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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청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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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청병 출병 요청

* 대원군이 8월 28일 평양 주둔 청군에게 보낸 편지

"지금 종사의 안위가 일시에 위급해져서 날마다 天師의 東援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즘 듣건대 대부대가 연이어 출정하였다고 하니 이는 참으로 다시 소생할 때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상국은 일본에 붙어 매국 하는 무리들을 일소하시어 하루 속히 焦眉之急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피눈물로 기원하고 또 기원합니 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 청일전쟁은 우리 땅에서 일어난 그들간의 전쟁, 소외당한 '조선'의 운명을 결정한 전쟁

진순신의 『청일전쟁』이 보여주는 중국의 회한과 조선인식 89

왜 전쟁에서 청국은 패했을까?

청일전쟁을 두고 양국의 군사력 특히 해군력의 대비와 운용은 많은 논쟁을 던져주었다. 청불전쟁 패전 후 청국은 해군에 엄청난 투자를 하여 재정비에 나섰다. 1995년 청국은 定遠號와 鎭遠號 라는 두 척의 7천톤급 세계 일류의 철갑선을 구매했다. 철갑전함, 순양쾌선, 포정, 어뢰정 등을 꾸준히 구매했으며, 서양인 전문가를 통해 수병들을 엄격히 훈련시켰다. 1888년 북양함대의 위용은 『北洋海軍章程』1)으로 정리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은 해군공채 1,700만원을 확보하고 실전경험을 쌓고 해군대학을 만들고 해군력을 증강시켰다. 반면 중국 은 더 이상의 투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양함대 주요 전선의 평균마력은 일본함대에 비해 1,850마력 적었으며, 평균시속은 1해리정도 늦었다. 평 균 군함의 연령도 일본함대보다 2년 길었다. 근대적 함정의 무력은 주로 배에 실린 화포에서 결정되는데, 전 체적으로 북양함대는 중포와 기관포 방면에서 우세했으며, 일본함대는 경포와 속사포 방면에서 우세를 점하 였다. 일본함대는 전형적인 기동전술을 펴서 함대를 둘로 나뉘어 효율적인 해전을 펼친 반면, 중국 측은 해전 경험의 부재로 인해 작전전술 능력이 부족하여 불리한 결과를 낳았다.

전쟁직전 영국 해군부의 '청일군사역량대비 비망록'(1894년 7월, 영국해군부 → 영국 외교부)의 글도 이와 비슷했다.

"일련의 군함 장비 인원의 숫자를 보면...청일 양국 해군의 실력차이는 두드러지지 않는다.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중국의 함대편제는 매우 단순하며 일본해군은 진정한 제국 해군으로 함대편제가 완전히 서방 해군의 편지를 모방하였다. 일본 군함의 모든 수병과 대부분의 군관은 모두 서방의 훈련방식으로 배양되었다. 일본 군함은 여러차례 원거리 出海를 했고, 군관 모두 효율적인 지휘를 할 수 있다. 외국 해군에서는 일반적으로 서양인 고문이 떠난 이후부터 중국함대의 효율이 큭 떨어졌다고 본다. 톤수나 대포문수나 중국이 일본을 이 긴다고 말할 수 있더라고 편제 규율 훈련에서 일본은 중국보다 크게 앞선다. 따라서 일본해군 역량은 비교적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1) 「船制」「官制」「昇擢」「考校」「俸餉」「恤賞」「儀制」「鈴制」「軍規」「簡閲」「武略」「水帥後路各局」등으로 구성. 이것은 주로 영국해군의 방법 을 참조하고 독일해군이나 중국의 옛 제조도 부분적으로 참고하였다. 기초작업에 참가한 인물은 周馥·丁汝昌·林泰曾·劉歩蟾·羅豊禄 등이며, 주복이 편집했다고 한다.

90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제 17기 박물관대학 상반기 과정 진순신의 『청일전쟁』이 보여주는 중국의 회한과 조선인식 91

청국의 조선독립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처리되었나?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직전까지 이홍장은 조선을 버릴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청국이 조선의 독립을 인정 하는 최종안이 아니라 청일 양국이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는 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또 시모노세키조약 후 청 일전쟁 발발 직후 폐기되었던 조청관계의 재구축을 위해서도 새로운 양국관계 수립이 요구되었지만, 청국은 이를 거절하였다. 조선을 대등한 국가로 간주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1899년 한청통상조약 체결로 정리되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둔 카이로 선언에서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강제로 폭력과 탐욕에 의해 탈취 한 지역에서 구축'되어야 함을 명시하였다.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그에 기반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샌프란 시크스코강화조약은 바로 청일전쟁 이전으로의 회귀를 선언하는 것이고, 이 논리는 과거 조청관계를 20세기 에 환기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실제 1945년 해방 직전에 장개석 정부는 한국의 치안 및 경제 등을 장악 하고 행정적, 경제적 영향력을 확보할 구상을 하였다. 물론 곧 이은 전쟁과 냉전으로 인해 이 논의와 시각은 잠복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말 한중외교관계 수립과 갈등, 중국의 부상과 미일의 경제위기, 혹은 최근의 미일동맹 강화와 미국의 아시아전략 등과 맞물며 새로운 한중관계 정립을 환기시키고 있다.

21세기 중국의 청일전쟁 반성과 한국, 동아시아

청일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마지막 해전으로는 위해위 해전이 있다. 1895년 1월 20일 일본의 산동작전군과 연합함대는 산동반도 동쪽의 榮成灣에 상륙해 영성현성을 점령하고 위해를 공격하였다. 격렬한 전투 끝에 2 월 2일쯤 위해주변 남북의 포대들이 모두 함락되었다. 위해만 앞바다의 劉公島를 기지로 삼고 있던 북양해군 은 일본군으로부터 육지뿐만 아니라 해상에서도 2월 4일부터 어뢰정 부대의 공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북 양함대의 자랑 정원호가 피격되었다. 정원호는 워낙 큰 배라 금방 침몰하지는 않았으나 회복이 불가능하다 고 판단되자 해안가에 정박시킨 후 함포만을 사용하였다. 일본 어뢰정의 공격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來遠호 와 威遠호 등도 격침되었다. 1895년 2월 11일 밤 정원호의 포탄 저장고가 바닥이 나자 정여창은 정원호를 자폭 시켰으며, 자신은 대량의 아편을 먹고 자살하였다. 그의 죽음을 숨긴 채 나머지 지휘관들은 일본군에 항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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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북양함대의 남은 함선인 진원 제원 평원 광병 진동 진서 진남 진북 진중 진변 등이 모두 일본군에 넘겨 졌고, 연습선 康濟호만이 항복한 청군과 외국인을 운송하기 위해 남겨졌다.

중국은 청일전쟁을 기억하기 위해 유공도에 기념박물관을 건립하고 대대적인 행사를 벌였다. 근대중국의 청일전쟁에 대한 반성의 결과는 어떤 방향으로 귀결될지는 얼마전 방영되었던 다큐멘토리 '대국굴기'를 통해 확인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다시 주변의 諸國으로부터 질문을 받아 곤란하고 더 나아가 위험한 상황이 되고 있다. 최근 일련의 사건은 이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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