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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내용과 경향

문서에서 제33회 발표자료집 (페이지 23-26)

2018년도의 경기·호서지역의 물질자료를 대상으로 한 고고학적 연구는 다양한 방 면에서 이루어졌는데, 특히 학회나 기관 주최의 학술심포지움 발표 논문이 다수를 이 루었다.

한성기를 다룬 연구로는 청주 오송·송절동유적과 진천 송두리유적 등 미호천 수계 와 충주 호암동·문암동·장태산·가장골유적 등 남한강 상류지역의 2∼4세기의 유적 을 대상으로 한 발굴조사 내용과 성과를 일별하고, 재지세력과 백제 중앙과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였다(충북대학교 외 2018; 백제학회·(재)중앙문화재연구원 2018).

최근 오송과 송절동유적의 발굴조사 내용을 근거로 미호천수계가 백제로 편입된 시 기를 둘러싸고 다소의 견해 차이가 제기되었다. 물질자료에 백제 중앙의 요소가 어느 정도 어떻게 반영되어야만 이 지역이 백제로 편입되었다고 인정될 수 있는지? 물질자 료에 백제 중앙의 요소가 반영되지 않고 재지적인 전통이 강하게 유지되었더라도 어 느 시점에 백제로 편입되었는지 등에 대해 앞으로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한 과제이다, 1970년대 중엽의 발굴조사 이후 조영 시기와 주체를 둘러싸고 백제와 신라의 논쟁 이 지속되어 온 가락동·방이동고분군의 성격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서울특별시·한성백제박물관, 2018). 앞의 Ⅱ장 1절에서도 짧게 언급하였는데, 이 논

의는 방이동 3호분의 조사가 촉매가 되었다. 1974∼75년도의 발굴조사 보고에서 방이 동 고분군의 석실은 지상식으로 보고되었으나 3호분의 발굴조사 결과 반지하식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조사 이후 가락동·방이동고분군을 모두 553년 신라 점 령 이후 조성된 신라 고분으로 파악하였으나 90년대 이후 가락동 3호분과 5호분에서 백제의 특징적인 관정과 승문타날된 암키와가 확인되면서 이 2기의 고분은 한성 백제 시기의 고분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 이외 고분은 귀속을 둘러싸고는 한성 백제 고 분, 고구려 고분, 553년 이후 조영된 신라 고분, 한성 백제의 석실 축조 기술을 지닌 백제계 기술자가 553년 신라의 점령 이후에 조영한 고분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 고,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 2000년대에 들어와 서울과 호서 지역에도 한성기의 횡 혈식석실이 상당 수 확인된 양상을 고려할 때, 백제 왕실에서만 적석총을 고수하였을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판단된다.

최근 가락동·방이동고분군으로부터 가까운 하남 감일동에서 한성 백제기의 대규모 횡혈식석실군이 확인되었고, 가락동·방이동고분군과 감일동고분군의 석실과 상호 비 교 검토와 함께 금암산고분군 및 양평 대평리 1·2호분의 신라 석실과의 면밀한 비교 검토를 한다면 가락동·방이동고분군의 조영 시기는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으 로 기대된다.

가락동 3·5호분은 백제 한성기의 고분으로 인식하면서도 이 고분의 피장자가 누구 인가에 대해서는 견해 차이가 있다. 횡혈식석실의 피장자가 백제 왕족일 경우, 백제 왕실의 묘제가 적석총에서 횡혈식석실로 변화하였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한성기 말인 5세기 3/4분기까지 백제 왕실의 묘제를 적석총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 논쟁은 공주 송산리고분군의 소위 방형석축유구의 성격 문제로까지 이어진 다. 한성기 백제 왕실의 묘제를 적석총으로 볼 경우, 웅진 천도 후, 송산리고분군에 개로왕의 허묘를 한성기 묘제의 전통에 따라 적석총이 조영되었을 개연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나 한성기에 왕실의 묘제로 횡혈식석실이 채용되었다면, 천도한 웅진 에 적석총을 조영할 수 있는 환경은 조성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웅진기의 고고학적인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쟁점백제사 학술회의인 백제 웅진기 왕계와 지배세력 백제 웅진기 영역과 지방지배 등을 통 해 웅진기의 백제의 정치와 지방 지배를 다루었다.

백제는 웅진 천도 이전에 금강수계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지방지배를 구축하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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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그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물질자료로서 횡혈식석실과 금동관모 등의 착장형 위 세품을 제시하였다. 한성기에 백제 중앙의 석실을 수용한 금강수계의 집단들과 웅진 천도 직후 횡혈식석실을 수용한 집단이 웅진기의 주요 지배세력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이현숙, 2018). 한성기에 성장한 세력과 웅진 천도 이후 새로이 부상한 세 력들이 웅진기의 지배세력을 이루었을 것이란 추정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횡혈식석실 의 수용 여부뿐만 아니라 부장품의 구성과 고분군의 입지와 규모 등을 복합적으로 검 토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웅진기 백제 영역의 경우, 고구려 성곽과 고분 및 유물을 근거로 5세기 말까지 미 호천이 금강에 합수하는 부강의 남성골산성 일대까지 고구려의 지배하에 잇었고, 6세 기 전반 이후에는 한강 이북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며, 남한강 일대는 여전히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백제의 영역은 호서 중서부 지역을 제외한 범위였 을 것으로 추정하였다(양시은 2018). 그런데 경기 남부지역에서의 백제 영역과 6세기 이후 한강 이남지역의 귀속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남동쪽의 영역 범위는 전북 무주군의 서쪽지역, 진안고원의 금산분지, 백두대간 서 쪽 장수군, 운봉고원, 섬진강 이서의 전남 동부지역으로 설정되었다(곽장근 2018). 이 범위는 웅진기 후반인 6세기의 상황으로 파악되지만, 호남 동부지역에서의 물질 양상 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백제와 가야의 관계는 물론 백제의 지배형태 에 대한 이해도 달라질 수 있으므로 물질자료의 정확한 시기와 주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남쪽 지역의 백제의 지방지배를 담로제 실시와 연계하면서 이를 나타내는 물질자료 로서 횡혈식석실의 수용과 확산에 주목하면서도, 익산 입점리와 웅포리유적 같이 재 지세력이 강한 곳에는 재지세력을 담로제에 포함하여 중앙 관등에 편제시켜 지배하였 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금강 이북지역에는 횡혈식석실이 조영되지 않는 점을 근거로 담로제가 실시되지 않았을 것으로 파악하였다(서현주 2018). 담로제의 실시는 물질자료의 변화를 수반하였는지? 왜 횡혈식석실묘의 조영을 담로제 실시의 물질자료 로 보아야 하는지 의문이다. 물질자료가 정치적인 변화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하 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 조사와 논의가 필요하다.

이 외에도 공산성 왕궁 고증 복원 및 송산리고분군의 방형석축 유구의 성격 해명과 관련하여 건물 구조와 제의시설의 논의를 위한 학술심포지움이 수차례 실시되었다(공

주시·공주대학교박물관 2018). 그리고 웅진기에 창건된 대통사와 관련한 조사가 이 루어지면서 대통사지의 성격 구명과 향후 활용 방안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공주 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백제학회·한국고고학회 2018). 또 세계유산인 백제역사유적 지구의 확대와 관련하여 백제 왕도 핵심유적의 문화유산적 가치에 대한 논의가 이루 어졌다(문화재청·백제학회 2018).

사비기의 고고학적 연구로는 부여와 익산지역에 소재한 불교사찰에서 출토한 치미 를 중심으로 한 특별전시회와 연관해서 백제·신라·중국·일본의 치미의 특징과 상 호 관련성과 치미를 통해 고대의 건축물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국립부여박물관 외 2018). 2011년 공산성 성안마을 일대 조사에서 출토한 貞觀十九年(645) 명 칠피 갑옷에 대한 칠 성분, 특징과 칠기의 복원과 보존처리 현황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대 한민국 국회 문화관광산업연구포럼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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