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용재선생행장(慵齋先生行狀) 역문(譯文) 목차

-풍산(豊山) 임여재(臨汝齋) 유규(柳氵奎) 찬(撰)

용재(慵齋) 이선생(李先生)을 경광서원(鏡光書院)에 봉안한지 몇 해 후에 선생(先生)의 묘 소 앞에 비석을 세우고 선생(先生)의 8대손 학경(學慶)이 유적(遺蹟)을 소매에 넣고 나에게 찾아와 말하되 『우리 선조(先朝)의 절행(節行)은 다만 문충공(文忠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 龍)이 지은 무오(戊午, 연산군4 1498)년 당적(黨籍)이 세상에 발행되었고 가장(家莊)의 원본

은 학경(學慶)의 종선조(從先祖) 눌재공(訥齋公, 이홍준李弘準)이 지었으나 당시 숨김에 구 애받아 세덕(世德)을 상세히 갖추지 못하였고 또 세대(世代)가 멀어서 글자의 획이 좀먹어 완편(完編)이 되지 못하였으나 감히 청하옵건대 보충하고 삭제하여 먼저 선생(先生, 서애西 厓 유성룡柳成龍)의 기록한 의사를 이어 주옵소서』 하니 보잘것없는 내가 늙고 병들어 감 당할 수가 없으나 다만 세의로는 그러하니 감히 힘쓰지 않으리오, 삼가 본상(本狀)에 의거 하여 대강 아래와 같이 바로잡고 부첨(附添)한다.

선생(先生)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는 종준(宗準)이요, 자는 중균(仲勻)이니 스스로 호를 장육당(莊六當)이라 또 용재(慵齋)라고 칭했다. 신라(新羅) 좌명대신(佐命大臣) 알평(謁平)의 후손으로 고려(高麗) 말기에 지수(之秀)라는 어른이 있으니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금자 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월성군(月城君)을 봉했다.

이분이 규(揆)를 낳으니 벼슬이 사재(四宰)로 시호는 정렬(貞烈)이요 이분이 윈림(元林)을 낳으니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가 되었고 이분이 만실(蔓實)을 낳으 니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선생(先生)에게 증조가 된다. 할아버지의 휘는 승직(繩直) 이니 진사(進士)로 세종조(世宗朝)에 벼슬하여 양주목사(楊州牧使)와 경상도(慶尙道) 관찰사 (觀察使)를 행직하고 대사헌(大司憲)으로 벼슬을 마침에 청백(淸白)으로 조정에 추중을 받았 다.

선고(先考)의 휘는 시민(時敏)이니 생원(生員)·진사(進士)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며 문장(文 章)과 명절(名節)로 한세상에 무거운 명망이 있었는데 김상국(金相國) 절재(節齋) 종서(宗瑞) 의 화(禍)에 연좌되어 금고(禁錮)를 당하였으므로 금계(金溪)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생도(生 徒)들을 가르치어 성취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호를 금계(琴溪)라 했다. 고을 사람들이 바야 흐로 사우(祠宇)에 숭봉(崇奉)할 것을 의논하고 있다.

어머니는 영가권씨(永嘉權氏)니 현감(縣監) 계경(啓經)의 따님이다. 선생(先生)이 영가(永 嘉, 안동安東)의 금계촌(金溪村)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재주와 기품이 준수하여 5세 때에 글을 지을 줄 알았고 7세에 글을 읽으매 큰 뜻을 통하니 생원공(生員公)이 시(詩)로 경계하여 이르되 『한번 밥 먹는 순간에도 세월이 흐름을 잊는다면, 어찌 이 세상에 명성(名 聲)을 심을 수 있으리오, 한가한 몸 창 앞에 앉았으나, 방탕한 뜻은 들판으로 달리듯 하느 리라』고 하니 선생(先生)이 비록 어린 나이었으나 이 시(詩)를 크게 외우며 더욱 공부를 힘 썼다.

10세에 생원공(生員公)께 말씀을 여쭈어 이르되 『경서(經書)는 모두 성현(聖賢)들이 전해 준 글이지만 혹은 문인(門人)들의 기록에서 나오기도 했습니다. 주역(周易)에 이르러서는 문 왕(文王)·주공(周公)·공자(孔子) 세 성인이 손수 썼으니 이게 참으로 성인(聖人)의 글이며 배 우는 자가 가장 존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니 생원공(生員公)이 듣고서 크게 기특하게 여

겼다.

선생(先生)이 손수 한 그루의 은행나무를 대청(大廳) 앞에 심었는데 생원공(生員公)이 말 씀하기를 『이 나무는 공자(孔子)께서 학문을 강마(講磨)하던 나무이니 다른 날에 마땅히 덕 망이 성대한 군자(君子)로 더불어 이 나무 아래에서 학문을 행하면 모두 성인의 무리가 될 수 있거든 하물며 우리 동국(東國)은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이 지금껏 유전되고 있으니 어 찌 성인(聖人)과 군자(君子)가 없다』 하리요.

13세에 문장이 성취되고 글씨 쓰는 법도 고체(古體)를 모방했다. 향해(鄕解-지방에서 보 이는 문과 초시)에 가고자 하니 생원공(生員公)이 학업이 완성하지 못했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일찍이 서울에 가서 유학하고 있었는데 생원공(生員公)이 그 재주만 믿을까 염려하 여 매양(每樣) 편지를 써서 경계하였으니, 두 번째 쓴 편지에 대강 이르기를 『너의 유학하 는 것이 호협(豪俠)한 무리에 견줄 바가 아니니 언행(言行)을 조심하고 주색(酒色)을 경계하 여 낭만히 놀지 말고 방랑한 사람을 사귀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의 선조(先祖)들이 나라에 명신(名臣)이 되었었는데 나의 몸에 이르러 불행히도 묻히 게 되었으니 나는 할 수 없거니와 적선(積善)한 지가 오래니 어찌 남은 경사가 없으리오.

네 형도 배우지도 못하고 재주도 없으며 네 아우도 역시 학문을 좋아하지 않으니 나의 바 라는 바는 너뿐인데, 너도 역시 학문에 정성이 없구나. 정성이 부족하면 실상이 없기 마련 이다. 내가 말한바 실상이라는 것은 덕행을 이름이요, 재화(才華)가 아니다. 진실로 그 행실 이 없으면 비록 칠보(七步)의 재주14)가 있은들 무엇을 취할까』 했다. 선생(先生)이 이 교훈 을 복종하여 비록 미미한 말과 세쇄(細碎)한 행실에도 감히 삼가지 않지 않았다.

계사년(癸巳年, 성종4 1473)에 생원공(生員公)의 상사를 당하여 애통하기를 예절에 지나 게 하고 복을 벗은 후에도 어머니 명령으로 산에 들어가 글을 읽었는데 같은 마을에 배공 (裵公) 인(裀)이 같이 가서 공부하는데 정신이 피로하면 배공(裵公)이 책을 덮고 쉬는데 선 생(先生)은 밤을 지새워 거두지 않았다. 이와같이 하기를 몇 개월이 되어도 정력이 처음과 같았다.

배공(裵公)이 말하기를 『자네가 혈기로 된 몸인데 근고가 남보다 이와같이 지날 수가 있 는가?』하니 선생(先生)이 말씀하기를 『지극한 즐거움이 여기에 있느니 무슨 피권이 있겠는 가』했다. 매월에 어머니를 와서 뵙고 한 달 읽은 공부를 어머니 앞에 외우는데 한자도 틀 리고 빼놓은 적이 없은 후라야 어머니께서 별찬을 마련하여 주었다.

정유년(丁酉年, 성종8 1477)에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하고 서울에서 우거하고 있었는데

14) 칠보(七步)의 재주 : 위(魏)나라 조식(曹植)의 재주를 말함. 그는 형님 문제(文帝)의 미움을 받아 칠보내(七步內)에 시(詩)를 지으면 죽이지 않는다 하니 칠보내(七步內)에 시(詩)를 지어 천하(天下) 에 유명하였다.

하루는 남추강(南秋江) 효온(孝溫)으로 더불어 행화방(杏花坊)에서 놀았다. 권경유군요(權景 裕君饒, 이름과 자)라는 사람이 그 의용(儀容)이 청수함을 보고 맞아서 자리에 앉게 하고 말하되 『자네는 속세의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선학(仙鶴)이 인간에 있다고 하며 군요(君饒) 가 먼저 사운(四韻)을 불렀다.

선생(先生)이 응구첩대(應口輒對, 묻는 대로 거침없이 대답함)로 글을 지었는데 참으로 속 진(俗塵)에 벗어난 태도가 있었다. 군요(君饒)가 크게 놀라며 이르되 『사람들이 말하기를 적 벽부(赤壁賦)에는 인화(烟火)의 기운이 없다15)고 했는데 자네의 시(詩)가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 보다도 지난다』하고 인하여 한잔 술을 권했다.

산생(先生)이 일어나 가려고 하니 군요(君饒)가 손을 잡아 만유하며 가지 못하게 하고 문 을 닫고 촛불을 켜놓고 밤을 새워 시를 읊고 아침에 보니 동대문(東大門) 밖에 우거하는 이 진사(李進士)였다. 크게 웃고 작별했는데 이후로부터 막역간의 친구가 되었다. 매일 추강(秋 江)으로 더불어 단종(端宗)의 지난 일을 말하다가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적이 없었 다.

병오년(丙午年, 성종17 1486)에 과거에 오르고 정미년(丁未年, 성종18 1487)에 정자(正 字)로 이조좌랑(吏曹佐郎)에 옮기었다. 이해 가을에 일본(日本) 사신이 나오매 위에서 관방 (關防, 국가의 방어)이 심히 중대하고 또 저나라 사진이 문재(文才)도 있으니 극력으로 호송 사(護送使)를 선택하라는 명령이 있으므로 이조(吏曹)에서 선생(先生)으로써 응대한 것이다.

선생(先生)이 명령을 받들고 동래(東萊)에 이르니 외국 사신이 선생(先生)의 글씨와 그림을 보고 절하고 받으며 말하기를 『처음으로 천하(天下)에 소중한 보물을 받았다』했다.

겨울에 또 평안도(平安道) 평사관(評事官)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상원군(祥原郡)에 이르 러 삼소도(三笑圖)의 시(詩)를 썼는데 선생(先生)의 문집 가운데에 실려있다. 후일에 남추강 (南秋江)이 여기에 지내다가 크게 놀래어 이르되 『이 글은 반드시 우리 친구의 수단이라』했 다.

무신년(戊申年, 성종19 1488)에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를 제수했는데 어세겸(魚世謙) 의 선출로 호당(湖堂)에 옮기고 여가를 주어 글을 읽게 했다. 왕(王)께서 환취정(環翠亭)에 행차하시었는데 선생(先生)이 환취정 시(詩)를 응제(應製)하매 일등을 차지하므로 성명이 자 자하여 선봉(先鋒)을 경쟁하는 자가 있으나 한때의 언론들이 선생(先生)을 제일이라 하여 맑은 명망을 영주(瀛州, 선경仙境을 말함)에 오른 것으로 비유했다.

얼마 후에 정언(正言)을 배수하니 이때 신수근(愼守勤)이 처음으로 청현(淸顯)의 자리에 올랐다. 선생(先生)이 외척(外戚)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 불가하다 하여 힘써 간하므로 곧다 는 말이 조정(朝廷)에 가득했다.

임자년(壬子年, 성종23 1492)에 부수찬(副修撰)을 배수하여 소장(疏章)을 올리고 돌아와

15) 적벽부(赤壁賦) …… 기운이 없다. : 송(宋)나라 문장가(文章家) 소식(蘇軾)이 적벽강(赤壁江)에 뱃놀이하며 지은 글이 적벽부(赤壁賦)이다. 그 글은 익은 음식을 먹지 않는 신선(神仙)이 지은 것 같다하여 연화(烟火)의 기운이 없다고 한다.

부모를 뵈었다. 계축년(癸丑年, 성종24 1493)에 검상(檢詳)으로 사인(舍人)에 승진하고 또 서장관(書狀官)으로써 중국(中國)에 들어갔는데 여관에 그림 병풍이 좋지 못함을 보고 붓으 로 전체를 뭉개었는데 역관(譯官)이 통사관(通事官)을 불러 괴이하게 여겨 힐책하였다. 통사 관(通事官)이 말하기를 『서장관(書狀官)이 서화(書畫)에 능숙하므로 필시 그 뜻에 만족지 못 하여 그러한 것이다』하니 역관(譯官)이 머리를 끄덕이고 말았다.

돌아오던 길에 그 처소에 이르러 새로 꾸민 흰 병풍 두 좌를 펴놓고 선생(先生)이 하나는 그 시를 쓰고 하나는 그림을 그리었는데 다 같이 절묘한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보는 자들이 모두 감탄하여 완상(玩賞)했다. 또 시율(詩律)을 잘하므로 중국(中國)에까지 소문이 났는데 뒤에 중국(中國) 사신이 와서 전하며 외웠다.

갑인년(甲寅年, 성종25 1494)에 의성현령(義城縣令)을 제수했는데 어머니께서 이때까지 강녕(康寧)했다.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을 사랑하는 뜻으로 사십(四十) 운자를 지어 주니 선 생(先生)이 절하여 받고 항시 외쳤다.

권수헌(權睡軒)이 시(詩)를 지어 전송하였는데 『성명(聲名)은 소년 시절부터 남극성(南極 星)같이 높았으니, 유현(儒賢)의 풍류(風流) 적선(謫仙, 이태백李太白)과 같으네. 경연(慶筵) 에서 명망이 높았으니 일찍 벼슬에 나갔고, 부절(符節)을 나눈 명이 내려오니 한 고을을 맡 았네. 향군(鄕郡)에는 삼물(三物)16)로 가르치어 주(周)나라 교화를 이루었고, 일천(一千) 가 호(家戶)에 인화(烟火)가 끊기지 않았으니 한(漢)나라 순리(循吏)를 이었네. 아전들 바삐 다 니며 무엇 하나 아침저녁으로 태평가 부르며 이 사람을 기리네.』라고 하였다.

현감으로 부임하던 처음에 향교(鄕校)가 퇴락한 것을 보고 터를 가리어 세우고 봉급을 덜 어서 공역(工役)의 비용을 보조하므로 규모가 굉장하였다. 고을 안에 유림의 명망이 있는 자를 불러 고을 자제들을 가르치어 시(詩)를 외우고 예를 익히되 한결같이 예전 법도를 따 라서 현송(絃誦)의 소리가 항상 들리니 그때 사람들이 문소(聞韶)를 무성(武城)17)에 비유했 다.

죽루(竹樓)를 관사(館舍)의 남쪽에 지어놓고 공사(公事)에서 물러와 휴식하는 곳으로 삼고 기문(記文)을 지어 걸었는데 한때 문사(文士)들이 전하여 외웠다. 소장(訴狀)에 마구 쓴 글 씨까지도 고을 사람들이 모두 보배로 삼아 감추어 두었다.

16) 삼물(三物) : 주(周)나라에서 만민(萬民)을 가르키던 세가지 일이다. 일(一)은 육덕(六德)이니 지 (智) · 인(仁) · 성(聖) · 의(義) · 충(忠) · 화(和)이고, 이(二)는 대행(大行)이니 효(孝) · 우(友) · 목 (睦) · 인(婣) · 임(任) · 휼(恤)이고, 삼(三)은 육예(六藝)니 예(禮) · 악(樂) · 사(射) · 어(御) · 서 (書) · 수(數)이다.

17) 무성(武城) : 공자제자(孔子弟子) 자유(子游)가 고을살이 하던 땅이름이다. 자유(子游)가 그 고을 에서 문학(文學)에서 숭상해서 현송(絃誦)의 소리가 들림을 공자(孔子)가 기뻐한 일이 있다.

무오년(戊午年, 연산군4 1498)년에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왔다. 이때에 유자광(柳子 光) 아극돈(李克墩,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장본인) 무리가 청백한 사류(士流)를 무고로 얽어서 화가 조석으로 이르게 되었다. 선생(先生)이 태연히 스스로 즐기며 근심을 삼지 않고 이망 헌(李忘軒) 주(胄)로 더불어 행정(杏亭)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밖에서 사람이 전하는 말 에 붉은 옷을 입은 관리 한 부대가 직접 동네로 들어오고 있으니 좌우(左右)에서 청하기를

『바둑을 거두십시오』 선생(先生)이 천천히 대답하기를 『잡아 오라는 명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공연한 소리라』 하고 바둑에 대하여 처음과 같이 두고 있었다.

조금 후에 금오랑(金吾郞, 금부도사禁府都事)이 과연 도착했다. 선생(先生)이 말씀하기를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영결하고 나온다』하니 금오랑(金吾郞)이 측연히 여기어 허락했다.

인하여 어머니께 절하고 하직하니 어머니가 범재(范滓)의 일18)로 개유하며 이르되 『네가 죽 을 곳을 얻었으니 내가 무엇을 슬퍼하리오. 네가 가서 잘 죽어야 하고 나를 염려하지 말 라』 하였다. 이망헌(李忘軒)으로 더불어 좌석을 같이하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국문을 받던 날에 얼굴빛을 변하지 않고 손으로 한일 자를 긴 장대 같이 그리고 한 말도 없었다. 종하나를 데리고 갔었는데 능히 글자를 알을 정도였다. 같이 국문을 받는데 또한 땅을 그면서 말이 없었는데 죄가 결정되던 날에 곤장 80대를 때리고 북계(北界)로 유배하 였다.

길이 고산역(高山驛)을 지나는데 『외로운 충성을 자신하나 사람들은 더불어 주지 않는다』

는 한 시를 벽 위에 쓰고 갔다. 감사가 위에 올리니 연산군(燕山君)이 원망하는 뜻이 있다 하여 옥에 가두었다가 죽이고 말았다. 이때 조정에서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는 자가 없고 유독 홍허백(洪虛白) 귀달(貴達)이 상소(上疏)하여 물어줄 것을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형 을 받던 날에 얼굴빛이 평일로 더불어 다르지 않았고 다만 소리를 가다듬어 말하되 『수양 산(首陽山, 백이伯夷·숙제叔齊가 죽은 곳)이 막연하여 나를 묻을 땅이 없구려』 하니 듣는 자가 눈물을 흘리었다. 금계(琴溪) 사망동(沙芒洞) 간좌(艮坐)의 언덕으로 반장(返葬)하였다.

선생(先生)의 용모가 단정하고 아담하여 맑은 물에 연꽃과 같고 지조(志操)가 맑고 정결 하여 얼음 위에 비춘 가을 달과 같았다. 글을 지으매 활발하여 붓을 드는 대로 물이 흐르 듯 하여 직접 한(漢)·당(唐)의 글로 체격이 같으며 시(詩)도 또한 넉넉하고 급박하지 않아 성정(性情)에서 우러나므로 옛 시(詩)하는 사람의 풍치가 있었으며 서화(書畫)·의약(醫藥)·점 술·음악에 정하고 교묘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점필재(佔畢齋) 김선생(金先生)을 선생으로 섬기었는데 김선생(金先生)이 큰 그릇

18) 범재(范滓)의 일 : 동한(東漢)시대 당고(黨錮)의 화(禍)에 걸리어 죽은 사람이다. 화(禍)를 당해 죽으려 갈 때 어머니가 이르기를 『네가 죽어서 이응(李膺) ·두밀(杜密)과 같이 이름이 있게 되리니 오히려 영광이라』했다.

으로 여기며 말하기를 『이군(李君)을 본 후로부터 가슴이 상쾌하다』했다. 정일두(鄭一蠧, 이 름 여창汝昌 문묘文廟에 배향) 김한훤(金寒暄, 굉필宏弼 문묘文廟에 배향) 두 선생으로 더 불어 도의(道義)에 벗으로 삼고 또 김탁영(金濯纓, 이름 일손馹孫)·남추강(南秋江, 이름 효 온孝溫) 제현으로 벗으로 삼았는데 추강(秋江)이 가장 공경하고 중하게 여기었다. 무풍(茂 豊) 부정(副正)이 한번 보고 기이하게 여기며 이르거늘 『공은 우리 동방(東方)의 시선(詩仙) 이라』 했다.

공이 어릴 때부터 빠른 말과 급박한 빛이 없으며 비록 창졸에 있어서도 일찍이 지조를 잃은 적이 없으며 그 경정(經筳)에서 강론함은 한결같이 하남부자(河南夫子, 정명도程明道·

이천伊川)를 따르고 상대(霜臺, 사간원司諫院)에서 곧은 말은 한(漢)나라 조정에 급장유(汲 長孺, 한무제漢武帝때 직관直官인 급암汲黯의 자字)에게 부끄러움이 없으며 보통에 뛰어난 맑은 의논을 문득 해동(海東)에 노중련(魯仲連)19)이라 할 수 있는데 애석하게도 그 아름다 운 말과 착한 행실이며 웅건한 문사(文詞)와 건장한 필법이 세상에 전하지 못함은 사화(士 禍)의 집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종조(中宗朝)에 원통함을 닦게 되고 벼슬을 회복해 주었다. 숙종(肅宗)때에 유림의 상소 로 인하여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증직했다. 부인(夫人)은 영가권씨(永嘉權氏)니 진 사(進士) 작(綽)의 따님인데 소생이 없어서 아우 공준(公準)의 셋째 아들 덕연(德淵)으로 아 들을 삼았으니 참봉(參奉)이다.

덕연(德淵)이 3남 2녀를 두었으니 맏이는 윤공(胤恭)이요, 다음은 윤검(胤儉)이니 다 참봉 (參奉)이요, 그다음은 윤양(胤讓)이니 진사(進士)요, 권경전(權景銓) 직장(直長)과 권명(權銘) 은 사위다.

윤공(胤恭)은 3남을 낳았으니 환(煥)·엽(燁)·찬(燦)은 수직(壽職, 나이가 많은 이에게 내리 는 직첩)으로 가선(嘉善)이요, 윤검(胤儉)은 민각(民覺)을 낳았으니 윤양(胤讓)은 2남 1녀를 두었으니 정수(廷秀)·민석(民奭)이요, 딸은 김익수(金益粹)에게 시집갔다.

환(煥)은 복창(復昌)을 낳았고 엽(燁)은 재창(再昌)을 낳았고 찬(燦)은 2남을 낳았으니 귀 실(貴實)·기실(起實)이요, 민각(民覺)은 3남을 낳았으니 상육(尙堉)·상돈(尙墩)·상연(尙堧)이 요, 정수(廷秀)는 4남 2녀를 두었으니 익(杙)·추(樞)·은(檼)·각(桷)이요, 사위는 이지백(李知 白)·곽륭(郭窿)이요, 민석(民奭)은 1남을 두었으니 선언(善彦)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 한다.

아! 하늘이 영걸의 특출한 재주를 내어 능히 태평한 거리에 활보하여 크게 쌓인 포부를 19) 노중련(魯仲連) : 중국(中國)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 사람이다. 진(秦)의 폭기(暴䎛)를 반

대((反對)한 유명한 사람으로 천하고사(天下高士)로 일컬어졌다.

펴지 못하고 마침내 참소하는 자들의 입줄에 오르게 되어 한때에 죽이는 화를 면하지 못했 음은 어찌함인가? 다행히 전지(天地)의 운수가 들어오고 우레와 비가 내리어 원통함을 씻고 벼슬을 주어 혜택이 천지(天地) 사이에 가득하였다.

선생(先生)의 부자(父子)에게도 떳떳한 공의(公議)가 민몰하지 않으므로 선생(先生)은 경광 서원(鏡光書院)에 배향되었고 눌재(訥齋)는 내성(柰城) 백록사(栢麓祠)에 배향되었으며 근래 에 또 도내의 의논이 일제히 발기되어 금호공(琴湖公)을 하단계(河丹溪) 창렬사(彰烈祠)에 봉안되었으니 여기에서 하늘의 도가 밝고 사람들의 마음도 한번 쾌할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극돈(李克墩)·유자광(柳子光) 같은 무리는 마른 백골과 썩은 시체를 잘라서 집에 먹이는 개를 주어도 먹지 않을 것이다. 화변(禍變)은 한때에 참혹하였으나 공의(公議)는 백년(百年) 에 엄중함이니 여기에서 백세(百世)에 자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것이다.

학경(學慶)은 행검(行儉)이 아담하고 공경하며 선조(先祖)의 일에 돈독한 분이다. 서로 대 하매 명가(名家)의 후손이 됨을 알겠다. 이미 갔다가 다시 와서 정성의 간칙함이 사람을 감 동할 만하니 어찌 감히 사양하리오, 노혼 함을 헤치고 정신을 수습하여 대강 선계와 덕행 을 갖추어 그 청함에 대하여 나의 높고 크게 우러러보는 생각을 부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