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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홉스 비평: 전쟁상태

문서에서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페이지 46-55)

적 사유가 아닌 만큼, 관찰은 언제나 사유가 이미 ‘이론적’으로 ‘상 정’해 놓은 것의 검증․확인으로서만 개입하게 된다. 그러므로 루소의 자 연인은 야만인에 대한 경험과 관찰에 앞서는 이론적 가설이요 논리적 허 구라 할 수 있다. 자연인과 경험적 사실의 관계에서 전자가 후자에 선행 하기 때문에 루소는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 “자연인의 진정한 모습을 찾으 려면 우선 사실들을 제쳐놓는 것으로 시작하자”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하늘과 땅 사이에 아무런 연고 없이 저 홀로 사는 자연인, 이 논리적 허 구의 목적은 흔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예찬이나 자연회귀에 있지 않고, 사회적 사실, 역사적 사실의 총체인 문명사회의 비판에 있는 것이다. 이 논리적 허구에 의한 문명사회 비판의 결과가 다름 아닌 루소 의 국가론이다. 다시 말하면 ꡔ사회계약론ꡕ에서 제시된 대담하고 독창적인 모든 것은 이미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악폐의 원인으로서 설명한 데에 있다. 사실 전쟁상태는 모든 악폐의 원인 이 아니고 결과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ꡔ제네바 초고ꡕ 1편 2장, VPW, I, 453)

“전쟁상태가 인간의 자연 상태라는 주장은 진실로부터 거리가 먼 이야 기다. 전쟁은 사실 평화에서 생겨나거나, 인간들이 지속적인 평화를 확보 하려고 취하는 예비조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ꡔ전쟁상태ꡕ, VPW, I, 305)

이렇게 루소와 홉스의 기본 입장이 상반되는 것은, 후자가 이중의 오류 를 범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자의 지적이다. 즉 홉스는 전쟁상태에 대 한 틀린 관념에 더하여 자만심 내지 오만의 성질에 대한 착오를 범하였다 는 것이 루소의 이중 비평이다. 따라서 루소의 전쟁상태에 대한 비평은

‘법적 관점’과 ‘심리학적 관점’, 이 두 단계를 거쳐 진행되게 된다.

(1) 법적 관점

“만일 전쟁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사람들 사이에서 아니고 오직 국가 들 간에서만 발생한다.”8) 전쟁에 대한 루소의 이런 규범적인 사고는 한 편 국가와 법에 대한 루소의 사상을 함축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 전쟁에 대한 홉스 사상의 모호함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홉스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전면적 전쟁을 논할 때, 그는 이 말을 통속적인 의미로 그냥 사용하 고 있는데, 만일 이 말을 법적인 의미로 취할 경우 개인들 간에 진짜 전 쟁은 자연 상태에서든 정치사회에서든 일어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자연 상태는 ‘독립’ 상태, 곧 공동 상위자도 심판관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누구든 다른 사람의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탈취하려고 폭력을 사용하는 자는 그 상대방과 전쟁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는 것은 루소 이전 의 모든 철학자가 인정했던 점이다. 그런데 자연 상태에선 개인들 간에 전쟁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루소는 이 전통에 대해서 하나의 역 설을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도대체 이 역설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이제 알아보기로 하자.

두 사람이 다투고, 치고받고, 심지어 서로 죽이는 일이 있다고 해서,

8) 루소, 전쟁상태 , VPW, 296.

이를 가지고 양자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둘은 서로 적이다, 라고 단정 할 수는 없다. 전쟁다운 전쟁이 있으려면, 첫째 적대관계가 일정한 기간 동안 지속되어야 하고, 둘째 서로가 피해에 대한 보상을 얻을 목적으로 싸워야 한다. 그런데 이 두 조건 중의 어떤 하나도 자연 상태에서는 충족 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누가 보더라도, 한나절 안에 끝나는 양자 또는 다자간의 격투가 진짜 전쟁의 특징을 이루는 장기간의 적대관계와는 다른 것이 자명하다.

“전쟁이란 확고부동한 관계를 전제하는 지속적인 상태다. 이런 관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성립되기가 거의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연 상 태에선 만물이 유전(流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만큼 어떤 다툼 거 리가 생겨나도 그 즉시 사라지게 마련이고, 분쟁은 시작되면 한나절 이상 갈 수가 없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연상태에서 격투와 살인은 있을 수는 있으나, 장기적인 적대관계나 전쟁이 존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 깝다.”9)

이상의 구별은 그러나 어디까지나 외적 차이에 의거한 구별이다. 루소 는 이 문제를 ꡔ사회계약론ꡕ에서 심층적으로 다루어 이 번에는 논거를 더 이상 전쟁의 지속기간에서가 아니라 그 대상[목적, objet]에서 끌어낸다.

사실 전쟁을 아무 분쟁이나 또는 단순한 일개의 복수와 혼동해서는 안 될 일이다. 왜냐하면 거기서의 목적은 결코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그로부터 피해에 대한 보상을 강제로 얻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인이 만물을 공유하는, 그러니까 소유[재산]의 경계가 없는 자연상태에 선 침해(侵害)라는 것 자체, 월권(越權)이라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상태는 소유의 제도화, 곧 정치사회의 수립 이전에 는 개인들 간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루소는 홉스 뿐 아 니라 로크와도 견해를 달리한다. 로크나 푸휀도르프가 자연상태에서도 전 쟁상태가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은, 그들은 소유를 정치사회 설립에 선행하는 ‘자연권’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루소 에게는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그 기초[존재근거]가 ‘사회 질서’에

9) 같은 책, p.294.

있는 까닭에, 자연상태에선 피해, 침해, 전쟁 따위는 있을 수 없는 것이 다. 루소는 이 점을 ꡔ사회계약론ꡕ의 한 대목에서 지나치게 간결해서 일종 의 수수께끼 같이 여겨질 수 있는 문장으로 재차 주장하고 있다.

“사람 관계가 아니고 사물 관계가 전쟁을 성립시킨다. 다시 말하면 전 쟁상태는 단순한 개인적 관계로부터는 발생할 수 없고 오직 실재적 관계에 서만 생겨날 수 있는 만큼, 사적 전쟁 또는 개인 대 개인의 전쟁이란, 불 변의 소유권이 존재하지 않는 자연 상태에서든, 만인이 법의 통치하에 있 는 시민 상태에서든 있을 수 없는 것이다.”(ꡔ사회계약론ꡕ 제1편 4장, PLE, 357)

물론 ꡔ사회계약론ꡕ이 간결하면서 극히 압축된 문장으로 짜여진 ‘소논 문’이라는 사실을 참작한다 하더라도, 루소가 위에 인용한 대목 이상으 로 전쟁에 관한 그의 논증을 전개하지 않은 것은, 이 문제가 철학자 누구 에게나 자명한 원칙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것을 그 스스로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루소 이전에 로크나 푸휀도르프 같은 학자들은 개인들 이 일단 국가의 구성원이 되면 그들 자신의 분쟁 사안에 대해서나 침해자 의 징벌에 관해서 더 이상 심판권이 없으며 그들의 분쟁을 재판관의 중재 에 맡겨야 한다는 것을 증명한 바 있다.

“자연 상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전쟁의 경우, 분쟁 당사자들 사이에서 사안을 결단해 줄 공동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하늘밖에 호소할 길이 없거나, 사소한 분쟁이라도 타협 없이 일방적으로 단숨에 종료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사회를 형성하고 자연 상태를 떠났 던 것이다. 사실 지상에 하나의 권위, 하나의 권력이 있다면, 사람들은 이것에 호소할 수 있어 전쟁상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분쟁 역시 이 권력을 부여받은 자에 의해서 해결될 것이다.”(ꡔ시민통치론ꡕ 21절)

이렇게 루소 이전의 철학자들에게는 시민사회에서는 개인들 간에 전쟁 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었던 만큼, 루소의 독창적 기여라 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도 철학자들의 만장일치에 반하여, 개인들 간의 전쟁은 자연상태에서도 있을 수 없다고 입증한 점이다. 그러면 이 두 종

류의 상태 중 그 어느 쪽에도 전쟁이 있을 수 없다면, 전쟁은 결국 ‘공 적 인격체’(personne publique) 곧 ‘국가’ 간에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루소의 결론이다.

“전쟁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니고 국가 대 국가의 관계이기 때문 에, 그 상태에서 개인들이 서로 적이 되는 것은 오직 우연적인 일이며 ,그 것도 인간이나 ‘시민[국민]’으로서가 아니고 병사로서 뿐이다. 즉 개인 들은 조국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고 그 방어자로서만 서로 적이 되는 법이 다.”(ꡔ사회계약론ꡕ 제1편 4장, PLE, 357)

(2) 심리학적 관점

“인간 대 인간의 보편적 전쟁은 결코 없으며, 그리고 인간 종은 서로 파괴한 끝에 멸종(滅種)하려고 생겨난 피조물이 아니다.”10) 루소의 이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은 각 개인의 생명 보존이 종의 희생을 대가로 하여 이루어진다는 주장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의 자연 본성 이 홉스가 기술한 바대로라면 인류는 존속해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안녕이 자신이 속한 종의 파멸에 결부되어 있다고 믿을 동물이 천지간에 있을 수 있을까. 또 이렇게 해괴하고 가증스러운 종이 과연 두 세대 동안이나마 존속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11) 우리가 루소의 이 통렬한 비평을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은, 종의 창조 목적이 종의 자기 파괴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은 개인의 보존을 위해서와 마찬가지로 종의 보존을 위해서도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주 고 있다. 즉 생의 본능이 전자와 후자의 보존을 동시에 확보해주는 역할 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째서 홉스는 이와 상반되는 견해를 주 장하는 것인가?

“그 자신이 설정한 제 원칙에 입각하여 추론했다면 홉스는 의당 자연 상태는 우리의 생명보존을 위한 배려가 타인의 생명보존을 위한 배려에 해 를 끼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태인 만큼, 따라서 평화에 가장 알맞고 인

10) 같은 책, p.294.

11) 같은 책, p.305.

간 종의 번식에 가장 유리한 상태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홉스가 말한 것이 이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던 것은, 야만인의 자기보존 본능에 사회생 활의 산물인 잡다한 정욕을 개입시켰으니까 말이다. 더욱이 야만인의 보 존 본능은 자연적으로 충족될 수 있는 반면, 사회인의 다양한 정욕은 그 자체가 법 제정을 필수불가결하게 만들고 있는데도 말이다.”(ꡔ불평등기 원론ꡕ, VPW, I, 159-160)

여기서 우리는 루소 심리학의 핵심 사상 중 하나를 만나게 되는 바, 이 는 루소 사상체계 자체의 근간을 이룰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현대 사회심 리학이나 마르크스-엥겔스 이데올로기 비평에 관해서는 선구자적 역할도 한다. 즉 이 사상에 의하면, 대부분의 욕망[욕심, 정념, 정욕, passions]은 그 기원이 ‘사회적 삶’에 있을 뿐 아니라, 또 그것은 인 간이 그의 동류와의 계속적인 교류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의 덕분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즉 루소는 스토아 철학자 처럼 한편의 원시적 충동 내지 자연적 성향과 다른 편의 여론[세론, opnion]에 기인하는 욕망을 구별하고 있고, 또 같은 이유로 “원시인 또 는 야만인은 이렇다할 욕망에 노출되는 일이 거의 없다”고 설파하는 것 이다. 그 기원이 스토아 철학에 있는 이 근본적인 구별로부터 루소는 다 종다양의 사회․문화 현상에 대한 판단을 도출하고 있다. 우선 몇 가지 사 례를 들어보자.

“사랑조차도 다른 모든 정욕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삶에 들어와서야 비 로소 흔히 인간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그 격렬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I, 164)

“사회적 인간이란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세인의 여론 속에 서 살 줄 밖에 모른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I, 195).

“내가 보니까 잡다한 욕심 가운데서 세론이 자신을 높여 요지부동의 왕좌에 오르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렇게 세론의 왕국의 신민이 된 나머 지 타인의 판단 위에 자신들의 인생을 세우는구나.”(ꡔ에밀ꡕ, VPW, Ⅱ, 185)

그러면 이런 ‘사회적 동물’의 심리와 대조되는 ‘떨어져 홀로 사 는’ 자연인의 심리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 원시인[자연인] 심리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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