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사비기 백제사 문헌 연구의 현황과 과제
Ⅲ. 정치사 및 대외관계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정치사와 대외관계사는 사비기 백제사 연구에서 언제가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온 분야였다. 특히 2016년과 2017년에는 대외관계사 연구가 활발하였음이 기존의 연 구사 논문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는데,22) 2018년에도 10편에 달하는 연구 논문이 제 출되었다.
1. 정치사
먼저 정치사에 대한 연구를 정리한다. 먼저 백제 무왕의 출계와 천하관을 검토한 논문이 주목된다. 이 논문에서는 파른본 삼국유사 왕력 무왕조의 기록을 근거로 무 왕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임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무왕의 출신을 몰락 왕족으로 파 악하였다. 또한 미륵사지 서탑에서 출토된 「舍利奉迎記」의 ‘대왕폐하’라는 칭호를 통 해 무왕이 중국과의 외교관계에서는 왕(대왕)을 자칭하면서 국내에서는 황제로 군림한 外王內帝 의식을 가졌음을 확인하였다.23)
무왕대 조영된 것으로 비정되는 주요 건축물의 현황과 관련기록 그리고 무왕대의 정국변화 등을 검토하여 대규모 건축물의 조영과 정치적 변동 관계를 실증적으로 도 출해보고자 한 논문도 제출되었다. 이에 따르면 무왕이 익산 지역에 왕궁성과 제석사
22) 장미애, 2017, 「2016년 백제사 연구 성과와 동향 웅진·사비시대 문헌사를 중심으로 」 百濟學報 20; 박지현, 2018, 「2017년 웅진·사비기 백제사 연구 성과와 과제」 百濟學報 24.
23) 노중국, 2018, 「백제 무왕의 출계와 천하관」 百濟學報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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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을 가진 승려들이 지방에서까지 활동하게 했으며, 왕흥사의 성격을 변화시키고 오 악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여러 지방에도 사원을 창건한 것이었는데, 너무 과감했던 그 의 시책으로 인해 그 역시 1년 만에 정변으로 추정되는 귀족세력의 반발로 단명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보았다.28)
이밖에 7세기 백제와 신라의 부세제도 및 지방지배와 통치체계를 비교하고, 백제 멸망 이후 신라가 당의 백제고지 통치체제와 부세체제를 참조하여 부세체제를 개편하 는 과정을 검토한 연구가 있다. 신라가 중고기 이래의 전통적인 관행을 존중하는 토 대 위에서 백제의 지방제도 운영을 부분적으로 수용했을 것으로 추론하였다.29) 삼국 사기 지리지에 수록된 웅진도독부 소속 주현들의 성격을 검토하여 7세기 백제가 부 병제를 도입하여 운용하였을 가능성을 확인한 연구도 있었다. 웅진도독부 51현의 배 치 양상이 수도 인근 지역에 대부분 위치한 唐의 軍府 분포 형태와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 웅진도독부 소속 주현들이 원래는 府兵制 하에서 수도로 올라가 국왕을 호위하 는 병력을 제공하는 군부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다만 백제가 수용하였을 부병 제는 서위·북주대의 것으로 판단하였다.30) 비교사적 관점에서 백제의 정치제도를 복 원하려 한 시도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2. 대외관계사
7세기 초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관계를 검토한 2편의 논문이 제출되었다. 먼저 598 년 백제 위덕왕의 대수외교와 607년 무왕의 대수외교를 모두 통상적인 대수외교의 과 정에서 얻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이후의 사행의 통해 고구려에 대한 견제의사를 수에 피력한 것으로 파악한 논문이 있다. 이때 백제의 목적은 고구려 견제가 아니라 수의 고구려 적대 정책에 동조하면서 수와의 관계 개선을 노리는 데에 있었다고 보았다.
고구려에 대한 적극적 견제 의사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을 당시 고구려·백제·신라의 전황을 생각할 때 고구려를 견제함으로써 백제가 얻을 수 있는 실익이 없었던 것을 통해 반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구려 견제가 실질적인 이득은
28) 이장웅, 2018, 「백제 法王의 정치와 불교」 지방사와 지방문화 21 1.
29) 전덕재, 2018, 「7세기 백제·신라 지배체제와 수취제도의 변동」 新羅史學報 42.
30) 채민석, 2018, 「熊津都督府 소속 州縣의 기원에 관한 새로운 인식 7세기 百濟의 府兵制 도입과 관련 하여 」 百濟學報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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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영동대장군과 동청주자사에 포함된 책봉 주체의 인식을 검토하여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백제의 위상을 검토하였는데, 백제가 고구려보다 높은 영동대장군을 제수받은 것은 고구려의 전략적 가치 하락과 백제에 대한 기대치의 상승이 맞물린 결 과로, 동청주자사는 앞선 고구려·신라에 대한 책봉에서 군사적 후원이라는 북제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백제의 군사적 후원을 기대한 북제의 기대가 포함 된 책봉호로 파악하였다. 즉 책봉 대상에 대한 책봉 주체의 인식이 크게 작용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35)
후자의 논문은 7세기 중반 양국의 대외정책을 비교하여 신라가 백제를 병합할 수 있었던 원인을 살펴본 것이다. 이에 따르면 나당동맹의 결성은 648년 김춘추의 입당 이 직접적 원인이지만, 645년 이후 백제가 사신 파견을 중단함으로써 당과 신라의 접 근을 저지할 수 없었던 상황이 바탕에 있었다. 백제는 친왕세력이 반고구려 친중국왕 조적이었던 기성귀족을 밀어내고 집권하면서 신라와의 전쟁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방 해가 되는 당과의 외교를 지속하는데 회의적이었으므로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고구려 에 접근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당의 침공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등 국제정세 판 단에 문제를 노출한 것이 나당동맹 결성에 성공한 신라에 병합당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36)
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먼저 왜계백제관인의 생성에서 소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에서 백제와 왜 관계의 변화가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본 논문이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왜계백제관인은 540년대에는 주로 백제의 가야 지역 진출 과정에서 임나 문제와 관련하여 활동하였으며, 550년대에는 백제의 대외 전쟁이 본격화됨에 따라 왜 에 청병사로 파견되었다. 백제와 왜에 양속되어 있는 왜계백제관인의 특수한 지위를 이용한 것이지만 562년 대가야 멸망 이후에는 왜계백제관인의 효용가치가 쇠퇴하였다 고 한다. 6세기 후반 이후 백제와 왜의 내부 정세가 변화하고 백제와 왜의 교섭이 왕 권과 왕권 사이의 직접적 교섭이 중심을 이루게 되면서 이후의 교섭은 주로 사신단의 왕래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37) 자연스럽게 사신단의 왕래를 통한 양 국의 교섭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는데 이에 대한 논문도 제출되었다.
35) 정동준, 2018, 「6세기 동아시아에서의 책봉호의 정치적 의미 국제정세의 변동과 백제의 책봉호에 반 영된 인식을 중심으로 」 사림 66.
36) 정동준, 2018, 「7세기 중반 백제·신라의 대외정책 비교」 新羅史學報 42.
37) 장미애, 2018, 「6세기 왜계백제관인을 통해 본 백제 왜 관계의 변화」 역사와 현실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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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단 각국은 백제로부터 조금씩 다른 지원책을 기대하며 사비회의에 참석하였기 때문에 각국마다의 관심 정도에 따라 사자를 파견하였던 것인데, 백제의 제안은 가야 제국을 만족시키지 못했으며, 이것이 신라와의 경쟁에서 백제가 패배한 이유라고 하 였다.40)
이상의 대외관계사 논문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은 관점의 다각화를 통한 입체 적인 분석이 시도되고 있다는 점이다. 6세기 동아시아에서의 책봉호가 가지는 정치적 의미를 분석한 논문에서 백제의 사례를 타국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은 물론 책봉 대상 에 대한 책봉 주체의 인식을 아울러 검토한 것, 사비회의를 분석한 논문에서 가야 제 국측 회의 참가를 주도한 것으로 여겨지는 대가야와 안라뿐만 아니라 여타 가야 제국 이 회의에 참가한 목적을 검토해 각국마다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려 한 시도 등을 들 수 있다.41) 대외관계사 연구에 一國史적 시각에서 벗어나 좀 더 복합적으로 관계사를 규명해내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은 이미 지적된 바 있는데,42) 이러한 경향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