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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손 동화의 탄생 배경

3·1 프랑스 체류 경험

도손은『안경』을 발표한 한 달 뒤인 1913년 3월 25일 도쿄 신바시(新橋)역에

서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마사무네 하쿠초(正宗白鳥) 등 문인들과 신문사와 출판사 관계자들을 포함해 약 백여 명의 배웅을 받으며 고베행 열차를 탔다. 프 랑스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도손은『안경』이외에도 소년 독자 를 대상으로 한 읽을거리(少年物)인『어린 시절(幼き日)』의 전신인「어느 부인 에게 드리는 편지(ある婦人に与える手紙)」(1912.5-1913.4),『지쿠마강의 스케치 (千曲川のスケッチ)』(1912)를 발표했으며, 2회까지 연재하던『버찌(桜の実)』40) 의 일시적 중단을 선언하고 돌연 프랑스로 떠났다. 당시의 일본은 다이쇼기로서 사회적·경제적으로도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보조를 맞춰 새로운 아동관 이 생겨나고 아동을 위한 아동문학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도 손 또한 위의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시대적 요청에 따라 아동과 소년들을 대상으 로 한 새로운 창작을 모색해야 할 필요를 자각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왕성한 활동을 하던 중 갑작스러운 프랑스행을 감행한 도손에게 사람 들은 더 큰 청운의 꿈을 품고 떠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도손의 얼굴은 어둡고 굳은 표정이었다.41)고 전해진다.

조카딸인 고마코(こま子)와의 근친상간 관계를 이어가던 중 고마코의 임신으로 인한 도피였기에 도손의 얼굴이 밝지 못했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 프랑스 특파원 신분이었지만 도피성 외유나 다름없었다.

그 이유 때문인지 도손은 2주일에 1회 유럽을 순항하는 1만 톤급의 일본 승선이 있었음에도 굳이 프랑스 배를 이용했다. 그해 5월 23일 파리에 도착했으나 도손 은 하숙집에 틀어박혀 프랑스어 공부만 했다. 하숙집 주변에 있는 천문대, 뤽상 부르 공원 등 거리 풍경을 관찰하는 정도가 그의 외출이었다. 7층 건물의 3층에 서 하숙을 했던 도손은 1층에 있는 카페를 혼자 드나들며 생활했다. 파리에 살고 있는 일본인을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도피하듯이 일본을 떠나왔기 때문에 자 신을 숨기고 싶었던 도손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40) 1913년 1월과 2월에 걸쳐『문장세계』에「1장」과「2장」을 발표했던 소설이다. 도손의 프랑스 행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중단되어 4월에『문장세계』에「『버찌』의 독자에게」라는 제목으로 글을 게재 하여 파리 도착 후에 집필을 이어 갈 것을 약속하고 프랑스로 떠났지만, 원고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1914년 3월부터 제목을『버찌가 익을 무렵』으로 바꾸고 처음부터 다시 써서 보내기 시작했다.

41) 福永勝也(2016)「島崎藤村のパリ逃避行と新生をめぐって」『人間文化研究』37号 京都学園大学人間 文化学会 p.12 참조.

6월이 되자 시베리아를 경유해서 모스크바에 와 있었던 오사나이 가오루(小山 内薫)가 찾아와 도손과 함께 하숙집에서 9일간 같이 생활했다. 도손은 오사나이 가오루와 샤틀레 극장에서 오페라를 관람하기도 하고, 8월부터 본격적으로 아사 히신문에「프랑스 소식(仏欄だより)」을 보내기 시작한다. 도손은 같은 하숙집에 거주했던 고고학자이자 서양미술사가인 사와키 요모키치(沢木四方吉)를 비롯한 서양화가인 야마모토 가나에(山本鼎) · 마사무네 도쿠사부로(正宗得三郎) 등 당 시 파리에 와있는 여러 화가들·일본 유학생·학자들과도 교류하며 음악과 그림 등 예술을 접할 기회를 얻는다. 중단했던『버찌』를『버찌가 익을 무렵』으로 제목 을 바꾸고 연재를 시작하며 도손은 타국에서의 힘든 생활을 견뎌낸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가 한창 활동하고 있었으며 도손과 동 연배의 작가라는 점도 도손의 관심을 끌었을 것으로 생각한다.『버찌』를『버찌 가 익을 무렵』으로 명사에서 서술형으로 제목을 바꾼 것은 프루스트의『잃어버 린 시간을 찾아서』와도 상관관계가 있다고 유추한다. 그리고『버찌가 익을 무 렵』에 사용된 의식의 흐름의 기법 또한 프루스트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도손 의 프랑스 생활은 문학을 비롯한 새로운 예술에 대한 개안의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국과 가족 그리고 고향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도손은 프랑스 체류 중에 자신이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고향 마고메(馬籠)를 늘 떠올리게 되는데 이는『신생(新生)』(1919)에 잘 나타나 있다. 자신의 유년시절에 대한 회상은 고국에 있는 자녀들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체류 1년이 지났을 무렵인 1914년 3월 도손은 파리를 방문한 다케다 사토루(竹田省), 가와카 미 하지메(河上肇)42)와 함께 드뷔시가 지휘하는 콘서트를 보러간다. 이 연주회 이전에도 도손은 고리 도라히코(郡虎彦)와 상제리제 극장에서 열린 드뷔시 연주 회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마침 도쿄에서 온 친구들 때문에 두 번째로 드뷔시43) 피아노 연주회를 감상하게 된 것이다. 이날 연주회의 깊은 감명을 도손

42) 河上肇(1879-1946) : 경제학자·언론인·교수·시인으로서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빈곤문제와 그 해 결 방안을 실질적이고 적극적으로 다루어 많은 독자의 호평을 받았으며, 특히 마르크스주의 경 제학자로서 선구자 역할을 했다. 저서로는『사회주의 평론』(1905),『가난 이야기』(1917),『자 본주의 경제학의 사적 발전』(1924),『경제학 대강』(1928),『제2 가난 이야기』(1930),『자본론 입문』(1932) 등이 있다.

新村出 編(2009)『広辞苑 第六版』岩波書店 p.613

은 “프랑스에 현존하는 모든 예술을 통틀어서 가장 나의 마음을 끄는 것은 단 하나로 드뷔시 음악이다.”44)라고「에트랑제(エトランゼ)」<51장>와「시정에서(市 井にありて)」의 ‘어느 날의 대화(ある日の対話)’45)에서 언급하고 있다. 작곡가 모 로이 사부로(諸井三郎) 또한 “도손의 마음에 강한 인상을 안겨준 음악가는 드뷔 시였다.”46)라고 말한다.

이 당시 드뷔시는 유복한 상류계급의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첫 번째 부인과 헤어져 있었다. 드뷔시는 그날의 연주회『어린이의 영역(チルドレンス·コオナア)』

여섯 곡의 순서에 따라「눈이 춤추고 있다(雪は踊りつゝある)」등을 연주했는데 이 혼이 성립되기 전에 태어난 딸이 가여워 작곡한 곡이다. 드뷔시는 아이들의 세계 를 어른의 관점에서 묘사한 것이 아닌 아이들의 관점에서 표현하려고 한 드뷔시 의 부성이 잘 드러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47)

도손은 이 연주회의 선율을 들으며 자신의 자녀들을 상기하며 즐거움이 아닌 애수(哀愁)를 담은 아이들을 위한 소곡(小曲)이라는 점에 깊이 공명했던 것 같다.

도손은「에트랑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토기바나시의 푸르고 깊은 정조를 떠오르게 하는 소곡이 나의 귀에 들려왔다.

나는 저 어른의 마음도 어린이의 마음도 유혹하는 듯이 저녁 숲에 작은 새무리가 모여 서로 재잘재잘 지저귀는 듯한 음악을 생생하게 귓전까지 들을 수도 있었다.

 お伽話の青い深い情調を思はせるやうな小曲が私の耳について居た。私はあの大人の心をも 小供の心をも誘ふやうに夕方の林に小鳥の群が集つて互いに鳴騒いで居る様な楽音をありありと 耳の底に聞くことも出来た。

(『도손전집 제8권』「에트랑제」p.282)

43) 클로드 아실 드뷔시(Claude Achille Debussy, 1862-1918) : 20세기 음악의 기초를 확립한 프랑 스의 작곡가.『달빛』『목신의 오후 전주곡』『바다』등이 있다. 1905년 드뷔시는 사생아인 클 로드 에마를 얻게 되었다. 에마를 낳아준 에마 바르다크와 재혼하게 되는데, 사람들의 입방아와 소문에 시달리다 영국 남부 해안도시 이스트번에 잠시 피신했다. 슈슈라는 별명을 가진 딸을 위해 피아노곡『어린이 세계(Chidren’s Corner)』(1908)를 썼다. 예민하고 감각적인 성격을 가진 드뷔시는 어린이의 마음도 쉽게 잘 읽어 냈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1996)『브리태니커 사전』제5권 웅진출판사 p.420 44) 島崎藤村(1976)『藤村全集 第8巻』「エトランゼ」筑摩書房 p.281 45) 島崎藤村(1976)『藤村全集 第13巻』「市井にありて」筑摩書房 p.145 46) 島崎藤村研究会(2019)『島崎藤村研究 第46号』図書出版 鼎書房 p.39

47) 최혜정(2020)「음악적 표현력 향상을 위한 미적 경험으로서의 피아노 지도 방안 : 중 · 고급 학 습자를 대상으로」(석사학위) 이화여자대학교 공연예술대학원 p.44 참조.

그때의 연주 목록 중에「어린이 영역」과 특히 영어로 된 몇 개의 소곡을 들었 습니다. 오토기바나시 세계로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듯한 곡이었어요.

あの時の演奏の目錄の中に、『チルドレンス·コオナア』と特に英語で題してあるいくつかの小 曲をもきゝました。お伽噺の世界へ人の心を誘ふやうな曲ですね。

(『도손전집 제13권』「시정에서」pp.155-156)

그날의 피아노 연주곡은 작은 새들의 속삭임 같았으며, 도손을 동화의 세계로 이끌었던 것 같다. 작은 새들의 지저귐이라는 비유는 도손이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 마고메(馬籠) 산천의 기억과 중첩된다. 드뷔시가 자신의 아이를 위해 작곡을 하고 그 곡을 직접 연주했다는 사실은 도손에게 충격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드뷔시를 보면서 도손은 자신도 고국의 아이들에게 보상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으며 그 방편으로 동화문학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지형은 “이날 감상한 드뷔시 연주회는 도손의 파리 체재 중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이었다.”48)고 하는데 논자도 이에 공감하는 바이다. 프랑스에서 경험한 많은 문화체험 중 충격적이라고 할 만큼 강한 인상을 받은 이 연주회는 도손의 문학 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일찍이 음악과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고 감수성이 풍부했던 도손은 드뷔시를 개인의 내면의 진실을 표현하고자 했던 후기 인상파 미술과 공통된 부분이 있다는 점을 비교하기도 한다.

드뷔시는 당대의 인상주의 미술과 상징주의 문학 이념을 음악으로 표현한 작 곡가 이다. “문학·미술·건축에는 없는, 음악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도손은 감상문「시정에서」49)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 도손의 드뷔시 음악에 대 한 감동은 동화문학에 가장 많이 투영되었다고 본다. 이를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 이 드뷔시의 피아노 연주곡「눈이 춤추고 있다(雪は踊りつゝある)」를 도손은 귀국 후에 첫 번째 발표한『어린이에게』<40화>와 두 번째 동화집『고향』<10화>의 제목으로 붙이게 된다.50)

그해 7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파리는 위험에 휩싸이게 되어 도손은 파리

48) 이지형(2011)「근대일본문학과 서양음악의 조우 -파리의 시마자키 도손(嶋崎藤村)과

드뷔시-『일본연구 30』중앙대학교 일본연구소 p.318 49)『전집 제13권』「시정에서」p.155.

50)『어린이에게』<40화> ‘雪は踊りつゝある’와『고향』<10화> ‘雪は踊りつゝある’로 제목이 똑 같다.

에서 떨어져 있는 시골인 리모주로 피난을 간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동양에서 온 낯선 이방인이 신기해서 도손 주위를 맴돌며 따라다녔던 동네 어린아이들과 친해지기도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많았다. 리모주에서의 생활은 고향 과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곳에서 들었던 민화와 생 활 체험은 동화로 재구성되어 귀국 후 도손은 동화집에 담아놓기도 했다.

한편 도손은 감상문「동화」에서 문장을 통해 프랑스 체제 중 터득한 동화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어학을 습득할 흥미로 나는 프랑스에서 여러 동화문학이 있음을 알고 겨우 한 구석을 살펴보고 왔다.

(중략) 아나톨 프랑스의『소년소녀』가 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아무런 줄거리도 없는 듯한 아동물로서 어린아이들이 함께 낚시를 갔던 일과 그밖에 어린이다운 화 제가 좋은 문장으로 거침없이 쓰여 있었다.

 語学を修める興味から、私は佛蘭西にいろいろな童話文学のあることを知つて、僅かにその 一端をのぞいて来た。

(中略)アナトオル·フランスに『少年と少女』のあることは、その私の眼にもついた。あれは筋も 何もないやうな少年の読物で、子供同志の釣に行つたことや其他の子供らしい話が好い文章で すらすらと書いてある。(中略)

(『도손전집 제9권』「동화」pp.107-108)

도손은 파리 도착 직후 외국생활을 각오한 만큼 프랑스어의 중요성을 인식하 고 바로 프랑스어 개인교습을 받는다. 도손은 미션스쿨인 메이지 학원에서 외국 인 선교사들로부터 영어수업을 받았으며, 졸업한 이후는 영어교사 생활을 했다.

영어에 숙달된 도손은 천문대 가까운 곳에 사는 영어에 능숙한 무루네타스(マダ ム·厶ルネタス)라는 나이 많은 부인에게 프랑스어 교습을 받는다. 이때 선택했던 교제가 당시 활동 중이었던 아나톨 프랑스51)의 동화집『소년소녀』이다. 외국어

51) Anatole France(1844-1924) : 프랑스의 소설가 겸 평론가. 지적 회의주의를 바탕으로 인간의 불완전함과 광신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주로 썼다. 온화한 인간미를 그린 평명한 문체의 유려함으로 인해 독자층이 다양하다.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와 유럽을 뒤흔든 드레퓌스 사건 때에는 에밀 졸라, 앙리 푸앵카레 등과 함께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고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는 평화주의를 강조했다. 1896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에 선출되었고 1921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를 익히기 위해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텍스트는 어린이용 동화집이다. “『소년 소녀』는「학교」「들놀이」「낚시질」등 읽기 쉬운 문장으로 되어 있으며 줄거 리는 매우 품위가 있다”52)고『소년소녀』를 번역한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는 말한다. 도손은 이와 같은 동화형식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흔한 일상적인 일도 동화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도손으로서는 새로운 발견이었던 것 같다. 생활 동화라는 형식이 탄생한 것이다. 아나톨 프랑스의『소년소녀』를 통해 도손은 고 향 마고메에서의 유년시절이라는 일상에서 착안하여 쓴 것이 동화잡지『아카이 토리』(1918)에 게재한「두 형제」이야기의「팽나무」와「둑중게 잡이」이다.

「둑중게 잡이」는『소년소녀』의「낚시질」을 재화한 것으로 도손의 두 번째 동화집『고향』<38화>에 수록되어있다.

이처럼 프랑스에서의 드뷔시의 음악과 미술·문학 등 다양한 예술 체험은 동화 창작의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체재 중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의 동화로 탄생한다. 도손 동 화의 소재는 귀국할 때 가방 속에 넣고 온 프랑스 여행이야기, 유년시절의 마고 메 고향이야기, 도쿄에서 메이지학원 다니던 시절까지의 이야기, 그밖에 인생을 살아오면서 직간접으로 경험한 것들을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 징이다. 이렇게 해서 325편의 단편 동화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3·2 다이쇼기 아카이토리(赤い鳥) 운동

일본에서 아동문학이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서 움트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기 부터이다. 메이지 신정부는 서구의 근대 합리주의를 수용하여 새로운 국민국가 건설을 급하게 추진했다. 서구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제도를 이식 모방하는 것 으로 출발한 것이다. 아동문학 또한 새로운 일본 건설을 목표로 한 교육정책과 관련이 있다. 메이지시대 초기의 아동문학은 에도시대의 통속문학인 게사쿠(戯 作)53)와 전승된 옛날이야기(お伽噺)가 주류를 이루었다.

52) 아나톨 프랑스의『Filles et les Garçons』(1886)를『소년소녀』(1937)로 번역한 미요시 다쓰지 는『소년소녀』의 후기에서『소년소녀』의 원문은 상당히 훌륭한 문장으로 쓰여 있다고 한다.

명문이라는 것은 내용의 품위와 그 높고 깊은 것을 동시에 독자들 마음에 전해지고 있다고 말 하고 있다. 독자는 감화를 받아 강하게 마음이 움직일 것이다. 그 만큼 이 책의 원문은 멋진 문 장으로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アナトール・フランス/三好達治 譯(1937)『少年少女』株式会社 岩波書店 pp.99-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