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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표상으로서의 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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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시는 초기의 치욕적인 삶으로부터 모성을 통한 세계와의 화해를 추구하는 시기 이다. 어머니라는 타자를 통해서, 시인은 고통과 우울함에서 벗어나 삶에 따뜻한 시선 을 보낼 수 있게 된다.

김현은 『남해 금산』의 해설에서, “이성복이 그린 화자, 나의 삶의 도정은 통과 제 의적 도정이다. 치욕적인 삶, 죽지 못하게 하는 어머니, 저 세계로의 길 떠남, 되돌아옴 이라는 네 단계의 도정은 시련과 극복, 죽음과 재생이라는 통과제의의 도정이다.”40) 라 고 밝히고 있다.

통과제의의 한 부분으로서 ‘어머니’에 관한 시들은, 대부분 중기시에 집중되어 있음 을 알 수 있다. 이성복의 작품 중에 어머니를 소재로 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남 해 금산』에서는 「문을 열고 들어가」, 「또 비가 오면」, 「어머니 1」, 「어머니 2」, 「수박」, 「聖母聖月 1」, 「聖母聖月 2」, 「봄날 아침」, 「금빛 거미 앞에 서」, 「분지일기」, 「어제는 하루종일 걸었다」등이 있다. 『그 여름의 끝』에서는,

「거리」,「어머니 1」,「어머니 2」,「섬」등이 있으며,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에서 는, 「높은 나무 흰꽃들은 燈을 세우고 15 16 17 23 24」와「어머니」가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다수의 작품을 통해 시인은 어머니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낸다. 그에 게 있어서 어머니는 보편적 모습이 아닌 구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 다.

다음은 『남해 금산』의 「어머니 1」에 나타난 에로스의 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건물 신축 공사장 한편에 쌓인 각목 더미에서 자기 상체보다 긴 장도리로 각목에 붙은 못을 빼는 여인은 남성, 여성 구분으로서의 여인이다 시커멓게 탄 광대뼈와 퍼질러앉은 엉덩이는 언 제 처녀였을까 싶으잖다 아직 바랜 핏자국이 水菊꽃 더미로 피어오르는 5월, 나는 스무 해 전 고향 뒷산의 키 큰 소나무 너머, 구름 너머로 차올라가는 그녀를 다시 본다 내가 그네를 높이 차올려 그녀를 따라잡으려 하면 그녀는 벌써 풀밭 위에 내려앉고 아직도 점심 시간이 멀어 힘겹 게 힘겹게 장도리로 못을 빼는 여인,

어머니,

촛불과 안개꽃 사이로 올라오는 온갖 하소연을 한쪽 귀로 흘리시면서, 오늘도 화장지 행상에

40) 김현, 「치욕의 시적 변용」, 『남해 금산』해설, 문학과지성사, 1986, p.97.

지친 아들의 손발에, 가슴에 깊이 박힌 못을 뽑으시는 어머니……

-「어머니 1」전문(시집2)

이성복 작품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여성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남성도 아니다. 어 머니는, 여성과 남성으로서의 성별 구분이 불가한 존재이다. 이성복 시에서 어머니는 단순한 가족의 개념이 아닌 시적 화자의 구원적 존재로서 드러난다. 고단한 아들의 손 발과 가슴 깊이 박힌 못을 빼는 행위는, 예수의 손발에 박힌 못을 빼는 이미지를 연상 시킨다. 자신의 상체보다 큰 장도리라는 도구가 갖는 의미는 어머니의 고통스런 희생 을 상징한다. 하지만 중기시에서는 고통 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희생을 통해서 삶을 향해 긍정적으로 나아가고 있음에 다분히 에로스적임을 알 수 있다.

어머니에게도 과거 여성성이 존재했을 때가 있었다. 그것은 처녀적 일이고 아주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 구름 너머에 존재 했을 때이다. ‘나’로 인지되는 화자를 만난 이후 부터 어머니에게 있어서의 여성성은 사라지게 되며, 모성적인 삶만 존재하게 된다. 가 건물 신축 공사장에서의 고단한 삶을 살아가면서, 어머니는 자기 상체보다 긴 장도리 로 각목에 붙은 못을 빼고 있다. 그 풍경은 아버지의 부재를 암시하는데, 초기시와 마 찬가지로 중기시에서도 아버지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기에 어머니는 가장 의 역할을 수행하는 적극적인 양상을 보인다. 남성들의 전유물 같은 공사장에 퍼질러 앉아 힘겹게 삶을 책임지는 자세를 취한다. 어머니가 빼는 것은 각목더미에 박힌 못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과 화장지 행상에 지친 아들에게 박힌 못이다. 그리고 그들 가 족의 가슴 깊은 곳에 박힌 못이기도 하다. 이렇듯 어머니의 사랑으로 인해 시적 자아 는 치유를 받게 된다. 고향 뒷산의 키 큰 소나무 너머, 또는 그 보다 높은 구름 너머 로의 구원을 꿈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 사랑하는 것이 때로는 역겨워 짜증이 나기도 하였지요

흐드러진 꽃나무가 머리맡에 늘어져 있었어요

내 사랑하는 것이 때로는 역겨워 얼어붙은 거리로 나서면

엿판 앞에 서 있는 엄마의 등에

버짐꽃 핀 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어요

때로 내 사랑하는 것이 역겨워 떠날 궁리를 해보기도 하지만 엿판 앞에 서성거리는 엄마의 등에 나는 곤히 잠들어 있었어요

-「거리」전문(시집3)

『에로스와 문명』을 쓴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에 의하면, “본능의 목적이 삶의 종결 이 아니라 고통의 종결-긴장의 해소라면, 본능의 입장에서 역설적으로 볼 때 삶과 죽 음의 갈등이 감소되면 될수록 삶은 만족의 상태에 더 가깝게 간다. <중략> 동시에 과 잉억압을 벗어난 에로스는 강화될 것이고, 강화된 에로스는 죽음의 본능의 목적을 흡 수할 것이다. 죽음의, 본능으로서의 가치는 변화할 것이다.”41) 라고 한다. 위의 시는 타 나토스적인 양상에서 환기의 대상인 ‘엄마의 등’이라는 에로스적 매개를 통과하여 고통 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양상을 보인다.

어릴 적 엄마의 등에서 꾸던 꿈은 그 자체가 구원이었다. 아이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생의 전부이고 삶을 지탱시키는 버팀목이다. 하지만 성장하고 나면 사는 것이 힘겨워 서 사랑마저 역겨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화자는 어린 날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어린 날 기억에서도 어머니는 여전히 가난하다. 가난으로 버짐꽃이 핀 아이 를 업고 엿판 앞을 서성인다. 화자의 짜증과 역겨움과 반항의 대상은 가난일 수도 있 고, 때론 의지와는 상관없이 흐르고 있는 세상일 수 있다. 시를 통해서 화자는 현실의 고통에서 어머니의 등을 떠올리며, 구원과 안식을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친척집에 가는 아이처럼”「凋落하는 가을빛을」해맑게, 어머니의 등은 힘든 세상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곤히 잠들 수 있는 구원의 대상인 것이다. 어 린 날에도, 성장한 후에도 그리움의 근원적인 대상 또한 어머니임을 「어제는 하루종 일 걸었다」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어제는 하루종일 걸었다 해가 땅에 꺼지도록 아무 말도 할 말이 없었다

41)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에로스와 타나토스」, 『에로스와 문명』, 김인환 옮김, 나남, 1989, p.285.

길에서 창녀들이 가로막았다

어쩌면 일이 생각하는 만큼 잘못되지 않은 거라고 생각도 했다 어차피 마찬가지였다

가슴은 여러 개로 分家하여 떼지어 날아갔다

그것들이야 먼데 계시는 내 어머니에게로 날아갈 테지만

젖은 불빛이 뺨에 흘렀다

날아가고 싶었다, 다만, 까닭을 알 수 없이

-「어제는 하루종일 걸었다」전문(시집2)

더 이상 어머니의 등에 기대어 살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 세상으로 팽개쳐진 순간부터 시적 화자는 해가 땅에 꺼지도록 걷는다. 하루는 늘 고단 하고 힘이 부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말이 필요 없는 세상에서 힘겨움에 가슴 이 찢어지는 듯 고통스럽다. “여러 개로 분가하여 떼지어 날아” 간다는 표현을 통해서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어머니에게로의 심정적 회귀를 갈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자식이란 어머니에게로부터 분리된 순간부터 회귀를 염원하고 있는 존재인 것이 다. “검은 새, 검은 새야 우리 어머니 이고 오는 흰 떡시루라도 보이는가”「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24」에서와 같이 어머니는 늘 그리움의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자식의 힘든 삶을 지탱하게 하는 대상이 어머니라는 타자이듯이, 어머니 또한 자식을 향한 존재임을 다음 시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몸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微動도 않으신다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사랑하는 어머니 微動도 않으신다

발밑 잡초가 키를 덮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어머니, 뜨거운

어머니 입김 내게로 불어온다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또 비가 오면」전문(시집2)

어머니는 세상으로부터 자식을 보호하는 존재이다. 세상의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미동도 하지 않는 존재이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몸이 불어나는 고통 속에서도 발 밑 잡초가 키를 넘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삶의 입김을 자식에게로 불어주 는 존재이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오직 자식만을 생각하는 존재인 것이다. 「또 비가 오면」에서 등장하는 비와 물은 고난의 상징이다. “세상의 어머니가 아파요”「봄날 아 침」에서와 같이 아픈 몸으로 역경을 견디어 내는 존재이다. 그 원동력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강한 모성성으로 인해 고난 속에서도 어머니는 자식을 향해 뜨겁게 생명력 을 불어넣어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노는 날이에요, 어머니 오랫동안 저는 잠자지 못했어요 오랫동안 먹지 못했어요 울지 못했어요 어머니, 저희는 금빛 거미가 쳐 놓은 그물에 갇힌 지 오래 됐어요

무서워요, 어머니

금빛 거미가 저희를 향해 다가와요 어머니, 무서워요

금빛 거미가 저희를 먹고 흰 실을 뽑을 거예요

-「금빛 거미 앞에서」전문(시집2)

시적 화자는 역경을 극복해가는 구원의 매개체로 어머니를 등장시킨다. ‘금빛 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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