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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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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시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죽음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이다. 죽음 충동의 타나토 스적 특징을 지닌 작품들은, 초기시의 죽음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초기시의 암울과 무기력으로 일관하던 죽음의 경향에서 벗어나, 후기시에서는 삶과 죽음 너머의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성복은 『오름 오르다』에서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초월, 진보와 순환의 사이에서, 그 사이로서만 드러나는 인-간 의 존재방식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용암의 분출과 퇴적으로 이루어진 오름과 마찬가지 로 상반되는 것들의 동시발생인 인-간은 그것들 사이 둥근 가장자리로서 존재하는 것 이다.”61)는 그의 말처럼 후기에 있어, 초기와 중기와는 달리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인 식이 변모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후기시에서는, 죽음 또한 삶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작품 상호간에 연관 지어 밝혀보 고자 한다. 이성복은, 시론서 『무한화서』의「삶 451」을 통해서 “운명이란 어느 날 내가 오라 해서 온 적 없고, 가라 해서 가는 게 아니지요. 기쁨이 오면 기쁨 먼저 보내

59) 심재중, 「깊은 오후의 열망」,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해설, 열림원, 2003, p.120-122.

60) 이성복, 「남벽 아래서」, 『극지의 시 2014-2015』, 문학과지성사, 2015, p.36.

61) , 「사랑이라는 미친 유혹」, 『오름 오르다』, 현대문학, 2004, p.83.

주고, 슬픔이 오면 슬픔 먼저 보내주고 일어서는 게 내가 할 일이에요. 그 사이에서 시 는 표정 하나 얻는 거지요.”62)라고 이야기 한다. 그의 말처럼, 후기시의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불교적인 용어를 빌어 설명할 수 있다. “빛이 드는 쪽을 양(陽)이라 하고 안 드는 쪽을 음(陰)이라 해요. 강도로 볼 때는 햇빛이 양이지만, 청명함으로는 달빛이 양이에요. 음양은 실체가 아니라 상보(相補)의 개념이고, 연기(緣 起)이며 공(空)이에요. 삶과 죽음 또한 뭐가 다르겠어요. 그렇다면 공이 아닌 실(實)은 무엇일까요.”라며 같은 책 「삶 457」을 통해서도 이와 같이 밝히고 있다. 이로써 초기 시와는 다른 차원의, 보다 깊고 원숙한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르주 바타유도 그의 저서 『에로티즘』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불연 속적 존재인 우리들에게 죽음이란 것이 존재를 이어주는 연속성의 의미를 가짐을 증명 해 보이려고 한다. 번식은 존재들을 불연속성으로 안내하며 존재들 간의 연속성을 위 기로 몰아넣는다. 즉 번식은 죽음과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존재들의 번식과 죽음에 대해서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존재의 연속 또는 죽음은 결국 동일 한 것에 대한 다른 표현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존재의 연속 또는 죽음은 둘 다 매혹적 이다. 그리고 에로티즘을 지배하는 것 역시 연속성 또는 죽음에 깃든 매혹이다.”63)라는 표현을 들어, 삶과 죽음을 같은 맥락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성복 시인 또한, 『무한화서』,「삶 448」을 통해서, “삶과 죽음을 함께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 시,「죽음에 대한 각서」에서도 이와 같은 시인의 태도는 잘 드러 난다.

겨울에 죽은 목단 나무 가지에서 꽃을 꺾었다 끈적한 씨방이 갈라지고 터져 나온 꽃, 죽은 딸 을 흉내 내는 실성한 엄마처럼 꽃 떨어진 자리도 꽃을 닮았다 여름 꽃을 보지 못했어도 우리는 겨울 꽃이 될 수 있다 희부옇게 타다 만 배꼽 같은 꽃, 제사상에 올리는 문어 다리 꽃, 철사로 동여매도 아프지는 않을 거다 그 꽃잎 마른 번데기처럼 딱딱하고, 눈비가 씻어간 고름 자국 찾 을 수 없다, 죽음이 불타버린 꽃

-「죽음에 대한 각서」전문(시집7)

위의 시는 죽은 목단 나무 가지를 소재로 하여 삶과 죽음과의 공존을 이야기 한다.

62) 이성복, 「삶 451」,『무한화서 2002-2015』, 문학과지성사, 2015.

63) 조르주 바타유, 『에로티즘』, 조한경 옮김, 민음사, 1997, p.13-14.

목단 나무는 싱싱한 물기를 머금고 살다가도 겨울이면 말라서 비틀어진다. 마른 가지 를 자르면 속이 텅 비어 있는 속성을 지닌 나무이다. 봄에 꽃이 피고, 꽃이 진 자리에 씨방이 생기는데, 겨울이면 그 씨방까지 말라 마치 죽은듯한 형상을 보인다. 화자는 그 마른 가지 위에 붙어서 죽은 것처럼 보이는 씨방을 꺾는 행위를 꽃을 꺾는다고 진술한 다.

죽음과 상반된 꽃말을 가진 목단을 등장시켜, 죽음을 향해 과감하게 다가가는 모습 을 보인다. 꽃이 져서 남은 씨방으로 죽음의 형국을 보여주는 목단나무를 통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름 꽃을 보지 못했어도 우리는 겨울 꽃이 될 수 있다”이다. 여 름 꽃과 겨울 꽃을 대비시킴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름 꽃과는 달리, 말라 비틀어져 꽃의 흔적만 남은 꽃 또한 충분히 아름답다는 진술이다. 마치 주검처럼 보이지만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화려한 꽃 못지않게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 임을 그려낸다. 더 나아가서 “희부옇게 타다 만 배꼽 같은 꽃, 제사상에 올리는 문어 다리 꽃” 같이 하찮거나 꽃이 아닌 꽃모양 형상들에까지 감정을 이입함으로써 태어난 것만으로도 모두가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미적 차원으로까지 인식을 끌어올린다.

보여 지는 형상에 매달리지 않고, 생명 가진 것들을 통해 아름다움의 층위를 한껏 고취시킴을 알 수 있다. 죽음의 과정을 통과하고 난 후, 다른 생명으로 나아감을 통해 생명은 연속성을 확보하게 된다.

조르주 바타유에 의하면, “에로티즘은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이라고 한다.”64) 목단이 푸름의 싱그러움에서 번데기처럼 딱딱한 죽음을 통과했을 때 비로소 “죽음이 불타버린 꽃”으로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복은 다음 시의 ‘민들레’를 통해서도 삶은, 소멸 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영생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이야기 한다.

떨리는 몸으로 초록 잎새들이 엮은 구름다리 너머

영성체 마치고 달려나오는 흰 옷 입은 소녀들

어떤 죽음이 밤새 입맞추었기에,

얇은 속옷 허벅지에 걸치고

64) 조르주 바타유, 위의 책, p.11.

민들레 씨방마다 숨어 있던 신부들 하늘길 오른다

-「46 어떤 죽음이 입맞추었기에」전문(시집5)

삶의 형태로서 민들레의 씨방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리인 것처럼 여겨 지지만, 시인은 죽음과의 입맞춤으로 생명이 잉태되었음을 이야기 한다. 민들레꽃이 진 자리에 맺힌 씨앗들을, 영성체 마치고 달려 나오는 흰 옷 입은 소녀들의 순결한 이미 지로 표현한다. 이 소녀(씨앗)들은 죽음과 입 맞추는 행위를 통해서 삶에서 죽음으로 나아가 또 다른 삶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러한 통과제의에 기인하여 삶은 영속성을 갖 게 되는 것이다. “어떤 풍경은 전화 코드 뽑고/ 한 삼십 분 졸고 나면 흔적이 없다”

「111 어떤 풍경은」할 만큼의 짧은 생일지라도 그 속에서 끝없는 순환의 고리에 연결 되어 삶과 죽음은 이어진다. 그러기에 “저 많은 암컷들의 배는 하늘의 달처럼/ 구령도 없이 부풀고 꺼지고를 되풀이하는 것이다”「122 부풀고 꺼지고 되풀이하면서」“물새들 은 어째서/ 같은 방향만 바라볼까/ 죽은 물새들을 추억하는/ 자세가 저런 것일까”「64 밀려오면서 고운 모래를」라는 진술을 통해서 볼 때, 삶은 끊임없이 죽음을 추억하며 죽음과 함께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시에서는 죽음 또한 추억되는 순간까지 삶 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게 된다.

다음 시,「73 무슨 天刑인가」에서도 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무덤이 없는 자들은? 렙 아젤이 물었다―

우리의 그림자들은 모두 절규라네. 유켈이 대답했다.

-에드몽 자베스, 「헌사」

무슨 천형인가, 사막의 하늘수박들. 렙 아젤이 물었다: 어머니, 저는 혹인가요? 어머니, 왜 혹 인 줄 모르셨어요? 혹인 줄 알면서도 그냥 두셨어요? 유켈이 물었다: 어머니, 저는 머리인가요?

어리석은 과즙 들어차 눈을 뜰 수 없어요. 어머니, 어리석은 벌건 과즙이 눈구멍을 열어 달래요.

(유켈과 렙 아젤, 너희는 어머니 마리아의 새끼 무덤들. 그분의 아드님도 찾지 못하는, 똑같은 줄무늬의 푸른 假墓들. 熱砂의 덩굴에 매달려 천국 수박밭을 그리워하는 천의 무덤, 만의 무덤 들.)

-「73 무슨 天刑인가」전문(시집6)

수박밭에 푸른 줄무늬의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수박들은 화자에 의해서 ‘가묘’가 된다. 천편일률적인 공동묘지의 봉분처럼, 천편일률적인 모양을 가진 수박들을, ‘천의 모양’과 ‘만의 모양’으로 인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시인의 기발한 발상에 의해, 수 박들은 각각이 ‘가묘’로서 이름을 갖는다. 수박 밭에 있는 수박들은 얼핏 보면 모두가 같은 모양으로 비춰지지만, 그 속에는 ‘렙 아젤’이 있고 ‘유켈’이 있다. 그리고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가 존재한다. 그들은 모두가 주검이 되어 묻혀 있다. 한 때는 천의 모양과 만의 모양으로 살았을 생명들은, 천의 모양과 만의 모양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벌 건 과즙에 의해 눈구멍이 막혀 있어 어리석게 살았던 생이지만,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 쳐 다른 삶으로의 도약을 꾀하게 된다. 예수의 승천으로 무덤은 더 이상 무덤이 아닌,

‘가묘’가 되었듯이, 수박들도 그냥 죽어 사라지지 않고, 그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 하기에 ‘푸른 무덤’이 아닌 ‘푸른 가묘’가 되는 것이다. 죽어서 소멸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다른 생명으로의 부활을 꿈꾸는 행위가 된다.

“살아/ 있다는 것은 검은 돌로 쌓은 장방형의/ 무덤에서 마지막 영생의 꿈에 붙들리 는/ 것이다”「29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죽음을 통해서만 이 마지막 영생의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 “소꿉놀이 끝나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풀잎”「2 풀잎은 약간 시든 채로 풀잎이었다」이지만, 풀잎은 시들어도 풀잎인 것이다.

거실 화장실 수건은 늘 아내가 갈아 두는데 그 중에는 근래 직장에서 받은 입생 로랑이나 랑세티 같은 외국물 먹은 것들도 있지만, 1983년 상주녹동서원 중수 기념수건이나 (그때 아버지는 도포에 유건 쓰고 가셨을 거다) 1987년 강서구 청소년위원회 기념수건도 있다 (당시 장인어른은 강서구청 총무국장이셨다) 근래 받은 수건들이야 올이 도톰하고 기품 있는 때깔도 여전하지만, 씨실과 날실만 남은 예전 수건들은 오래 빨아 입은 내의처럼 속이 비친다 하지만 수건! 그거 정말 무시 못할 것이더라 1999년, 당뇨에 고혈압 앓던 우리 장인 일 년을 못 끌고 돌아가시고, 2005년 우리 아버지도 골절상 입고 삭아 가시다가 입안이 피투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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