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 H ․ A ․ P ․ T ․ E ․ R ․ 4
외국 접경지역의 협력사례와 시사점
이 장에서는 외국 접경지역의 협력사례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우리나라 동해연안 접 경지역에 적용할 수 있는 시사점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외국 접경지역의 협력사례로 는 동․서독, 중국․대만, 남․북 예멘의 경우를 살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북한 측이 호응할 수 있는 경제성이 높은 사업의 개발, 북한의 수용 가능한 사업 발굴, 동해연안 접경지역의 생 태환경 및 경관에 대한 보전 및 활용, 접경지역의 평화적 이용과 비무장화의 병행 추 진, 남북 합의 이전의 남한 주도의 가능사업 발굴 등을 제시하였다.
1. 외국 접경지역의 협력사례
1) 동․서독
1955년 12월 9일 서독은 동독을 인 정하는 제3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단 절하겠다는 「할슈타인원칙」을 발표 하여 동독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 고자 하였고, 1961년 8월 13일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구축해 동ㆍ서독의 관 계는 전후 최악의 상태로 발전하였다.
국경이 동독 측에 의해 점차 공고화되어 가게 되자 서독정부는 국경을 통과하는 여행과 방문이외에도, 주민들의 분단에 따른 고통 완화를 목적으로 국경지역에 서 동ㆍ서독 간 협력 사업을 모색하기 위해 1972년 기본조약(Grundvertrag)을 체 결하였다. 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동서독은 건설적이고 실무적인 협력이 가능 해졌으며, 협력사업은 중세시대 한자동맹(Hansestädte)의 주요 교역과 무역지역인 뤼벡만(灣, Lübecker Bucht)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그림 4-1).
기본조약의 제도적 장치로써 동․서독은 1973년 1월 [기본조약추가의정 서](Zusatzprotokoll zum Grundlagenvertrag)를 통해 ‘경위원회’(Grenzkommission)를 공동으로 구성하여 동․서독 간 경계선 획정뿐만 아니라, 분단과 관련된 전반적 인 사안을 세부적으로 다루기로 하였다. 접경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동․
서독 간 1393km에 달하는 경계선을 획정하는 일이었다.
기본조약에 따라 설치된 접경위원회에서는 주로 자연재해방지, 수자원관리, 환경오염, 국토의 이용, 도로망의 연결문제 등을 토의하였고, 이를 문서화하는 협 정이 맺어졌다. 그리고 특정분야의 경우는 양정부의 대표단이나 경제 단체의 대 표끼리 합의를 도출한 경우도 있었다. 접경위원회는 국경지역 14개 지부에 국경 정보교환소를 설치․운영하였으며 교류가 활성화됨에 따라 상대편 국가에 상주 대표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1973년 9월 접경위원회는 접경지역에서의 홍수, 화재 등 재난방지에 관한 공 동협정(Vereinbarung zur Schadenbekämpfung und zum Schutz von Katastrophen)을 체결하여, 국경지역에서 화재가 발생하거나 홍수, 산사태, 전염병, 병충해, 수자 원 오염, 폭발물 등의 사고가 발생하여 상대편 지역에 영향을 줄 경우 이를 신속 히 알리고 공동 대처하도록 하였다. 국경의 통과로 인해 수자원 관리 이용에 지 장을 초래한 경우 주민들의 식수이용이나 공업용수 이용에 지장이 없도록, 양측 은 국경지역에서 수자원 관리시설 설치 및 보수 유지에 경제적인 지원을 하고 그 수자원의 공동 이용권을 확보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천연자원의 경우 상대편 지역에 까지 매장되어 있고 상대편 지역의 자원을 채 굴해야만 기술적으로 자원이 개발되는 경우 상호 지하 월경의 허용과 정보교환
에 합의하였다. 또한, 상대편 지역에 피해를 주는 환경오염에 대해 양측이 공동 으로 대처하기로 합의하고,9) 국경통과를 위한 10개의 도로, 8개의 철도, 2개의 내륙운하, 3개의 항공로가 1985년 허용되었다10). 동ㆍ서독은 기본조약 제7조 3호 에 대한 추가 의정서를 통해 1972년 5월 조약상 합의된 교통 분야의 협력을 확대 강화할 것을 합의하기도 하였다.
1985년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쵸프의 개혁․개방정책에 따른 국제정세의 변화를 편승하여 동․서독 간 해빙 분위기가 조성되어 80년대 후반부터는 동․서독 간 자매시 결연도 이루어졌다. 동․서독간 자매시 결연은 양독 간에 특별한 이해와 협력의 상징으로 평범한 일반 시민과 조직․기관이 참 여한 전시회, 스포츠 단체 및 청소년 단체 등의 상호 방문이 이루어져 서로를 이 해할 수 있는 만남의 장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독일 통일이후 동․서독 접경지역 의 구접경지역 시설은 새로운 용도로 이용되고 있으며, 26개의 역사체험관과 박 물관시설을 설치 관리하고 있다.
2) 중국ㆍ대만
중국과 대만은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분야에서 엄격한 구분정책을 추진하 고 있는데, 이러한 입장의 차이로 양안관계는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대립관계가 최근까지 지속되었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입각한 ‘1국 2체제’, 대만은 ‘3 불정책’(불접촉, 불담판, 불타협)과 3통불허(통상, 통우, 통항)등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1979년 이래 중국의 개혁ㆍ개방 표방으로 발전의 계기가 마련 되었는데, 특히 중국의 교류협력 제의에 대만 정부가 제한적이나마 융통성 있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양안 관계는 비정치ㆍ민간 차원에서의 교류에 획기적인 발전 을 이룩할 수 있었다.
9) 구동독 지역의 공장이나 도살장, 목장에서 폐수가 서독지역으로 흘러들어 하천이나 수자원을 오염시 키는 경우, 동독 측이 비용문제로 정화시설을 마련하지 않자 서독연방정부와 주정부가 비용을 공동 부담하여 정화시설을 마련해 주는 경우도 있었음(통일원, 1995.12. 동서독 교류협력 사례집, p326-328) 10) 분단이전에 40개의 철도노선, 30개의 고속도로와 국도, 140개의 지방도로, 수천 개의 각 지역 간 통
과도로가 있었으나 동독 측의 차단 조치에 의해 극소수만 허용되었음(통일부, 1995. 12.)
<그림 4-2> 중국․대만간 삼통(三通) 협력
자료: 조선일보 (2008.11.5)
경제교류의 동기를 살펴보면 중국은 대만경제를 흡수하려는 경제적 통일전략 차원의 의도가 있었고, 대만은 노동력 부족과 그에 따른 임금인상 등 국내기업 환경의 악화를 방지하고 한국 등 경쟁국 기업들의 중국진출에 주도권을 빼앗기 지 않겠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
1980년대 양국의 경제교류는 이미 비공식적 간접무역을 중심으로 한 초보적인 교류단계에서 벗어나 무역투자 규모가 확대되고 1987년 10월 대만정부의 ‘친인 척방문 허용조치’로 새로운 차원의 발전 단계를 맞이하였다. 중국은 대만과의 합 작생산을 통해 대만의 해외 판매망과 수출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었으 며,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과 관행 등 많은 자본주의 원리를 학습하여 본토 연안지역의 경제개발을 가속화하는데 힘이 되었다. 반면, 대만은 중국의 값 싼 노동력과 저렴한 원자재를 이용하여 기업의 생산비를 절감하고 노동집약적 산업의 이전으로 산업구조의 고도화에 도움이 되었다.
중국의 대외개방정책은 1979년부터 종래의 고립적인 자력갱생정책에서 탈피 하여 대외무역의 확대와 적극적인 외자도입을 통하여 경제성장을 도모하려는 정 책을 의미한다. 이러한 중국의 대외개방정책은 경제개발의 발전 단계에서 상호 보완성이 높은 대만과의 경제교류를 촉진하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중국은 1980 년 초 대외개발 초기, 광동성에 심천, 주해, 선두, 복건성에 하문 등 4개 경제특구 를 설치하고 특히, 대만에 인접한 하문은 대만자본의 유입을 유도하고자 설치하 여 대만과의 경제교류를 시도하였다.
이에 더해, 1982년에는 복건 성 연안구에 대만동포 접대소 를 설치하여 상품교환을 하고, 1983년 국무원은 대만동포 경 제특구 투자우대조치를 발표 하여 조세 우대 30%, 내수판매 허용, 토지사용상의 우대정책 을 추진하였고 이어서 1990년
대만투자구를 설치하였다. 하문 경제특구내에 1989년 5월 행림지구(경공업중심) 와 해창구(중화학공업 중심)등 대만투자구를 설치하여 관련업종기업의 투자를 유인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지속적인 양안 간 교류에 힘입어 2008년 11월 중국과 대만(兩岸·양안) 은 분단 59년만에 전면적인 삼통(三通)11) 실시에 합의하여 ‘1중(하나의 중국) 경 제권’을 향한 역사적 진보를 이룩하였다. <그림 4-2>에서 보듯이 상하이(上海) 등 중국 63개 항구와 가오슝(高雄) 등 대만 11개 항구가 2008년 12월부터 개방되어, 그동안 일본, 한국, 홍콩을 경유하던 양안 화물선들의 물류비용이 대폭 절감될 것으로 예상된다.
3) 남․북 예멘
예멘은 1939년 영국과 오스만 투르크의 전쟁으로 남예멘 지역은 영국의 보호 하에 북예멘 지역은 계속하여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어 남ㆍ북 예 멘의 분단이 시작되었다. 분단된 남ㆍ북 예멘은 같은 민족ㆍ언어ㆍ종교를 가지 고 있었으나 왕정을 거쳐 아랍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공화정을 채택한 북부와 사 회주의 체제를 채택한 남부와의 이데올로기 차이가 컸다.
남․북예멘은 1981년 12월 양국 정상 간 개최된 아덴회담에서 「남북예멘 협 력 및 조정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째, 양국 대통령으로 구성되는 「예멘최고평의회」를 구성하고, 이 회의의 지시 사항을 실천할 「공동각료위원회」와 「사무국」을 설치한다. 「예멘최고평의 회」는 6개월에 한번 씩 조정회의를 개최하며, 「공동각료위원회」는 3개월에 한번 씩 개회한다. 둘째, 양국의 경제 및 사회개발 계획을 조정하고 「양국연합 공사」에 의한 지질 및 수자원 분야의 공동조사와 개발에 힘쓴다. 양국의 농업지 도 및 농산물 판매를 위한 공동기구를 설치한다. 카타바-두라인 간 연결도로 건
남․북예멘은 1981년 12월 양국 정상 간 개최된 아덴회담에서 「남북예멘 협 력 및 조정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째, 양국 대통령으로 구성되는 「예멘최고평의회」를 구성하고, 이 회의의 지시 사항을 실천할 「공동각료위원회」와 「사무국」을 설치한다. 「예멘최고평의 회」는 6개월에 한번 씩 조정회의를 개최하며, 「공동각료위원회」는 3개월에 한번 씩 개회한다. 둘째, 양국의 경제 및 사회개발 계획을 조정하고 「양국연합 공사」에 의한 지질 및 수자원 분야의 공동조사와 개발에 힘쓴다. 양국의 농업지 도 및 농산물 판매를 위한 공동기구를 설치한다. 카타바-두라인 간 연결도로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