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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형장륙당공가장(仲兄莊六堂公家狀) 역문(譯文) 목차

-제(弟) 눌재(訥齋) 홍준(弘準) 찬(撰)

공의 성(姓)은 이씨(李氏)요, 휘는 종준(宗準)이며 자는 중균(仲勻)이고 호는 장륙거사(藏 六居士)라고도 하고 또 용재(慵齋)라고도 하니 경주로 관향(貫鄕)을 하고 신라좌명대신(新羅 佐命大臣)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고려(高麗)말에 지수(之秀)가 있으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봉월성군(封月城君)이요.

규(奎)를 낳으니 벼슬이 사재(四宰)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렬(貞烈)이며 휘 원림(元林)을 낳으 니 아조(我朝, 朝鮮)에 들어와서 벼슬이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고 휘 만실(蔓實)을 낳으니 이조판서(吏曹判書)라. 공에게는 증조가 되고 조부는 휘 승직(繩直)이니 세종조(世宗 朝)에 벼슬하시어 양주목사(楊州牧使)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으 로 마치니 청백(淸白)하심으로 조정에 중용되었고 부친의 휘는 시민(時敏)이시니 생원진사 (生員進士)에 합격하시고 청백(淸白)으로 세상에 명망이 높으시더니 계유(癸酉)에 화(禍)가 미치매 금고(禁錮)형을 당하셨다.

모친은 영가권씨(永嘉權氏) 시니 현감(縣監) 계경(啓經)의 따님이시다. 공이 안동(安東) 금 계촌(金溪村)에서 나시니 어려서부터 상모가 우뚝하시고 5세에 글을 부치시고 7살에 글을 읽어 대의(大義)를 통달하시니 생원공(生員公, 용재공 부친)께서 글을 지어 경계하시니 글에 가로대

일반도망세월경(一般都亡歲月輕) / 한 밥에 세월 빠른 것을 잊으니 기지사세수풍성(豈知斯世樹風聲) / 어찌 세상 소리를 알까 보냐 공신수향창전좌(空身雖向窓前坐) / 빈 몸이 비록 창 앞에 앉았으니 일의응치야외행(逸意應馳野外行) / 뜻을 응당 야외로 달아난다.

이때 공이 비록 어린 나이시나 마음에 이글을 외우고 더욱 학업에 힘쓰시더니 10세 때 부친께 말씀하기를 경서(經書)는 다 성현(聖賢)이 전해 준 문자(文字)이나 혹은 문인(門人) 들의 기록에서 나왔고, 주역(周易)인즉 문왕(文王)·주공(周公)·공자(孔子) 세 분 성현(聖賢)의 친히 쓴 글이오니 진성인(眞聖人)의 글이라 하오니 생원공(生員公)이 들으시고 크게 기이하 게 여기시어 손수 은행나무 한 그루를 대청 앞에 심으시고 생원공(生員公)이 가로대

『이 나무는 부자(夫子)께서 배우고 강하든 나무라 내가 뒷날 성덕군자(盛德君子)로 더불 어 이 나무 아래서 강학(講學)하라』

하심에 대답하여 가로대

『동방(東方)에도 성인(聖人)이 있습니까』

생원공(生員公)이 가라사대

『성인(聖人)의 도(道)를 행하면 성인이 될진대 하물며 우리 동방은 기자(箕子)의 유풍(遺 風)이 지금까지 흐르니 어찌 현인군자(賢人君子)가 없다』 할 것인가.

13세에 문장(文章)을 이루고 필법(筆法)이 옛사람을 압도하시더니 향시(鄕試)에 응시코자 한데 생원공(生員公)은 학업이 부족하다 하시어 허락지 않으시다. 일찍 서울로 유학(游學)할 새 셍원공(生員公)이 그 재주가 덕보다 앞설까 염려하시어 글로 경계하시니 그 대략이 이러 하였다.

「너의 유학(游學)하는 것이 호협(豪俠)한 무리에 비교할 바가 아니니 언행(言行)을 삼가고 주색(酒色)을 경계하며 게을리 놀지 말고 미친 벗은 사귀지 말라. 우리 선대(先代)가 조정에 이름있는 신하(臣下)이니 나에 이르러 불행(不幸)하게 구렁에 빠졌으니 나는 그만이다마는 적선(積善)을 오래 하면 어찌 경사가 없겠느냐? 너의 형은 배우지 못하고 재주도 없으며 너

의 동생도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나의 바람은 너뿐인데 너도 또한 배움이 성실치 않으 니 성실치 않으면 실(實)지가 없을지라. 내가 말하는 실(實)이란 덕행(德行)을 말함이요, 화 려한 재주를 말함이 아니라 그 덕행이 없으면 비록 칠보시(七步詩, 중국 위魏나라 조식曹 植이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지은 詩)를 짓는 재주가 있은들 취할 바가 아니다.」

공이 이 훈계(訓戒)를 가슴에 새겨서 비록 적은 말과 조그마한 행동이라도 감히 삼가지 않음이 없다 하시다.

계사(癸巳, 성종 4, 1473년)에 생원공(生員公)이 별세(別世)하시니 슬퍼하심이 예(禮)에 지 나치고 복(服)이 끝남에 모친의 명령으로 죽림사(竹林寺)에 들어가 글을 읽을새 한마을에 사는 배인(裵裀)이 같이 가서 공부함에 심신이 피곤함에 배씨(裵氏)는 책을 덮고 쉬는 데도 공은 밤이 새도록 쉬지 않으시고 몇 달이나 계속하시되 정력(精力)이 여전하시니 배씨(裵 氏)가로되 「군(君)의 혈기(血氣)가 부지런하기를 사람에 지남에 이와 같은가.」 공이 답하여 가로대 「지극히 즐거움이 여기 있는데 어찌 되곤 하리오」 하시더라 매월 초하루에 모친을 뵈러 집에 오시어 한 달 읽은 글을 모친 앞에서 외우시되 한자도 그릇됨이 없어야 모친이 별찬(別饌)을 장만하여 주시고 극찬하였다.

정유년(丁酉年, 성종8 147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시고 서울에 우거(寓居)하실 때 하 루는 남추강(南秋江, 남효온南孝溫)과 더불어 달을 따라 행화방(杏花坊)에서 노시니 권경유 (權景裕)가 공의 품위와 용모가 청수(淸秀)하심을 보고 맞아서 자리를 비켜 가로대 『자네는 티끌 세상 사람이 아니고 참으로 선학(仙鶴)이 인간에 왔다』라고 이르더라. 군요(君饒, 권경 유權景裕)가 글을 먼저 사운(四韻)을 불음에 공이 응구첩대(應口輒對) 하니 참으로 진세(塵 世)에서 뛰어난 태도인지라. 군요(君饒)가 매우 놀라 손을 잡고 앉아 밤이 새도록 글을 읊 다가 아침에 보니 이에 배동(背洞)에 우거(寓居)하는 진사(進士) 이모씨(李模氏)라. 이 뒤로 부터 막연한 벗이 되어 매양(每樣) 백공(伯恭, 남추강南秋江)과 군요(君饒, 권경유權景裕)로 더불어 노릉(魯陵, 단종端宗)의 지나간 일을 말하다가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때가 없으셨다.

을사년(乙巳年, 성종16 1485) 급제(及第)하시고 강목(綱目)을 글로 대답하셨으며 정미(丁 未, 성종18 1487)에 정자(正字)로부터 이랑(吏郎)에 옮기셨다. 이해에 일본(日本) 사신을 맞 을세 임금이 정조에 명하시기를 관문방어(關門防禦)가 심히 중요하고 또 저 나라 사신이 글 재주가 있다 해서 엄격히 호송사(護送使)를 가릴세. 전조(銓曹, 인물 가리는 곳)에서 공을 철거하여 공이 임금 명을 받들고 동래현(東萊縣)에 이르러서 왜국(倭國, 일본) 사신이 공의 글씨와 그림을 얻고 극찬의 절을 하면서 가로대 처음으로 천하 보배를 얻었다 하더라.

겨울에 또 평안평사(平安評事)로 명령을 받으시고 상원군(祥原郡)에 이르시어 삼소도(三笑 圖)란 시와 그림을 쓰셨더니 뒷날 남추강(南秋江, 남효온南孝溫)이 이곳을 지나다가 보고 매우 놀라 가로대 이는 반드시 나의 친구 솜씨라 하였다. 무신(戊申)에 홍문관교리(弘文館 校理)를 제수받으시고 어세겸(魚世謙)의 추천으로 호당(湖堂)에 뽑히시고 여가를 얻어 글을 읽게(賜暇讀書) 하셨다.

임금이 환취정(環翠亭)에 행차할 세 공이 응제(應製, 임금의 물음에 응답하는 벼슬)로 우 두머리에 계시니 명성이 자자하고 칼날을 다투는 자가 없으니 그때 공론이 제일가는 명망 으로 추대하느니 조금 뒤에 정언(正言)에 배명(拜命) 되시다. 이때 신수근(愼守勤)이 처음으 로 청현직(淸顯職)에 오르시니 공이 말하되 이는 외척(外戚)으로 권력을 잡을 징조라 해서 그 옳지 않음을 역간(力諫) 하시니 바른 소리가 조정에 진동하다. 임자(壬子)에 수찬(修撰) 에 배명(拜命) 되시니 모친을 모시고 뵙고자 글을 올려 집에 돌아오시다.

계축(癸丑, 성종24 1493)에 검상(檢詳)으로부터 사인(舍人)에 승진하시고 서장관(書狀官) 으로 연경(燕京, 중국 수도인 베이징의 옛 이름)에 가실 때 사관(使館, 지금의 여관)의 병풍 그림이 낡은 것을 보고 심히 못마땅하게 여겨 붓으로 다 망쳐놓았더니 역관(譯官)이 통사 (通使)를 불러서 물은즉 통사(通使) 가로대 서장관(書狀官)이 서화(書畫)를 잘하시니 반드시 그 뜻에 차지 않아서 이렇게 한 모양이라 대답하니 역관(譯官)이 수긍했는데 중국서 돌아오 는 길에 그곳에 당도하니 새로 흰 병풍 두 개를 만들어 놓았거늘, 공이 하나는 글씨를 쓰 고 하나는 그림을 그리시니 그 묘(妙)가 극에 이르니 보는 자 다 탄성을 하였다. 또 시율 (詩律)로 중국 서울에서 그 명성을 울렸더니 뒷날 중국 사신이 왔을 때 그 글을 외쳤다 한 다.

갑인(甲寅, 성종25 1494)에 의성현령(義城縣令)이 되니 그때 모친께서 기력이 강녕(康寧) 하시어 벼슬에 계실 때 백성 사랑하라는 뜻으로 5언시(五言詩) 40수를 지어 공에 주시니 공이 절하고 받아 현(縣)에 도착하여 보시니 향교(鄕校)가 퇴락하거늘 터를 새로 구해서 옮 겨 지으실 제 봉급을 털어 공사비에 보충하여 지으니 규모가 굉장한지라. 현내(縣內) 글 잘 하는 사람을 불러 향중자제(鄕中子弟)들을 가르치게 하시어 시(詩)를 외우고 예(禮)를 익히 되 옛날 법과같이 하시니 현송(絃誦, 거문고를 타면서 詩를 읊음)의 소리가 항상 들리는지 라. 그 당시 사람들이 의성(義城)을 무성(武城)에 비유하면서 객관(客官, 숙소를 말함) 남쪽 에 죽루(竹樓)를 짓고 공을 위하여 퇴근 후 휴식하시는 곳으로 정함에 기(記)를 지어 현판 (懸板) 하시니 한때 문사(文士)들이 전해가며 외우고 소장에 글씨까지 명필이라 해서 읍 사 람들이 보배로 여겨서 깊이 간직하였다 한다.

무오년(戊午年, 연산군4 1498)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계셨는데 이때 조정에서 류 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이 청류명현(淸流名賢)들을 상(上, 임금님)에 모함(謀陷)하니 화 (禍)가 조석(朝夕)에 있으나 공은 아무 걱정도 안 하시고 이망헌(李忘軒, 이주李冑)으로 더 불어 행정(杏亭)에서 바둑을 두시니 바깥사람들이 와서 말하기를 붉은 옷을 입은 관인(官 人)들이 동구(洞口)에 들어온다고 하거늘 좌우 사람들이 바둑을 거두어 치우라 한 데도 공 이 조용히 가로대 잡으라는 명을 받지 않았으니 나는 죄인이 아니라 하시고 여전히 바둑을 두실 세. 조금 후에 금오랑(金吾郞, 죄인 잡는 관인)이 도착하거늘 공이 가로대

『노모(老母)가 계시니 작별할 시간을 달라』

하시매 금오랑(金吾郞)이 측은히 여겨 허락하였다.

모친께 절하시고 작별인사를 올리니 모친께서 옛날 범방(范滂, 중국 한나라 사람)의 일을 비유하시면서

『네가 죽을 자리를 얻었으니 내가 어찌 슬퍼하랴. 너는 죽기를 잘하고 내 생각은 조금도 말라』

하시다.

망헌(忘軒, 이주李胄)과 함께 잡혀서 국문(鞠問)당하는 날 안색이 조금도 변함이 없이 손 으로 한일자(一)를 그어 장강(長杠, 길고 굵은 멜대) 모양을 만드시고 한 말씀도 없으셨다.

귀성(貴成)이란 종이 있었는데 능히 글도 알고 공의 신임을 받아 항상 따라다니더니 함께 국문을 당하는데 또한 땅을 그며 한 말도 없었다. 죄를 결정하는 날 곤장 80대를 맞고 북 계(北界)로 귀양 가서 봉화(烽火) 불을 드는데 불 살리는 역을 담당하고 떠나갈 때 고산역 (高山驛)을 지나게 되어

「고충자허중불여(孤忠自許衆不與, 외로운 충절을 남이 몰라준다는 뜻)라는 글 한수」를 벽 위에 써 붙이고 가신지라.

감사(監司)가 이를 나라에 알리되 연산군(燕山君)이 자기를 원망한다 해서 다시 잡아 죽 이니 그때 조정이 두려워서 감히 말하는 자가 없고 홀로 홍귀달(洪貴達)이 글을 올려 구원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지라. 사형을 집행하는 날 공은 안색이 전일과 다름이 없고 다만 소리를 높여 가로대

『수양산(首陽山)이 멀고 머니 내가 칠 땅이 없구나』 하시니 듣는 자가 모두 눈물을 흘렸 다 한다.

금계사망동(琴溪沙芒洞) 간좌(艮坐) 언덕에 안장하다.

부인은 영가권씨(永嘉權氏)니 아들이 없어 동생 공준(公準)의 셋째 아들 덕연(德淵)으로 봉사(奉祀)케 하니 공의 유언이신지라. 공은 용모가 단정하시여 맑은 물에 핀 부용(芙蓉)과 같으시고 지조는 결백하시어 빙호(氷壺)에 비친 가을 달과 같으시며 글은 활발하고 글씨는 절묘하며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문장들과 같은 체격(體格)이었고 또 노는 데도 여유가 있 어 궁색함이 없으심이 천성에서 나시니 옛날 시인(詩人)들의 풍채가 있으셨으며 글과 글씨·

그림과 음율(音律)·의약(醫藥)과 복서(卜筮)에 무불통지(無不通知)하시더라.

일찍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김선생(金先生)을 스승으로 섬기심에 선생이 큰 그릇 이라 보시고 가로대

『이모(李模)를 본 뒤로 흉금(胸襟)이 트는 것 같다』

하시더라.

정일두(鄭一蠧, 정여창鄭汝昌)·김한훤(金寒暄, 김굉필金宏弼)으로 더불어 도의(道義)의 벗 을 하고 또 김탁영(金濯纓, 김일손金馹孫)·남추강(南秋江, 남효온南孝溫) 제현(諸賢)과 좋은 벗이 되시니 추강(秋江)이 가장공(家狀公)에게 공경하고 중히 여기신다.

무풍부정(茂豐副正, 왕족 이총李摠)이 공을 보고 기이히 여겨 가로대

『우리 동방에 시선(詩仙)이다.』

하면서 녹음(綠陰)과 홍엽(紅葉)때는 반드시 양화도(楊花渡)에 공을 영접(迎接)하여 달을 따라 배를 타고 글을 지으신 것이 백여 수에 이르시더라. 공이 일찍 홍유손(洪裕孫)을 보시 고 탄식하시어 가로되 이 사람이 이런 기이한 재주와 높은 행실이 있으니 지위는 불구하고 더불어 사귐 직한 바라 하시니 홍씨가 이로 인하여 사림(士林)에 중요하게 보이다.

공이 어릴 때부터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고 비록 창졸(倉卒)간이라도 행동에 실수가 없 으시며 그 경악(經幄, 글을 강론하는 곳)에 있어 강의하시고 의논하실 때는 하남부자(河南 夫子, 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 선생을 말함)의 법을 따랐고 상대(霜臺, 정언正言 간관諫 官)에 계실 때는 바른말 하는 것이 한나라 조정에 장유(長孺, 중국의 급암汲黯이란 사람)에 부끄럼이 없으셨고 활달하고 밝은 의논은 해동(海東) 노연(魯連, 제齊나라 노중련魯仲連)이 라 하였다. 아름다운 날과 착하신 행실이며 웅장하든 글과 건장유력(建章有力)한 필법이 후 세에 전하지 못한 것은 사화(史禍)를 당한 집인 탓이리라. 겨우 보고 들은 것을 모아 눈물 을 섞어 이 글을 쓰고 후일 명필군자(名筆君子)의 채술(采述)을 기다리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