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안승봉 주임교수가 재직 당시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방사선과 전공의 교육이 시작되었 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유호준 교수가 최초로 레지던트 수련을 시작해 1960년 에 수련을 마쳤으며, 강사로 재직 중 수도의대(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로 자리를 옮겨 교수로 재직했다. 이후 1957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치고 안승봉 교수의 뒤 를 잇게 될 최병숙 교수와 미국 토마스제퍼슨의대에서 수련한 이규환 교수가 활동했고, 1964년부터는 역시 미국에서 방사

선과 수련을 마친 박창윤 교수가 귀국, 전임강사로서 활동을 시작 했다.

이외에도 이때 활약한 의료진으 로는 미국에서 레지던트 수련 중 귀국하여 후일 고려병원 방사선과 과장, 안양병원 부원장 등을 역임 한 박양옥 교수, Seldinger method

를 이용한 혈관촬영술을 최초로 시 안승봉 선생님과 polyclinic 나온 학생들, 1963년.

제2장

57 도한 곽철균 교수, 신경방사선과학을 전문적으로 수련, 교육한 서정호 교수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조교수로 3년간 재직 후 이직한 천영세 교수, 해군 대령 출신으로 동위원소실의 기초 를 다진 최용규 교수, 초기 방사선치료실의 기초 확립에 힘썼던 윤용규 교수 등이 초기 방사 선과학 발전에 큰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며 활동했다.

진료

1962년 세브란스병원이 신촌으로 이전했을 때, 당시 보유하고 있던 6∙25 전후의 낡은 장 비를 대체 및 보완하기 위해 미국 Picker사 제품 500mA Tomo 일반촬영 장치가 도입되고, 핵의학 검사 장비로써 갑상선, 신장 기능 검사 장비 등이 도입되었다. 특히 이 해 안승봉 교 수 주도로 방사선과에 동위원소실을 설치, 현 핵의학과의 발전에 초석이 되었으며 대규모 방사선과로의 도약에 기반을 마련했다. 1965년부터는 일본 Toshiba의 Condense type X-ray system이 도입, 흉부촬영에 이용되었고 1967년부터는 미국 Picker사로부터 한국 최초 의 TV X-ray 투시진단 장치를 도입해 대장투시검사와 carotid angiography 등에 사용되 어 환자 진료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68년부터는 동위원소실에 thyroid uptake system 장비를 비롯해 cardiac cineangiography 등이 도입되어 심장혈관검사가 발전했고, 1969년부터는 암실용 위장검 사 전용 투시 장비가 도입되어 위장관 조영술을 이용한 위, 대장 검사가 시행되었다.

특히 1969년 세브란스병원이 연세 암센터의 정식 설립인가 준비를 하면서 안승봉 교수의 주도하에 동아시아 경제발전을 위한 콜롬보계획(Colombo plan)에 참여한 일본 해외기술협 력사업단과의 교류를 통해 코발트 원격치료장치, 자동현상기, 전자동 TV 부착 투시장치 등 을 도입하여 암 진료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또한 당시 1958년도부터 스칸디나비아 여러 국가의 원조하에 진료시설과 병원선 등이 운 영되어 북유럽 방사선과 의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혈관촬영 장비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1969년도에 angiography 장비가 도입되었으며 곽철균 교수를 필두로 1970년대 에 들어 심장, 대동맥, 간, 비장 등의 혈관촬영 검사의 발전계기가 되었다.

안승봉 주임교수는 1970년까지 주임교수직을 맡은 후 본인이 근무하였던 미국 오하이오 주 Akron city hospital로 자리를 옮기고 그 뒤를 최병숙 교수가 이어받아 세브란스 방사선 과를 이끌게 되었다.

영상의학과100

58

연구

안승봉 교수 재직 시 1964년에 대한방 사선의학회 잡지가 처음 발간되었고, 안 승봉 교수는 여기에 세브란스병원 방사 선과의 이름 최초로「위장 양성종양, 십 이지장 팽대부 주위암의 방사선진단」이 라는 제목의 위장관 조영술에 대한 논문 을 발표했다. 안승봉 교수는 주로 위장관 영상 연구 분야의 당대 권위자였고, 내과 나 외과와의 컨퍼런스 시에도 안승봉 교 수의 영상 소견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 지 않을 정도였다.

또한 당시 안승봉 교수는 방사선 진단

뿐 아니라 미국에서 수련한 방사선 치료 분야에서도 국내에 지식을 전수하고 연구에 앞장서 는 역할을 했으며, 1969년 코발트-60 원격 치료기 도입과 관련해 국내 일간지에 이에 대한 최신 지견을 일반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2) 최병숙 주임교수 시기 (1970~1978)

1970년 안승봉 교수가 미국으로 떠나고 주임교수를 맡은 이후 1978년까지 이를 역임한 최병숙 주임교수는 1957년에 세브란스를 졸업해 1958년에서 1961년까지 수련 과정을 거쳤 다. 그 후 1961년 9월 강사로 모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한 이래 주임교수라는 중책을 맡아 후진 육성에 심혈을 쏟았고, 의사로서도 진료에 정성을 다하는 한편 대한방사선의학회장 (1970년), 대한 X선 검진회장(1974년), 대한방사선 방어학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우리나라 방 사선의학 발전을 위해 대내외에 끼친 공로를 이루 말할 수 없다. 방사선학회장을 역임하며

암과 방사선치료.

제2장

59 방사선학회 기금을 국내 최초로 조성했고, 신기기 도입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영상의학과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78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국제방사선학회 참석 후 황달의 급속한 악화로 인해, 1978년 3월 25일 새벽에 갑자기 타계하셔서 과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 었다.

교직원 및 운영

최병숙 주임교수 시기부터는 과에 대해 체계적인 기록 및 내부 조직을 바로잡기 위해 많 은 노력을 했다. 교수진과 의국원 또한 고생을 함께 나누며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당시 교수 진으로는 서정호 교수와 강사 3인방 이도행, 윤용규, 김정규 선생, 전공의로는 최성욱, 오기 근, 최경희, 이영해, 최규옥, 이종태, 김호균, 양병철, 유형식, 김병태 선생이 있었다.

특히 서정호 교수와 황윤천 기사는 함께 방사선필름, 조영제 등의 관리에 체계적인 틀을 잡기 시작했는데, 서정호 교수는 신경방사선학 공부를 위해 해외 파견을 가는 등 과의 미래 를 위해 많은 생각을 하셨다.

1973년 암센터 방사선 치료실의 책임 은 윤용규 부교수의 후임으로 부임한 이 도행 부교수가 맡았다. 당시 전공의들은 6개월씩 전담 분과적으로 일하도록 하였 으며, 그 결과 학문적으로나 진료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74년부터 1976년까 지는 미국에서 방사선치료 전문의를 하 신 최명선 교수가 이도행 교수와 함께 일 을 했다. 그런데 방사선 치료를 위해서는 방사선 물리학자들의 도움이 필수적이어 서 방사선 물리학을 전공한 남정우 (1969~1975)가 방사선치료실의 기초 기술 확립에 공헌을 하였다.

최병숙 주임교수 시절의 교수진과 의국원.

영상의학과100

60

하지만 그 시절 방사선과를 지원했던 여러 전공의들 중에는 1~2년차 중간에 통보도 제대 로 하지 않고 중간에 미국으로 가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수련이 힘들어 그만두는 경우도 빈 번했으며, 미국의 의사 부족으로 외국인 의사들이 의사자격시험인 ECFMG에 지원할 수 있 었기 때문에 방사선과 교수 및 전공의 부족 상황은 계속되었다.

이는 공부는커녕 일하기도 힘든 방사선과의 시설 및 교육, 환경의 열악함에 주요 원인이 있었다. 당시는 일반촬영조차 일본에서 배워온 위장관 방사선학과 책 이외의 공부할 자료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1977년 4명의 남자 지원자가 방사선과를 지원 하자 많은 환영을 받았으며, 최병숙 주임교수가 전공의 4명을 집으로 초대해 만찬을 베풀어 줄 정도였다.

진료

최병숙 주임교수 시절 방사선과는 조기위암 진단 부문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최병숙 교수와 서정 호 교수는 국내 최초로 일본 연수를 떠나 공기와 바 륨을 섞어 이중조영촬영(double contrast study)을 시 행하는 조기위암에 대한 방사선 검사에 대해 공부를 하였기에 과에서는 당연히 이 분야에 전력을 기울이 게 되었다.

당시 이중조영촬영은 투시하기 전 모두 고글을 썼 다. 고글을 쓰고 빛을 차단한 후에는 어두운 방에서 고글을 벗고, 희미하게 보이는 엑스선 투시 형광판 앞에 서서 환자에게 바륨을 투약했는데, 코를 통해 카테타를 삽입해 50cc 주사기로 공기를 다량 주입한 뒤 환자를 두서너 바퀴 돌게 하여 공기와 바륨을 섞 이게 한 후 촬영했다.

1972년에는 국내 최초로 선형 가속기 장비인 LINAC 고선량 치료기가 암센터에 도입되어 방사선과는 국내 유일한 방사선치료실을 지닌 과로 대외적으로 유명해졌다. 치료실의 확장 과 방사선물리학을 전공한 남정우 선생의 도움은 방사선치료실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크게

이중조영촬영 시에 고글은 필수품이었다.

제2장

61 일조했다.

앞서 말했듯이 1973년에는 암센터 방사선치료실에 윤용규 부교수의 후임으로 이도행 부 교수가 책임을 맡았으며 전공의들이 6개월씩 전담하여 일했다. 그리고 1974년부터 1976년 까지는 미국에서 방사선치료 전문의를 하신 최명선 교수가 이도행 교수와 함께 일했다.

1974년 혈관촬영은 당시 걸음마 단계로 암실에 설치된 투시기를 이용하여 처음 시도했 다. 당시 카테타는 램프 위 끓는 물 속에 불꽃을 이용하여 철사심을 넣고 손수 구부려 만들 어 쓰던 시절이었다. 혈관에 잘 걸리게끔 모형을 만들고 구멍을 여러 개 뚫어 조영제가 잘 흘러나오도록 만드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만드는 기술이 좋으면 좋을수록 더 나은 카테타가 만들어졌다.

한편, 1972년 영국의 물리학자 G. Hounsfield와 J. Ambrose의 CT의 발명으로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인체의 단층촬영구조의 영상화가 가능해지자 최병숙 주임교수는 거대한 CT

한편, 1972년 영국의 물리학자 G. Hounsfield와 J. Ambrose의 CT의 발명으로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인체의 단층촬영구조의 영상화가 가능해지자 최병숙 주임교수는 거대한 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