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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병원 방사선과 (1913~1958)

세브란스병원 방사선과의 역사는 1913년 X-ray 장비 운영을 기점으로 해, 1945년 해방 전까지의 역사(당시에는 병원 소속의 뢴트겐과, 엑스-광선과, X-ray과, 방사선과로 불렸다)와 해방 이후부터 교실이 창립된 1958년까지의 역사(방사선과), 그리고 교실 창립 이후의 역사로 이 어진다. 현재는 영상의학과(2007년 11월 개명)로 명칭이 변경되었지만 과거 통상 사용하던 명 칭인 방사선과로 통일하여 기술한다.

(1) 1913년~1945년 (해방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진단 목적의 X-ray 장비를 설치한 최초의 의료기관은 세브란스병원이며, 이는 동시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영상의학교실 역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앞에서 설명하였 듯이 세브란스의 학교 건물이 1912년에 완성되었을 당시 X-ray 장비가 도입되어 부분적으 로 조립되기 시작한 것은 알려져 있으나, 설치 완료일과 촬영 개시일에 관한 기록은 확실하 지 않다. 다만 신축된 의과대학 건물의 봉헌식은 1913년 6월 13일이기에, 촬영이 시작되었 던 때는 봉헌식 이후라고 생각된다.

장비 도입과 관련해서 앞서 기술한 에비슨의 기록뿐만 아니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및 세브란스병원 의무부총장을 지낸 김명선의 회고록「잊을 수 없는 사람들」( , 『월간 세브란스』, 1979)에서도 세브란스병원의 X-ray 장비 도입 시작년도를 1912년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서 울대병원 방사선과 교수였던 조중삼의 논문『대한방사선의학회지』( , 1976; 『대한방사선사협회지』, 1976)에서도 여러 증언을 토대로 1913년에 세브란스병원이 국내 최초로 X-ray 장비를 도입 했음을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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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X-ray 장비

당시 국내 최초로 설치된 기종은 미국 Wappler사 제품이었다. 이는 1912년 세브란스가 기부한 마지막 3차 기부금의 일부로 구입하였는데, 1913년 세브란스가 사망한 해에 사용되 기 시작했다. 이 기종은 당시 미국 내에서도 최첨단으로 불리던 장비로, 장비 구입 주선은 외과 과장인 러들러가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러들러는 세브란스의 주치의였는데, 1907년에 세브란스병원의 시설을 세브란스와 함께 둘러보면서 X-ray 장비 도입의 필요성 을 절감해 이를 추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장비 관련 사진은 1917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된 해당 연 도 졸업앨범에 유일하게 남아있다.

1895년 뢴트겐의 X-ray 발견 이후, 처음 사용된 X-ray tube는 가스관구(gas tube)였다.

이 장비도 역시 유리관구(硝子管球)내부의 공기를 전류로 이온화시켜 방사선을 발생시키는 원리를 적용하였는데, 뢴트겐이 사용했던 튜브형 관구보다는 개량된 원형통으로 구비된 관

1913년에 사용한 우리나라 최초의 Wappler사 X-ray 장비. 에비슨이 환자의 발목을 찍고 있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 형광판을 보며 검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촬영자는 당시 근무 하던 강문집(姜文集) 혹은 이일선(�日宣)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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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였다. 이 장비는 방전식 정류방식으로 촬영과 X-ray 투시장치가 별도인 배전방식으로 되 어 있었고, 투시테이블은 수직 상태에서 상하 이동만 가능한 기종이었다.

이 장비는 왼쪽 벽장처럼 되어 있는 곳의 여러 개의 구형전극(球型電戟)으로부터 전기가 흘 러 자기정류(磁氣整流)를 발생시켜 유리관으로 되어있는 X-ray tube에서 방사선이 발생하 도록 하는 장치로, 전기 발생 시 그 소리가 매우 높고 전선에 불꽃이 번쩍이는 경우가 많았 다고 한다. 전선줄은 천정을 통해 길게 늘어져 튜브까지 연결되어 있고 발생한 방사선은 발 사 방향이 일정치 않아 질적인 면에서 매우 선명도가 낮았을 것이다.

X-ray 촬영은 당시 3mm 정도 두께의 4×6인치 유리판 위에 형광물질이 도말된 종이를 놓고 촬영한 후 현상하였고, 투시는 형광판을 통해 가슴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바륨을 이용 한 위장관 투시도 하였다.

참고로 1919년 유럽 유수의 대학병원과 1925년 미국의 Mayo clinic에서도 이 기종을 설 치하여 사용한 사실이 문헌에 보고되어 있다.

1919년 동일 기종(유럽 병원).

1925년 Mayo clinic에 설치된 동일 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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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X-ray 장비의 운영

X-ray 장비가 세브란스병원에 처음 설치되었을 당시에는 이 장비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 춘 의사나 기사가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 외과 과장인 러들러 교수에게 지도받은 세브란스 의학교 제2회 졸업생 강문집이 X-ray 촬영을 전담하게 되었다. 골절 등의 치료는 당시 외 과에서 담당했기에 X-ray 촬영도 같이 담당하여 근무하게 된 것이다. 강문집은 환자진료, 학생강의 등으로 바빠지면서 1917년경 X-ray 촬영 전담을 위한 방사선기사 이일선을 고용 하여 같이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이일선은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 독립을 위한 신문을 방사선과 암실에서 인쇄, 배포해 일본 경찰의 수색을 받자 도피 길에 오르는데 이후 그의 생 사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이 장비를 언제까지 운영하였는지는 그 기록이 확실하지 않다. 다만 1924년 외과 선교사 의사인 홉커크(C. C. Hopkirk)가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사용했는데, 당시 그는 이 장비의 성 능에 대해 매우 극찬하였다. 이후 방사선 기사인 정일사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이 장비를 사 용하였지만 언제까지 사용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X-ray 장비를 다룬 강문집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강문집

(姜文集, 1912�1921)

1913년 세브란스병원에 설치된 X-ray 장비의 최초 운영자는 외과의사 강문집이었다. 그는 1911년 세브란스의학교 제2회 졸업 생으로, X-ray 장비를 다룬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였다. 당시 학 교와 병원에 근무하는 교수직 의사는 23명, 그중 한국인 의사는 10명 남짓 했는데, 유일하게 외과 의사이면서 X-ray 촬영을 겸 직하였다. 주로 골절환자를 위한 단순 촬영 정도의 간단한 촬영 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는 염화은이 도말된 유리판(4×6인 치)을 이용하여 촬영한 후 판독하고 재사용하던 시기로 아쉽게도 당시 촬영한 사진에 대한 영상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강문집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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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집에 대한 자료는 다행히도 김명선이 그에 대한 회고록을 남기면서, 그의 활동 사항 과 당시 방사선과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게 되었다.「잊을 수 없는 사람들: 강문집 선생님」( ,

『월간 세브란스』, 1982)즉, 1912년에 최초로 X-ray 장비가 세브란스병원에 도입되었고, 이 장 비를 운영한 사람이 당시 외과 교수로 일하던 강문집이었다는 사실과 그가 부모에 대해 효 심이 지극했고, 종교적으로 참된 기독교인의 삶을 살았으나 안타깝게도 1921년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 사실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은 우리나라 최초로 X-ray 장비를 다루었던 강문집의 행적을 유일하게 알 수 있는 자료로 그 내용을 전문 소개한다.

“세브란스병원 관계자로서 지금 강 선 생을 본 사람이든지 그가 세브란스병원 에서 무엇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을 것 으로 안다. 세브란스의학교 1~3회 졸업 생들은 제중원에서 몇 년간 공부하고 졸 업했다는 기록이 없다. 당시에는 초대 교 장인 에비슨 선생께서 보시기에 의사로 서 세상에 나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 다고 생각되는 사람만 졸업을 시켰다. 강 선생은 어느 해에 제중원에 들어오셔서 공부하다가 1917년, 즉 제2회 졸업을 하 였는지 알 길이 없다. 그때 의사가 한국 에 50명도 안 되는 시절에 의학교를 졸업 하고 서울에서나 국내 어디서나 졸업을 하면 요즘말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 수 있을 시대였다. 그러나 그는 졸업 후 계속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에서 의사로 서 또는 외과선생으로 타계하시기까지 수고했다.

『월간 세브란스』(1982)에 실린 김명선의 글「잊을 수 없는 사람들: 강문집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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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한국에 엑스레이(X-ray)가 병원에 처음 설치하게 된 것은 세브란스였던 것으로 생

각된다.

1912년 X-ray 기기가 세브란스에 처음 설치되었을 당시에는 그것을 전문한 기사 나 의사가 없어서 강 선생이 외과선생으로 일하면서 X-ray 기사 일을 겸했던 것이 었다. 그 당시 외과과장은 러들러 선생으로서 환자치료와 강의를 전담하셨고, 강 선 생은 외과환자를 치료하면서 X-ray 기사로서 수고하셨다. 에비슨 선생께서 제중원 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데 도와주는 젊은 사람들 중에 의사로서 보시기에 합당한 사 람으로 생각되시면 의학을 공부하게 하는 시대였다. 자세히는 몰라도 강 선생은 그 런 사람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병원에서 학생지도에 정성을 다했고, 또한 남 대문장로교회에 장로로서 교회 일에도 열심이셨다. 그 당시에 장로교회의 장로라는 직분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는데, 장로로서 교회 일에 관계하셨다는 것은, 또 세브 란스 직원으로서 오직 강 선생만이 장로로 남대문교회에서 일하셨다는 것은 그의 신앙이 어떠하셨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는 그뿐 아니라 가정생활에 있 어서도 지금 사람으로선 생각도 못할 일을 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 선생은 어렸 을 때 어머니가 타계해서 계모 손에서 자랐다. 그런데 그 계모도 아들이 한 명 있어 서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제1회 졸업 후 결혼해서 사는데 그 계모는 자신의 친아들과 함께 살지 않고, 전실 아들인 강 선생 댁에서 일생 사셨다는 것을 보면 강선생 내외 분의 효성이 어떠하였는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계모의 친구들이 왜 친아 들과 같이 살지 전실 아들 집에서 사냐고 물으면, 이것이 사람 사는 예라고 했다는

1912년 X-ray 기기가 세브란스에 처음 설치되었을 당시에는 그것을 전문한 기사 나 의사가 없어서 강 선생이 외과선생으로 일하면서 X-ray 기사 일을 겸했던 것이 었다. 그 당시 외과과장은 러들러 선생으로서 환자치료와 강의를 전담하셨고, 강 선 생은 외과환자를 치료하면서 X-ray 기사로서 수고하셨다. 에비슨 선생께서 제중원 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데 도와주는 젊은 사람들 중에 의사로서 보시기에 합당한 사 람으로 생각되시면 의학을 공부하게 하는 시대였다. 자세히는 몰라도 강 선생은 그 런 사람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병원에서 학생지도에 정성을 다했고, 또한 남 대문장로교회에 장로로서 교회 일에도 열심이셨다. 그 당시에 장로교회의 장로라는 직분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는데, 장로로서 교회 일에 관계하셨다는 것은, 또 세브 란스 직원으로서 오직 강 선생만이 장로로 남대문교회에서 일하셨다는 것은 그의 신앙이 어떠하셨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는 그뿐 아니라 가정생활에 있 어서도 지금 사람으로선 생각도 못할 일을 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 선생은 어렸 을 때 어머니가 타계해서 계모 손에서 자랐다. 그런데 그 계모도 아들이 한 명 있어 서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제1회 졸업 후 결혼해서 사는데 그 계모는 자신의 친아들과 함께 살지 않고, 전실 아들인 강 선생 댁에서 일생 사셨다는 것을 보면 강선생 내외 분의 효성이 어떠하였는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계모의 친구들이 왜 친아 들과 같이 살지 전실 아들 집에서 사냐고 물으면, 이것이 사람 사는 예라고 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