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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복궁 점령 - 청일전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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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의 전개와 그 동아시아적 의미 39

구 선 희(국사편찬위원회)

40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제 17기 박물관대학 상반기 과정 청일전쟁의 전개와 그 동아시아적 의미 41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에 대해 일본은 경복궁 점령은 먼저 발포한 조선 병사와의 우발적인 충돌에서 시작되었고 일본군은 어쩔 수 없이 응전하며 왕궁으로 들어가 국왕을 보호한 것으로 소규모 충돌 사건에 지 나지 않는 것이라 했다. 이것이 당시 일본의 공식 입장이었다. 일본의 이런 견해를 염두에 두면서 이 사건의 실체를 살펴보기로 하자.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한 것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파견된 청나라 군대와 무력 대 치를 하는 과정에서 청군을 공격하는 데 유리한 형세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당시 일본은 서울에서 가까운 인 천을 거점으로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고 있었고, 청은 아산만을 통해 군대를 조선으로 보내고 있었다. 일본 은 조선정부 권력을 그들의 영향력 아래 두고 서울의 남쪽에 있는 청나라 군대를 공격해 조선의 영역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 조선정부 권력의 핵심인 왕이 거주하는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것이었다.

일본의 경복궁 점령으로 조선의 국왕은 일본의 포로 아닌 포로가 되었고, 왕비 일족과 대립하고 있던 흥선 대원군이 일본에 의해 정권을 잡게 됨으로써 조선정부는 일본에 종속되었다. 이로써 서울에 있는 조선의 군 대는 일본군에 의해 무장 해제 되었고, 일본군에 필요한 군수품 수송과 징발 등은 모두 조선정부의 명령으로 시행됨으로써 일본은 조선에서 전쟁을 치루는 데 필요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일본의 경복궁 침입 과정에서 일어난 조선군과 일본군의 교전을 일본 자료("일청전사 초안")에서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7월 23일 오전 0시 30분, 공사의 전보를 받은 오시마 여단장은 모든 부대를 향해 계획을 실행할 것을 명령하고, 또한 사람을 시켜 서울-의주 간과 서울-인천 가나 전선을 절단하여 이 일이 청나라에 빠르게 전해지는 것을 막으면서, 막료를 이끌고 일본 공사관으로 지휘부를 옮겼다.

……

다케다 중좌가 지휘하는 일단이 영추문에 도착했는데 대문이 굳게 닫혀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영추 문을 부순 후 가와치 중위의 2분대가 먼저 돌입하여 문을 지키고, 차례로 제7, 제5중대가 진입하였으며, 제7중대는 함성을 지르며 곧바로 광화문으로 나아가 수비하는 조선 병사를 쫓아내고 점령한 다음 안에 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1소대는 다시 건춘문으로 나아가 안에서 문을 열었다. 이 사이에 수비하던 조 선 병사는 한 명도 저항하는 자 없이 모두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이때 제6중대는 예정대로 남대문으 로 들어가 오전 4시 20분 건춘문에 도착했는데, 문 밖에 있던 조선 병사가 이들을 향해 총을 쏘아 즉각 응사했다. 5시 조금 지나 영추문으로 들어온 제7중대의 1소대가 도착해 안에서 문을 열어 곧바로 문안으 로 진입하였다. 건춘문으로 들어온 제6중대는 다시 북방의 춘생문, 신무문, 순거문을 점령하는 임무를 부 여받고 병력을 나누어 조선 병사를 추격하면서 왕궁 내부를 지나 북쪽으로 일제히 행진했다. 그런데 춘 생문으로 향하던 부대가 왕국 북부 외곽에 이르자 북쪽 소나무 속에서 조선 병사가 사격을 가해 그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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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였다. (이때 제3중대는 근처 왕궁 성벽의 외부에서 남쪽의 조선 병사와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제5중대는 군기를 호위하면서....광화문 안에 있었는데 북쪽에서 격렬한 총성이 들려오자 다케다 연 대장은.... 야마구치 대대장으로 하여금 제5중대를 지휘하여 제6중대를 지원하게 하였다.

이에 제5중대는 즉각 건춘문 안에서 성벽 안쪽을 따라 북진하였다. (야마구치 대대장은 건춘문의 누각 위에 올라 일반적인 정황을 시찰한 뒤, 제5중대를 뒤따랐다. 이때 외부독판 조병직이 궁내에서 나와 오 토리 공사를 면회할 것을 청했다. 대대장은 이를 허락하고 호위병을 딸려 광화문으로 나가게 했다.) 제5 중대가 지원하자 처음에 제6중대에 맞서 저항하던 조선 병사는 속속 북쪽 왕궁 성벽을 넘어 백악 방향으 로 도망감으로써 양쪽 사격이 가까스로 멈추었다(오전 7시 반).

위의 자료를 보면 오전 4시 20분부터 오전 7시 반까지 약 3시간 동안 조선군과 일본군의 총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한 후 국왕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일본의 자료("일청전사 초 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미 왕궁 안의 조선 병사 대부분을 쫓아내 성벽은 사방 모두 일본병이 점령하게 되었다. 이제 핵심은 왕 궁 내부를 수색하여 국왕의 소재를 발견하여 포위하는 데 있었다. 즉 야마구치 대대장(이때 왕궁 북부에 있었다)은 제5중대와 제6중대의 2분대에게 수색을 명령했다. 잠시 후 제5중대장으로부터 "국왕이 옹화 문 안에 있고, 조선 병사가 지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대대장은 우선 부하들의 사격을 제지 하고 직접 왕이 있는 곳으로 갔다(당시 국왕은 옹화문 안 함화당에, 왕비와 후궁은 집경당에 있었는데, 전투가 시작되자 왕비가 함화당으로 거처를 옮겨 국왕과 함께 있었다.) 야마구치 대대장이 옹화문에 이 르렀을 때에는 제5중대 일부가 이미 문안에 있었고, 장교는 조선 관리와 담판 중이었다. …… 여러 사람 [조선 관료를 말함-필자]이 대대장에게 청하기를 "외무독판이 지금 오토리 공사 있는 곳으로 가서 담판 중이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병사를 옹화문 안으로 들여보내지 말기를 바란다."고 했다. 대대장이 말하기 를 "문안에 있는 조선 병사들을 보라. 만일 그들이 갖고 있는 무기를 나에게 내주지 않는다면 청에 응할 수 없다."라고 했다. 그들이 말을 듣지 않자 대대장이 즉각 칼을 빼들고 군대를 지휘하여 질타하면서 문 안으로 돌입하려고 했다. 그들은 크게 놀라 대대장의 요구를 받아들여 국왕의 재결을 얻을 때까지 미루 기를 청했고, 잠시 후 문을 나와 조선 병사의 무기를 내주었다.

일본군은 조선 병사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무방비 상태가 된 국왕을 포로로 잡고 있었다. 경복궁을 점령하 던 날 일본군은 경복궁 점령과 함께 왕궁 주위에 있던 조선의 군사 시설을 모두 점거하고 무기를 압수했기 때 문에 조선 병사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기도 했다. 왕궁 북쪽 고지에서 시작된 조선측 사격이 오후 2시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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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았다고 한 일본측 기록을 보면, 조선군과 일본군간의 교전이 오후 2시까지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함으로써 벌어진 조선군과 일본군의 교전은 일본이 계획 한 청일전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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