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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올림픽이 중요한 이유

박승록 / 한국경제연구원

본 장에서는 베이징 올림픽 이후에 기대되는 중국의 정치체제와 외교 전략을 살펴본다. 중국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사회와 시장의 요구는 다양해지고 정부의 권위적이거나 독점적 정책결정과 정은 점차 도전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시장의 변화는 사회계층 간, 지역 간 분화를 촉진하 고, 빈부격차를 확대시킨다. 따라서 중국정부는 점점 더 국민들의 다양한 요구에 직면할 것이고, 이는 결국 민주화 요구로 나타날 것이다. 중국의 현 정치체제는 지금까지 시장경제를 성공적으로 발전시킨 업적도 있지만, 경제적 성공의 그늘에 가린 문제점들 가령, 부정부패, 파벌주의, 지역 이기주의, 관료주의, 행정의 비효율성, 취약한 사법체계 등의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중국의 외교전략에서도 변화가 기대된다. 중국은 그동안의 경제성장을 토대로 경제력이 크게 상승시키고 있다. 미국이 종전과 마찬가지로 중국 외교전략의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는 가운데 외 교전략도 지금까지 취해 온 방어적 외교자세에서 보다 적극적 자세로 변화할 가능성은 있다. 하 지만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수동적이고, 미국의 공세에 대하여 방어적, 우회적인 자세를 견지할 것이다.

올림픽 게임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스포츠 행사이다. 비록 단기간의 국제적 행사이지만 개최도시에게는 매우 장기적인 효과를 미친다는 점에서 하나의 이정표 가 되는 행사이다. 특히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서는 스포츠 시설 및 이를 지원할 각종 사회 인프라의 건설을 위해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는데 이는 올림픽이 끝난 후 개최도시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유산이 된다.

최근에 올림픽을 준비하는 데 도시들은 많은 비용을 지출한다. 따라서 올림픽 준 비를 위한 막대한 비용지출은 도시의 전반적 환경을 개선시키는 긍정적 효과가 있 을 경우에 정당화될 수 있다. 원래 올림픽 게임은 비교적 작은 규모에서 출발하였 지만 오늘날에는 올림픽 개최국가의 사회변화, 개최도시의 환경변화에 매우 중요한 촉매제가 되는 크고 중요한 행사가 되었다.

현대 올림픽은 고대 올림픽이 중단된 뒤1) 약 1500년 만인 1896년에 피에르 쿠베 르텡(Pierre Coubertin)(1863~1937)남작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쿠베르텡은 잘 조직된 스포츠 행사가 육체적, 문화적 쇄신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신념에서 올림픽을 재 개하였다. 운동은 육체적 건강을 개선시킬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가와 사회계층에 서 민주주의와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최근 많은 국가와 도시들이 경제개발과 도시개선을 위해 올림픽을 유치하려고 한 다. 올림픽 개최는 올림픽 개최 전후 많은 수의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어서 일자리 창출 등 경제를 보다 활성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림픽을 위한 각종 운동시설의 건설은 이전에 부족했던 새로운 스포츠 및 레크리에이션 설비 등을 새로 건설함으 로써 도시를 획기적으로 개조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올림픽 개최는 운동시설의 건설 외에도 교통 인프라의 구축, 도시의 미관을 개선 하기 위한 새로운 투자를 가능하게 해주기도 한다. 올림픽은 올림픽 경기가 진행되 는 동안 국제적인 미디어의 관심을 끌 수 있으므로 주최국과 주최도시의 새로운 이 미지를 세계 여러 나라에 전달하여 국제적 인지도를 높일 수 있게 해준다. 새로운 설비의 계획과 구조물의 모습은 새로운 디자인, 혁신적인 자재 사용을 통해 이 분 야에서 새로운 기록을 세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것 역시 개최국과 개최도시의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여 인지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이와 같은 올림픽 개최의 다양한 효과 때문에 정치지도자들은 올림픽 유치를 다양한 정치목적 달성을 위해 고도의 계산된 행사로 활용하곤 한다.

중국 역시 베이징 올림픽 개최를 통해 세계에 중국의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주려 고 한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유치하기 위한 과정에서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

1 ) 고대 올림픽은 기원전 77 6에서 서기 39 3까지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4년마다 한번씩 2 39 회까지 열 렸다. 제우스 신에게 제사를 지낸 다음 그리스의 젊은 남자 중에서 형벌을 받은 일이 없는 사람들 로 운동경기가 이루어졌다. 우승자에게는 올리브나무로 만든 관을 머리에 씌워주고 영웅의 칭호를 부여했다. 그러나 올림픽 횟수가 거듭되면서 도시 국가사이에서는 아마추어 정신을 망각한 채 물질 적인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어 승리만을 목적으로 한 부정행위가 이루어졌다. 그리스를 정복한 로마 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기독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서기 39 3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올림픽 경기를 중단하였다.

아왔던 인권문제의 개선된 모습, 개혁·개방 이후 경제적 성과, 중국의 문화와 중국 의 자존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국의 국가적 업적에 대해 긍정적 측면의 국제적 인식을 이끌어 내려고 한다.

가. 올림픽 개최까지 걸어온 신중국의 노정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유치하고, 이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 는 모습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이 올림픽 개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인들은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붉은 군대(紅軍)가 북경에 입성하 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이후의 중국을 과거의 중국과 구분하여 신중국(新中國) 이라고 부른다2). 올림픽 개최를 눈앞에 둔 신중국은 매우 특수한 역사적 배경과 구 조를 갖고 있다.

중국은 복잡한 사회시스템, 점조직적이고 폐쇄적인 집권시스템, 봉건적 인치주의 와 서구에서 도입된 현대적 법치주의의 혼재, 주류인 한족(漢族) 특유의 이중적 민 족성 등으로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나라이다. 이런 신중국이 이제 세계무대에 등장 해 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것이다.

한국과 신중국(新中國)이 정식 교류를 시작한 지 16년의 세월이 흘렀다3). 올림픽 개최 이전 중국은 한국을 비롯한 외국에 대해 아쉬운 입장이었다. 올림픽 개최 이 후 중국의 국내외 상황변화는 예측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중국이 여의주를 물고 승 천하는 “용의 시대”가 시작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된다.

중국이 왜 개혁·개방을 선택했고, 더 나아가 올림픽을 개최하려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선 문화대혁명 이후 신중국이 걸어온 노정과 신중국인 의 생각을 살펴보자.

10년 겨울을 뚫고 나온 사상의 봄

1976년 9월, 중국 공산당의 영수(領袖)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하자 10년의 대환 란 문화대혁명4 )이 종결된다. 1978년 문화대혁명의 최대 피해자인 덩샤오핑(鄧小平) 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개혁·개방의 시대로 불리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鄧小平)은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中全會)

2 ) 1 949 년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해 수립한 중화인민공화국을 과거 봉건시대 중국과 구별하기 위 해 중국 정부는 ‘신중국(新中國)’으로 부른다.

3 ) 1 99 2년 8월 대한민국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정식 국교가 수립되었다.

4 ) 정식명칭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다. 중국공산당 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이 중국혁명정신의 재건을 명분으로 1 96 6~7 6년까지 10 년 동안 추진한 대격변·대환란이다. 중국이 소련식 사회주의노선을 따라 갈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자신의 권자와 역사적 위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마오쩌둥(毛澤東)은 역 사의 흐름을 역류시키기 위해 인류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전통파괴와 반인륜의 혼란상태 를 조장하고 방치해 신중국을 공포와 공황상태로 몰아넣었다.

에서 중국 공산당의 역사적인 변화를 결정한다. 대외 개방정책의 추진, 국제무역의 확대, 외국자본의 이용, 선진기술과 관리경험의 도입을 통해 중국경제의 발전을 도 모한다. 이를 위해 먼저 광동성의 션쩐(深圳)과 쭈하이(珠海), 푸젠성 샤먼(厦门)과 싼터우(汕头)에 경제특구를 설치한다. 이어 1981년 6월 중국공산당 11기 6중전회에 서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关于建国以来党的历史问题的 决议)》를 채택해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마오쩌둥(毛澤東) 만년기의 역사적 오류를 시 정하고, 동시에 마오쩌둥(毛澤東)의 업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화대혁명 최대 피해자 중의 한사람인 덩샤오핑(鄧小平)은 문화대혁명이라는 대 환란으로 상처받은 중국민의 의식을 치유하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마오쩌둥(毛澤東) 에 대한 객관적 평가라는 원칙을 세워 가해자와 피해자 양쪽 모두를 복권시킴으로 써 중국사회의 분열과 붕괴를 막아냈다. 문화대혁명에 가담한 자라해도 적극적 형 사범에 해당하는 자만을 의법처리하고, 단순가담자는 역사적 피해자로 인정하여 복 권시킴으로써 역사의 단절과 사회분열을 막는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올림픽을 개 최하는 중국의 굴기가 있게 한 역사적 결단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은 1997년 2월, 9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 년 동안 경제개 혁에서 큰 성과를 얻었지만 정치개혁에서는 보수적 태도를 고수했다. "사회주의 노 선의 견지, 인민민주전제정치의 견지, 공산당 집권영도의 견지, 막스-레닌주의와 마 오쩌둥(毛澤東)사상의 견지"라는 4개 기본원칙을 주창했다.

이 같은 덩샤오핑(鄧小平)의 2중 노선은 중국경제의 개혁과 발전이라는 성과를 거 두었지만, 정치·사회적 측면에선 기본적으로 마오쩌둥(毛澤東) 노선을 계승했기 때 문에 1979년 서단(西单)민주사건의 진압, 1989년 6.4 톈안먼 민주운동을 진압하는 등 보수적 태도로 일관했다. 덩샤오핑(鄧小平) 시대에 해결되지 못한 정치개혁의 과 제는 현재까지 중국의 정치·사회·경제에 커다란 문제로 남아있다.

중국 국내의 한 정치전문가는 덩샤오핑(鄧小平) 시대를 이렇게 평가했다. “덩샤오 핑(鄧小平)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이념과 전술 등을 그대로 답습한 사람이다. 그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이념과 전략전술 등을 그대로 모방했을 뿐이고, 마오쩌둥(毛澤 東)과 다른 점은 단지 경제발전에 집중한 것뿐”이라고 했다. …문화대혁명은 강청 등 4인방에 의해 주도된 것처럼 외부에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마오쩌둥(毛澤東)이 기획하고 조종한 자신의 집권연장을 위한 일인극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1958년 부터 1960년대 초까지 진행된 대약진운동의 실패, 3년 대기근 등 경제정책의 실패 와 마오쩌둥(毛澤東)의 독제에 불만을 품은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마오쩌둥(毛澤東) 개인의 절대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이라는 교묘한 수단을 동원해 신중국 을 대환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농민세력을 기반으로 공산혁명을 이끌고 정권을 장악했다. 공 산혁명 이후 계속되는 내전으로 피폐한 경제를 살리기 위해, 마오쩌둥(毛澤東)은 대 약진운동(1958~1961년)을 통해 중국을 곧바로 공산주의 단계에 진입시키고자 하였 다. 대약진운동 기간 동안 만들어진 인민공사(人民公社)는 전 국민의 80%에 달하는

농민의 토지소유 욕구를 막아 오히려 농업생산성을 저하시켰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시행한 스탈린 방식의 강제농업집단화 정책은 중국 농촌을 피폐시켰다. 이 같은 실 정에 반발하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마오쩌둥(毛澤東)은 문화대혁명이란 환란을 일 으켰다.

덩샤오핑(鄧小平)은 문화대혁명의 최대 피해자였지만 자신이 집권한 뒤에는 덩샤 오핑(鄧小平)의 정치노선에 장애가 되는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마오쩌둥(毛澤 東)이 동원한 방법을 그대로 답습한다. 즉 사상해방의 봄으로 불리는 1980년대 또한 덩샤오핑(鄧小平)의 설계와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신중국 성립 이래 문화대혁명 을 거치면서 형성되어 수면아래에 존재하는 반공산당 세력과 개혁노선을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와 계산 끝에 사상해방의 분위기를 만들어 숨어 있는 반대세력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후 1989년 단번에 제거한 것이다.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의 정치적 보수노선이 중국국민의 지지를 받 고 유지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신중국이 건립에 동참한 혁명세 대가 건재했기 때문이다. 혁명세대는 주로 대장정에 참여했던 세대를 일컫는다.

1988년 장융지예(张永杰)·청왠쭝(程远忠)은 중국 동방출판사에서 펴낸 󰡔제4세대인(第 四代人)󰡕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세대를 구분하고 그들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제4세대인(第四代人)󰡕에서 중국공산당이 창당된 1921년부터 1976년 문화대혁명이 종결될 때까지 55년은 정치시대이고, 1976년 이후는 경제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생 활공간과 행위군체들의 특징을 기준으로 분류하면 신중국인을 4개의 세대로 나눌 수 있다. 혁명전쟁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제1세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17년 동안 성장한 사람들은 제2세대,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으로 활동했던 세대는 제3세대, 문화대혁명 종결 후 1980년대 사상해방기에 성장한 청년세대는 제4세대에 속한다.

제1세대인은 세대 전체가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로 양극 화된 사고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직선적으로 대응하며, 사유와 감정이 독립적으 로 작용하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제2세대인은 제1세대인의 리더에 복종하며, 집 체주의를 신봉하고, 금기의식이 매우 강하다. 특히 사상부문에서 금기의식이 매우 강한 특징을 갖고 있으며,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다.

제3세대홍위병(红卫兵) 세대와 1977년 대학입시 부활 후 최초 대학입학세대)인은 복잡한 인생경력 때문에 그들의 행동방식, 감정방식, 사유방식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제3세대인은 과거와 현시대를 비교하면서 자신들의 과거운명을 바꾸고자 한 다. 제3세대인은 십대시절에 겪은 문화대혁명이라는 대환란의 경험과 갑자기 돌변 한 세상에 적응해야 하는 혼돈상태에서 생존을 위해 극단적인 이중성을 표출하는 세대이다. 현재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의 실권을 틀어쥔 세대가 제3 세대이다.

중국 국내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중국의 부정부패와 개혁을 가로 막고 있는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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