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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육군조병창의 지정학적 기원과 등장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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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육군조병창은 1941년 5월 5일에 개창식을 가졌다. 총검공장과 견습공 연습공장이 완공된 상태였다.1) 이보다 앞서 1940년 12월에 이미 조선군에 편성되어 있었고,2) 조병창 건설을 위한 추가 토지 매수 신청에 대한 허가가 떨어진 건 1939년 9월 1일이었다. 본격적인 조성 공사는 1939년 10월부터 시작됐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무렵 일본육군조병창장은 정식 숙소 건설이 완료될 때까지 고쿠라 공창에서 파견될 공사감독 요원의 임시 숙소 마련을 위한 임대료 지출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 요청이 승인된 건 1939년 9월 30일이었다.3)

공사 기간까지 포함해서 인천육군조병창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약 6년간 부평지역에 존재 했던 일본의 군사시설이다. 광복 후 인천육군조병창은 주한미군의 군사시설로 활용되었고, 그 런 탓에 공여 구역이 반환되는 시점에서 인천육군조병창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주된 관심은 주로 건축물과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군사시설이란 측면에서 봤을 때 인천 육군조병창 부지가 일본군의 군용지로 쓰인 시기는 좀 더 오래 전이다.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적어도 1910년대 이후 조선총독부는 부평역 주변의 토지를 군사 용지로 확보해 두었고, 이것이 점차 확장되며 인천육군조병창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했던 것이 일본군의 군사훈련장인 ‘부평연습장’이었다.

조선군 경리부가 ‘부평 부근 소연습장’ 부지 매입을 신청한 건 1923년 1월 31일이었고, 이 요청 은 2월 20일에 승인된다. 이후 일본군 제20사단 경리부가 관할하던 약 72만 8,000평의 토지가 일본육군조병창 관할로 이관된 건 1939년 11월 2일이었다. 15년가량 군사 연습장으로 활용된 것인데, 이런 연혁을 고려할 때, 부평지역은 경술국치 직후 일본에 의해 군사적 성격의 지정학 적 의미가 부여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서울과 인천의 중간지대인 데다가 기차역은 물론, 조성된 지 얼마 안 된 신작로가 통과하고 있었고, 철도 주변의 넓은 황무지를 끼 고 있으면서 공격과 방어에 적합한 높지 않은 구릉이 두 지역 사이에서 진지 역할을 하기에 적 합하다고 판단됐기 때문일 것이다.

1) 戰備課 近藤少佐, 「朝鮮視察報告」, 1941. 05.

2) 「朝鮮軍管区部隊」, 『部隊行動表』, 鮮北課, 1945.

3) 「宿舎借上ニ關スル件申請, 陸軍造兵廠長官 小須田勝造→陸軍大臣」, 1939.09.30.

– 부평연습장을 중심으로

김현석 (생태역사공간연구소 공동대표)

일제강점기 인천육군조병창부지의

군사기지화

일본이 부평지역을 군사 요지로 주목한 건 다시 18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94년 1 월 16일, 쓰쿠바(筑波) 함을 타고 제물포에 도착한 다나카(田中) 대위 등 일본군 3명은 서울까 지 이어진 도로를 정탐한 후 ‘인천경성간도로시찰보고서’4)를 작성해 일본 해군대신에게 제출했 다. 이들은 제물포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경로를 모두 세 개로 파악하고 있었다.

4) 「JACAR(아시아역사자료센터)Ref.C10125477300、27年3月1日 筑波艦仁川京城間道路視察報告外の件(防衛省防衛研究所)」.

그림 1. ‘인천경성간도로시찰보고서’ 첨부 지도

* 출처 : 「JACAR(아시아역사자료센터)Ref.C10125477300、27年3月1日 筑波艦仁川京城間道路視 察報告外の件(防衛省防衛研究所)」.

그림 2. 구현산 일대

* 출처 : 국토지리정보원 국토정보플랫폼(https://map.ngii.go.kr/)

‘제1로’는 석암리, 구현산, 구지리, 오류동을 거치는 길이고, 제2로는 석암리, 부평, 양화진을 거 쳐 가는 길이며 제3로는 인천부 읍치와 중림현, 노량진을 통해 가는 길이다.

이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참고하면 ‘석암리(石巖里)’ 즉, 지금의 석바위 시장 부근에서 대로는 제 1로와 제2로의 두 방향으로 나뉜다. 제1로는 성현(星峴)을 넘어가게 되는데 포병이 지나가는 것 이 쉽지 않았다. 이 길은 ‘구로(舊路)’라고 불렀다. 흔히 옛 경인로라고 부르는 곳이다. 성현을 지나면 솔밭에 닿았는데, 이곳이 지금의 송내동이고 그 당시에는 구지리(九芝里)라고 불렀다.

제2로는 길이 좋았지만 우회하는 길이었다. 제1로와 제2로, 어느 곳을 택해서 걸어도 구현산 너머 구지리에서 만나게 되어 있었다.

다나카 일행이 정탐한 후 얼마가 지나 일본군이 청일전쟁 전야에 제물포에 상륙했다. 그리고 곧 바로 서울로 침입해 들어가 경복궁 점령사건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은 자국을 보호한 다는 명분을 내세워 구현산에 포대를 설치했다. 이곳을 인천과 서울 사이의 요지로 파악한 것이 다.5) 구현산(九峴山)은 지금의 광학산 일대를 가리킨다.

넓은 시야로 바라본다면, 훗날 구현산 주변에 군수시설이 들어서게 된 셈인데, 구현산과 인접한 동쪽 기슭에는 평양병기보급창 부평분창이 조성됐고, 북쪽 기슭 넓은 황무지에는 인천육군조병 창이 건설됐다.

5) ‘帝國軍隊 朝鮮에 上陸 및 淸韓 兩 政府로부터 撤兵 要請의 事’, 1894. 6. 6(일제의 한국침략사료총서 3).

그림 3. 부평연습장 실탄사격장의 야포대와 일행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그림 4. 부평연습장에서 실탄사격 발포광경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그림 5. 부평 평야에서 사단장 일행의 휴게시간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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