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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부군가장(先府君家狀) 역문(譯文) 목차

-남(男) 홍준(弘準) 찬(撰)

선부군(先父君,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은 시민(時敏)이요, 자는 자수(子修)며, 호는 금호 (琴湖)다. 선덕(宣德, 명나라 선종의 연호) 경술(庚戌, 世宗12 1430)에 서울 사제에서 출생 하시니 어릴 때부터 재주로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동국 신동(神童)이라고 일컬었다. 성장함 에 따라서 경서(經書, 사서삼경)에 몰두하셨고 척당(倜儻, 높은 기상) 강개(慷慨, 분개하는 뜻) 하는 절의(節義)가 있었다.

노산(魯山, 단종) 계유(癸酉, 1452 端宗 즉위년)에 사마시(司馬試, 소과)에 합격하고, 경사 의 잔치도 베풀기 전에 중형(仲兄) 명민(命敏)이 계유정란(癸酉靖亂)에 화(禍)를 입으니 1문 의 연좌화(緣坐禍)로 부군(府君)도 금고(禁錮, 공민권 박탈과 같은 형)를 당하고 드디어 남 쪽 안동(安東) 금계촌(琴溪村)으로 돌아와서 계사(癸巳, 1473) 6월에 하세(下世)하셨다.

아! 원통한 일이다. 우리 선인이 품위가 아름다웠고 뜻이 컸으며 도량이 침중하고 성질이 엄격하며 굳세었다, 평상시에 집에 계실 때도 의관을 벗지 않으셨고 모친을 봉양하는 데 있어 효성을 지극히 하셨다. 음식을 부드럽게 하여 반드시 그때그때 새롭게 해서 드리며 산에 가서 산양하고 냇물에 가서 생선 잡기를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게을리하지 않았다.

밤에 잠자리를 돌봐드리는 인사와 새벽에 잠자리를 살펴보는 인사를 반드시 하되 문밖에 꿇어앉아 명령을 기다렸다.

들어오라 하시면 들어가서 자리에 앉으니 앉은 자세가 기울지 않고 ​말씀이 있어야만 대 답하며 명령이 있으면 따랐다. 출타할 때는 연유를 고하고 돌아와서는 꼭 뵙고 돌아옴을 알렸으니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었다.

계미년(癸未年)에 친상(親喪)을 당하여 슬퍼함이 예에 지나쳤고 장사는 한결같이 가례를 따랐고 오직 천불(薦祓, 불전에 기도하는 제사)에는 ​초7부터 77(49일)까지 불전에 귀의하고 재산도 많이 바쳐 힘을 다하면서 항상 모든 아들에게 일러 가로대 부처(佛)를 숭상 않은 것 이 선유(先儒)의 명백한 가르침이고 나도 또한 유교의 책을 배우고 있으니 어찌 생각이 없 으리오 마는 다만 호천망극(昊天罔極)한 은혜(恩惠, 부모님 은혜)를 보답고자 할 따름이다.

헛된 일인가 아닌가는 알 수 없고 비록 허망한 일이라고 하나 ​나의 정성에 있는 것이니 허망한 것도 실지가 될지라 그러나 너희들은 본보지 말라 하셨다.

계부(季父, 삼촌) 미민(靡敏)은 선인과는 이모(異母, 배다른 모친)의 형이다. 부여로 귀양 살이 갔다가 배씨상(裵氏喪)을 당하여 달려와서 장사를 치르고 돌아갈 때 노비(奴婢, 남자 종과 계집종) 여섯 명을 주고 문서까지 넘겨주시니 어머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도 아들 딸이 많은데 한두 명 주면 되지 어찌 6명이리오」 하시니, 대답해 가로되 「내가 형으로 더 불어 어머니는 다르나 의리로는 아무 간격이 없소. 형이 가난하고 부리는 것이 적으니 그 고생을 참아보지 못한 탓이 아니겠소. 소민(小民, 어린이 또는 천한 사람)은 향토를 생각하 나니 모자가 서로 헤어져 있으면 흩어지기 쉬우니 차라리 온 식구를 다 데리고 오면 이런 근심이 없을 것 아니오」 하고 건장한 종을 보내 일행을 편히 데려오다.

3년을 산소 곁에서 시묘(侍墓)하고 복(服)이 끝난 뒤에도 낮과 밤으로 통곡을 하니 한 동 리에 사는 종질(從姪)되는 진사(進士) 배정(裵楨, 외종질)과 글을 읽을 때 시전육아장(詩傳 寥莪章. 부모를 생각하며 지은 시)을 읽으면 부군께서 통곡하시니 정(楨)도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나 슬픔이 다해야 그치시다. 또 채소 과일 곡식이 철을 따라 새로 나면 반드시 옷을 갈아입고 천신(薦新, 새 음식을 조상에 드리는 제사)을 하다.

항상 집안 자제들을 약간 모아놓고 가르침을 게을리하시지 않았다. 향당(鄕黨)에 처하여 남에 대할 때도 반드시 예절을 지켰다.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추종하였다.

청성군(靑城君)이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있을 때 누차 공의 댁에 가서 문후(問候, 같은 재 배 간에 안부를 물음)하면 공이 또 회사(回謝, 상대에서 베푼 인사에 대하여 인사를 갚다) 하려 가면 반드시 공사를 제쳐놓고 나가기를 기다려서 결재하고 처리하였다. 그리고 사람들 에게 말하기를 「이생원(李生員)이 자리에 있으면 부끄러워서 감히 일할 수 없다」고 하였다.

외인이 혹 물품을 보내주면 반드시 그 물건이 어떻게 하여 생겼나를 물어보고 알지 못하 면 받지 않았다. 또 받으면 반드시 한 말 곡식을 가지고라도 갚았다 치곤(緇髠)과 짚신과 두루마리 하나에 대해서라도 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려운 사람이 보내주는 것을 그대로 받고 마는 것이 불인하다는 취지에서였다.

중년에 우리 자당(慈堂)이 큰 병을 얻어서 3년 동안을 막심한 고생을 하였다. 살림은 기 울었고 그러나 그런 문제는 돌아보지도 않고 개념도 하지 않았다. 의원을 맞이하여 백약을 다 써서 치료만을 서둘렀으니 급기야 병이 나았다.

그런 뒤에는 자제들을 가르쳐서 밤낮으로 성취하기를 바랐다. 항상 시로써 독려하였다.

一飯都忘歲月輕 豈知斯世樹風聲 空身雖向窓前坐 逸意應馳野外行

한 그릇의 밥에 세월 빠른 것을 잊었으니

어찌 이 세상에 풍성(風聲, 세상을 바로잡는 교화나 성명)을 세울 수 있을까.

빈 몸으로 비록 창 앞을 향하여 앉았으나 호탕한 뜻은 들 밖을 달려 다니고 싶구나.

중형(仲兄) 종준(宗準)이 서울에 유학(遊學)하고 있었다. 선부군(先父君)이 매양(每樣) 서 신으로 경계하고 면려(勉勵)하였으니

첫 번째 서신에 「모름지기 내가 너를 경계하는 말을 기록해 두라.

전에 하든 행동을 그대로 하지 말고, 단정치 못한 미치광이 같은 사람들과 상종하지 말고 감히 잘못을 꾸미려 하지 마라. 몸에 도움이 되지 않은 일은 하지 말고 부질없이 놀기를 힘쓰지 말며 열심히 공부하여 매일 노력하여 부디 힘쓰고 또 힘쓰라」고 하였다.

두 번째 서신에는 「너희 유학(遊學)은 다른 호협(豪俠)한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다.

말과 행동을 삼가고 술과 여색을 경계하여라. 부질없이 놀지 말고 미치광이 같은 사람과

상종하지 마라. 우리 선조가 대대로 조정의 명신(名臣, 이름 있는 신하)이 되었는데 나의 대에 이르러 때를 만나지 못하고 감가(坎軻, 초야에 있는 현달치 못함)에서 몸을 마치게 되 었으니 나는 이것으로 그만이다. 오랫동안 착한 일을 쌓으면 어찌 자손에 끼쳐지는 경사가 없겠느냐 네 형은 공부도 하지 못했고 또 재주도 없다. 네 아우도 또 학문을 좋아하지 않 는다. 오직 내가 기대하는 것은 너뿐이다. 그런데 너는 학문을 배웠는데도 성실하지 못하 다.

성실하지 못하면 실(實)이 없는 것이니 성실이라고 하는 것은 덕행(德行, 덕이 있는 행실) 을 말하는 것이며 재주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덕행이 없으면 비록 칠보의 재주(七步之才, 위나라 조식(曺植)이 그의 형 문제(文帝) 에게 칠보 안에 글을 짓지 못하면 대법(大法,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다. 조식(曺植)이 응구 첩대(應口輒對, 묻는 대로 거침없이 대답함) 하여

(煮豆燃豆箕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相煎何太急)

-콩을 삶는데 콩대를 때니 콩이 솥에서 울고 있구나. 본시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인데 삶 는 것이 어이하여 이리 급한고?- 라 하였다. 문제(文帝)가 부끄럽게 생각하고 후회하였다.

굉장한 재주에 비유함)가 있더라도 어디에 소용이 닿겠느냐?」고 하였다.

세 번째 서신에는 「첫째는 조정의 이해(利害)와 대신(大臣)들의 흑백(黑白)을 말하지 말 것이며

둘째는 인물의 장단(長短, 누가 낫고 누가 못하다)과 주색의 평론과 친구의 과오(過惡, 과 실과 나쁜 점)를 말하지 말라.

이것은 그 대표적인 큰 사항만 들어서 말한 것이다. 미세한 언사나 세밀한 행동에 이르러 서도 다 근신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마땅히 마음에 새겨서 잊지 말고 원대한 도를 성취하 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아! 옛사람이 말하기를 「자식을 아는 것은 그 아비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으니 우리 선인 의 선견지명(先見之明, 미리 미래에 대한 그 사람을 판단하는 밝음)은 아무나 따를 수 있겠 는가?

과연 중형(仲兄)이 대과에 방안(榜眼, 갑과에 둘째로 합격한 사람. 첫째로 합격자는 장원 랑(壯元郞)이라 하고 셋째로 합격한 사람을 탐화랑(探花郞)이라고 한다)으로 합격하였다.

서화와 음악과 의약(醫藥)과 점(占)으로부터 잡된 기술에 이르도록 정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벗을 사귀되 단인(端人, 단정한 사람)이 아니면 같은 유에 끌려서 도로 화(禍)가 되 는 것이다. 내가 또 학문을 좋아하였으나 득실하지 못하여 경서(經書)의 깊은 뜻에 통하지 못하고 겨우 조그만 명성인 소과(小科)에는 급제하였으나 여러 번 대과(大科)에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 형제가 선인에 대하여 죄인이 되었다.

백부(伯父) 도관(都官, 중앙관리) 정랑(正郎) 불민(不敏, 정랑은 정5품 벼슬 불민은 이름)

의 자제가 하나 있는데 명망이 없었고 중부(仲父)는 성균(成均)으로 주부(主簿)를 지낸 물민 (勿敏)이 세 아들을 두었으나 영체(零替)하였으며 다만 한 손자 팽령(彭齡)이 있어 음(陰)으 로 이제 진잠현감(鎭岑縣監)이 되었으나 아들은 없다.

계부(季父) 미민(靡敏)은 자제 4형제를 두었으나 혹은 병들고 홀아비로 된 사람이 두어 사람이나 된다. 그 우리 선인의 자서(子婿, 아들과 사위)에는 급제하여 현감(縣監)도 되며 현령(縣令)도 되고 감사(監司)도 되었다.

숭홍공(崇弘公) 세 아들도 보잘것없으나 아들도 있고 손자도 있어 문안에 우쭐하게 있으 니 오직 조상이 하늘에 계신 영혼의 음덕(蔭德)으로 도운 공이 아니겠는가?

우리 선인의 아들과 자손된 사람은 사람 노릇을 잘하여 문호를 다시 일으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각각 언행을 삼가며 학업을 부지런히 하여 당연히 선인의 경계한 글로 거울을 삼고 관직 에 소임을 다하고 뜻과 절조를 잡아서 조상의 청백을 법으로 삼고 청전(靑氈)을 삼아 대대 로 추락함이 없은즉 부모에게도 욕이 없을 것이요. 조상의 이름도 드러내어 아름다운 일이 다 하지 않을 것인가 각각 힘쓸지어다.

□成均生員琴湖先生李公墓碣銘(성균생원금호선생이공묘갈명) 幷序(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