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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기와 부흥운동에 대한 논의의 확산

문서에서 제33회 발표자료집 (페이지 81-86)

2018년 사비기 백제사 문헌 연구의 현황과 과제

Ⅱ. 백제 멸망기와 부흥운동에 대한 논의의 확산

2018년 사비기 문헌 연구에서 가장 눈에 띄는 흐름은 2017년과 마찬가지로 멸망기 와 부흥운동을 주제로 한 연구 논문의 비중이 높다는 것이다. 2017년 웅진·사비기의 연구 성과를 정리한 논문에 따르면 2017년 제출된 백제 멸망기와 부흥운동을 주제로 한 논문은 총 10편이었는데,4) 2018년 역시 이와 비등한 9편의 논문이 제출되었다. 여 기에 2018년 11월 16일과 30일 2주 간격으로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개최된 백제부흥전 쟁과 주류성을 주제로 한 학술회의에서 제출된 논문을 포함하면 2017년보다 많은 연 구 성과가 제출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표 1> 참조).5)

4) 박지현, 2018, 「2017년 웅진·사비기 백제사 연구 성과와 과제」 百濟學報 24.

5) 이들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정식으로 공간된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수량의 단순 비교는 어려 울 수 있으며, 공간 시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2019년의 연구 성과로 정리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 지만 백제 부흥운동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례로 보기에 무리는 없을 것으로 생 각한다.

조법종 교과서에 나타난 백제 부흥전쟁 관련검토 곽스도 주류성 발굴조사의 현황

개최일자 : 2018년 11월 30일

《2018 홍주주류성 고증 학술세미나 백제부흥전쟁 전적지와 홍성》

발표자 주제

장재환 [기조강연] 백제 부흥전쟁과 주류성 이재준 부흥전쟁기 주류성에 대한 종합고찰 한지연 도침의 불교사상과 백제부흥운동 이상훈 부안 주류성의 군사학적 고찰

* 굵은 글씨는 주류성 위치 비정에 대한 주장이 있는 연구 논문임

먼저 멸망기에 대한 연구를 정리한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직면하여 의자왕 이 주재한 방어전략회의에서 제시된 백제의 방어 전략을 살펴보고 실제 전개된 황산 벌 전투, 기벌포(웅진강구) 전투, 사비성 남쪽의 전투를 이 방어 전략에 맞추어 분석 한 논문이 있다. 이에 따르면 황산벌 전투는 중앙군인 계백의 5천 결사대가 신라군의 진격을 개태사 일대에서 막고자 한 것이었다. 기벌포 전투는 해로로 공격한 나당군을 막기 위한 전투였으나 백제군의 방어선을 피해 웅포 일대에 상륙한 나당군이 백제군 의 공격을 물리치고 강경 일대와 군산 방면의 양쪽으로 진격하였으며, 사비성 남쪽에 서의 전투에서는 당군이 사비성 남쪽 지역에 이르자 백제군은 신라군이 합류하기 전 에 중앙군과 주변 지방군을 총동원하여 당군에 대한 대공세를 펼쳤으나 대패를 당하 고 이 때문에 사비성 방어 병력이 부족해져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신, 사비성이 쉽 게 함락되었다.6)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작전을 신라와 당의 입장에서 분석한 연구도 같은 연구자 에 의해 이루어졌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덕물도에서 회합한 것은 당군이 서해 중부 횡단항로를 이용하여 덕물도에 도착하였기 때문이고 이 항로에 대한 정보는 신라에서 제공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당시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전달받지 못한 신라군이 남천정까지 북상하였고, 이것이 백제의 방어 전략 수립을 혼란스럽게 하였던 것으로 보았다.7) 각각 방어측인 백제와 공격측인 나당연합군측의 관점에서 전쟁 과정을 분석

6) 남정호, 2018, 「660년 백제의 방어전략 회의와 방어전 재검토」 전북사학 53.

7) 남정호, 2018, 「660년 당군과 신라군의 연합 작전에서의 몇 가지 문제」 역사와 담론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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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는 점에서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할 수 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 각한다.

좀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분야는 백제 부흥운동이다. 먼저 백제 부흥운동의 촉 발 계기와 시점에 대한 재해석이 시도되었다. 신라가 백제와의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과거의 원한을 풀려고 하였고 그것이 백제인들에게 더 커다란 공포와 두려움이 되었 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것이 7월 18일 이후 백제에서 자위 조직체들이 형성되는 이유 가 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사비성에 대한 당군의 약탈, 항복한 왕의 치욕으로 느끼는 의분 등의 요소만으로는 당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백제땅의 선택이 부흥운동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점에 대한 지적이었다. 또한 7월 18일 이후 분 산적으로 존재하던 자위 조직체들이 8월 26일 나당연합군의 임존성 공격 실패와 당군 이 철수 이후 광역의 백제 부흥운동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하여, 개별 자위 조직체에 서 벗어나 일정 규모의 부흥운동으로 전환된 계기를 8월 26일 임존성 전투에서 찾아 야 한다고 보았다.8)

또한 같은 연구자에 의해 백제 부흥운동의 쇠퇴 과정이 정리되었다. 이에 따르면 신라는 661년 9월 옹산성을 함락시킴으로서 백제와 당의 유착을 방지하고 나당동맹의 관계를 재확립할 수 있었으며, 이를 계기로 백제부흥운동의 기치가 꺾이게 되었다. 이 후 662년 5월 백제 부흥세력이 부여풍을 추대하고 정식으로 백제국의 ‘부흥’ 또는 ‘수 립’을 선포하였지만 7월에 신라는 당군과 함께 백제땅의 북부 지역을 거의 신라와 당 주둔군의 점령 하에 두었다. 이는 백제 부흥국의 수립 과정에서 표출된 권력 다툼으 로 국력이 분산되었기 때문이며, 이것이 백제 부흥세력의 정치적 위기와 부흥국의 몰 락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9)

한편으로 백제 부흥운동의 과정을 정리하면서 웅진도독부의 위치와 위상을 검토한 논문이 제출되었다. 웅진도독부의 위치를 백제 멸망 직후, 백제부흥운동기, 부흥운동 종료 후로 시기를 나누어 확인하고 그 위상의 변화 양상을 살펴본 것이다. 이에 따르 면 백제 멸망 직후 당은 백제의 5방에 5도독부를 설치하였으며 이때 웅진도독부는 북 방이었던 웅진에 두어졌다. 그러나 5도독부는 660년 8월부터 일어난 백제 부흥운동으 로 인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았고 웅진도독부만이 백제부흥군 진압을 위한 당군의

8) 김병남, 2018, 「백제 부흥운동의 태동 배경에 관한 일고찰」 백제학보 23.

9) 김병남, 2018, 「신라의 백제부흥세력 공략 과정과 의미」 한국고대사탐구 28.

본영으로서 기능하였다. 백제부흥군 진압과정에서 신라가 기존 백제영역의 일부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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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비중을 가진다고 생각되므로, 2018년 들어 논쟁이 다시 활발해 진 것은 고 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군사학적 관점에서의 문제제기는 만성적인 사료 부족에 직면하는 백제사 연구에서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경청할 필요가 있다. 다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러한 학술논쟁이 지방자치단 체의 역사 전유 시도에 이용되지 않도록 명확한 경계선을 설정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 다. 그리고 이는 비단 백제사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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