 제주4·3사건 은신처 동굴 실태와 피신생활

2. 세화리 마을 다랑쉬굴 피신생활

대나 우익인사들의 집과 가족이 있는 마을을 무장대의 습격 대상이 되었다. 그렇

다는 것이 밝혀졌다. 다랑쉬굴에서 발견한 시신 11구 중 종달리 주민이 7명과 하

다랑쉬굴은 세화리에서 멀리 남서쪽으로 6km 지점에 해발 170m에 위치하고

입견이 있었기에 청년들이 숨을 수밖에 없었다. 종달리와 하도리에 발생한 무차 별 학살사건들을 생각하면 청년들은커녕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피신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림 7> 다랑쉬굴 내부 모습

56)

동굴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종달리와 하도리 주민들의 사건 당시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 발견 당시 피신생활을 위한 생활용품, 생활도구인 유물들이 대부분으 로 사건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중에서 단추․버클․안경․가죽신 등 주민 들이 입었던 의복류와 그릇․단지․허벅․숟가락․솥 같은 주방도구들을 가장 많이 포함하는 일반 생활용품들을 발견할 수 있다. 동굴의 내부에 대한 <그림 7>을 살펴보면 의복류를 제외하고 생활용품의 대부분 시신이 하나만 있었던 제2 굴에서 확인되었다. 동굴의 공간을 원래 집에서 익숙한 것처럼 구별하고 생활용 품들을 보관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을 보면 제2굴의 공간이 마치 부엌처럼 사 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8>을 살펴보면 제2굴에 있었던 유물들에 대해 더 자세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56) 다랑쉬굴 현장 표석

<그림 8> 다랑쉬굴 제2굴 유물

57)

제2굴에 있는 유물들의 대부분은 지방도구인을 확인할 수 있다. 유물 중에서 밥을 먹을 때 쓰는 놋쇠그릇 · 사기그릇 · 놋숟가락 · 밥주걱의 수는 상당하다.

또한 음식을 만들거나 보관하는 데 쓰는 젓갈단지 · 항아리 · 됫병 · 막사발 · 양푼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석쇠와 소뼈가 남아 있다는 것을 보면 소고기도 먹 었다고 알 수 있다. 고기를 먹는 것은 사건 당시에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지만 집에서 가져왔거나 동굴에서 나와 찾을 수도 있었다. 특히 물을 찾는 게 힘들었 기에 물이나 다른 액체를 보관하는 빈병 · 호리병 · 주전자들은 생존에 아주 중 요하여 동굴 생활에서 중요한 도구들이었다고 추정된다. 유물 중에 요강이 있는 것은 동굴 안에서 특히 낮에 나오기 위험하여 대소변도 동굴 안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 유물 중에 지방도구 외에 가위낫 · 호미 · 대검 · 쇠스랑 · 철창이 있었

57) 제주4·3평화기념관

<그림 10> 다랑쉬굴 발굴 당시 유골 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의 일부는 농사 하는 도구들이지만 2장의

<그림 3>에서 보이다시피 무장대의 무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도구들을 청 년들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가져갔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유물 중에 M1탄 피 하나가 남아 있어 누군가가 동굴에서 소총을 쏜 적 있는데 정확히 누가 하였 는지 알 수 없다.

<그림 9> 다랑쉬굴 발굴 당시 유물

다랑쉬굴에서 피신하였던 사람들의 학살사건은 1948년 12월 18일에 제9연대의 진압작전으로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없으나 증언채록 을 통하여 그의 비극이 알려졌다. 공식적인 자료에서는 다랑쉬굴이 언급되지 않 았지만 미군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12월 18일에 곧 제주도를 떠나려는 제9연대 제2대대의 마지막 작전이었다고 기록한다. 이 날, 130명을 사살하고, 50명을 포로 로 잡았으며 소총 1, 칼 40, 창 32개를 압수하였다.58) 이것을 보면 다랑쉬굴의 학 살은 연대교체가 일으킨 가혹한 진압작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앞에 설명하였 듯이 12월 말에 일어난 대전 제2연대와 제주 제9연대의 전체적 교체가 경쟁을 자극하여 많은 희생을 야기하였다. 다른 시기였더라면 비극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없지만 12월의 가혹한 작전과 다랑쉬굴의 사건은 분명히 관계가 있 었다.

공식적인 자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1990년대에 증언채록을 통하여 사 건의 과정을 어느 정도 밝힐 수 있었다. 1992년에 종합조사를 실시한 사람들이 1948년 12월의 다랑쉬굴 사건에 대한 풍문이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

58) Hq.USAFIK.G∼2 Periodic Report, No.1021, December 24, 1948.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 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003, p. 301.)

다.59) 또한 증언자 2명의 증언을 중심으로 12월 18일에 토벌대의 작전으로 다랑 쉬굴에서 숨었던 주민들이 학살당하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증언자 중 1명은 구좌 읍 종달리 민보단 간부 출신인 오지봉 씨였다. 오지봉 씨는 12월 18일의 군인·경 찰·민 합동토벌에 참여하여 다랑쉬굴의 사건을 직접 경험하였다.

“굴밖에 있던 사람들은 사살됐고, 굴 입구가 양쪽에 두 개였는데, 나오라! 나오 라! 소리쳤는데 나오지도 않고 그래서 토벌대가 처음에는 입구에 수류탄을 던졌다.

그래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검불’로 불을 피운 후 구멍을 막아 질식사하게 하 였다”고 말하였다.60)

다른 증언자인 채정옥 씨는 사건이 벌어진 다음 날에 동굴에 들어가 질식을 당한 주민들의 시신을 발견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종달리 학교 교원이었던 채정옥 씨는 11월에 무장대에게 납치되어 다랑쉬굴에서 산 적이 있었다. 산사람들이 확 인하러 보내준 채정옥 씨는 “굴 안에는 그때까지도 연기가 가득 차 있었으며 희 생자들은 고통을 참지 못한 듯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죽어 있었고 코나 귀로 피가 나 있는 등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증언하였다.61) 이 증언들과 1992년 당시 합동조사 덕분에 학살의 과정에 대해 생생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1992년 다랑쉬굴이 발견되었을 당시에 은신처 동굴의 존재가 처음 알려지게 되었지만, 은신처에서의 생활상보다 진상규명 운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유적 지의 중요성은 이차적이었다. 다랑쉬굴은 4·3사건의 진상규명 운동에서 중요한 버팀목의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다랑쉬굴의 사건은 다랑쉬 굴이 위치한 다른 마을 주민들이 피신생활을 하였던 점에서 다른 은신처 동굴보 다 특이한 양상을 지닌다. 따라서 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마을 내의 동굴에 국한하지 않고 피신생활에 용이한 곳으로 여겨지는 동굴을 선택하여 은신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이는 4·3사건의 혼란스러운 성격처럼 마을 주민들은 아군과 적군 을 잘 구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은신처로서의 중요성을 다랑쉬굴은 잘 보여준다.

59) 제민일보 4·3 취재반, 4·3은 말한다 2권, 전예원, 1994, p. 355.

60) 제주민예총4·3문화예술제사업단,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각, 2002, p. 86.

61) 제민일보 4·3 취재반, 4·3은 말한다 2권, 전예원, 1994, p. 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