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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 사회성

문서에서 루소 ꡔ사회계약론ꡕ (페이지 55-63)

자연상태에 관한 홉스 이론에 대해 루소가 한 논박은 사실 선량함을 인 간의 자연적 본성으로 주장하는 이론의 부정적 측면이다. 루소의 홉스 논 박은 일찍부터 학자들 사이에 주지의 사실이었지만, 반면 루소가 홉스의 것과 상반된 이론 역시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간과되어 왔다.

그것도 그럴 것이, 루소 자신이 자연적 사회성[사교성] 이론의 ‘체계적 논파’를 시도한 것은 ꡔ사회계약론 초고ꡕ에서 뿐이었으며, 더욱이 후에 ꡔ 제네바 원고ꡕ라고 명명될 이 초고 자체도 1887년이나 되서야 간행되었으 니까 말이다.12) 그러나 이런 체계적인 논박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 저자의 진정한 생각을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주

는 상당수의 상술된 비평 대목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자연 본성으로서 사회성에 대한 루소의 독특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사상 자체는 이미 고대부터 모든 철학자에 의해 인정된 원 리 중 하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원리를 ‘도덕과 정치’에 관한 그 의 저술 어디에서나 확립하고 있다. “인간은 그와 자연적 유사성을 갖고 있는 자들과의 관계에서 사교적인 동물이다. 그래서 정치사회(polis) 밖 에도 사회와 정의 같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또한 스토아 철학의 원리 에 따라 사유한 키케로 역시 완벽한 고립 속에서 살기를 원하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공리적 사실로서 정립하였다. 그래서 근대에 들어와 이번에는 그로티우스, 푸휀도르프, 쿰베르란트(Cumberland)등이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을 논했을 때, 이는 사실 고대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나 스토아 학파에 의해 정립된 이론을 다시 계속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중 푸휀도르프는 이 이론의 창안자는 아니면서도 그의 저서 ꡔ자연법과 국제법ꡕ의 제2편에서 이 이론을 매우 명료하게 진술한 장점이 있을 뿐 아니라, 이 제2편이 또한 루소 자신이 가장 주의 깊게 읽은 책 중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여기서 그의 진술을 살펴보는 것이 긴요 하다.

푸휀도르프에 있어서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은 두 종류의 양상으로 대별 되어 기술되고 있다. 우선 자연적 사회성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결합시 키는 자연적 동일성을 의식하고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같은 종(種)에 속하는 동류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돕는 것에서 드러난다. 이런 경우의 사회성은 따라서 비이기적인 감정이요, 일반적인 우정이며, 우리와 온 인류를 잇는 보편적인 온정이다. “자연은 틀림없이 모든 인간 간에 우정 일반을 법으 로 제정하였으니, 인간은 누구든지 엄청난 죄악으로 인해 그 자격을 상실 하지 않는 한 이 우정으로부터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창조자의 섭리에 따 라 자연법은 인간 본성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전자의 준수는 언제 나 인간에게 유익하고 따라서 이 일반적인 우정 역시 그것을 존중하는 모 든 자에게 득이 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의 근거를 규명하는 문제에 12) 제네바 원고 는 1887년 러시아 모스크에서 ALEXEIEFF에 의해 러시아

어로 처음 간행되었다.

있어서, 그 해답은 이로부터 끌어내는 ‘유용성’에서가 아니고 동일한 자연본성의 일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비타산적인 인정[온정]은 사회성 중 상급의 형태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으나, 사회성 중 이해타산적 인 형태의 것도 있다. “우리가 우리의 자연 본성의 명령에 따라 사교적이 라고 해서, 이것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은 아니다. 사회성의 목적은 오히려 이와 반대로 교제를 통한 도움과 봉사 의 교환에 의해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더욱 잘 챙길 수 있는 데에 있다 .”13) 이렇게 정의된 사회성이란 결국 상호이해증진, 서비스의 교환, 즉 이기심이 언제나 무엇인가 이득이 될 것을 꾀하는 교역에 다름 아닌 것이 다. 푸휀도르프가 이렇게 사회성의 두 번째 양상을 강조하는 것이 기이하 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가 여기서 목적하는 바는 홉스를 논박하 는 것이고 또 이런 목적에서 사회성이 이기심[자만심]과 일치함을 제시하 는 것은 매우 훌륭한 논법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자연으로부 터 이성을 부여받은 존재들이 자기 자신들의 생명보존을 위해서라도 서로 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자각한 이상, 서로 해를 끼치는 일보다는 오히려 상부상조를 꾀한다는 것이 당연한 생각이니까 말이다. 좀더 고상한 감정이 부재한다 해도, 이기심이 우리를 사회적인 존재로서 처신하도록 강 요하는 바이다. 게다가 우리가 설사 인간은 본래 자기 자신의 이득만을 꾀 한다는 것을 용인한다 할지라도, ‘자연상태’와 ‘사회적 삶’이 서로 상반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 루소가 한 일은 자연법의 근거는 이성에 선행하는 두 원리, 즉 자기애와 자비심[동정심]에 있다고 주창함으로써 사회성을 자연법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그친다.

“자연법의 모든 법칙은 사회성 원리를 개입시킬 필요 없이 우리 정신 이 자기애와 자비심, 이 두 원리를 조합하고 결합시킬 수 있는 데서 기원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ꡔ불평등기원론ꡕ, 서문, VPW, I, 138)

13) S. Pufendorf, Le Droit de la Nature et des Gens, Barbeyrac역, Thourneisen, 1750, 제2편 3장 18절.

루소가 이 문제를 좀더 철저히 다루게 되는 것은 ꡔ제네바 초고ꡕ의 제2 장 ‘인류의 일반 사회에 관하여’ 에서다. 이 곳에서 루소가 내리는 결 론이 다름 아닌 인류의 원시상태에서 인간 일반을 아우르는 ‘자연 사 회’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인 만큼, 우리는 이를 통하여 자연적 사회성 이 론에 대한 루소의 논박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루소는 여기서 일찍이 푸휀도르프가 구별했던 두 형태의 사회성에 의거하여 그의 논증을 진행시 키고 있는 바, 이는 결국 사회성의 첫 번째 형태는 거부하고 오직 두 번 째 형태만 유보할 작정에서였다. 루소에 따르면 우리를 우리의 동류(nos semblables)에 접근시키는 것은 결코 푸휀도르프가 믿는 것처럼 동일한 자연 본성의 일치가 아니고, 우리가 그들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고 기대하 는 이득이다. 사실 우리는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을 때만 비로소 사회적, 사교적 동물이 되는 법이다. “이러한 타인의 필수적 도 움 때문에 사회 일반의 형성을 위한 최초의 인연이 맺어지며, 또 그것이 보편적 온정의 토대이기도 하다. 물론 이 보편적 온정은 각자가 그것을 함양할 의무는 지지 않고 단지 그것의 열매만을 따먹으려고 하기는 하지 만 말이다. 이 맥락에서 자연적 본성의 동일성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적 동일성은 인간들에게 결합만큼이나 다툼의 소지 가 될 뿐 아니라, 그들 사이에 이해와 합의 못지않게 질투와 경쟁심을 일 으키는 원인이기 때문이다.”14) 루소의 이 고찰에는 한편 그의 홉스에 대 한 이해가 반영되어 있고, 다른 한편 푸휀도르프의 이 틀에 박힌 생각을 반박하려는 명백한 의도가 실려 있다. “인류 보편적 온정이라는 것은 동 일한 자연적 본성의 일치, 즉 인류라는 동일 사실 이외의 그 어떤 동기도 그 어떤 근거도 전제하지 않는다.”15)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루소에게는 사회성의 형태는 둘이 아니고 단 하나 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것은 사회적 유대는 개인적 이해득실 계산에 좌우된다는 형태의 사회성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 적 사회성’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문제 의 장(場)에서는 인간들이 수고, 알선, 조력 따위를 교환하여 수많은 욕

14) 제네바 초고 제1편 2장, (VPW, I, 447).

15) 푸휀도르프의 같은 책, 제2편 3장 18절.

구를 만족시키는데, 이런 욕구들 자체가 오직 ‘사회적 삶’에서나 생겨 날 수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인간들이 자연상태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 로 살았다고 결론내리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굳이 이런 결론을 내린다면, 이는 ‘자연인’을 ‘우리 눈앞에 있는 인간들’

과 혼동하고, ‘사회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사회 내부에서나’ 발 생할 수 있는 제 필요를 원용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식으로 현재 우리들의 헛된 욕망과 육체적인 필요를 혼동하면서, 이 후자 를 인간 사회의 근거요 기초로 생각한 학자들은 사실 언제나 결과를 원인 으로 착각한 셈이며, 그러니까 그들은 그들의 추론에서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루소에 따르면, 푸휀도르프, 헬베티우스(Helvetius), 백과사전파 학자 들의 공통된 오류는 단적으로 말하면 육체적 필요는 사실 인간들을 제각 기 따로따로 흩어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히려 인간들을 서로 접근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고 믿은 데에 있었다. 이 지 적은 동시에 루소 독창성의 관건을 이루는 아이디어를 함축하고 있고, 그 래서 또한 루소 자신이 지칠 줄 모르고 강조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루 소의 이 아이디어가 가장 강렬하게 표명된 것은 이때까지 공중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저작, ꡔ제언어의 기원에 관한 시론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이 말을 발명한 것은 욕구와 필요를 표현하기 위 해서라는 주장을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 주장은 근거가 없어 방어불가 능이다. 최초의 욕구의 자연적 결과는 인간들을 갈라놓는 것이지 접근시 키는 것이 아니다. 문명 이전의 이 야만 시대야말로 황금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인간들이 통합되어서가 아니라 서로 분리되어 떨어져 살았 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태초의 상태에선 각자가 스스로를 천하의 주인으로 여겼다고 말한다. 물론 가능한 이야기다. 그러나 문제의 사태를 좀더 면밀히 고찰한다면, 더 정확한 이야기는 아무도 자기 수중에 있는 것 이외의 것은 알지도 못하고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욕구가 그를 그의 동류들에게 가까워지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동류들로부터 유리시킨 다. 사람들은 조우하게 되면 하기야 서로 공격하는 일이 발생하였으나, 이런 조우 자체가 매우 드물게 일어났다. 그래서 전쟁상태는 어디에나 존 재했으며 동시에 온 땅은 평화로웠다.”16)

이 원문이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가 여기서 루소 독창 성의 원천이 되는 그의 고유한 변증법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 다. 홉스와 푸휀도르프를 동시에 겨냥하고 있는 이 원문은 루소가 하나의 동일 논법을 사용하여 만인의 만인에 대한 자연적 전쟁 이론과 이와 상반 된 자연적 사회성 이론을 일시에 논파하고 있는 것을 역력히 드러내 보이 고 있다. 생명에 필수적인 욕구, 즉 육체적인 욕구는 푸휀도르프가 주장 하는 것처럼 인간들을 서로 가까워지게 하거나, 또는 홉스가 주장하는 것 처럼 인간들을 서로 원수가 되게 하는 것을 초래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생명보존의 필요성에 몰린 인간들은 서로 멀리 떨어지려고 하는 것이다.

자연 상태는 따라서 전쟁이 일반화된 상태도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는 사 교적 상태도 아니고 ‘분산’과 ‘고립’의 상태인 것이다. 원시 상태에 서 인간이 자급자족하는 독자적 [홀로 사는]존재인 것은 그의 욕구란 그 의 육체적 필요에 지나지 않고, 그의 힘은 그의 욕구에 비례하는 만큼 동 류가 가까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배려가 아니고 대지의 과실들이다.” “숲 속을 떠돌아다니며, 일도 언어도 거처도 없는, 전쟁도 인연도 없는, 동류 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해칠 마음이 없는, 아 마도 평생에 어느 누구도 개인적으로 알아본 적이 없는 원시인은 그의 고 독 속에서 행복하지, 그로티우스나 스토아 철학자들이 원시인의 속성이라 고 주장한 사회에 대한 욕구 따위는 있을 리가 없다.”17) 그러므로 사회 성은 자연적 성향이 아니고, 인간들에 의해서 제도로서 설립된 것이다.

이것이 또한 루소가 ꡔ불평등기원론ꡕ에서 도달한 결론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들에게 인간들이 상호간의 필요로 인해 서로 교제하고 언어 를 사용하게 된 데에 자연이 한 일이라곤 거의 없는 것이 명백해진 이상, 그들의 사회성이 자리를 잡게 된 일이나 그들이 사회적 유대를 확립하는 일에 자연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확실하다.”(ꡔ불평등기원론ꡕ, VPW, I, 158)

16) 루소, 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 Gallimard, Paris, 1990, 2장 (67) 및 9장(94).

17) 불평등기원론 , VPW, I, 165/166.

그런데 자연은 인간의 사회성이나 언어사용과는 무관하다는 이 결론은 마치 루소 사상에 전환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ꡔ사브야아르 사제의 신앙고 백ꡕ의 한 대목에서 부인되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인간이 그 자연 본성 에 의해 사회적이거나, 또는 부여받은 본성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 이는 그의 종(種)과 연관된 다른 선 천적 감정들 때문이다. 왜냐하면 오직 육체적 욕구만을 고려한다면, 그것 은 인간들을 접근시키기는커녕, 분산시키니까 말이다.” 이 대목의 난점 은 육체적 욕구에 관해선 일관성이 유지되고 있는 반면, 자연적 사회성에 관해선 종전의 입장과 상충되는 듯 보인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 모순 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인상’에 지나지 않는 것은 루소의 사유가

‘완벽가능성’ 내지 ‘잠재적 능력’이란 개념을 매개로 하여 전개되기 때문이다. 루소에게 있어서 이성이 선천적[천부의] 능력인 것처럼, 사회 성 역시 선천적 감정(sentiment inné)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자 연인에게 있어선 오직 ‘가능태’(en puisance)로서만이 존재하는 까닭 에 이것들이 개발되기 위한 조건들은 결국 사회라고 하는 환경만이 제공 하고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선 ‘지 식’은 필수불가결하며, 인간은 이 지식을 오직 그의 동류와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성이란 홀로 떨어 져 살기 때문에 아무런 지식도 획득한 바 없는 존재에게는 그 발전 정도 가 제로일 수밖에 없다. 자연의 품에서 막 태어난 인간은 사회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만을 갖고 있으며, 이 가능성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 만 인간 자신이 사회 안에서 삶을 영위한 다음에나 실제[현실]로 변환된 다. 그러니만치 사회성이 인간을 자연상태에서 끌어낸 동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사회가 설립된 이후에나 사회성이 발전하였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사회성이 사회적 삶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요컨대 결과 를 원인으로 착각하고 있는 셈이다.

이 모든 착각의 중심에는 사회성의 본질에 대한 오판이 자리 잡고 있 다. 원시인은 자급자족하는 존재로서 타인의 도움 없이도 살아가는 데 아 무런 지장이 없는 만큼, 사회적 삶에 대한 욕구를 체험할 리도 없으려니 와 그런 삶을 ‘생각해볼’ 능력조차 없는 것이다. 그래서 루소의 ‘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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