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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금지와 멜랑콜리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40-46)

초기시를 이끌어 가는 주된 정서는 멜랑콜리이다. 자책이나 우울감, 자기비하의 감정 인 멜랑콜리는 자기파괴라는 측면에서 다분히 타나토스적이다.

“우울증의 특징은 심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낙심,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단,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 모든 행동의 억제,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에게 욕 설을 퍼부을 정도로 자기 비하감을 느끼면서 급기야는 자신을 누가 처벌해 주었으면 하는 징벌에 대한 망상적 기대를 갖는 것 등으로 나타난다.”38)

프로이트의 멜랑콜리는 과도한 나르시시즘이라는 전제하에 미완성된 애도로써 자기 비하가 동반된다. 이 멜랑콜리는 이성복 시의 많은 부분에 관여하는데, 특히 초기시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정서이다. 애도가 금지된 시대에서, 시적 화자는 멜랑콜리에 의해 우울감과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는 「다시, 정든 유곽에서」처럼, “후회는 눈 쌓인 벌판처럼 끝없고 우 리의 피로는/ 죽음에 닿는 江 한 끼도 거름 없이 고통은 우리의 배를/ 채우고 담배 불 로 지져도, 얼음판에 비벼도 안 꺼지는 욕정”과 “물 마신 뒤의 목마름”으로 드러난다.

성탄절에 자살한 Pavese를 모티브로 하여, 「성탄절」이라는 시에서는 멜랑콜리가 과대망상으로 확대된다.

성탄절 날 나는 하루 종일 코만 풀었다 아무 愛人도 나를 불러주지 않았다 나는 아무에게나 電話했다 집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살지 않으니 죽음도 없어요 내 목소리가 빨간 제라늄처럼 흔들리다가…… 나는 아무 데도 살지 않는 愛人이 보고 싶었다 그 여자의 눈 묻은 구두가 보고 싶었다 성탄절 날 나는 낮잠을 두 번 잤다 한 번은 그 여자의 옷을 벗겼다 싫어요 안돼요 한 번은 그 여자의 알몸을 파묻고 있었다 흙이 떨어질 때마다 그 여자는 깔깔 웃었다 멀고 먼 성탄절 나는 Pavese의 詩를 읽었다 1950년 Pavese 自殺, 1950년? 어디서 그를 만났던가 그의 詩는

정말 좋았다 죽을 정도로 좋으니 죽을 수밖에 성탄절 날

38) 지그문트 프로이트, 슬픔과 우울증 ,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윤희기, 박찬부 옮김, 열린책 들 2003, p.244.

Pavese는 내 품에서 천천히 죽어 갔다 나는 살아 있었지만 지겨웠고 지겨웠고 아무 데도 살지 않는 愛人이 보고 싶었다 키스! 그 여자가 내 목덜미 여러 군데 입술 자국을

남겨주길…… Pavese는 내 품에서 천천히 죽어 갔다 나는 그의 故鄕 튜린의 娼女였고 그가 죽어 간 下宿房이었다 나는 살아 있었고 그는 죽어 갔다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다

-「성탄절」전문(시집1)

살아 온 날들과 살아 갈 날들을 다 살아버려 삶을 지속시킬 이유마저 없는 화자는 살아갈 이유를 「그해 가을」 “벽에 맺힌 물방울 같은 여자”를 통해서 찾고 있다. 그 러나 그 여자는 아무데도 살지 않는 애인이다. 그 애인은 「성탄절」에서 Pavese의 환 영으로 나타난다. 성탄절에 죽은 그녀는 시적 화자의 품에서 다시 한 번 천천히 죽어 간다. 「성탄절」의 타나토스적인 기괴함과 음산함은 「소풍」에서 “선지 같은 기억 들”로, 「여름산」에서는 “잡힌 손에서 물 같은 피가 흘렀다” 와 같이 묘사되고 있다.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에서는 “썩은 웅덩이에 고이고 베어 먹어도/ 베 어 먹어도 자라나는 너의 죽음”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세월의 집 앞에서」를 통해서 는 “앞머리 없는 기차. 그리고 너의 눈에 물방울처럼 미끄러지던 세월”로 나타난다. 이 러한 내용 외에도 초기 작품 거의 모든 곳에서 암울하다 못해 처절함으로 일관된 비유 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성복 시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정든 유곽에서」, 「꽃 피는 아버지」, 「사랑 일기」등에서와 같이 제목이 주는 아이러니이며, 이 아이러니를 통해서 슬픔은 극대화 되고 있다는 것이다. 「눈」에서는 일반적인 순백의 깨끗한 이미지와는 달리 이성복 시인만의 언어로써 그것을 묘사하고 있다.

눈이 온다 산등성이 허름한 집들은 白旗를 날리고 한 떼의 검은 새들, 집을 찾지 못한다

마음의 수레 바퀴 자국에서 들리는 수레 바퀴 소리

희생자들은 곳곳에 쌓였다 나무 십자가가 너무 부족했다 잘못, 시체를 밟을 때마다 나는

가슴 속에 물고기를 그렸다

희생자들은 곳곳에 녹아 흘렀다 물고기 뼈가 공중에 떠올랐다

아― 하고 누가 소리 질렀다

또 한 떼의 희생자들이 희생자들 위에 쓰러졌다 사슴 뿔을 단 치욕이 썰매를 끌고 달려갔다 아― 하고 뒷산이 대답했다

-「눈」1. 3연 부분(시집1)

초기시에는 집이 없다. 안식의 공간으로서의 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새들도 예외는 아니다. 집을 찾지 못하는 한 떼의 검은 새들은 백기를 날리며 내리는 눈과 대비된다.

모두가 떠도는 존재들인 것이다. 아름다움을 거세당한 화자에게 있어 ‘눈’은 일반적이 거나 보편적인 이미지를 상실한다. 희생자들은 가차 없이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시 체가 되어 밟히게 된다. 눈을 희생자로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에 삶을 향한 긍정이라고 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뼛속까지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자의 가 슴은 팔딱거리는 물고기를 키울 수 없을 만큼 폐허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가슴 속 물 고기들 또한 살아있지 못하고 앙상한 뼈가 되어 공중에 떠오른다. 시 전반을, 그냥 치 욕이 아닌 “사슴 뿔을 단 치욕이 썰매를 끌고 달려”가듯 끌고 가는 것이다. 이렇듯 초 기시에 나타난 멜랑콜리는 깊은 우울감으로 일관된 타나토스의 형태를 띤다.

「다시, 정든 유곽에서」의 1연과 4연을 통해서도 사회적 금지에 의한 멜랑콜리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나 우리는 누구냐 우리의 하품하는 입은 세상보다 넓고

우리의 저주는 십자가보다 날카롭게 하늘을 찌른다 우리의 행복은 일류 학교 뱃지를 달고 일류 양장점에서 재단되지만 우리의 절망은 지하도 입구에 앉아 동전 떨어질 때마다 굽실거리는 것이니 밤마다

숨은 罪를 더듬고 가랑이는 병약한 아이들을 부르며

소리 없이 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나 우리는 누구냐 우리의 후회는 난잡한 술집, 손님들처럼 붐비고

밤마다 우리의 꿈은 얼어붙은 벌판에서 높은 송전탑처럼 떨고 있으니 날들이여, 정처 없는 날들이여 쏟아 부어라 농담과 환멸의 꺼지지 않는 불덩이를 廢車의 유리창 같은 우리의 입에 말하게 하라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를

앞서 가는 사내의 삐져 나온 머리칼 하나가 가리키는 方向을 무슨 소린지 어떻게, 어떻게 하라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안다 우리가 잘못 살고 있음을 때로 눈은 내린다

참회의 전날 밤 무릎까지 쌓이는 표백된 記憶들 이내 질퍼덕거리며 낡은 구두를 적시지만 때로 우리는 그리워한다 힘 없는 눈송이의 모질고 앙칼진 이빨을 때로 하염없이 밀리는 車들은 보여 준다 개죽음을 노래하는 지겹고 숨박히는 행진을 밤마다 공장 굴뚝들은 거세고 몽롱한 사랑으로 별길을 가로막지만 안다 우리들 詩의 이미지는 우리만큼 허약함을

-「다시, 정든 유곽에서」1, 4연 부분(시집1)

“후회는 난잡한 술집의 손님들처럼 붐비고 <중략> 꿈은 얼어붙은 벌판에서 높은 송 전탑처럼 떨고 있으”며, “폐차의 유리창 같은 우리의 입”, 이 모든 것들의 이미지는 낯설다. 그 낯선 이미지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이 다. 그 의문의 출처는 “우리가 잘못 살고 있음”과 “우리들 시의 이미지는 우리만큼 허 약함을” 알아버림에 대한 자각 때문이다. 그 자각은 우울감을 증폭시킨다. 우울감은

‘저주, 절망, 굽실거리는, 죄, 병약한, 소리 없는 울음, 후회, 환멸, 잘못 살고 있음, 참 회, 개죽음, 허약함’ 의 감정들을 불러오게 된다. 화자는 내면에 깔려 있는 이러한 감 정들로 인해 깊은 자책을 하게 된다. 멜랑콜리에 동반되는 자기비하가 나타나고 있는 지점이다.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에서는 자기비하를 넘은 병적인 세계를 보여주게 된다.

어느날 갑자기 망치는 못을 박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벼는 잠들지 못 한다 어느날 갑자기 재벌의 아들과 高官의 딸이 결혼하고 내 아버지는 예고 없이 해고된다 어느날 갑자기 새는 갓낳은 제 새끼를 쪼아먹고 캬바레에서 춤추던 有婦女들 얼굴 가린 채 줄줄이 끌려나오고 어느날 갑자기 내 친구들은 考試에 합격하거나 文壇에 데뷔하거나 美國으로 발령을 받는다 어느날 갑자기 벽돌을 나르던 조랑말이 왼쪽 뒷다리를 삐고 과로한 운전수는 달리는 버스 핸들 앞에서 졸도한다

어느날 갑자기 미류나무는 뿌리채 뽑히고 선생은 생선이 되고 아이들은 발랑까지고 어떤 노래는 금지되고 어떤 사람은 수상해지고 고양이 새끼는 이빨을 드러낸다 어느날 갑자기 꽃잎은 발톱으로 변하고 처녀는 養老院으로 가고 엽기 살인범은 불심 검문에서 체포되고 어느날 갑자기 괘종시계는 멎고 내 아버지는 오른팔을 못 쓰고 수도꼭지는 헛돈다

어느날 갑자기 여드름 투성이 소년은 풀 먹인 군복을 입고 돌아오고 조울증의 사내는 종적을 감추고 어느날 갑자기 일흔이 넘은 노파의 배에서 돌덩이 같은 胎兒가 꺼내지고 죽은 줄만 알았던 삼촌이 사할린에서 편지를 보내 온다 어느날 갑자기, 갑자기 옆집 아이가 트럭에 깔리고 축대와 뚝에 금이 가고 月給이 오르고 바짓단이 튿어지고 연꽃이 피고 갑자기,

한약방 주인은 國會議員이 된다 어느날 갑자기, 갑자기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갑자기, X이 서지 않는다

어느날 갑자기 주민증을 잃고 주소와 생년월일을 까먹고 갑자기, 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후략>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부분(시집1)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에서 벌어지는 세계는 보편적 시선으로 바라보면 도무지 이해불가의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이상하다 못해 기괴하다. 모든 것이 철저히 부정당 하는 세상이다. 지금까지 자아라 믿었던 것들이 재조정되고 재구성되어야 하는 세상이 다.

일상적인 혹은 정상적이라 여기던 삶을 살아가던 어느 날,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망치는 못을 박지 못하고 벼는 잠들지 못하며, 미루나무가 뿌리 채 뽑히고 선생은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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