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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위의 근거

문서에서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페이지 91-95)

이제 ꡔ사회계약론ꡕ의 유일한 주제인 정치권위의 근거를 상론할 차례이 다. 루소에게서 이 권위는 그 근거를 자연이 아니고 합의(convention)에

26) 루소, 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 제9장, (Gallimard, 1990), p.93.

27) 루소, 같은 책, p.94.

두고 있다.

“사회 질서는 신성한 권리로서 다른 모든 권리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이 권리는 자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합의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ꡔ사회계약론ꡕ 제1편 1장, PLE, 352)

“자연은 어떠한 인간에게도 타인에 대한 권위를 부여한 적이 없고 또 힘으로부터 어떠한 권리도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결국 합의만이 모든 정당 한 권위의 기초로서 남는다.”(ꡔ사회계약론ꡕ 제1편 4장, PLE, 355)

이상의 두 원문은 국가의 계약설과 천부의 평등 원리를 결합시키는 연 결고리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만일 인간은 타고나기를 평등하고 자유 롭다면, 어느 누구도 타인을 지배하는 천부의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천부의 재능, 육체적 강건, 지적 우월, 그 어떠한 것도 한 인간에 타인에 대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인간은 힘과 지력에서 불평등하다는 사실 로부터 어떤 인간은 명령하는 권리, 어떤 인간은 복종할 의무를 가진다는 결론은 결코 도출될 수 없다. 이 복종의 의무 역시 그 근거는 의무 주체 의 자유로운 약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조건하에서 결국 자연법에 어긋나지 않고 참주(僭主)적이 아닌 모든 권위는 오로지 그 권위에 복종 할 사람들의 동의에 근거할 뿐이다.

“시민적 결합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자발적인 행위가 있을 수 없는 최고의 자발적인 행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 래 자유롭고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 어떠 한 구실로도 인간을 그의 동의 없이 예속시킬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ꡔ 사회계약론ꡕ 제4편 2장, PLE, 440)

따라서 루소의 국가론은 개인주의 원리에 입각한 국가론인데, 이 점에 서 루소는 로크나 푸휀도르프, 뷔르라마르키를 계승하고 있으며 자연법 전통에 서 있다. 로크의 글을 인용해 보기로 하자.

“자연에 의해서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고 독립적인 존재인 고 로, 어느 누구도 그의 동의 없이 이 자연 상태로부터 끌어내거나 타인의 정치권력에 예속시킬 수 없다. […] 한 정치사회의 기원이 되는 즉 정치

사회 성립의 진정한 기초가 되는 것은 오로지 결합하여 이런 정치사회를 구성해내기 위한 과반수를 형성할 수 있는 일정한 수의 자유인들의 합의뿐 이다. 바로 이것만이 지상에 합법적 정부를 탄생시키고 시킬 수 있다.”

(ꡔ시민정부론ꡕ 95절, 99절)

푸휀도르프 역시 개인주의적 국가 구상에서 토대 역할을 하는 이 원리 를 로크에 못지 않게 명확히 천명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천부의 동등 한 자유를 갖고 있기 때문에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사전에 당사자의 동 의 없이 인간을 예속시키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부당하지 않을 수 없 다.”28) 이 원리로부터 직접 결과하는 명제는 주권자[군주]는 그의 권력 을 오직 협약에 의해서만 소지(所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시 푸휀 도르프를 인용해보자. “군주에게 정당한 권리와 진정한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다름 아닌 이 협약인 것은 협약은 그의 권위를 그의 폭력이 아니고 신민의 자발적인 동의와 순종에 세우기 때문이다.”29) 결국 이상의 인용 문은 루소 자신이 정치적 권위는 자연이 아니라 협약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연법 전통으로부터 이탈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그 자신이 이를 완벽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그가 다음과 같이 언표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문제를 토론해온 학자들 중 가장 건전한 편의 뒤를 이어 나 자신 도 정치 통일체의 정초로 그 구성원들의 협약을 원칙으로 설정하였다.”

(ꡔ산에서 보낸 편지들ꡕ 여섯 번째 편지, VPW, Ⅱ, 200)

그러므로 루소에서 독창적인 것은 국가의 정초는 협약에 있다는 사상이 아니고 이 협약의 본성에 관한 루소의 구상에 있다. 사실 루소 이전에 사 회계약을 정치권위의 정초 행위로서 제시한 학자들 대부분은 사회계약을 일종의 복종 협약으로 생각하였다. 즉 이들에게는 사회계약은 어떤 인민 [백성]이 자발적이든, 필요에 의해 강제되었든 군주의 권위에 복종하기로 수락한 협약에 다름 아니었다. “모든 왕들의 합법적인 권력은 예외 없이

28) 푸휀도르프, 같은 책, 제3편 2장 8절, p.366.

29) 푸휀도르프, 같은 책, 제7편 3장 1절, p.408.

그들이 다스리는 백성의 동의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 동의는 자발적인 것 일 수도 있고 강요된 것일 수도 있다.”30) 후자의 경우, 복종은 정복과 전쟁의 권리에서 결과한다. 전자의 경우, 복종의 동의가 자발적인 것은 한 민족이 무정부적 자연상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왕에게 자신을 양 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협약은 노예 계약을 모델 로 하여 구상되었다. 왜냐하면 한 백성이 왕에게 자신을 주는 (se donner)행위는 노예가 자신을 주인에게 주는 행위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 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자연법 법률가들에게는 군주의 신민에 대한 권력은 주인의 노예에 대한 권력과 동일한 기원과 동일한 근거를 갖는 것 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루소의 자연법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이 부각되기 시작하는 것은 루소가 볼 때 계약 당사자 중 일방에만 이익이 되는 협약은 결코 참된 계약으로 간주할 수 없고 따라서 정당한 권위를 위한 정초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복종 협약은 소위 노예 협약 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에 어긋날 뿐 아니라 (법적으로) 유효하지 않다. 이 상이 루소가 ꡔ사회계약론ꡕ의 ‘노예소유권에 관한 장’에서 힘을 경주하 여 입증하려는 점인데, 이 장에서 그가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복종 협약에 대한 비평이다.

그러나 ꡔ사회계약론ꡕ에선 저자는 노예소유권에 관한 비평에 들어가기 전에 부권(父權)에 관한 비평을 선행시키고 있다. 사실 여기서 루소의 주 관심사는 국가 계약설이나 인민주권에 적대적이던 17, 18세기의 왕정주의 사상가들의 주장을 검토해 보는 것이다. 이 사상가들에게 정치권위, 곧 군주의 신민에 대한 권위가 그 근거를 자연에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 던 것은 군주의 권위가 부권에서 파생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상의 주목적이 왕정의 여타 통치 형태에 대한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이 었다면, 이에 병행하여 계약설 자체를 완전히 침몰시키지는 못한다하더라 도 특히 그것의 적용 범위를 제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만일 왕권이 부권에서 나왔고 부권은 자연에 근거하고 있다면, 협약이 합 법적 권위의 유일한 근거도 아닐 뿐 아니라 원칙적 토대도 될 수 없는 것

30) 푸휀도르프, 같은 책, 제7편 7장 2절, Ⅱ, 383.

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의문시되는 것이 다름 아닌 계약설의 기초 원리이다. 이상의 이유를 배경으로 루소의 정치학 저술 중에서 부권 에 대한 비평이 차지하는 중요성과 위상이 부각된다.

문서에서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페이지 9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