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은 시대의 변화와 성격을 드러내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따라서 개념 의 출현과 확산, 그 변용을 이해하는 개념사는 중요한 사회문화적 변동과 정치 경제적 문제를 드러내는데도 유용하다3). 개념은 그 자체가 변화의 동학을 가지 는 바, 특정한 현상에 대한 집합적 인지, 평가, 해석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깊이 연동되어 활용된다. 개념의 형성과 사회현실의 변화 간에는 연결성 못지 않게 시차도 존재한다. 때로는 개념이 현실에 앞서 수용되고 공유됨으로써 현실의 변화를 추동하거나 견인하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로 현실의 변화를 채 따라가 지 못하고 낡은 현상에 결박된 개념지체의 현상을 보일 때도 있다. 또 현실의
2) “It is a matter of urgency to have well-defined concepts so that the platform economy can be regulated and the laws adequately enforced
.”
ILO, The Future of Work We Want, p.7.
3) 개념사의 고전적인 시각은 R.Koselleck, The Practice of Conceptual History,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2 및 멜빈 릭터, 송승철, 김용수 옮김, [정치사회적 개념의 역사], 소 화, 2010 참조..
어떤 모습을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승인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 결과 주요한 역사적 개념들은 유토피아적인 미래전망을 추동하기도 하고 변 화하는 현실을 가로막는 이데올로기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코젤렉은 개념의 이러한 특징을 과거로부터 축적되어온 지나간 시간과 미래로 열린 기대지평으 로 설명했다.
노동 개념은 근대로의 전환을 설명하려 할 때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역사적 기본개념의 하나로 간주된다.4)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욕구를 충족시키는 노동 과 사회관계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려는 활동을 동시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노동이라는 개념은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함의를 포함했다. 근대 이전에는 노동 이 주로 수고, 고생, 고통의 의미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고 근대로의 이행과정 에서 노동이 비로소 인간의 자기실현, 기본적 권리의 영역으로 자리매김된 것 으로 이해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노동 개념사는 주로 근대 이후에 주목하 는 경향이 있고 노동을 인간존재의 중요한 속성으로 의미부여하는 것 자체가 근대를 특징짓는 문화적 지표로 간주되기도 했다5). 한말 이래 전반적인 근대화 과정과 더불어 노동 개념은 생존, 자아실현, 책임과 의무 등과 깊이 연관되는 방식으로 한국 사회에 자리 잡았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다양한 사회운동의 핵 심요소가 되었다.6) 식민지 시기 이래 노동문제, 노동자, 노동계급, 노동해방 등 의 어휘는 좌파와 급진, 민중적 지향성과 친화력이 높은 말로 이해되었고 분단 상황 하에서 종종 기피되는 어휘가 되기도 했다.7) 힘들었던 한국의 초기 노동 운동사는 노동 개념의 정상성, 보편성, 당위성을 사회적으로 확인하려는 인정 투쟁의 과정이기도 했다8). 노동은 신성하고 노동자는 사회발전의 근간이라는
4) 노동의 개념사는 서구의 개념사 연구에서 중요한 주제의 하나다. W.Conze, 이진모 옮김, [코젤렉 개념사 사전 10: 노동과 노동자], 푸른역사, 2014; Peter Anthony, The Ideology of Work,(1977) Herbert Appelbaum, The Concept of Work: Ancient, Medieval, and Modern, State University of NewYork Press, 1992 등 참조.
5) 개념사의 근대중심적 편향이 노동과 관련된 어휘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김경일, [노동], 소화, 2016. 30쪽.
6) 박명규, [국민, 인민, 시민 – 개념사로 본 한국의 정치주체], 소화, 2009.
7) 김윤희, “근대 노동 개념의 위계성,” [사림] 제52호. 2015.
8) 구해근,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창작과 비평사, 2002; 김원, [여공 1970], 이매진, 2005.
참조.
생각을 승인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질서원리와 공존할 수 있음 을 승인받는 것, 한마디로 근대적 노동개념의 공유과정이 민주화 운동의 중요 한 과제였다. 실제로 1987년 이후 노동과 노동문제, 노동정치라는 말에 대한 거 리감은 크게 줄었고 노동, 고용, 일, 직업 등에 대한 논의가 일상적인 것이 되 었다. 이후 취업난, 실직, 고용유연성 등의 변화를 겪으면서 노동과 노동조건은 더욱 개인 및 가족의 안정적 삶과 불가분의 것으로 되었고 노동정책은 국가적 아젠다의 핵심적 사안으로 자리잡았다9).
사회정치적 개념은 현실에서 억압될수록 유토피아적 지향을 지니게 된다. 민 주주의라는 개념, 인권이라는 어휘, 해방이라는 말이 가졌던 시대적 함의를 떠 올려보면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내부의 민주화와 고도소비사회로의 전환, 외부의 탈냉전과 세계화 등에 힘입어 노동이란 말에 덧붙여졌던 유토피아적 지 향이나 미래전망적 아우라가 약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근로’라는 중성적 표현 과는 달리 ‘노동’이라는 개념에는 근대 이래의 가치함의적 성격이 포함되어 있 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단순노동을 대체하는 효과가 광범위하게 확인되고 비정 규직이 전면화, 일상화하며 부가가치의 창출방식이 탈공장화하는 현실에서 ‘노 동’으로 불리던 인간의 활동은 어떻게 재조명되고 재인식되어야 할 것인가가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급변하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포착할 개념을 찾지 못 해 많은 말들을 덧붙여야 하는 상황도 보고 있다. 고착화된 기존개념의 고수가 또 다른 개념지체, 또는 개념왜곡 현상을 강화시킬 개연성도 없지 않다. 최근 소개된 몇 몇 논저와 사회적 담론 속에서 이런 쟁점이 다루어지고 있는 방식을 통해 개념지체의 가능성, 새로운 개념화의 시도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겠 다.
2.1 노동에서 일로?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빅 데이터 등으로 불리는 최근의 변화를 논의하는
9) 정부 수립 후 사회부의 노동국에서 시작하여 1963년 노동청이 되었다가 1981년 노동부로 독립하여 2010년 현재의 고용노동부로 변화해온 정부조직변화 자체도 노동 영역에 대한 범사회적 관심의 변화과정을 잘 드러내준다.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기술이 인간의 노동에 미치는 영향력을 주목한다는 점에 서 이전의 관심사와 유사하다. 그런데 노동이라는 말과 일이라는 말이 구별되 고 그 의미가 새롭게 분화되고 있는 경향이 확인된다. 이런 단어의 선택이 목 적의식적이거나 명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얼마일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언어의 사회적 사용과 공감의 효과라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노동은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 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로 정의된다. 반면 일은 “무엇을 이루 려고 어떤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이라 고 되어 있다. 양자는 몸울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그 목적 에 다르다는 점이 부각된다. 즉 노동은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함’이 명 시되어 있는데 비해 일은 ‘무엇을 이루려고’라고 되어 있어서 좀더 포괄적이고 불특정적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노동은 일의 일종이면서 특히 ‘생계유지’라는 목적을 뚜렷하게 지니는 유형의 일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서구의 노동 개념사를 정리한 콘체의 연구에 따르면 여러 언어권에서 labor와 work에 대응되는 두 어휘가 대비되어 사용되면서 이중적 의미가 존재했다고 한 다.10) 같은 맥락에서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영어에서 labor 라는 단어가 work 이 라는 의미와 pain 이라는 두 의미를 함축한다고 했다.11) Cambridge Dictionary 에 따르면 labor 는 practical work, especially when it involves hard physical effort/ to do hard work/ workers who do the practical work with their hands 로 설명되어 있 다. 또 work 은 an activity such as a job, that a person use a physical or mental effort to do usually for money/ something created as a result of effort, espectially a painting, book or piece of music 등으로 설명되어 있다. labor 와 work 개념의 의미차가 한국어의 노동/일 개념과 정확하게 대비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유 사한 의미의 분화가 확인되는 점은 흥미롭다12). 이런 의미에서 최근 labor 대신
10) 콘체, 앞의 책 및 김경일, 앞의 책, 53-55쪽. 모든 사례에서 labor는 work과 달리 고통과 번뇌, 수고의 의미가 강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11) R.Williams, Keywords: A Vocabulary of Culture and Society, Oxford University Press, 1983. pp. 176-177.,
12) 노동 개념의 적합성을 다루고 있는 연구로는 Harry Coenen, Roelof Hortulanus, “The Concept of Labour in a European Perspective, TRANSFER 1/01; Jaques de Bandt,”The
work 이 더 빈번하게 사용되는 흐름과 한국어 용례에서 노동 대신 일이 더 자주 사용되는 경향 사이의 어떤 연관성을 추론할 개연성은 충분하다. 최근 ILO는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는데 그 주제가 ‘The Future of Work’이다. OECD 역시 최근 ‘The Future of Work Initiative’를 출범시켰고 McKinsey&Company 가 시작한 Global Initiative 역시 ‘Technology, Jobs and the Future of Work’ 이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것을 보면 이미 work 이란 어휘가 시 대적인 화두로 자리잡은 모양새다. 자동화, 디지털 플랫폼, 혁신 등으로 인해 크게 달라지고 있는 현실을 설명해야 한다는 시대적인 과제가 강조되는 시점에 서 전통적으로 강조되어오던 labor 개념 대신 work 이라는 단어가 강조되는 이 유는 무엇일까? 내용적으로는 노동시장, 노동정책, 직업안정성 등을 언급하면 서도 총체적으로 ‘labor의 미래’가 아닌 ‘work의 미래’를 내걸고 있는 것은 미래 형 과제를 다루는데 ‘Work’이란 어휘가 보다 적실함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최근 job과 career를 구별하는 논의에서도 유사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즉 기계생 산 산업화 단계와 부응한 job이라는 어휘가 조직화된 기업이나 공장에서 정기 적인 출퇴근의 형식으로 정형화된 직장의 의미를 내포하는데 반해 career는 ,가 변적인 직장, 유연한 노동형태, 업무방식의 유동성, 일생을 거쳐 이동하고 변화
최근 job과 career를 구별하는 논의에서도 유사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즉 기계생 산 산업화 단계와 부응한 job이라는 어휘가 조직화된 기업이나 공장에서 정기 적인 출퇴근의 형식으로 정형화된 직장의 의미를 내포하는데 반해 career는 ,가 변적인 직장, 유연한 노동형태, 업무방식의 유동성, 일생을 거쳐 이동하고 변화